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3 주일설교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사도행전 17:1~10
“공격이 최상의 방어이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 말의 출처가 궁금해서 구글링해봤더니 이런저런 말들만 있고 정확한 출처가 없습니다. 그 대신 “국가의 힘은 방어가 아니라 공격에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아돌프 히틀러의 말입니다. 바로 이 말 때문에 히틀러는 온 세상을 시끄럽게 했나 봅니다.
그런데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한 사람은 히틀러 말고도 또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폭탄을 터뜨린 적은 없지만, 폭탄보다 더 강력한 복음을 전해서 그가 가는 도시마다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6절). 본문에서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황을 살펴봅시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고 그 결과 간수와 그 집안이 밤중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튿날 감옥에서 나온 바울은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 아볼로니아를 통과해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에서 전도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 이유는 그곳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빌립보에서는 회당이 없어서 말씀을 전하기 불편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그 당시 마케도니아의 수도였는데 여기에는 회당이 있었습니다(1절). 회당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모여있어서 말씀을 전하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하는 것은 바울에게 관례가 되었습니다(2절).
이것을 보면 바울은 매우 전략적으로 전도했습니다. 우리도 전도할 때도 전도하기에 더 좋은 상황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남이 하는 장소와 방법을 답습하기보다 나에게, 우리 동네에 맞는 방법을 개발해야 하겠죠.
그런데 한 가지는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전한다는 말은 인간의 죄와 형벌, 즉 지옥 갈 운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전한다는 말은 믿음과 영생을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사람이 변하고 영혼이 구원받습니다. 복음을 빼고 사랑만 전한다면 그것은 환자에게 약 대신 사탕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할 때 성경을 강론하며 전했는데(2절) 그 복음을 듣고 많은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믿었습니다. 평소에 회당에 나오는 그들은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전도할 때 복음에 열려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 교회 다니다가 지금은 쉬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며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전도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어이없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헬라인 가운데는 많은 사람이 믿는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시기하여 분노가 가득 찼습니다. 제가 이것을 어이없다고 하는 데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회당은 원래 유대인이 모이는 곳인데 헬라인 중에 유대인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헬라인들은 복음을 받고 믿는데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반발합니다. 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현상입니까?
그런 일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에게는 잘못된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바울도 믿기 전에는 그런 선입관이 있었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 성경이 말하는 그 메시아가 예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단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고 성경을 성경대로 보지 않기에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성경이 말하는 그 메시아가 예수님인 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특유의 못된 행동이 있습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하는 것이 바울의 전매특허라면 거짓말로 선동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매특허입니다. 5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불량배들을 매수해서 온 도시를 소란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야손의 집에 쳐들어가서 바울 일행을 찾았습니다. 빌립보의 루디아처럼 야손은 자기 집을 바울 일행이 머물게 하며 예배 장소로 헌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손은 성이 소란한 것을 보고 재빨리 바울 일행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유대인과 불량배들이 야손의 집에서 선교사들을 찾지 못하자 야손과 신자들을 끌고 가서는 거짓말로 고발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부르는 명칭이 흥미롭습니다. “천하를 어지럽히던 이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천하를 어지럽힌 것은 바울이 아니라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입니다.
어쨌든 바울은 가는 곳마다 소동이 일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에서, 빌립보에서 바울 앞에는 항상 선동과 난리, 돌팔매질, 고소/고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성탄절에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서로 양보하고 평화 현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이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마치 조폭이 지배하는 뒷골목에도 나름대로 질서가 있듯이 불신자들의 세상에도 사탄을 중심으로 질서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없이도 그런대로 살아 갑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질서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 없이 사는 결과가 지옥이라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이런 복음 전파를 사탄이 가장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면 바로 사탄이 자기 종들을 시켜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결과적으로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불신자와 어울려 사는데 아무런 소동이 없다면 사탄의 질서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지옥 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유대인과 불량배들은 바울 대신에 야손과 신자들을 끌고 가서 거짓말로 고발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전했다고 고발해서는 효과가 없을 테니 반역죄로 고발했습니다. 바울이 황제 외에 예수라는 다른 왕이 있다고 선동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본향은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행 14:22)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내용을 잘 알면서 그 말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바울이 로마 외의 다른 나라를 전하고 황제 외의 다른 왕을 주장한다고 고발했습니다. 결국, 야손과 신자들은 바울에게 협조한 죄로 벌금을 내고 풀려났습니다.
그날 밤에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갔는데 베뢰아로 가자마자 또 유대인 회당에 들어갔습니다(10절).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겠죠? 그래서 많은 사람이 믿었겠죠. 그리고 또 유대인들이 사람들은 선동해서 난리를 피웠겠지요. 할 수 없이 바울은 그 도시를 떠났겠지요. 이런 일은 무한히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누가를 통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을 때 신자들 앞에는 두 가지 현상이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신자가 계속 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을 반대하고 신자를 괴롭히는 일이 계속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생겨나는지 신자들이 궁금해했습니다.
누가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해 답을 주었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꼭 미워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그런 와중에 왜 신자는 계속 늘고 있는지,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이 누가를 통해서 답을 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가는 곳곳마다 난리가 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복음은 세상을 향해 공격하고 침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사탄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대하여 결국 죽였습니다. 또 제자들과 신자들을 괴롭히고 죽였습니다. 특히 처음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포기하게 하려고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기존에 믿던 사람보다 처음 전도한 지역, 처음 믿는 가정에 그런 소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부른 이름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유대인들 자기들이 선동하고 소동하게 해 놓고 그 죄를 바울과 실라에게 뒤집어씌웠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천하가 어지럽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복음은 잠자는 세상을 깨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그 이름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1970년대에 연탄으로 난방했는데 연탄가스의 일산화탄소에 중독되는 슬픈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일산화탄소는 무색무취여서 자던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고 변을 당합니다. 그럴 때 우연히 그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소리를 지르고 추운 겨울이지만 방문을 열고 사람을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요즘 같으면 구급차가 달려와서 고압산소 마스크를 씌우겠지만 옛날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동치미 국물을 먹이는 것뿐이었습니다. 가스 중독 환자에게 동치미 국물을 먹인 이유는 동치미나 무김치 안에 들어있는 유황 성분이 연탄가스를 중화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이 조용하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소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온 동네를 깨워야 합니다. 추운 겨울이어도 방문을 열어젖혀야 합니다. 시원한 공기가 있는 바깥으로 사람을 끌어내야 합니다. 아무 집이나 가서 동치미 국물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죄와 사탄에 중독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믿음은 자유인데 왜 남에게 믿음을 강요하느냐고 난리를 칩니다. 난리는 자기들이 치면서 신자가 시끄럽게 한다고 화를 냅니다.
하지만 그 난리치는 사람들 가운데는 반드시 믿는 사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런 난리를 겪으면서 견고한 신앙으로 바뀝니다. 전도하다가 더 큰 어려움이 생기면 더 믿음 좋은 신자가 만들어집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바울이 전도한 도시 중에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성숙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바울이 그들이 훌륭한 믿음을 칭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어디를 가든지 여러분이 가는 그곳을 복음으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