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희 목사의 성서속 도시 이야기] (39) 왕의 대로에 있는 길하레셋,아로엘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mib.co.kr%2Fonline_image%2F2005%2F1130%2F20051130_28_01.jpg) | 이스라엘이 에돔과 모압의 국경이 되는 세렛 시내를 건넘으로써 실질적으로 광야 40년의 방랑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가나안 입주를 위해 요르단 고원지대로 난 소위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를 따라 북진해갔다. 이 ‘왕의 대로’는 ‘바닷길’(Via Maris)과 함께 민수기 20장 17절에도 언급되는 성서시대의 가장 중요한 2 개의 고속도로 중 하나이다. 이 ‘왕의 대로’변에는 고원지대에 있는 중요한 성읍들이 자리잡았다. 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지나간 ‘왕의 대로’변의 성읍들을 찾아가기 위해 먼저 동쪽으로 난 쉬운 사막길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왕의 대로’를 따라 올라오기로 했다. 요르단은 렌터카 이용도 가능하지만 택시도 하루에 100달러 정도면 기사와 함께 다닐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택시를 빌려 기사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을 아침 일찍 출발한 나는 가장 남쪽에 있는 길하레셋((Kir-Hareseth)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길하레셋은 암만에서 118㎞ 떨어져 있다. 사막으로 난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자 눈에 띌 만큼 험한 지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침내 험한 계곡 사이로 멀리 길하레셋이 시야에 들어왔다.
길하레셋은 아르논 남쪽 28.4㎞,사해 동쪽 17.6㎞ 지점에 자리한 고대 모압의 수도로 현재의 케라크(Kerak)이다. 해발 933m 고원에 위치한 이곳은 주변의 언덕과 깊은 계곡들로 인해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이사야의 신탁에서 두번 언급되며(사 16:7·11) 예레미야서에서도 두번 나온다(렘 48:31·36). 이사야 15장 1절에 나오는 길(Kir)도 길하레셋으로 본다. 북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은 공물을 거절하고 배반한 이곳을 치기 위해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연합하여 길하레셋을 공격하여 함락 직전까지 갔다. 이때 모압 왕은 성벽 위에서 자신의 맏아들을 자신들의 신에게 번제물로 드리며 전세를 만회하려 했다.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이스라엘 본국에 큰 사건이 생겨 포위를 풀고 귀국했다(왕하 3장).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성채는 중세 십자군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이중삼중으로 쌓여진 성채는 이곳에서 일어난 전쟁의 역사를 증언해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성안에는 막사와 감옥이 아직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고지에 위치한 이 성의 가장 큰 문제는 식수였는데 우물은 예부터 성 밖에 있었다. 그래서 성읍 바로 밑에 수로로 추정되는 180m 정도의 터널이 있다. 1924년 발굴을 통해 모압인과 로마시대부터 중세 아랍시대의 도기들이 발견되었다.
1230m 고지에 있는 천혜의 성채인 길하레셋를 떠나 ‘왕의 대로’를 따라 계속 북쪽으로 달려 아르(Ar·민 21:28)를 답사한 후 계속해서 북진,아르논 골짜기에 이를수록 더욱 험한 지형을 달려야 했다. 마침내 아르논 골짜기에 이르자 이곳이 예부터 암몬과 모압의 경계가 되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깎아지른 듯한 계곡의 S자 길을 따라 올라가 다시 골짜기 북쪽에 있는 아로엘에 도착했다.
아로엘에 이르자 가장 먼저 양을 지키는 개가 이방인의 방문을 달갑지 않게 여겼는지 짖으며 달려들었다. 양치기 노인의 저지로 개를 피해 무사히 무너진 옛 성채에 오를 수 있었다. 아로엘은 요단 동편의 옛 모압과 암몬의 경계선이 되었던 아르논 강둑 바로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 키르벳 아라이르(Khirbet Arair)에 위치하였다. 이 지역은 와디 무지브(성경의 아르논) 북쪽 경사면의 메데바와 케라크 사이의 교통로 동쪽으로 4㎞쯤 떨어져 있다. 이곳은 아르논 골짜기를 관통한(렘 48:19) ‘왕의 대로’를 보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세운 요새였음을 성채 위에서 아르논 골짜기를 바라보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로엘은 ‘가난한,내쫓긴’이란 뜻이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여호수아 12장 2절,신명기 2장:36절,열왕기하 10장 33절,예레미야 48장 19절 등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정복한 후 르우벤 지파가 거주했던(대상 5:8) 이곳은 사사시대와 왕조시대에도 이스라엘이 통치하였다. 그러나 모압 메사의 성공적인 군사원정의 결과(BC 850년경)로 이곳은 모압 왕국에 병합되었다. 메사 비문에 따르면 메사 왕은 아르논에 대로를 만들고 아로엘을 건설하였다. 그후 이곳은 아시리아의 확장기 동안 다메섹이 몰락할 때까지 시리아의 소유지로 남아 있었다(BC 732년). 이곳에 대한 발굴작업은 1964∼66년 에밀리오 올라바리가 이끄는 예루살렘과 스페인센터 회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6개의 고고학층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헬라 도자기들이 많다는 것은 BC 3∼2세기에 새로운 거주지가 있었음이 증명됐다.
지금은 무너진 성채와 까마득한 아르논 골짜기만이 그 옛날 암몬을 지키는 요새였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아로엘과 천혜의 요새였던 길하레셋의 무너진 성에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요새임을 깨닫게 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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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40) 브니엘과 숙곳 |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형 에서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일로 인해 형을 피해 도망쳐 하란에서 20년을 지낸 후 많은 가족과 재물을 소유하여 귀향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귀향 여정은 그의 생애만큼이나 평탄하지 못했다. 그중에서 천사와 씨름한 브니엘(Penuel)과 우릿간을 지은 숙곳(Succoth)을 찾기 위해 오늘날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서 택시로 아침 일찍 출발했다.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요르단 지역에 있는 성서 도시들을 찾기 위해서는 대중교통과 차를 빌리는 것보다는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비용면이나 시간 절약면에서 좋다.
브니엘은 요단강 동쪽 얍복강 중류에 위치한 성읍이다. 이곳은 브누엘로 표기되기도 한다. 나는 이곳이 오늘날 제르카 강(성경의 얍복강) 중류에 있고 현재 지명이 ‘텔 에드 다합’이라는 기초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출발했다. 요단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제르카 강을 만나는 곳에서 상류로 얼마쯤 올라가면 큰 길이 나오고 계속해서 2∼3㎞를 더 올라가면 브니엘이 나온다. 초행길이고 특별한 유적이 있는 곳이 아니라서 여러 번 주위를 왕복한 후에야 어렵게 브니엘을 찾았으나 지금은 텔(언덕) 형태로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우기를 맞은 얍복강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만큼 많은 양은 아니고 그저 우리나라 개울물 정도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형으로 보면 그 옛날 야곱이 건넜던 얍복강도 지금의 개울 정도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야곱은 밧단 아람(Paddan Aram)에서 돌아오는 도중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을 지낼 때 천사와 날이 새도록 씨름하게 되었고 날이 새려 할 때 천사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그래서 야곱이 그곳을 브니엘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뜻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이다(창 32:24∼ 32).
또한 이곳은 숙곳과 함께 기드온이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미디안 사람들을 패퇴시킨 후에 그들을 뒤쫓아갈 때 음식 제공을 거절한 이곳 사람들에게 징벌을 가하고 브니엘 망대를 헐며 성읍 사람들을 죽인 곳이기도 하다(삿 8:8∼9·17). 이후 2세기 동안 브니엘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폐허가 된 것 같다. 열왕기상 12장 25절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1세가 브니엘을 건축했는데 그것은 여로보암이 브니엘을 확장하고 요새화한 것을 말한다. 이 성읍은 또 애굽의 시삭(셰숑크)이 점령했던 성읍의 명단 중 53번째로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애굽에 정복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산 사이에 있는 계곡임에도 불구하고 하류로 내려올수록 계곡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게 펼쳐지는 비옥한 토지가 있다. 농산물도 많이 나고 목축업도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강 주위의 토지에서는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올라간 길로 다시 내려와 요단계곡과 평행하게 조성된 포장도로를 타고 다시 북쪽으로 3.2㎞ 정도 달려가면 도로 바로 옆에 큰 언덕이 왼쪽으로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브니엘을 떠난 야곱이 도착하여 우릿간을 지은 숙곳이다.
숙곳(Succoth)은 오늘날 와디 라예브(Wadi Rajeb)와 제르카강(얍복강) 사이에 있는 고르아브 오베이테(Chor Abu Obeideh)로 알려진 매우 비옥한 지역이다. 요단강 동쪽,얍복강 북쪽 지점에 있는 성읍인 숙곳(수 13:27)에는 동쪽으로는 언덕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요단강에 이르는 오솔길이 있다. 이곳이 바로 시편에서 언급되고 있는 숙곳 골짜기이다.
이 성읍의 이름은 야곱이 밧단 아람(Paddan-aram)에서 그의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자기집과 가축 우릿간을 만든 일로 인해 붙여졌다(창 33:17). 그래서 숙곳은 ‘천막’ ‘오두막’ 또는 ‘작은 양우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성읍은 헤스본 왕 시혼(Sihon)의 영토 일부분으로 갓 지파에게 주어졌다(수 13 :27). 후에 이곳 주민들은 브니엘 주민과 마찬가지로 기드온 병사들에게 음식 제공을 거절,기드온에게 잔인한 형벌을 당하였다(삿 8:5∼9,14∼16). 그리고 솔로몬 당시에는 성전에서 쓸 놋그릇들이 이곳 근처에서 주조되었다(왕상 7:46,대하 4:17). 오늘은 야곱이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은 브니엘과 우릿간을 지은 숙곳을 찾았다. 하나님 나라로 향하여 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여정 속에도 야곱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축복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브니엘에서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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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산(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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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4.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0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YvNjI4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628.jpg) 벧산 폴리스, 원형극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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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3.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z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YvNjYz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663.jpg) 벧산 성읍
고대도시 벧산은 하롯계곡과 요단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전략적으로 요단계곡을 지나가는 남북교통로와, 이스르엘과 요단동편 지역을 지나가는 동서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벧산은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 시대의 역사자료에 이미 언급이 되고 있다. 벧산은 다낙, 므깃도, 이블레암 등과 더불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에 점령되지 못한 가나안의 도시들이었다.(삿 1:27) 사울 시대 이 도시는 블레셋의 통치아래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박아 달아매었다.(삼상 31: 10,12) 다윗은 자신의 왕국을 북쪽으로 확장하면서 이 도시를 점령한 것 같고, 그 후 솔로몬은 벧산을 자신의 다섯 번째 행정 구역에 포함시켰다.(왕상 4:12) 벧산은 주변의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원지, 그리고 온화한 날씨로 인하여 농작물을 풍성하게 수확하였던 지역이다. 이스라엘의 랍비 중 한사람은 벧산을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만약 에덴동산이 이스라엘 땅 안에 있다면, 벧산은 그 문이 될 것이다.” 전략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벧산은 기원전 700년경부터 방치된 폐허가 되었다. 헬라시대에 이곳은 ‘스키토 폴리스’ (Scythopolis)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스키토인들의 도시’라는 의미의 이 도시명은 아마도 프톨레미 2세 (기원전 285-246년) 통치 때에 용병으로 있었던 스키토인들과 관련된 것 같다. 당시 스키토인들은 프톨레미왕조의 용병으로 이곳 벧산에 주둔하였다. 벧산이 최대의 번영기를 누린 것은 기원전 63년 폼페이가 이 도시를 점령한 이후이다. 이 도시는 데가볼리 도시들 중 요단강 서편지역에 위치한 유일한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데가볼리 도시연맹의 중심적 수도가 되었다. 벧산에는 발굴된 대표적 유물로는 보존 상태가 좋은 로마시대의 대규모 원형극장이다. 기원 2세기 후반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원형극장은 약 5000여명 정도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이 갖추어져 있다.
바울의 전도여행과 섬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3.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z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EwLzEwNTIuanBnLnRodW1i%26filename%3D1052.jpg) 미항
로마로 압송돼 가던 바울이 무라에서 갈아탄 알렉산드리아호는 풍랑으로 인해 그레데 섬 동쪽 살모네 앞을 지나 남쪽 해안을 따라가다가 간신히 라새아 성에서 가까운 미항에 도착했다. 바울은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행선하기가 위태함을 알고 이곳에서 겨울을 보낸 후 이달리야(이탈리아)로 가기를 백부장에게 권했다(행 27:6∼11) 미항(Fair Havens)은 잘 정돈되지 않은 채 해수욕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지명이 의미하는 ‘아름다운 항구’ ‘좋은 항구’라는 뜻 그대로 경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리더노스곶의 동쪽에 있는 하나의 만과 동일시되는 미항의 항구는 동쪽과 남동쪽으로 열려있다. 라새아의 유적지를 발견했던 스프레트 선장은 1853년에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바울에게 드렸던 한 교회의 유적을 발견했다(행 27:8). 성경에 보면 바울을 로마로 압송해 가던 배가 이곳 미항에 정박해 있는 동안 바울은 이곳에서 겨울을 지나기를 백부장에게 권했으나 그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행 27:7∼15)고 기록하고 있다. 뵈닉스는 미항에서는 배로 3∼4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렇다면 선장과 선주가 말한 대로 몇 시간만 가면 겨울을 안전하고 편하게 보낼 수 있는 뵈닉스로 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몇 시간의 항해만 하면 겨울을 편하고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데 구태여 불편한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자는 바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바울의 태도를 더 기뻐하시는 것을 미항을 떠나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 지경에 이른 사건에서 깨닫게 하셨다(행 27:9∼26) 바울이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기도했다고 전해지는 바울동굴은 항구 언덕 위에 나무십자가를 세워놓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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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드라게 섬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들렀던 곳으로 성경에서 꼭 한번 언급된 곳이다(행 16:11). 사모드라게(Samothrace: 트라키아의 사모스라는 뜻) 섬은 트라키아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그리스 군도상의 섬으로 에게해 동북부에 위치해 있다. 이 섬은 그리스로부터 흑해로 들어가는 굽은 뱃길에 위치하고 있어 고대에는 여행자들과 식민지 개척자들,그리고 상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항구 중의 하나였다. 이 섬에는 4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펩가리산은 해발 1650m로 에게해의 선원들에게 등대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섬에는 BC 8세기에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이곳에서 트라키아인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 섬을 트라키아의 사모스라고 명명했다.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은 이 섬의 꼭대기에 서서 트로이 전쟁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전성기에는 해군기지의 역할도 한 곳이다. 19세기 중엽 ‘사모드라게의 승리’로 알려진 배의 유물이 발견된 후 시작된 발굴작업이 1938년 이후 재개돼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 시대에 건축된 12개의 건물 잔해를 포함하는 ‘위대한 신들의 사원’의 유적을 발굴해냈다. 이 위대한 신들에 대한 예배는 헤로도토스와 플라톤,아리스토파네스의 글에도 언급돼 있다. 그 예배의 제사에는 각 도시의 사절과 순례자들이 그리스 전국과 소아시아 지역에서까지 모여들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네압볼리로 가는 도중 이곳을 방문했다(행 16:11). 바울이 탔던 배는 일단 사모드라게 섬에 기항했는데 아마 기항한 곳은 현재 이 섬의 북서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인 카마리오티사 항구였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유적이 1938년 이 항구의 변두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바울이 마을 상륙을 기념해 세운 것인지도 모른다. 바울은 터키의 드로아에서 이곳 사모드라게를 거쳐 유럽의 첫 입항지인 네압볼리로 갔다. 항구에서 6㎞쯤 떨어진 유적지에는 아직도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특별히 니케(Nike) 신의 신전 기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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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스 섬은 터키 트로길라온곶에서 1.6㎞ 지점에 있으며 에게해 동남부 이오니아 제도 중의 한 섬으로 에베소 남서쪽, 밀레도의 북서쪽에 있다. 이 섬은 동서의 길이가 43㎞,가장 넓은 곳은 24㎞ 정도이다. 흰 모래 해안과 마을,그리고 고기잡이 항구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이곳을 한글개역 성경에서는 사모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섬의 주요 도시들은 바울 시대에는 자유시였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 기오 섬을 떠나서 사모스 섬에 들렀다가 다음날 밀레도로 갔다(행 20:15). 특히 피타고리온 항구는 피타고라스 정리로 유명한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고향으로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그래서 이 항구 부두에는 삼각형 형태의 피타고라스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항구 옆에는 해수욕장,언덕 위에는 교회와 옛 성채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11세기께 이오니아인들로 이들은 일찍부터 무역에 나서서 기원전 620년께에는 지브롤터 해협 밖에까지 진출하였다. 기원전 6세기에는 폴리크라테스라의 통치로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문학 예술 철학 등 다방면으로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수도가 건설되고 항구와 헤라 신전도 건조되었는데 피타고리온 항구 산중턱에는 당시 바위를 파서 건설한 수로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이후 아테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헬레니즘 시대에는 남쪽에 있는 로도스 섬(행 21:1)의 번영과 함께 쇠퇴하였다. 그후 기원전 133년 오랜 기간 로마의 속주로 있다가 15세기 이후에는 터키의 지배를 받았고 1923년에 로잔 조약에 의해 그리스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모스 섬의 동남쪽 해안에는 평야지대가 있어 포도 올리브 목화 등이 생산되는데 이곳의 포도는 예부터 맛이 좋기로 유명했으며 오늘날에도 이곳의 포도주는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섬지역치고는 나무가 많아 조선업이 발달했는데 빌린 차로 섬을 가로지르자 지금도 산중턱에서 나무로 배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에서 가장 큰 도시는 북쪽에 있는 바티항으로 천혜의 입지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해변에는 역사박물관이 있는 공공도서관을 비롯해 은행 여행사 영국?독일?프랑스영사관들이 들어서 있고 일렬로 늘어선 쇼핑점과 카페,레스토랑들이 아름다운 해안과 잘 어우려져 바티항의 독특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4만여명이 거주하는 이 섬의 중앙에는 해발 1433m나 되는 케르케테우스 산이 있다. 헤라 신전은 사모스 섬의 예배장소였으며 문화적으로 자랑할 만한 건축물이다. 이곳의 신전은 사모스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기원전 2000년초에 헤라 신전은 투박한 헤라상을 가진 단순한 은신처에 불과했으나 기원전 8세기에는 길이 100ft의 헤라 신전이 건축되었고 이후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던 기원전 7세기에는 더욱 화려한 신전이 재건축되었다. 그러다가 100년후인 기원전 6세기께에는 고대 그리스 신전 중 가장 큰 신전이 되었다. 독재자 폴리크라테스가 지배할 당시에는 길이가 108.7m나 되는 이오니아식의 장엄한 신전이 재건축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헤라 신전에는 기둥 1개만 외롭게 우뚝 솟아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부서지고 무너진 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 신전에서는 기원전 6세기 중엽 사모스파의 작품인 여성 입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원주를 연상시키는 원통형의 직립상으로 오른손은 겨드랑이에 붙이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으며 세로로 섬세하게 주름이 새겨진 키톤(chitoon:그리스에서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남녀가 함께 입었던 옷)을 입고 있다. 이 여성 직립 입상 중에서 잘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가 현재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케라뮤에스 봉납의 부인상’이다. 이러한 엄청한 규모의 헤라 신전이 있었던 사모스 섬에 오늘날 도시 뿐 아니라 산중턱과 꼭대기까지 쥬도코스 피기 수도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바울이 이곳에 최초로 뿌린 복음의 씨앗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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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오 섬은 에게해의 동부 중앙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터키 본토에서 직선거리로 8㎞밖에 안 떨어져 있지만 그 사이에는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다. 기오 섬은 남북이 51.2㎞,동서가 12.8∼28.8㎞에 이른다. 이 섬의 가장 큰 항구는 섬 이름과 같은 기오 항으로 오늘날의 명칭은 시오(Chio) 또는 히오스(Hios)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고스 섬에서 레스보스(성경의 미둘레네)로 가려던 헤롯왕이 북풍에 의해 기오 섬에 밀려와 그 도시의 기둥들을 재건할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바울 시대에 기오 섬은 아시아의 로마 영토에 있는 자유도시 중의 하나였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노정에서 미둘레네로부터 남으로 항해하여 밤새도록 기오 맞은편 본토에 정박하였다가 다음날 보다 더 넓은 바다를 건너 사모에 도착하였다(행 20:14∼15). 그러나 나는 바울과는 반대 방향인 남쪽의 사모스 섬에서 이곳 기오 섬으로 들어왔다. 이 섬의 최초의 주민은 크레타인과 가리아인들이었으나 이오니아인에게 정복되었다. 이오니아인들은 이곳을 번창시켰다. 현재 이 섬의 가장 큰 기오 항은 비잔틴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답게 아직까지도 당시의 모습들이 남아 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1210년 터키 시대에 세워진 성의 일부가 남아있는데 지금은 조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의 특산물로는 청색의 대리석이 유명한데 지금도 많은 양의 대리석이 채굴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비단은 프랑스 리옹으로 수출될 만큼 질이 좋으며 그 외에 오렌지 아먼드 유향수지 피혁 등도 수출 품목들이다. 항구의 서쪽에는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유네스코 지정문화재인 이 수도원은 1045년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건물 중심부는 기둥이 없는 15.5m 높이의 둥근 지붕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는 당시의 유명한 성모 마리아의 이콘이 있다. 그러나 1822년 터키인들에 파괴돼 지금은 모자이크 벽의 일부만 남아 있다. 그리고 기오 섬에는 호메로스를 비롯하여 유명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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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다 섬은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바울이 탄 배가 유라굴라라는 광풍을 만났을 때 간신히 피난했던 곳이다(행 27:14∼16). 가우다섬은 오늘날의 그리스어로는 ‘가브도스’라고 하며 이탈리아어로는 ‘고조’(Gozzo)라고 한다. 이 섬은 그리스 최남단에 있는 작은 섬이다. 바울을 로마로 압송해 가던 배가 항해 중 풍랑을 만나 그레데 남쪽 해안을 따라 표류하다가 이곳 가우다 남쪽 아래쯤 왔을 때 간신히 피난할 수 있었다(행27: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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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5.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1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ExLzExMjUuanBnLnRodW1i%26filename%3D1125.jpg) 로도섬 아크로린도스 바울 도칙기념교회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들른 로도(Rhodes) 섬은 고스 섬 남쪽으로 85㎞쯤, 터키 소아시아의 해협으로부터는 약 17㎞ 떨어져 있는 지중해의 작은 섬이다. 에게해 대부분의 섬과 마찬가지로 로도 섬도 터키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나 그리스에 속해 있다. ‘로도’는 섬 이름인 동시에 항구 이름이기도 하며 그 이름의 뜻은 ‘장미꽃’이다. 섬의 크기는 에게해에서 그레데 다음으로 크며 너비 67.2㎞,길이 27.2㎞가 된다. 이 섬은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숲이 무성하고 농산물과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도중 고스를 떠나 이곳을 거쳐 바다라로 갔다(행 21:1). 바울의 배가 정박한 곳은 공항 근처의 로도 항구가 아니라 남쪽에 있는 린도스라는 항구이다. 아크로린도스는 북쪽 로도스시에서 동해안을 따라 약 55㎞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아크로린도스는 마을의 정상에 있다. 아크로린도스에느 바울의 정박을 기념하는 교회가 항구 남쪽 해안에 세워져 있다. 로도 섬의 옛 항구인 만드라키 항구(로도 항구 바로 옆)는 고대 7대 불가사의인 태양신 헬리오스 거상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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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장 1절에 언급되고 있는 고스 섬은 터키의 밀레도 항구에서 남쪽으로 68㎞ 거리에 있는 비옥한 작은 섬이다. 3만여명이 사는 작은 이 섬은 바울 사도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도중 일박하고 이튿날 로도 섬으로 향한 곳이다(행 21:1). 로마 제국이 통치할 때는 자치도시였으며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는 주치의인 고안의 간언에 따라 모든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는 오스만제국과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947년 그리스령이 되었다. 오늘날 섬 사람들은 대부분 중심도시인 고스시에 살고 있으며 섬 중앙에는 해발875m의 오로메돈 산이 있다. 지중해성 기후인 이곳은 옛날에는 고운 직물과 포도주가 명물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어업은 물론 밀 감귤류 포도 채소류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특히 작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구리와 철 등 광산물도 많이 나오고 있다. 고스 섬은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출생지이다. 또한 이곳은 화가 아펠테스(Apeltes), 시인 필레테스(Pilletes) 등을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기원전 5세기께 히포크라테스는 이곳에 의학교를 세웠다. 현재 이 섬의 코스(고스)시에는 2400년전 히포크라테스가 그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다. 그래서 이 섬 서쪽에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유적이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유적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 왼쪽에 대신전터임을 보여주는 7개의 기둥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2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 또 다른 작은 신전터가 있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 아폴론 신전의 제단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항구 옆에는 바울 도착을 기념하는 그리스정교회가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3.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z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EwLzEwNTYuanBnLnRodW1i%26filename%3D1056.jpg) 멜리데섬 발렛타 항구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이 탔던 배가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14일 동안 표류하다가 도착한 멜리데(Melth) 섬은 오늘날 몰타공화국이다. 이곳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 남쪽에 위치해 있다. 멜리데 섬은 이탈리아 남부의 시실리 섬 남쪽 약 100㎞,아프리카까지는 약 340㎞ 지점에 있는 작은 섬이다. 현재는 몰타(Malta)라고 불린다. 섬의 길이는 약 29㎞,너비는 13㎞,높은 곳은 해발 258m 정도이다. 남서쪽은 바다와 급경사를 이루는 가파른 절벽이고 북동쪽 해안에는 크고작은 만이 많이 있다. 멜리데는 지중해를 동서로 횡단하는 여행자나 북쪽에서 남쪽 아프리카로 건너가는 여행자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현재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조선소 폐쇄와 수출입 저조로 경제 사정이 매우 나쁜 상황이다. 바울이 이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를 만난 곳에는 기념교회만 세워져 바울이 보블리오를 만났다는 것만을 전해주고 있다. 바울과 일행은 이곳에 도착하여 보블리오를 만나 사흘 동안 그의 집에서 머무르면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바울은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는 보블리오의 부친을 기도와 안수로 고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병자도 고쳐주었다(행 28:1∼10). 그래서 이 섬의 가장 큰 항구 발레타시 언덕에는 보블리오를 기념하는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는 보블리오가 바울과 일행 276명을 잘 대접해준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이 교회 앞에는 보블리오 동상이 세워져 있다. 표류하던 바울이 처음 도착했다는 곳은 발레타에서 북서쪽으로 12.9㎞쯤 떨어져 있다. 바울은 금식 절기가 지난 뒤 그레데의 미항을 떠나 항해하다 난파돼 표류하였고 이곳 멜리데 북서쪽에 상륙하였다(행 28:1). 오늘날 이곳 해안을 사람들은 바울만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겨울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날씨가 춥자 원주민들은 불을 피워 따뜻하게 바울 일행을 접대했다. 그때 뜨거움을 참지 못한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자 원주민들은 ‘저가 살인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했다’(행 28:4)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손이 붓거나 쓰러져 죽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신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뱀에게 물린 바울이 죽지 않은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이곳 멜리데 섬은 이외에도 중앙의 라바트에 바울 기념교회와 카타콤 등 바울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있으며 모스타에는 유명한 모스타돔이 있다.
요나의 무덤(니느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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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3.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z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EwLzEwNTguanBnLnRodW1i%26filename%3D1058.jpg) 모술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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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무덤이 있는 에살핫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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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x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EwLzEwNDAuanBnLnRodW1i%26filename%3D1040.jpg) 니느웨 성읍 입구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2.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y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EwLzEwOTcuanBnLnRodW1i%26filename%3D1097.jpg) 니느웨성에서 멸망을 선포하는 요나 선지자
니느웨(니네베·Nineveh)가 성경에 처음 소개된 것은 창세기이다. 노아홍수 이후 노아와 그 자손들이 세상에 흩어져 살 때 노아의 둘째아들인 함의 계통에서 니므롯이란 영걸이 출생한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여러 곳에 큰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당시 세운 도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니느웨이다(창 10:8∼12). 니느웨는 오늘날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이며 이라크 전쟁으로 일반인은 출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모술에서 곧바로 티그리스 강을 건너면 니느웨이다. 니느웨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세워진 고도로서 이곳의 유적지는 2개의 커다란 쿠윤지크(Quyunjiq·많은 양무리) 언덕과 네비 유누스(Nebi Yunus·선지자 요나) 언덕으로 나눠져 있다. 약 13㎞에 이르는 정방형의 성벽이 에워싸고 있다. 니느웨 성벽의 높이는 30m에 달하며 성벽 위에는 6대의 쌍두마차가 동시에 달릴 수 있는 넓은 길이 있다. 그리고 성은 매우 깊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성 내부에는 병영과 무기고,군량창고 등이 자리하고 있다. 면적은 니느웨성을 한번 도는데 3일이 걸린다고 요나서 3장 2절에 기록돼 있을 만큼 매우 넓어서 220만평에 달한다. 오늘날 남아있는 성벽과 성문을 보면 당시 니느웨의 규모가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컸음을 실감할 수 있다. 열왕기하 19장 35∼37절에 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18만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치러왔으나 하룻밤에 몰살되었고 산헤립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귀국하여 니느웨로 돌아가 그들이 섬기는 우상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 피살됐다. 니느웨성은 상업이 번창하여 생활이 윤택해지자 범죄가 극심해져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했으나 요나는 이방인의 구원을 달갑지 않게 여겨 욥바로 내려가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치게 된다. 이에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켜 결국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내며 회개한 후 니느웨로 가 멸망을 경고,왕 이하 온 국민이 회개함으로써 멸망이 보류되었다(욘 3:4∼10). 그후 BC 606년에 바벨론에 멸망되었는데 이것은 선지자 나훔과 스바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나 3:7,습 2:13). 오늘날 요나의 무덤은 시내 언덕 위에 세워진 에살핫돈 왕궁에 있다. 에살핫돈은 산헤립의 아들로 피살된 부친의 뒤를 이어 앗수르의 왕위에 오른 자이다(왕하 19:37). 1845∼50년 발굴로 니느웨의 도서관 규모가 밝혀지고 점토로 만든 서판들과 설형문자 비문도 발굴되었다. 도서관에는 언어학,천문학,점성술,종교적 문헌,법전,과학 서적과 기구,문학과 예술,역사서와 연대표,상업서,각종 서간 등 서판이 무려 2만6000개나 소장돼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니느웨는 이라크의 다른 도시들보다 사원이 많고 고대 앗수르의 수도답게 많은 유적이 있다. 에밀 보타의 발굴에 의해 당시 규모가 많이 드러났으며 이곳에서 발굴된 많은 고고학적 유물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오늘날 모술에는 57만여명이 살고 있으며 시민 대부분은 쿠르드족이다. 기후는 자그로스 산맥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섭씨 50도까지 올라가 무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영하까지 내려간다. 연평균 강수량은 400㎜로 남부에 비해 비가 많이 온다. 산업은 중세부터 직물로 유명했으며 바그다드 다음 가는 대도시로 이라크 경제의 중심지이다. 특히 1939년 북쪽 교외에서 유전이 발견된 후 석유채굴기지와 교통요지로 급속히 발전했으나 이라크 전쟁으로 다시 쇠퇴하고 있다. |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41) 디셉과 아벨므홀라 |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가장 유명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엘리야와 그 후계자 엘리사의 고향을 답사하기로 하고 암만을 출발해 성서에 나오는 ‘왕의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성경에 나오는 왕의 대로는 오늘날 요르단의 35번 도로 중 수도인 암만 북쪽으로는 가장 중심된 도로로 암만 남쪽으로는 사막으로 난 15번 도로 다음으로 중심을 이루는 도로다. 암만을 출발해 50km를 달리면 요르단에서 가장 큰 유적이 남아있는 제라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20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안자라(Anjara)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그릿 시냇가에 도착하게 되는데, 바로 시냇가 위 언덕에 엘리사의 고향인 아벨므홀라가 보인다.
그릿 시냇가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때 가뭄이 들어 엘리야가 잠시 머문 곳으로 오늘날의 와디 알 야비스(Wadi al Yabis)이다. 그릿 시내에서 잠시 멈춘 후 도로를 따라 올라가자 바로 위에 야비스의 푯말이 있어 이곳이 그릿 시냇가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시내라고는 하지만 우기 때만 흐르는 와디(건천)인지라 도착했을 때도 물이 없어 엘리야 때의 가뭄을 상기시켰다. 엘리야는 이곳에서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로 연명했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이곳을 떠나 오늘날 레바논 지역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곳 과부의 공궤를 받았다(왕상17:1∼9).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의 고향인 아벨므홀라는 바로 이 시내 계곡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오른쪽 언덕의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곳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주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곳으로 경사진 산 언덕에 위치해 있지만 밭을 경작할 수 있는 비교적 비옥한 지역이다.
오늘날 텔 엘 마클룹(Tell el-Maqlub)인 아벨므홀라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사사 시대에 미디안 사람들이 기드온 300명 군사의 기습을 받고 스레라와 아벨므홀라 평원의 경계를 경유해 도망하는 사건에서 언급되었다(삿7:22). 그리고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아벨므홀라에 있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까지 와서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았다(왕상19:16, 19∼21).
오늘날 별다른 유적이 없지만 그 옛날 엘리사가 12겨리소로 밭을 갈다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던 아벨므홀라 가까이서 사진을 찍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엘리야의 고향 디셉으로 갔다. 디셉은 아벨므홀라가 보이는 그릿 시냇가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막길의 산을 넘어가다가 다시 비포장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엘리야는 성경에서 여섯 번이나 디셉 사람으로 나오고 있다(왕하3:1). 그리고 디셉의 지명에 대해서는 독립적으로 나오고 있지 않고 확실한 자료도 없기 때문에 디셉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약간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이전까지 디셉은 그릿 시내(와디 엘 야비스) 지류 중 하나인 와디 엘 마스쿠프(Wadi el-Masquf) 근처에 위치한 리스팁(Listib)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글루엑은 왕상17:1의 야베스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을 엘리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엘리야의 활동 무대가 대체로 와디 엘 야비스(그릿 시내) 지역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디셉은 얍복강과 야르묵강 사이의 길르앗 지역의 산악지대에 있는 성읍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일반적으로 오늘날 텔 마르 일야스(Tell Mar Ilyas)로 보고 있다.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발굴이 거의 끝나고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마침 한국 사람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에 대해 신기한 듯 나에게 엘리야와 관련된 모자이크를 가리켜 주었다. 현재 이곳에는 산 정상에 일부 바닥이 모자이크로 장식된 회당터로 보이는 60평 정도의 유적이 남아있어 그나마도 사람이 거주했던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고향인 디셉과 아벨므홀라.오늘날 별다른 유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힘들게 이곳을 찾아 멀리 요단계곡 너머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그 옛날 바알 숭배에 빠져 종교적으로 암울한 이스라엘을 일깨웠던 엘리야와 그 후계자 엘리사의 시대적 사명을 되새겨 본다.
이원희 목사 photobib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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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2.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y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YvNjY1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665.jpg) 나인성 교회 내부, 그림은 예수께서 나인성 청년을 살리시는 모습이다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쌔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대시니 관을 멘 자들이 서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눅7:11~17)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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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2.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y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gvODAw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800.jpg) 단 여로보암 산당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3.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z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YvNjY0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664.jpg) 단 여로보암 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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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은 고대 이스라엘 북단에 있던 도시로 헬몬선 남쪽 기슭에 있으며 두로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중 남북으로 갈라지는 지점으로 텔 단(T. D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3년 7월 21일 이스라엘 북부의 중요한 유적지 텔 단의 한 발굴자는 성문 밖 광장의 나지막한 돌담을 파헤치던 중 잘 다듬어진 새카만 돌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대부분 구조물들이 냇물에 다듬어진 매끈한 석회암이기 때문에 이 조각은 쉽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 돌을 들쳐낸 순간 지금까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 뒷면에는 히브리어와 모양이 비슷한 고대 아람어 기록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문화가 발달했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발굴에서도 이러한 기념비의 발견은 대단한 일인데 기록물이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이스라엘에서 그것도 석비의 형태이기 때문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석비가 발견된 단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북쪽 경계를 이루는 도시였다. 원래 단 지파는 중부지역을 분배받았는데 해안에 이미 정착해있던 블레셋 사람들 때문에 그곳에 자리잡을 수 없었다. 할수없이 그들은 북쪽으로 올라가서 맑은 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진 도시 레셈(수 19:47), 또는 라이스(삿 18:29)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지파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단이라 명명했다. 요단강의 이름은 원래 단으로부터 흘러 내려온다는 뜻인데 세 군데의 원류 중에서 단의 샘이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길이 32cm 폭 22cm 크기의 석비 조각에는 고대 아람어로 모두 13줄이 기록돼 있었다. 비록 부숴진 조각이기 때문에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아람의 한 왕이 이스라엘의 왕을 죽이고 정복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발굴자들은 곧 아람의 왕 벤하닷이 단을 정복했다는 열왕기상 15:16-22의 사건을 떠 올렸다. 서기전 9세기 초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두 왕국의 끊임없는 전쟁은 유다의 아사왕이 아람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아사는 자신의 적 북 이스라엘을 징벌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의 금고에 보관된 은과 금을 모두 끌어 모아 다메섹 아람왕에게 조공으로 바쳤다. 아람의 왕 벤하닷은 아사의 부탁을 받고 단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북부지역을 유린했고 그 결과가 바로 단에 세운 승전비에 기록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석비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아홉번째 줄에 새겨져 있는 ‘베잇트 다비드’, 즉 ‘다윗 왕조’라는 단어 때문이다. 구약성서 외의 기록에서 다윗이 처음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때부터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심 있는 고고학자, 역사학자, 성서학자들 사이에 ‘역사적 다윗에 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 뜨겁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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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3.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z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cvNzg0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784.jpg)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마리아
마리아 방문교회(Church of the Visitation)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 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눅1:39-40)
마리아의 샘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중간에 고아원이 있는 시온수녀원(Sisters of Zion)을 지나 높은 종탑과 더불어 마리아 방문 교회가 보인다. 콘크리트로 된 넓은 계단을 올라가면 교회입구에 넓은 철문이 있고 교회 정면 앞 벽에는 천사와 함께 마리아가 나귀를 타고 나사렛에서 이곳을 방문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 마리아 방문교회임을 알 수 있다. 교회를 들어서면 교회 건물 맞은편 벽에 누가복음 1장 46-55절에 있는 마리아의 찬송이 45개국 이상의 말로 쓰여져 있다. 1980년에 한글로 쓰여진 것도 맨 윗부분에 있다. 이 건물은 세례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집터였었다는 곳에 십자군 시대부터 교회가 있어왔다. 현재의 교회는 1862년에 세워진 교회 위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 발루지에 의해 설계되어 1955년에 윗층이 건축되었다. 아래층 교회 안에는 직경이 1m 가량되는 원판형 돌이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로마군인들이 두 살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죽일 때 세례요한이 숨었던 굴을 막았던 돌이라 한다. 정면에 있는 동굴 안에 우물이 있다. 교회의 세 벽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가랴의 모습,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마리아의 모습 그리고 사내 아이들을 죽이는 군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윗층에는 오르간과 약 80석 정도의 예배실이 있고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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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샘(Mary''''s Spring)
세례요한 탄생교회를 나와서 곧장 앞으로 200m 쯤 가면 마리아 방문교회로 가는 도중에 마리아의 샘이 있다. 이 샘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이름이 엔 케렘(포도원의 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리아가 세례요한의 부모를 방문한 것과 관련하여 십자군 시대분터 마리아의 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안쪽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먹지는 못하지만 손이나 발을 씻을 수 있어 잠시 피로를 풀 수 있다. 벽 위에는 다음의 구절이 적여 있다.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55:1)
엔 케림(Ein Karem)
엔케렘은 4개의 산기슭 가운데 위치한 해발 650m의 계곡들 사이에 있는 동네이다. 예루살렘에서 이곳을 거쳐 삼손의 고행인 소라와 소렉 골짜기로 갈 수 있다. 초기에 정착했던 이곳 거주민들은 농작물을 생산해 4km 정도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에 공급해 온 농부들이었다. 엔 케림이란 이름은 샘이라는 ‘엔’과 포도밭이라는 ‘케렘’으로서 이 곳의 좋고 단 물로 농사를 지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벧학게렘’으로 언급되었다.(렘6:1) 엔 케렘은 유다의 한 성읍으로 제사장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서 세례요한이 태어난 곳이다(눅1:39). 따라서 주후 4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성지화 되었고 순례자들은 이 곳을 사가랴의 집이라 불렀고 후에 동정녀 마리아가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했다는 곳에 교회를 지었다.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 중에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눅1:40)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1949년 이후 북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동유럽에서 이민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예루살렘에 직장을 가지고 매일 출퇴근하고 있다. 또한 경치가 좋고 조용하므로 많은 예술가들의 사무실이 이곳에 있다. 이곳에 이르는 길은 헤젤산(Mount of Herzel)으로부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면 교차점인 마을의 중심지가 나오고 주차장도 있다. 서쪽으로는 하닷사 의료센타가 있고 엔 케림 계곡인 오른쪽으로는 엔 케렘 농업학교가 있다. 이곳에 있는 주요 성지로는 시계요한 탄생교회, 마리아의 샘, 그리고 마리아 방문교회가 있다. 또한 엔 케렘에는 히브리대학의 의과대학이 있고 하닷사(Harassah)라고 하는 대학병원이 있다. 특히 하닷사 병원은 세계에서도 의료기술을 알아주는 이름있는 대학병원이다.
세례요한 탄생기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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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5.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1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gvODQw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840.jpg) 세례요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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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4.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0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cvNzU0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754.jpg) 세례요한 교회 내부 요한 탄생 동굴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5.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1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gvODQx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841.jpg) 세례요한 탄생 교회 비잔틴 시대 교회 돌
세례요한 탄생교회(Church St.John the Baptist)
세례요한이 탄생했다는 장소위에 세워진 스페인 프란치스카 교회이다. 교회 앞에는 로마 시대에 사람이 거주했다는 흔적으로 비너스 여신의 동상과 더불어 포도주 틀과 두개의 무덤이 있다. 계단을 올라서 교회를 들어서면 돌로 포장된 앞마당이 있다. 마당에는 각국 어로 된 사가랴의 노래가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글자가 우리의 눈길을 끌 기도합니다. 한글도 있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정면의 오른 쪽이 바로 세례요한이 태어난 곳입니다. 바로 제단 밑에 '여기서 주보다 앞선 이가 태어났다'라고 라틴어로 쓰여 있습니다. 오른쪽 계단 앞에는 지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쇠창살이 덮여있고 안에는 비잔틴 교회의 공작새들과 꽃을 묘사한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또한 헬라어로 “주의 순교자들 만세!”란 문구가 있는 모자이크가 1885년에 발견되었다. 이는 비잔틴 시대의 옛 교회가 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첫 번째 교회는 4세기 비잔틴 시대에 세워졌고 6세기 사마리아인에 의해서 무너졌다. 그 후 아랍인 정복하에서는 대상의 숙소로 사용되었었다. 1485년 프란치스카에 소유가 허락되고 1674년부터 교회를 건축하고 정착하기 시작했고 1897년에 교회가 확장되었다. 현재의 교회는 1674년도에 건축된 것이다. 교회안으로 들어가면 가운데 높은 제단이 세례요한에게 봉헌된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제단을 엘리사벳에게 드려진 것이다. 좌측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세례요한이 탄생한 동굴이 있는 곳이다. 동굴입구 위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는데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세례요한을 낳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한 첫 번째 말이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눅1:68). 동굴안에는 제단이 있고 벽에는 여러나라 언어로 세례요한의 생애와 이 교회의 역사가 쓰여져 있다.
스데반 기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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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4.blog.daum.net%2Fupload_control%2Fdownload.blog%3Ffhandle%3DMDRUajRAZnM0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cvNzU1LmpwZy50aHVtYg%3D%3D%26filename%3D755.jpg) 스데반교회 내부
스데반 기념교회(St. Stephen's Church)
일찍 일어나 황금문을 지나 올리브산으로 들어서면서 바로 옆에 스데반을 기념하는 교회가 감람산 중간에 세워졌다.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다가 유대인들에 게 끌려가 성문 밖에서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것을 기념하는 교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