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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안>
제목: 다양한 모습으로 있는 하나의 교회
일자: 2023년 7월 23일 주일
에베소서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https://youtu.be/mANKIwqmhhA
설교의 목적:
지난 주일에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다. 교회는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인 공동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계획을 이어받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언약을 계승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꿈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계획과 경륜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며 그것을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후대를 축복할 수 있다.
이번 주에는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의 다양한 종류에 대하여 생각해 볼 것이다. 왜 이렇게 다양하게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볼 것이다.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대리인인 교회가 바람직한 방식으로 갱신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볼 것이다.
설교 개요
1. 간략하게 정리해 본 기독교회의 역사
2.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교회
3. 교회의 역사가 가르쳐 준 것
4. 갱신과 일치를 위한 여정
1. 간략하게 정리해 본 기독교회의 역사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교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불교와 무속신앙으로부터 소원성취와 평안을 빌었습니다. 그러다가 1세기 전에 기독교 신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기독교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미국에서 온 두 사람의 선교사가 제물포 항구에 들어온 날입니다. 그 때는 지금부터 138년 전인 1885년 4월 5일입니다. 그 두 선교사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입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600년 전인 삼국시대입니다. 그런데 150년이 채 안 된 기독교 신앙이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까닭은 아마 우리 민족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신앙을 전수해 준 사람들은 미국과 영국 등 서구의 기독교인들입니다. 동양인들이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유교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면 서양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던 시절에 유럽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널리 퍼졌습니다.
서양인들도 각 나라마다 고유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독교 신앙이 점차 세력을 넓혀갔고 마침내 온 유럽이 기독교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 신앙을 유럽 전체에 퍼뜨린 사람들은 사도 바울처럼 선교에 열심을 냈던 선교사들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중해의 작은 지역 유대 땅에서 시작되어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 출발한 유대 땅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모세를 자신들의 스승과 지도자로 모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유대인들 가운데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사도 바울도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자기 동족과 마찬가지로 한 분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믿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과 에스라 같은 유대인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과 같은 분입니다.
그렇게 보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모세와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결국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것을 관리하게 하려고 부르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담이며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렇게 성경 이야기를 따라가노라면 어느 새 우리가 그 기나긴 대열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간략하게 되돌아보면 우리의 신앙은 미국과 유럽에서 왔고 그것은 다시 중세 천년을 거슬러 지중해의 작은 나라 유대 땅에서 왔으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왔습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비전과 뜻을 소개할 때마다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어떤 교회들이 있을까요? 세상에 있는 다양한 교회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2.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교회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인류가 온 세상에 퍼져 다양한 인종과 나라와 언어를 이루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교회도 온 세상에 흩어져 다양한 형태와 특징을 나타냅니다.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교회가 다양한 교회가 있는 이유는 가장 먼저 지리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대양 육대주에 있는 교회들은 먼저 지리적으로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의 기독교회를 크게 둘로 나눈다면 하나는 서방교회이며 다른 하나는 동방교회입니다. 이것은 1054년에 갈라진 교회의 대분열의 결과입니다. 그때 로마제국은 동서로마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결과로 교회도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때 서로마교회가 오늘날 로마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면 동로마교회는 이스탄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동로마제국에 세워진 교회를 동방교회라고 부르며 그들은 자신을 정통(orthodox)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들을 동방정교회라고 부릅니다. 동방정교회 또는 정교회는 그리스와 러시아에 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서로마를 중심으로 자리잡은 서방교회는 그 이후로 유럽 전역에서 주류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517년 로마를 중심으로 서양세계 시민들의 신앙을 지도하던 교황청에 반대하고 일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종교개혁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뜻을 좇아서 진리를 외면한다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교회에게 바른 길로 나아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제안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은 기존의 관행을 바로잡는 대신에 그 제안자를 이단으로 몰아서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로마교회에 대항한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신앙인들을 가리켜 그릇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하여 불의에 대항한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서방교회는 다시 둘로 나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교회를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라고 부릅니다. 로마가톨릭교회를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회라고 부릅니다.
개신교회가 독일에서 일어났을 때 영국의 교회는 로마교황청과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로마교황청은 영국의 정치에 간섭했으며 영국의 국왕은 이에 반기를 들고 더 이상 로마교황청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독자적인 교회로 있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생긴 교회를 영국의 국교회(國敎會, Church of England) 또는 성공회(聖公會,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부릅니다.
성공회도 전 세계에 교회를 세웠는데 우리나라에도 성공회에 속한 교회들이 있습니다(100여 개 교회 5만여 신자, 2009년 통계). 전 세계에 있는 성공회들의 모임을 세계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전 세계의 기독교회를 크게 둘로 나누면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되고, 서방교회는 다시 셋으로 나뉘어져서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그리고 성공회가 됩니다. 이 네 개의 큰 그룹이 모두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개신교회는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 여러 지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결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루터교회와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장로교회, 그리고 성공회에서 갈라져 나온 감리교회와 침례교회, 그리고 감리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구세군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개신교회에 속하며 그 후로는 오순절교회에 속합니다. 오순절교회는 100여년 전 미국에서 성령의 은사를 경험한 신자들이 일어나서 세운 교회입니다. 오순절교회는 장로교회와 달리 예배 형식이 유연하고 통성기도를 드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순절교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단이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명칭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입니다.
기독교회의 역사가 2천년이 된 것을 생각해 보면 그 기나긴 역사를 족보로 정리할 때 간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가문의 족보를 기록할 때도 여러 계파가 있어서 한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어느 계열에 속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공부하면서 오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독교회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까요?
3. 교회의 역사가 가르쳐 준 것
기독교회의 역사를 배울 때 우리가 기억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유대인이며 사도 바울도 유대인인데 그 두분 다 유대교에서 추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인 산헤드린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모임인 회당에서 쫓겨났으며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체포되어 법정에 섰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황제에게까지 가서 재판을 받고 죽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분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분들은 왜 기존의 교회에서 미움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아마 그분들이 진리를 추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의로움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는데 천국이 그런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신앙의 길을 나서는 사람은 기존 사회에서 배척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먼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리입니까?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이 진리입니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진리이며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 진리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에게 그것을 맡기실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에서 생명이 잘 자라고 충만하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다 보면 진리를 가로막는 일이 생깁니다. 그것은 보통 거짓말이며 욕심에서 나온 일들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속이고 해롭게 합니다. 그것이 진리를 가로막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가리켜 불의한 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불의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고 결국 그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행동에서 불의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불의는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아가고 사회적 약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은 무릇 더불어 살아가며 공동체 안에서 존중을 받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할 때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사람들을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따돌릴 때 그 사람들의 생명은 점점 꺼져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왕따를 당해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 것입니다. 그 괴로움이 너무 커지면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합니다.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서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기다리셨는데 바로 그 여인이 그런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왕따시키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출신 지역이나 또는 혈통이나 직업, 또는 성별에 대해서 차별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별이 일어나는 이유는 편견 때문입니다. 편견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그에 못 미친다고 판단하고 그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무시는 점점 자라나서 증오와 배제로 이어지고 나중에는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기독교회는 차별과 증오를 일으키는 편견에 맞서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적으로 몰아 죽이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은 교회가 심하게 병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병이 악화되었을 때 종교재판으로 사람을 죽이고 종교전쟁으로 다른 교리를 믿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사람을 차별하고 다른 사람을 원수처럼 여기는 원인이 무엇인가 하고 살펴보면 지금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인가 하나님인가? 또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신가? 침례가 정당한가 세례도 좋은가? 예배 시간에는 악기를 사용해도 되는가 아니면 사용하면 안 되는가?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합당한가 아닌가? 성령세례의 첫번째 외적 증거는 방언인가? 방언은 폐하여졌는가 아직도 유효한가?
이런 논쟁의 결과로 오늘날 기독교회의 교리체계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교리를 믿는다는 이유로 추방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굽힐 수 없는 신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기독교인 중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적그리스도적 단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한 차별금지법 제정이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일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대와 장소라는 한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의 문화와 전통이라는 한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노예제도가 당연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와 어떤 시대에는 일부다처제도가 용인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어떤 사회에서 그런 일은 결코 용인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시대와 장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서로에 대하여 존중하는 태도로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지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교회는 어떻게 자신을 새롭게 하며 하나 됨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4. 갱신과 일치를 위한 여정
기독교회는 2천년 역사를 지나오면서 수많은 교파를 낳았습니다. 정말 다양한 색깔의 기독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교회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릅니다. 그런 점에서 온 세상의 교회는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서로 연합하며 하나의 거대한 성전으로 지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을 모시고 살며, 우리 공동체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을 품고 하나됨을 이루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됨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집중할 때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핵심 가르침에 다가가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예언자 미가를 통해 들려주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요구는 세 가지입니다. 그것은 진실과 자비와 겸손한 신앙입니다(미가 6:8).
이런 일에서라면 우리는 온 세상의 어떤 그리스도인들과도 하나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장 큰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므로 서로 사랑하고 돕는 일에 마음을 모은다면 우리는 충분히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각 교파의 교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우기고 다른 사람들을 그 교리의 잣대로 판단한다면 과거에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분열과 배제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생명을 살리는 것이 진리이며 공동체를 번영으로 인도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의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일수록 자기 중심적인 착각과 오만에 도취되어 극단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금식결사대에 가입한 사람들이 사십여명이나 되었다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진리에 눈 뜨지 못하고 맹신하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습니다(행 23:21).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이단사이비 집단이 있어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단사이비 집단이 위험한 이유는 그들의 모임이 가정을 깨뜨리고 사회의 건강성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앗아가고 오로지 교주의 가르침과 명령에 굴종하게 하는 신앙은 어떤 단체를 막론하고 이단사이비 집단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두 가지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어떤 교회나 교파나 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저절로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진리를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이며, 발견하고 깨달은 진리를 실천하는 용기 속에서만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속한 진영에서 다른 진영의 사람을 원수처럼 대하는 것은 스스로 진리를 떠난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두 번째 함정은 내가 늘 옳다는 착각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실수하고 착각하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판단이 불완전한 이유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하여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배우고 또 알아갈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고 더 온전하고 더 건강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구도의 길이며 신앙생활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뭐라고 합니까? 우리를 지도해 주시고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 달라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은 우리가 아직 온전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온전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행위이며 그런 태도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편 119: 18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릇된 교리와 가르침으로 사람을 호리는 무리에게 속아넘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위조지폐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진짜 화폐를 익숙하게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바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록 우리는 이단사이비 집단의 거짓과 위선을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다양한 모습으로 있는 주님의 백성들과 좋은 이웃으로 구도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성경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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