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국의 그림자”(1988년9월호 월간중앙 복간기념 논픽션 당선작)
金正道
(편집 자:주)속칭 "계명세대의 세계정부"란 다국적 외국인들이 합작과 건강을 빙자하여 한국에 상륙 하였다. 그러나 숨은 목적이었던 사이비 종교인 초월명상 (TM)을 포교하려다 필자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그러자 마하리쉬 일당은 초월명상만 반대 하지 않는다면 평생 먹고살 수 있는 4억 원 이상의 금전유혹은 물론 서울근교의 한 고등학교의 재단 이사장직을 맟아줄 것 등의 유혹을 하였다. 그 역시 실패하자, 필자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하여 신앙인(C교회 집사)이자 법률전문가인 K변호사 등과 공모하여 무고한 필자에게 공금 횡령 등의 누명을 씌워 구속시키려던 K변호사 등의 음모역시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외국인들은 미화 150만불이나 투자한 SCI-KOREA(주) 합작회사를 포기하고 도주한 사연과 국제적 사기단체 및 사기극인 초월 명상(TM) 그리고 종주 인도인 마하리쉬(MAHARISHI)등의 정체를 폭로 한 내용임.
[미지의 방문객]
1980년 7월 중순이었다.
『김사장 나 좀 봅시다 』
더위에 축 늘어져 사무실이 있는 C호텔로 들어서자마자 호텔 지배인 S씨가 나를 찾았다.
나는 당시 이 호텔 532호실에 JD PR이란 상호로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김사장을 소개해 달라는 캐나다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사업관계인 것 같은데
한번 만나 보시겠소? 나더러 김사장을 소개해 달라고 하던데요.』
『지배인이 잘 아는 분인가요?』
『잘은 모릅니다. 다만 우리 호텔 손님으로서 수인사를 나눈 정도예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뭐 인사 정도야 나누지요. 만나서 알아보면 될 테니까』하고 대범하게 대답했다.
당시 내가 하고 있는 사업의 거래자들이 대부분 외국인들이었으므로
외국인을 만난다는 것이 별일은 아니었다. 혹시 알지 못하는 외국인에게서 좋은 거래
하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감도 솟았다.
『그쪽에 연락해서 다시 통지해 드리지요』
그날은 그렇게 얘기가 끝났다. 나는 내 사무실로 들어갔다.
내 사업은 한국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금융업체들의 선전이나 행사 및 제반 자질구레한
업무를 대행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비서업무대행이었다.
외국 금융업체들은 대부분 소규모여서 홍보라거나 비서업무 파트가 미비하였고
따라서 한국인으로서 그걸 조직적으로 대행해 주는 사람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생겨나게 되었는데 내가 그 1호인 셈이었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미군부대에서 자라 언어 능력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교우관계 등에서
외국인들과 상대하기에 불편함이 없었고 이런 업무의 내용에 비교적 익숙했기 때문에
호텔에 사무실을 개설하는 모험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은 순풍에 돛단 격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순조로운 편이었고,
장래의 희망을 걸 수도 있었다. 직원으로는 여비서 한 사람과 업무 비중에 따라
일을 거들어 주는 미국인 한 사람을 두었고 그 외에는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을
충원해서 도움을 받았다.
『존 씹니다. 인사 하세요』
다음날 지배인은 그 외국인을 소개해 주었다. 훤칠한 키에 귀공자 같이
단정하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사내였다.
처음에는 별로 이야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나의 고객으로서 내 업무능력을
테스트해 보려는 듯한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자세히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내 영어는 빠른 편이고 또 서구 문화권의
습성에 젖어서 우물거리지 않고 명쾌히 대답하는 체질이었으므로 그 사람은
아주 흡족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비즈니스 상담은 없었다.
며칠 후에 다 시 한번 만나자는 것으로 그날 첫 대면은 끝났다.
그가 가고 나니 공연히 싱거워졌다. 외국 금융기관의 한국 지점 개설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도 해보았으나 어쩐지 그런 건 아니라는
감이 들었다.
[큰 사업 한번 같이 해봅시다.]
며칠 후 그 '존'이라는 사람이 다시 찾아왔다.
『김사장, 금융기관 행사 대행 같은 작은 일이 아니라 큰 사업 한번
해보시지 안겠습니까?』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리가 자본주가 되어 한국에 사업체 하나 설립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은밀히 한국쪽 책임자를 물색해 왔습니다. 그래서 김사장을 만났던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우리 S국제상사는 스위스에 본부가 있습니다. 한국에는 첫 진출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현지 책임자를 구하느라고 오랫동안 조사 작업을 벌여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기는 지난번이 처음이지만 그동안 김사장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최적격자라고 판단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그것이 어떤 일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합작회사란 말입니까 아니면
업무 대행이란 말입니까?』
『아, 물론 합작회사지요. 투자금은 우리가 전부 부담할 테니 김사장은
경영만 맡아 달라 그겁니다. 경영에 있어서도 필요하다면 당신이
분야별전문가를 채용하여 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나는 현기증이 일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김사장은 충분히 유능한 사업가가 될 자질이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같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실은 이미 외국은행 지점장 등으로부터
당신의 신뢰성에 관해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는 JDPR 개업시 영자신문인 코리아 헤럴드가 신종 기업 소개란에서
<외국은행의 홍보가로서 독보적인 존재이며 인간보증수표>라고 나를 묘사한
기사의 스크랩까지 지니고 있었다. 보통 이상의 관심이었다. 그는 이어 말했다.
『우리 S국제상사는 개발도상국인 한국의 수출 사업을 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업 외에도 세계적으로 학교운영 등 육영사업을 돕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술단체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도 미화 5백만 달러
(당시 한화 약 33억원) 또는 그 이상을 들여 합작이나 육영사업을 벌일 계획입니다.
재정은 충분하니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단번에 믿기는 어려운 청사진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당신이 나를 믿고 사업을 같이하자는 것도 좋지만 우선 나는 합작을 할 만큼의
재정력이 없고, 둘째로는 당신이 원하는 그런 큰 회사를 경영한 경험도 없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정 원한다면 합작회사의 설립을
희망하는 사람을 물색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존'은 안색이 달라지면서 내 손을 잡았다.
『김사장이 아니면 안됩니다. 이 일은 김사장만이 해낼 수 있습니다.
꼭 우리와 같이 일합시다.』
나는 점점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갔다. 그리고 마치 최면에 걸린 것 같은 상태에서
좀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 낯선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솔직히 나는 당신이 누군지, 또 S국제상사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지
그것도 모르고 있지 않소. 당신이 S국제상사를 대표하여 결정권을 가지고
나와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근거를 본부로부터 제시해 주시오.』
[얼마나 믿어야 할지...]
4일 후 C호텔 텔렉스실에서 내 사무실로 전갈이 왔다. 스위스 소재 S국제상사로부터
나에게 전문이 왔다는 얘기였다. 나는 황급히 내려가 그 전문을 읽어 보았다.
<JDPR, C호텔 532호 김정도 귀하. 스위스 소재 S국제상사는 한국에서 귀하를
사업 자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기꺼이 동의합니다. 우리 아시아 대표들이
보내는 보고서를 통해 귀하의 원만성과 효율성에 관한 명성은 익히 알고 있으며,
귀하의 업무수행 능력에 대한 신뢰와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귀하가 S상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하며, 모든 실제조치는
본 SCI의 주재 대표에 의해 취해질 것입니다. 귀하의 자문 업무 수행과 관련된
모든 비용은 서울 소재 귀하의 은행구좌로 송금될 것입니다.
S국제상사의 중역진이 이 사항을 승인하는 즉시 이 텔렉스에 추가하여
문서를 발송하겠습니다. -S국제상사 >
텔렉스 내용대로라면 합작사업 문제는 거론되지 않는 등 '존'의 말과는 달랐다.
그러나 필요한 비용을 송금 약속한 점 등 초기 문서로서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의문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실력이나 경제력 조건이
나보다 나은 사람이 많을 텐데 왜 나를 선택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함경북도에서 월남한 나로서는 혹시 공산당이 제3국을 통하여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까지 떠올랐다. 월남 한게 비록 6살 어린 시절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즉각 C호텔 담당 K형사에게 '존'의 합작제의 등 그동안의 모든 사실을
말하고 그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 며칠 후 C호텔 커피숍에서 K형사를 만나
조사 결과를 들으면서 나는 공연히 나를 도와주려는 외국 사람을 의심 했구나
하는 기분이 됐다.
『김사장, 말씀대로 '존'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스위스에 사업적 근거도 있고
사상문제도 없으니 안심하고 사업이나 잘 하시오. 나중에 사업이 잘되면
나를 모른척이나 하지 마시오.』
결국 그해 8월말경 나는 '존'과 함께 SCI(주)라는 이름으로 합작을 위한 내국인
법인을 설립했다. 대표이사에는 나, '존'과 내국인 4명이 이사로 법정등록 되었다.
그런데 당시 경제기획원의 외국인 합작 인가는 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필요한
조건들이 많았다. 한 담당자는 연신 드나드는 나를 지켜보다 딱해서인지
한마디 충고를 해왔다.
『김정도씨, 여기가 어디 구멍가게를 인가해 주는 곳입니까?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외국 사람들이 김정도씨의 말만 믿고 몇 백만 달러는 투자해 준단 말이오?
그러니 지금 하는 JDPR이란 개인 사업이나 잘 하시오.』
그제 서야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말이 합작이니 지금 나에게는
그들의 투자금은 한 푼도 없다. 오직 그들의 말만 믿고 이렇게 서류뭉치를 들고
흥분해서 날뛰고 있는 것이다. 『헛고생 했구나-』
[자본금 1백 30만 달러!!]
'존'은 이미 스위스로 가고 없었다. 나는 즉시 그리로 전화해서
내 의구심을 털어놓았다. '존'은 내 말을 듣더니 껄껄 웃었다.
『늦어도 이틀 내로 1백만 달러를 보낼 테니 거래은행 구좌번호를 불러 주세요.』
번호를 불러 주면서도 반신반의였다. 다음날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속았다는 생각을 거의 굳히게 되었다. 그런데 이틀 후 네덜란드계 ABN의
자금담당 S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아마도 또 다른 행사나
새로운 일감이 생겼거니 하고 그의 사무실로 갔다.
나는 어떻게 그곳을 나왔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사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진지한 사업 파트너였던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행운이 때로는 이렇게 찾아올 수도 있단 말인가. 그들의 말할 수 없는 신뢰성에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제부터 제 2의 인생이로구나. 입술을 깨물며
기업가로서 기필코 성공하리라 나는 다짐했다. 일이 바빠졌다.
우선 합작 인가를 받아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서둘러 경제기획원에 1백만달러에 대한
주불납입금 증서를 제출했다. 담당 실무자도 꽤 놀란 모양이었다.
『김정도씨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요. 어찌되었든 합작 인가 조건은
구비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자본금은 1백 30만 달러였다. 업종은 그들이 말한 대로 나전칠기와 목공예품의
제조 및 수출사업. 한국의 나전칠기는 세계적인 시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분석이었고, 사실 해볼 만한 사업이었다.
나는 '존'과 함께 공장을 물색한 끝에 인천시 북구 효성동의 비어 있는 공장을
가계약했다. 회사 상호는 SCI-KOREA(주), 합작비율은 S국제상사 85% 대
내국인 15%로 내국인 지분 중 내가 8%를 확보하였다.
S국제상사측 K변호사의 강력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회사의 공동대표가 아닌
단독대표로서 경영 및 인사권을 모두 지니게 되었다.
단독대표를 고집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나를 필요로 했고
그들 나름의 투자 속셈이 뻔히 있을 터인데, 나의 개인 사업마저 포기하면서
실질적 경영권도 없는 월급 사장 노릇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6억 4천만원에 사들인 공장의 규모는 대지 2천5백평에 건평 1천평, 기숙사까지
갖추고 있었다. '존'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원이 6백명이나 필요하다고 했으나
나는 사업계획에도 없는 증원계획에는 반대하여 현실적으로 필요한 2백 50명만을
신문공고를 내 채용했다. 간부 임명도 내가 했고 친구 몇 사람도 받아들였다.
취임식과 조회를 끝내고 나니 감개무량하였다. 학력이니 경력 또는 재산도 없는
내가 제법 규모가 큰 중소기업의 대표이사가 되었다니 꿈만 같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무엇이든 열심히 해온 덕분에 이런 '기적'을
이룰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16세에 하우스보이로 취직]
1956년 경복중학을 겨우 졸업한 나는 아버님 사업 실패에 따른 생계 위협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음해 나는 아버님의 진학 권고를 뿌리치고 동두천에 있는
미 7사단 PX에 근무하는 아저씨의 소개로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들어갔다.
열여섯 살 때였다. 그런데, 구두를 제대로 닦을 줄 몰라 3일만에 실격, 화장실
청소담당으로 쫓겨났다. 전화위복이랄까, 얼마 후 화장실이 깨끗해지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고 인정받아 미군 지배인의 추천으로 서비스 클럽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의 영어공부는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화장실에서 단어를 외우다가 AFKN의 한
아나운서 눈에 띈 것이 인연이 되어 그에게서 ABC에서부터 다시 새롭게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제대하여 떠날 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너는 잘 모르겠지만 더 나은 일자리로 옮길 수 있을거야.』
그의 말대로 나는 1970년 미 7사단의 철수 계획에 따라 감원될 때까지
타자수, 도서관 책임자, 그리고 사단장의 개인통역으로까지 출세(?)를 했다.
그동안 참모들이나 고급장교들을 상대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익혔다.
특히 그들의 公私구분과 객관적인 사고방식은 나중에 외국은행을 상대로 사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많은 친구들도 사귀었다.
뒷날 JDPR을 차린 것도 부대에서 사귄 친구 덕분이었다. 우연히 다시 만난
미국인 친구로부터 미국계 케미컬은행 지점장인 '브라운'을 소개받은 게
실마리가 됐다. 그가 한국에 은행을 설립하려는데 은행 업무를 제외한
제반사항에 어려움이 있다고 도움을 요청해왔던 것이다. 약 4개월간
'브라운'의 심부름을 해주면서 홍보자문의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드디어 케미컬은행이 정식으로 개점하였을 때 '브라운'은 그 당시 한참 한국에 지점을
설치하려던 외국은행 지점장들에게 나를 추천하여 주었다. 역시 미국계 은행인
'BTC' 와 사우디계의 'NCB'은행 지점장들에게 나의 실적을 소개해주어 뜻하지 않은
생소한 일을 시작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빈틈없는 계획과 예산에 맞추어 차질 없이 임무를 수행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나에게는 홍보자문이나 대행업을 한 경험이 전혀 없는데다가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상업적으로 그들의 자문을 소화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내가 맡은 주요업무는 내한하는 외국 은행장이 주최하는 만찬행사, 기자회견,
개업선물, 개업식에 관계된 인쇄물 등 그 당시 일반 광고기획의 업무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10여개의 주한 외국은행 개설업무에 참여하는 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것을 터득했다.
그러던 중 뜻밖에 일부 외국은행가들로부터 홍보전문가로서의 자질과 사업성을
인정받아 독립 사무실을 개설하라는 권유를 받고 JDPR이란 상호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일이 바빠지기 시작했고 사업영역이 주한 외국이란 특수성
때문에 나는 월봉 미화 2천 달러에 주택을 임대하여 주는 조건으로 미8군 AFKN
현직아나운서를 전역시키면서 채용하였던 '펨버턴'과 직원들이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행사 전체를 주관하면서 외국은행에서 부탁하는 업무에 대한 분석과 거기에
합당한 아이디어와 계획을 결정하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 일을 그대로 계속 했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회사창립]
81년 1월 경제기획원으로부터 합작인가가 나왔다. 그러자 S국제상사의 자매회사
임원들이라며 여러 나라에서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유럽의 영국, 서독, 이탈리아, 프랑스, 동남아의 태국, 싱가포르, 홍콩,
미주지역의 미국, 캐나다, 브라질 등의 대표 또는 간부라는 사람들이 연이어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내한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스위스 회사와의
합작은 흔치 않았으므로 이웃 회사에서도 부러운 격려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약간 마음에 걸렸던 것은 그 무수히 많은 외국인들이 모두 사업가라기보다는
어떤 야릇한 집단이나 조직체의 일원 같은 느낌을 주었다는 점이다.
모두 너무 겸손했고 조용했으며 잘 길들여진 인간들 같아 보였다.
사업의 장래에 대해 꼬치꼬치 묻지도 않았다.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나전칠기 분야는 매우 영세했던데 비해 합작회사로서의 조업조건과
시설 등은 사원들에게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독보적인 수출제조업체의 수준이었다.
우선 나는 이합집산으로 구성된 사원들의 정신적 갈등을 해결하고
미래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사원들이 희망을 갖고 자발적으로 협동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와 승진을 연결시키는
조치도 취했다. 나전칠기와 목공예에 전혀 무지한 나도 경력사원들의 조언을 받아가면서
청량리 등 제품을 만들거나 재료구입 하는 곳을 열심히 돌아보았다. 제조업체로서
수출을 잘하는 업체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군소기업체를 기술이 좋고
작업을 열심히 하면서도 수출상대국에 대한 정보수집이나 취향에 맞는 상품개발에
여건상 제약을 받고 있는 곳이 많았다.
나는 여러 가지 샘플을 만들어 세계 각국에 널려있다는 S국제상사
자회사들에 그 견본들을 보냈다. 얼마 후 제품에 대한 문제점과 시장성에 대한
평가가 나왔다. 나는 제품이 갖고 있는 한국의 전통적 이미지를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지적된 문제들을 개선하여 다시 샘플을 보냈다. 얼마 후 의외로 많은 호응과 함께
몇 나라에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원들도 자신들이 각별히 노력하여 만든
제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수출회사의 사원으로서의 긍지를 갖는 것 같았다.
[이상한 제의]
합작승인이 나온 후 약 한 달이 지난 1981년 2월 초순 '존'은 나에게 아주 예의 바르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JD(나의 약칭),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본부에서는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간단한 기도를 하는데 당신도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당신이 사업을 열심히
잘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을 잃으면 사업의 성공도 결국 그 뜻을 잃게 되니
한번 해보십시오.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아침저녁으로 20분씩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는 것 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매일 건강을 위한 운동을 하는 외에는 특별한 종교도 없는 터였기 때문에 앞뒤
생각 없이 그 제안에 승낙했다.
'존'은 나 말고도 이사로 채용된 내 친구 L에게도 그것을 권유하는 것 같았고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H신문사의 이사 李모씨도 같이 소개했다.
세 사람이 우선 스타트로서 그들의 그 '기도'라는 것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李모씨는 시골에 중학교를 하나 갖고 있었는데 운영이 부실하여 S국제상사에
그 운영권을 넘기려고 '존'을 부단히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기도에 앞서 '존'은 아주 엄숙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 기도는 스위스 본부에 있는
스승의 특별 허락을 얻어 전수하는 것이며 이는 크나큰 영광이라는 것이었다.
기도방법은 이러했다. 처음 이틀간은 기도에 대한 이론적 강의를 받는다.
그 후 사흘째부터 그들이 준비한 촛불만 켜진 컴컴하고 밀폐된 방으로 들어가
기도의 실기를 터득한 후 각자가 자신이 외워야 할 주문을 받는 것이다.
그 광경은 흡사 제사격식과 같았다. 진한 박하향의 내 음과 함께 정면 벽에 그들
스승의 초상화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때 흰 손수건 한 개와 과일 몇 개를 바치는데,
그것은 스승의 지혜에 대한 감사를 뜻하는 것으로 옷과 음식과 집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당시 의식을 집전하던 서독인 부사장 '맥스'는 마치 무당이
제당에 대고 신을 부르듯 초상화를 보고 인도어로 열심히 중얼 중얼거리며
가끔 종을 딸랑딸랑 흔들며 합장을 했다.
그리고 나에겐 꿇어앉은 상태에서 눈을 감으라고 한 뒤 얼마 후 귓가에 입을 대고
아주 은밀한 소리로 소근 거렸다.
『이제부터 당신의 주문은 '쉐이링'이오. 세 번 만 소리를 내어 따라하고
그 다음부터는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나도 아주 낮은 목소리로 『쉐이링, 쉐이링, 쉐이링』하고나니 20분간 눈을 감고
15초 간격으로 그 주문을 반복하라는 것이었다.
약 20분 후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더니 눈을 뜨게 했다.
그러더니 『이제 당신은 기도 입문 식을 끝냈으며 지금껏 행한 행동은 부모나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씨앗을 밭에 뿌리고
궁금하여 자꾸 파보면 결국 그 씨앗이 죽어버리는 것과 같아 당신의 건강을 위해
꼭 비밀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들어오기 전의 비밀 준수 서약을 꼭 지킬 것을 다시 환기시켰다.
지금까지 한 것은 종교의식이나 개인숭배가 절대 아니고 스승에 대한 예의일 뿐이며
오직 과학적으로 연구된 기도 기법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李씨와 우리 회사의
L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진행되었으나 누구도 동시에 밀실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한사람이 할 때 다른 두 사람은 밀실 밖 마루바닥에서 그들의 추종자들과
이야기나 하면서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세명 모두는 밀실속에서 행한 예기치 못한 의식에 대해 개운찮은 느낌은 있었으나
눈짓으로 나오는 웃음을 참기로 했다. 생각지도 않게 남의 조상 무덤에 가서
절을 하고난 기분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어서인지 강력한 항의도 하지 않고
의구심을 그냥 덮어 두었다. 우리는 그 후 하루도 빼지 않고 열심히 아침저녁으로
그 기도를 했다. 그들이 설명한대로 기도와 암송을 하고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고
마치 한여름 낮에 근무를 하다 깜빡 졸고난 뒤의 개운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불편은 전혀 없었다.
[전 사원의 합동기도]
1981년 6월 '존'으로부터 또 다른 정중한 간청이 들어왔다.
『그동안 JD당신도 경험 했듯이 우리 기도는 큰 효과가 있소. 이제부터는 전 사원들에게도
건강과 수출증대를 위하여 기도를 실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원들이 기도를 하고나서 4시간만 작업을 해도 실적은 그전 8시간보다 더 많이 오르고
외화수입도 배가되어 빠른 시일 내에 모두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우리와 관계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 훌륭한 기도기법을 보급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우리 스승님의 희망도 그러합니다.』
'존'의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왜냐하면 나 자신 지난 3개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을 때는 차속에서나 남의 사무실에서도
눈치껏 했을 정도로 그 효과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해 6월부터 전 사원 2백 50명은
저항 없이 모두 시키는 대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개중에는 종교인으로서의 불만도
있었을 터인데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종교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사 불만이
있었더라도 설득에 나선 사장의 체면과 직장을 생각하여 마음에만 그쳤던 것 같다.
전 사원 2백 50명이 매일 오전 오후 20분씩 강당에 모여 충실한 추종자 노릇을 했다.
그것도 꼭 일과시간인 오전 9시에서 저녁 6시 사이에 해야 된다는 '존'의 부탁대로
개인시간은 침해하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새로운 직원을 채용할 때에도 회사 정책상
묵상기도를 한다는 조건으로 채용하였다. '존' 등 합작 상대국에서 파견된
10여명의 외국인들은 매우 만족해했고 사원들과의 유대 관계로 매우 좋았다.
수출도 예상보다 빨리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고 시장 전망도 좋았다.
[드디어 스위스 본사로 ]
'존'은 합작 초기부터 나에게 스위스 본부의 최고 책임자인 그들의 회장과 다른 자매국
회사를 방문하여 줄 것을 간청해왔었다. 초청장과 항공권은 언제든지 준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세가지 이유로 '존'의 제의를 미뤄왔다. 첫째, 한국 현지 책임자로서
회사에 대한 경영 경험이 너무 없고 둘째, 아직 그룹회장 등 사업 책임자들과
사업 계획에 대해 논할 만한 형편이 못되며 셋째,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내가 외국을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날 미군부대 재직 시 미군 참모들과의 경험에서 목적에 부합되는 상황이 무르익어야만
상호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자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년이 넘고 어느 정도의 경험도 쌓이고 사업전망에 대한 포부도 토로할 수 있게 되자 더 이상 본사 방문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쪽의 초청을 몇 차례 사양한 터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고 판단, 81년 10월 마침내
출국했다. 일행은 H회사의 李이사였다.
그 사람은 운영이 어려운 시골 중학교를 S국제상사측에 팔아넘기려고
자기 회사일 절반, 우리 회사일 절반 하는 식이었다. S국제상사가 사업뿐 아니라
각지에서 육영사업도 함께 벌이며 적합한 학교를 하나 매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존'으로부터 흘려들은 그는 우리 회사에 와서 몇 달간 묵상 기도를 함께 해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스위스에까지 같이 가게된 것이었다.
우리는 하루가 지나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다. 제네바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1박하고 기차로 취리히에 도착하니 약속대로 S국제상사 본부의 안내원과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승용차로 약 3시간 정도 걸려 S국제상사의 본부가 있는 S라는 곳에
도착했다. 높은 산이 겹겹이 둘러싸고 맑은 호수가 흐르는 해발 8백여M의 산중턱
막다른 곳에 고풍의 건물이 있었다. 근처의 가옥은 모두 30채 정도로 스위스의
전형적인 작은 마을이었다. 안내원이 손짓으로 본부건물을 가르쳐 주었다.
약 4백평 가량 직사각형 4층 석조 건물로 웃 부분의 돔 형식으로 된 지붕이 돋보였다.
건물 앞면은 연두색과 분홍색등으로 칠을 새로 했으나, 뒤편은 매우 낡은 모습
그대로였다. 안내원의 설명으로는 약 80년 전에 어떤 부호의 별장을 구입, 보수하여
쓰는 것이라고 했다. 건물 입구 아치 밑에 평화를 상징하는 종이 걸려 있어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갈 때마다 한번 씩 타종을 한다고 한다.
현광 정면에는 '계명세대의 세계정부'라고 씌어 있었는데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현관 입구를 들어설 때는 마치 김포공항을 통과할 때와 마찬가지였다.
경비원들은 흡사 세관원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여행 가방들은 일일이 X레이를
통과해야 했고 누구든 철저한 몸수색을 당했다.
일단 검색을 끝내고 현관을 통과하니 모든 복도에는 붉은 카핏이 깔려 있었고
벽지는 형형색색의 무늬로 된 실크였다.
접견실이란 50평 정도의 방 정면에는 인도인 특유의 복장을 한 그 스승들의 섬뜩한
초상화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발짝 들어서니까 진한 박하향이 코를 자극했고
주위는 온통 여러 가지의 화초들로 장식된 것이 마치 이색적인 사원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특이한 것은 일단 그 방에서 그 스승을 알현하는 사람은 준비된 비디오 촬영기에 의하여
모두 촬영 된다는 설명이었다.
그 접견실을 지나서 나와 李이사는 3층의 귀빈실에 여장을 풀었다. 바로 위 4층에
그들의 스승이 거주하며 우리는 대단한 귀빈으로 영접되어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귀빈실에 묵게 되었다는 생색도 그들은 잊지 않았다.
우리가 여장을 푼 귀빈실도 모두 실크와 카핏으로 장식되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높은 산과 눈과 나무들, 그리고 잔디로 덮인 언덕은 한마디로 신비스런 천국이라 할만 했다.
음식은 고기와 술, 담배를 빼고는 전 세계에서 수입된 과일과, 매우 고급의 식물성
단백질이었다. 진한 박하향의 음료수는 구토가 날정도로 참기가 힘들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그곳에 상주하는 2백여명 중 스위스인은 운전사 한 명 뿐이고
모두 다른 나라 사람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은 급료를 받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는데 어떻게 그처럼 일사불란한 명령계통과 절대적 헌신이 가능한지 매우 궁금하였다.
일단 명령된 지시는 시간과 때를 가리지 않고 싫어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자발적으로 이행되니 그 점이 이해가 안 갔다.
[첫 대면]
도착해서 다음날이면 회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깨졌다.
만나기까지 무려 10여일을 대기해야만 했다. 각종 브리핑 자료를 가지고 간 나는 김이 빠지고
점차 의혹이 생겼다. 대체 세계적 사업본부가 왜 이런 산속에 있는가?
독특한 취향을 가진 대부호의 별장이라 하더라도 석연치 않은 점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동행한 李이사는 그의 학교를 처분하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도 하고 사정도 하는 모양이었으나
실패한 것 같았고 하루하루 미뤄지기만 했다.
도대체 10여일씩 요양을 하러 온 꼴이 된 셈이었다. 외부에 함부로 출입할 수도 없고
방안에서 천국과 같은 바깥 청취를 관람만 하고 있으려니 울화가 치솟기 시작했다.
10여일이 지나자 나는 소리를 지르고 전화기를 내동댕이치면서 귀국하겠다고 날뛰었다.
비서가 달려오더니 바로 다음 날 면담이 있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세계적인 인사들이 면담과 방문으로 일정이 늦춰졌다는 것이었으나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S그룹의 회장, 면담은 그렇게 지리 한 대기 끝에 이루어졌다.
석연치는 않았으나 일단 S그룹의 회장으로 간주하고 내가 해야 할 일과 예의는 갖추었다.
출국 전에 간부들과 함께 한 달씩이나 걸려 만든 SCI-KOREA (주) 의 사업실적과 사원들의 복지 정책 등 사업계획에 대한 브리핑 자료를 모두 꺼내 들었다.
그런데 막상 회장은 사업문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그 비디오 테이프를 보관하고 있지만, 당시의 대화에서는 사업과는 전혀 관계없는, 한국에서의 묵상기도보급 문제만이 거론되었다.
그 외는 일체 말하지 말라는 사전 주의를 받기도 했다.
회장은 한국 국민의 1%인 6백명만 단합된 기도를 하면 한국의 정치적 안정은 물론이고
세계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엉뚱한 강의로 시종했다.
또한 면담은 비디오로 촬영되어 세계 각국에 보내진다고 했다.
결국 그들은 한국에도 그들의 사업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음을 선전하기 위하여
나를 초청한 것이었다. 회장은 느릿느릿 자기 말만 했고 우리는 듣고만 있었다.
통역은 거듭해서 대한민국의 가장 저명한 기업인과 저명한 교육인 (H사의 李이사)이
본부를 방문하여 기도를 찬양한 것처럼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우스꽝스럽게도 그들의 묵상기도 선전용 비디오의 증인으로 출연한 셈이었다.
그제야 합작 당시 '존'이 근거도 없이 왜 6백명의 직원을 채용하려 하였는지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 날부터 본부의 참모들은 나에게 그 스승이 새로 개발했다는 기도 다음단계의 기법을
스승과 같이 할 것을 적극 권유하기 시작했다. 스승은 원체 영향력이 크므로 당신 같은 경우 10일 정도면 'S'의 순수한 논리와 체험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묵상기도를 전수받을 때 같이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고, 점점 희미하게나마
이들의 목적과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단호히 사업목적으로 온 만큼
그 이외의 일은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들은 집요했으나 강압적이지는 않았다.
[회사라기보다는 기도센터였다]
기분전환 겸 여행을 하라기에 그것은 승낙을 했다. 초호화 여행이었다.
헬리콥터와 전용 세스나기를 동원해 주었고 호텔 예약도 그들이 다 도맡아 주었다.
유럽여행이 끝나자 그들은 회장대신 국제담당 이사라는 서독인 G박사를 내세워
다시금 우리를 그 교육에 참석시키려고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때 서독에서
변호 사업을 하다가 묵상기도에 매료되어 미화 1백만 달러를 헌금하고 본부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그는 대단히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에서 우리 'S'가 85%의 주식을 가지고 있고 당신은 그것을 대표하고 있을 뿐인데
본부의 정책 'S'를 반대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오? 당신은 우리 정책에 거역할
아무 권한도 없는 형식적 대표일 뿐이오.』나는 G에게 단호히 말했다.
『첫째, 나는 'S'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며 합작계약에도 그런 조건은 없다.
둘째, 당신들의 투자 목적은 영리사업이므로 그 목적을 위배하지 않는 한 나의 잘못은 없고
싫으면 투자 금을 회수해 가면 그만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약 3시간 동안의 험악한 분위기와 대화에도 결론은 없었다. 밤 12시가 넘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나는 잠자리에 들려는 H사의 李이사를 설득하여 함께 'S'본부를 떠나 근처 로잔에 있는 호텔로 방을 옮기기로 했다. 李이사는 아직 학교양도 건에 미련이 있기 때문에 머뭇거리기만 했다.
비서들이 달라와 만류했다. 나는 또 다시 쏘아 붙였다.
『이제부터는 내발로 태평양을 건너가더라도 당신들 같이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들과 사업을 같이 할 수 없다』라고 한 후 떠나 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침 7시도되기 전에 '존'이 우리를 찾아 왔다.
전날에 있었던 자기들의 무례를 용서하기 바란다며,
『회장님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헬리콥터를 보냈으니 바람도 쐴겸
근처 산장에서 식사를 하고 같이 만나러 갑시다』
산장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李이사는 연상 감탄한다.
『김사장 보통 아닌데, 그러다가 이 외딴 산골짝에서 이놈들한테 무슨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해 ?
너무 고집 부리지 말고 저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하고 한국에 간 다음에 큰소리를 치면 될 것 아니오.』
그러나 나는 그런 불길한 느낌이나 걱정 때문에 정당한 주장을 굽히지는 않았다.
우리는 얼마 후 헬리콥터를 타고 회장이 묵고 있다는 로잔별장으로 갔다.
높은 산과 설경이 매우 아름다 왔다. 어제저녁만 해도 한 결 같이 내가 무슨 죄인이라도 되듯 공박하던 참모들은 물론 회장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그러나 막연히 안부와 앞으로의 여행계획을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칙사 대접을 받으며 유럽 여행을 계속했다.
회장의 배려로 미국, 캐나다 등도 돌아본 후 그 해 12월 초순에야 귀국했다.
회장은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들의 자매회사를 꼭 방문해 달라는 부탁도 있지 않았다.
몇 군데를 방문하였으나 회사라기보다는 기도센터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았다.
경우에 따라 서독 같은 곳에는 몇 백평 정도의 공장과 자체 인쇄소도 있었으나 모두 무보수였다. 작은 곳은 몇 십 명이 기도를 할 수 있는 기도실과 두어 개의 사무실 정도였다.
흡사 우리나라에 아직도 존재하는 소규모 사이 비종교 집회소와 같은 것이다.
진한 향내 음과 초대 스승으로 모시는 M의 사진이 방마다 붙어 있었고 또한
기도의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는 논문과 책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대강 그런 것이 'S'가 자랑하는 지부인 셈이었다.
[본격 교육]
우여곡절과 위험스런 모험도 있었지만 세계여행의 보람은 매우 컸다.
입국하여 회사에 돌아오니 출국 중 밀렸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 중에 있었던 사건과 여행담은 다음 한가한 시간으로 미루기로 사원들의 양해를 구했다
연말 안에 선적해야 할 문제와 외국여행 중 의외로 발생한 신규 수출상담 등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도 구정연휴로 하기로 하고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어쩌면 그 당시 영세적이었던 나전칠기와 목공예분야를 택하여
선진 외국 기술과 경쟁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다행히 이제는 조업풍토와 설비개선은 물론 진공 나무건조기까지 구입하였으니
실현 가능한 모험과 도전이었던 셈이다. 사원들도 지난날 개인 영세업장에서
무릎을 맞대고 일할 때와 같이 일당제나 불규칙한 고임금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안정할 수 있는 회사원이란 자부심과 장기 근속자에 대한
사원 공동주택 마련 설계 등에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1982년 2월 총무과장이 급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다고 들어왔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 김포공항에서 어떤 60대 외국인이 사장님을 찾는데
통관검문에 불응하여 통관시킬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동안 여러 나라로부터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왔으므로
그런 경우를 예상하여 차를 몰고 김포공항으로 갔다. 통관구역 안을 두루 살펴보니
매우 초췌한 외국 노인이 가방 하나를 끼고 세관원과 다투고 있었다.
세관원도 얼마간 시비를 하다 별 이상을 못 찾았는지 통관 시켜 주었다.
외국인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네덜란드 대학의 K교수인데 S국제상사 특명을 받고
'S'교육차 한국에 왔다는 것이었다. 그 문제의 가방 안에는 스승의 성스러운 지식이 들어있어 함부로 열 수 없으므로 통관에 불응했다는 것이었다.
회사에 돌아와 부사장인 서독인 '맥스'및 외국인들에게 그를 소개햇으나
이미 서로 잘 알고 있었다. 매우 반가운 듯 서로 껴안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그런데 K씨는 그 문제의 가방을 식사할 때나 화장실에는 물론 취침시에도 손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내가 직원들을 시켜 좀 들어다 주게 하면 더욱 질색을 하고 신주 모시듯 끼고 다니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전 사원을 모아 놓고 강의를 시작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동안 합작 상대국의 선량한 직원들로만 알았던 10여명의 외국인들이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창설 1년이 넘도록 부사장이던 '맥스'와 그의 처 R은 50대 후반의 나이에 걸맞게 사원들에게는 따뜻한 부모대접을 받을 만큼 자상했었고
캐나다에서 기술자문으로 파견된 H부부와 총각인I도 한결같이 온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주어진 일만을 하며 아주 우호적이고 겸손했었는데 갑자기 무슨
특명을 받은 사람들처럼 표변해서 전 사원을 일일이 호명해 가며 교육 참석 여부를 체크하고 불성실한 직원을 꾸짖었으며 작업 여부에 상관없이 교육장으로 사람들을 내몰고 끌어가는 것이었다.
[일이 아닌 기도가 업무]
합작계약서나 회사체계는 아랑 곳 없이 S라는 기법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간은 장장 8주간, 매일 오전 오후 2시간씩 모두 5시간이상은 작업을 포기한 상태에서
계속되었다. 40~50cm두께의 질 좋은 스폰지 쿠션을 온 강당에 깔아 2백 50명이 동시에
뛰고 뒹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스승의 음성은 직접 공개할 수 없다며
이어폰 2백 30개를 가설하여 전원이 비디오를 통하여 스승의 가르침과 음성을 듣게 했다.
그리고 누구도 이탈할 수 없도록 서로 감시할 수 있는 점조직 책임자를 만들었고
해당자가 아프면 업고라도 나오게 했다. 약 1주가 지나자 사원들로부터 차츰 반발이 일기 시작했다 .
그러자 부사장 '맥스'G등은 반대하는 사원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은 첫째, 한국에 있는 SCI-KOREA(주) 사원 2백 50명은 선택된 사람들이며
그것은 스승의 특별은총이라는 것이었다. 둘째, 'S'기법은 스승이 특별히 창안한 비법으로
8주 후면 여러분이 마음먹은 대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며 하늘도 훨훨 날 수 있는
기적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셋째, 본 기법훈련은 급료를 주는 일과 시간 내에 하므로
반대할 수 없고 만약 거부하면 감봉이나 해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명상전수 비슷한 의식을 하였다.
그러나 2주후부터는 친근감, 동정, 달, 코끼리, 우정 등 51가지의 주문과 수십 가지의
심한 요가동작을 취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두 편안히 눕게 한 후 인도어로 경전 같은 것을
낭독하는데 그 소리가 아주 싫지 않게 낭랑하게 들리거나 깜박 잠이 들 때도 있었다.
약 3주 동안 그들의 행동은 마치 사이비종교나 어떤 사상의 세뇌교육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목공예와 나전칠기를 제작하여 수출한다는 처음의 목적은 사라지고 이젠 'S'의 교육장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나를 회유하고 포섭하여 나를 중간대역으로 삼으려 했으나
스위스에까지 갔다 와서도 전혀 그들의 의도대로 따를 것 같지가 않자 본부에서
강사를 파견, 자기들이 직접 2백 50명 사원을 세뇌시키려는 것이었다.
사원들을 일단 강당에 몰아넣으면 밖에서 문을 잠그거나 보초를 세워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그들은 명상은 사장인 나와는 관계가 없으니 관여하지 말라는 협박까지 했다.
나는 사장이었으되 텅 빈 공장에 혼자 남은 사장이었고 사원들은 전부 교육장에 끌려 들어가 이상한 주문을 외며 잠들어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사원들이 반발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을 하든, 기도교육을 받든 월급은 그대로 준다는 것 때문이었다.
교육은 우선 육체적 노동이 아니므로 잠깐 잠깐 잘 수도 있고 편해서 좋지 않느냐고 하는 사원도 여럿 있었다.
옳은 말이다. 월급 받고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라면 누가 싫어하겠는가.
그들은 교육을 실시하면서 또 사원모집에 나섰다. 가족 모두가 들어오는 것도 환영이었다.
기숙사에 그들을 수용하며 같이 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상당수의 가족과 친지들이 더 입사했다. 그들의 업무는 근로가 아니라 기도였다.
『대체 어떻게 할 셈입니까?』 항의했으나 교육은 곧 끝난다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10명의 간부 중 8명이 그런 식이었고 나 외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한 이사였던
내 친구 L도 처음과는 달리 은근히 그들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대로 두라는 것이었다.
[교육 중단]
그러나 그들의 속셈은 곧 드러났다. 부사장이 전이사들 앞에서 이제부터
자기는 월급을 받지 않고 무보수로 헌신하겠노라고 선언하자 다른 이사들도 모두 합세했고
묵묵히 있는 나는 흡사 사명감도 없는 사람 꼴이 되었다.
한국인 간부 몇 사람도 분위기에 눌려 10%, 혹은 20%씩 감봉하겠노라고 자원했다.
아하, 이것이로구나.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것이 확산되어 전 사원이 무보수로 일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유럽의 그 공장 직원들이 자랑스럽게 무보수로 일하고 있노라고 말하던 것들이 떠올랐다.
이제 사원들이 교육에 좀 더 심취되면 하나같이 무보수를 자청할 것이며
가족들 전부가 들어오라는 권유는 재산헌납과 무엇이 다른가.
이와 비슷한 종교단체는 국내에도 있다. 그러나 이건 외국 사람들이다. 심각한 문제였다.
무보수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되나.
거리로 나가서 구걸을 해오라고 해도 해올 것이 아닌가. 그동안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기도라는 명목으로 자기들의 의식을 주입해 왔고, 이제 정식교육을 실시하여
단번에 2백 50명 사원을 자기들의 추종세력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합작회사는 형식적인 근거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종교를 포교하고
추종자를 만들어 사회각계에 침투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李이사의 소유인
시골의 S중고는 S국제상사와 자매결연했다. 李이사는 학교를 그들이 사줄 것으로 기대하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곧 학교의 어린 학생들에게도 'S'교육이 실시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랴.
'S'는 신체적으로 또는 스트레스 등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 또는 의지가 약한 사람,
돈은 많은데 나이가 많아 정상적인 성관계나 활동에서 만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을 노려서
습관적인 자기최면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자발적으로 추종자가 되거나
헌금자가 되어 그들의 추종세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S'를 그만두는 것은
심한 두통이나 불안, 초조 때문에 의지가 굳세지 않는 한 어렵게 되어 있다.
나는 나중에 생길지도 모르는 법적인 문제를 감안하여 전 사원들로부터 설문식으로
당시의 모든 기록을 남겨 놓았다. 물론 G교수가 신주같이 모시던 문제의 가방속의 그 스승,
아니 교주의 비밀문서라는 서류도 복사해 두었다. 3월 12일 오후 5시 강당에는
대표인사인 나와 외국인 8명, 그리고 사원 2백 50명이 모두 모였다.
전격적인 모임이라 외국인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살피기에 바빴다.
나는 발표를 했다.
『지금껏 명상 교육을 해온 것은 사장인 나의 잘못이다. 그 동안 외국인들이 주관했던
기도와 'S'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외국인 종교집단을 위한 사기극이다.
우리 회사에서는 위와 같은 사기행위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였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사원들은 그제야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사장과 외국인들이 짜고 사원들을 부정포교에 이용한다고 의심해 왔던 일부사원들이 오해를 풀었다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교육을 시작한지 24일만이었다.
남녀 사원들은 서로 손뼉을 치거나 앞사람의 등을 밀어가며 강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부사장 '맥스'등은 어이가 없는지 앉은 채로 멍하니 사원들이 떠들며 나가는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 역시 사무실로 돌아와 회전의자에 몸을 던지듯 털썩 앉으니
가슴속이 후련해 옴을 느꼈다.
『나쁜 놈들, 이 모든 것이 다 끝났겠지.』
그 순간 지난 3주간에 마치 무슨 괴기영화라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났다. '맥스'와 R이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공손히 들어왔다.
그를 쳐다보는 순간, '맥스'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정중한 부탁이 있다며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JD,당신이 아까 강당에서 우리 스승을 욕되게 하며 'S'를 중지시킨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세계정부'에 대한 도전이므로 그 결정을 취소하기 바랍니다.
아니면 우리는 사업실패로 아프리카 농장으로 유배당하게 됩니다.』
나는 '맥스'에게 분명히 설명해주었다.
『맥스. 그동안 개인적으로 당신을 좋아했고 사원들에게 부모같이 따뜻이 잘 해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오. 그러나 당신들이 주장하는 그 기도교육은 합작목적에 위배되며,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신들의 정당치 못한 목적을 위하여 나와 사원들을 그동안 속여 왔다는 점이오.
이제부터는 사업외의 일체의 변칙행위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단호히 말했다. '맥스'도 나의 분명한 태도를 알았는지 그날 저녁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하고 서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사흘 후 회사에 출근하니까 왼 낯선 외국인과 함께 '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Z라는 서독인이 인사와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자기는 S국제상사 회장의 특별비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 대하여 많이 들어 알고 있으며 한국회사를 성공적으로 만든 훌륭한 사람이라는 칭찬과 예의도 잊지 않았다.
특히 Z는 한국의 기도교육 문제 때문에 긴급 파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기가 죽었던 '맥스'도 다시 기세가 등등했다. 그래서 며칠 동안 협상을 했으나
회사에서의 묵상기도교육재개는 어렵다는 결론이 나오자 장소를 그들이 묵고 있는
C호텔로 옮기자는 제안을 해왔다. 즉 그들이 82년 4월 6일 나를 불법적으로 회사에서 쫓아낼 때까지 낮에는 회사가 있는 부평과 저녁에는 C호텔을 오가며 끈질긴 협상을 벌였다.
협상에는 합작 당시의 주역인 '존'이 주로 나섰다. '존'은 그간의 우정관계를 생각하며
기도교육을 재개해 달라고 간곡하게 설득해 왔다.
[회유...협박...]
'존'의 말에 의하면 이미 나를 믿고 1백 50만 달러나 S의 돈을 투자했는데
이제 와서 자기를 배신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사업실패에 대한 조직으로부터의 비판은 물론 여지껏 쌓은 자신의 지위가 무너진다며
손가락으로 자기의 목을 자르는 시늉까지 해가며 사정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자기들의 목적은 사업이 아니고 묵상기도로 지식을 보급하는 것이며
단체의 명칭은 '계명세대의세계정부'라고 밝혔다.
그러니 감히 '세계정부'에 도전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기들의 조직이 전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위협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 리고, 『결코 우리들의 기도가 사이비종교이거나 나쁜 것은 아니니 제발 믿어 달라』
고 휘유하기도 했다.
『존, 그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면 왜 합작당시에 그런 사실을 숨겼으며
지금 와서는 기도도 아닌 'S'라는 것을 갑자기 강요하는 이유가 뭔가?』
『실은 처음부터 그것을 실시하면 거부감이 일거나 사이비종교로 오인될 것 같아
조용히 보급하기 위하여 말하지 않은 것뿐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그래왔다...
만약 당신이 끝까지 우리를 반대하면 우리 3백만 형제들이 동시에 묵상기도를 하겠다.
그러면 당신의 신체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그것은 분명히 협박이었다. '존'은 계속 말했다.
『지금 한미 간의 박동선 사건도 당신이 M의 뜻을 거역한 노여움 때문에 발생한 것이오.』
그리고는 더 한층 어이없는 소리를 해댔다.
『만약 당신이 기도를 중단하면 한국에는 스트레스와 긴장이 높아져 금년가을쯤
북괴가 남침을 할지도 모르오. 이 모든 사실은 세계적으로 연구 및 입증되고 있는 것이며
여기 이 책들이 그 증거요.』 그는 여러 가지 도표가 그려진 책들을 열심히 펼쳐 들었다.
그중에는 그 스승이 창안했다는 통일장과 세계평화론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이야기를 믿기에는 이미 그들의 행동이 너무 앞뒤가 맞지 않고, 괴변이 많았다.
『존, 정말 당신 스승이 전지전능하고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다면
왜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것이오? 당신의기도가 과학적이라면서 의식을 하는 이유는 또 뭐요?
만약 당신네의 의식이 순수하게 스승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면
비행기를 탈 때도 비행기와 조종사에 대한 고마움으로 합장이라도 해야 되지 않는가?
내가 볼 때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
'존'은 매우 난감한 듯 턱에 손을 괴면서 소파 옆으로 몸을 비스듬히 젖혔다.
며칠 수 무역담당 이과장이 텔렉스 한 장을 가져왔다.
스위스로부터 이상한 내용의 텔렉스가 왔는데 외국인들이 사장님에게는 말하지 말라 길래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수출사업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친애하는 국가적 지도자에게,(당시 김정도를 지칭한 것) 1982년 4월 4일 스위스 'S'에서는 계명세대의 국제수도 10주년 행사에 즈음하여 각국의 업적을 검토, 편찬코자하니 다음 사항을 속달등기로 보낼 것. 귀국의 정부,교육,군대,법률,사법,과학,경제계등의 우리 묵상기도 참여자 숫자,참여도,업적,기도센터,계명세대의 징후 등을 자세히 분석 보고할 것. J(그들의 스승의 이름으로 서신 맺음말이나 상호 인사 시 합장하면서 사용한다)』
두번째 텔렉스는
『제3의식을 금주 말에 진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4월 10일~25일간의 '나르는 주간'에 늦게 된다. 만약 '에바하트'가 가능하지 않으면 '낭키쇼'에게 부탁하라.J』
그것은 그들의 계획을 실천키 위한 본격적인 스케줄이었다.
첫번째 텔렉스의 내용으로 그들의 본격적인 의도, 합작 동기와 목적을 확실히 알 수있었다.
뒤따라온 텔렉스 내용도 사원들을 훈련시켜 그들의 계획인 '세계정부'를 실현시키기 위한
추종자를 만들기 위한 세부지시였다. 특히 왜 지난 2월 20일부터 갑자기 K를 보내 'S'를 강요했는지
그 내막이 확실히 드러난 셈이었다.
[파격적인 조건 제시]
'존'등 외국인은 그 텔렉스를 보자마자 안달이 나서 사원들에게 교육을 재개하려 했으며
사원들도 이젠 냉담해졌다. 그 때는 이미 그들의 정체나 목적이 사원들에게는 대부분 알려진 뒤였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끈질기게 교육재개를 간청했으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4월 초순에 '존'과 Z가 나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매우 명랑하게 인사를 하면서,
『JD,오늘 매우 좋은 제안이 있으니 검토하여 주기 바랍니다.』
나는 그들이 이제 그 교육이란 것을 포기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 제안은 엉뚱했다.
첫째, 내가 교육을 반대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들과 공동대표제로 하되
사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고, 둘째, 나의 대표이사 봉급 1백 20만원과 차량 (로얄살롱) 및
여비서 1명에 대한 지원은 근무와 상관없이 5년간 계산하여 지급하고,
셋째, 합작회사 때문에 폐업한 나의 개인사업인 JDPR의 사업자금 등 모두 4억원을
지원해 줄테니 사원들 교육을 재개시켜 주고 경제기획원등에 교육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내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최소한 4억 이상의 현찰과 승용차를 제공해 준다는
말하자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일순간 짧은 동요가 있었다.
일찌기 받아본 적이 없는 제안이었고, 또 앞으로도 내 일생을 털어서도 얻을 수 없는
조건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착잡해진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내가 승낙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서류를 작성하자고 덤볐다. 나는 결국 머리를 저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사원들을 팔아먹을 수는 없소. 더 우기 당신네 교육의 정체가 당신의 스승을 신봉하는 사이비종교인 것이 드러난 이상 협상이란 있을 수 없소.
단, 당신네가 사업을 택하든지 당신네 종교를 택하든지 선택할 권리는 당신들에게 있소.』
그때까지 옆에서 감정을 절제한 듯 앉아있던 Z가 벌떡 일어나며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JD, 당신은 이 회사의 왕이 아니야. 회사문제를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다.
그 동안 우리가 변호사에세 알아보았는데 필요이상으로 당신 의도에 말려 있다고 하더라.
이것이 최후통첩이니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권리 보호를 위하여 당신을 해임치 않을 수 없다. 만약 의심이 나면 K변호사에게 물어보라.』
한참 소리를 지르던 그는 마지막으로 회유를 하듯 다시 돈 이야기를 꺼냈다.
『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당신의 신상을 위하여 이제 고집은 그만 부리시오. 당신은 해도 너무한다.』
그들은 나가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그들이 정말 나를 해임할 수 있을 것인지 착잡했다.
그들도 이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이다.
[외로운 싸움]
노크소리가 나더니 나를 잘 이해해주고 같이 울분을 털어 놓았던 C부장과 S부장,
그리고 몇 사람이 들어왔다. 『앉으시오. 우리 같이 대책을 논의 합시다.』
그런데 천만 뜻밖이었다.
나를 이해해 주고 있는 사람인 줄만 알았던 C부장, 그는 앉자마자,
『사장님의 의도는 잘 압니다. 그러나 너무 고집을 부리지 마시고 저 사람들의 협상조건을 받은 후 그 다음 교육을 안 받거나 저놈들의 뒷통수를 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회사나 사원들을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다른 간부들의 의견도 거의 같았다 .
그 중에는 『우리는 그 s기법의 기술을 끝까지 배워 따로 교육센터를 차리면
기술직이나 사업적으로도 우리가 운영할 수 있지 않읍니까』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나 한사람 때문에 회사가 곤란해지고 있으면 잘못하다가는 위험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심중에는 은연중 내가 회사를 그만 두고 나가 주었으면 하는 뜻도 있었다.
『여러분, 오해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동안 파악된 외국인들의 실상과 입수된 텔렉스 등을 설명해주었다.
『첫째, 부정한 것을 알고 실리를 차린 후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옳은 방법이 될 수 없고, 둘째, 문제는 사이비종교의 교육인데
그것을 인정한 후 다시 그것을 나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방법이고,
셋째, 다국적으로 침투한 저들에게 부정포교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지금 떳떳한 활동과 조직이 비대해졌을 때 결국 그 피해를 우리 자산과 사회가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므로 비리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막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거 봐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서 왜 저들이 우리나라에 추종세력을 심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기도에 빠지면 그날부터 여러분은 판단력이 없어집니다.
월급도 없는 무보수 봉사를 영광으로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재산까지도
모두 헌납하는 맹신자가 되어 여기저기서 돈과 사람을 끌어다가 전부 저들에게 헌납하는
결과가 된다 그 말입니다. 저들은 6백명을 기간단위로 해서 우선 그 숫자의 추종자를
심어 놓으려고 초기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그거예요. 6백명만 되면 그 다음에는 곧장
6천,6만 눈덩이처럼 커져서 저들이 시키는 대로 눈 감고 앉아 주문을 외우고 재산
바치고 돈 벌어다주고 그럴 거 아닙니까. 지금 막지 못하면 우리나라 정말 큰일 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런 것은 차후에 얼마든지
막을 수 있으며 우선 손해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젠 그 외국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직원들도 저렇게 되었단 말인가. 한탄스러워졌다.
며칠 후 긴급면담 제의가 들어왔다. 뜻밖에도 면담내용은 대표이사 변경의 건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회유도 별 효과가 없자 통고대로 나를 사장직에서 쫓아내기로 한 것이었다.
[마지막 협상]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그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각오를 다지며 그들이 만나자는 장소로 갔다. D호텔에 있는 K변호사 사무실이었다.
우리 측에서는 나와 직원 2명, 상대측은 K변호사와 공인회계사 등 모두 6명이 참석했다.
내가 K변호사와 공인회계사에게 대표이사 경질에 관한 근거를 물었다.
K변호사는 내 처지를 동정해주듯 말했다. 이미 그는 저쪽 편이었다.
대체 이 사람은 저들의 의도와 그 결과를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김정도씨 고집부리지 말고 외국 사람들과 협상하시지요. 외국 사람들이
손해배상을 할 용의가 있다고 하니 서로 합의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대표이사직은 외국인들이 대주주이므로 김정도씨의 잘못이 없어도
해임이 가능하고 더욱이 내국인 주주 L씨가 외국인들 편이니
대표이사 경질은 얼마든지 가능하오.』 공인회계사 O씨도 한마디 했다.
『우리는 외국인 고객 보호를 위하여 SCI-KOREA(주) 경영진이 교체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너무도 태연했다. 나는 K변호사에게 질문이 아닌 충고를 했다.
『변호사님 사업도 좋지만 지금 외국인들은 합작을 빙자하여 우리 사원들에게
부정포교를 강요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저들의 행동으로 보아 길어야 3년 짧으면
6개월안에 국제적인 사이비종교 조직으로 들통이 날건데 변호사님께서는 그 때
사회와 자식들에게 뭐라고 변명하시겠습니까?』 K변호사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김정도씨 나는 김정도씨에게 충고를 받을 나이가 아니니 염려하지 말고 이제 그만 가보시오.』
그 날 저녁 나는 H사 李이사와의 약속대로 C호텔에 있는 ‘존’ 방에서 Z와 함께
마지막 협상에 들어갔다. 李이사는 『대강 알고 있으시겠지만』하며 그간에 자기가
이 사람들과 접촉한 경위를 은밀히 털어 놓았다.
李이사가 지난 6개월간 협상에 적극 개입한 것은 李이사의 개인 학교재단을
그들에게 넘겨보자는 속셈이 있어서였다. 흥정은 2백 30만달러에 되었으나
2백만달러는 스위스은행 자기의 비밀구좌에 넣어 달라는 조거이었다.
물론 나머지 30만달러와 서산에 있는 대지 중 선친 묘를 제외하고 나머지
7천 11평을 커미션으로 나에게 등기 이전해주겠다고 하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는 생각이었고 이미 그는 충남 모처에 자신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S중고등학교와 미국의 저들 대학과 자매결연까지 맺은 바 있었다.
그러나 자매결연 후 외국인들이 나타나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이상한 주문과 기도교육을 실시하려들자 학부형과 학생들의 반발이 일어나고
문교부의 감사가 실시되어 그들은 모두 계획을 중단하고 말았다.
자매결연도 취소된 것은 물론이다.
[실속이나 차리라구]
李이사는 결국 학교를 팔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다가 고인이 되고 말았지만
그날 C호텔 모임을 앞두고 나에게 인간적인 충고를 해왔다.
『김사장 내가 솔직히 말해 볼까? 세상에 김사장같이 미련한 사람은 처음 보았어.
내 동생 같아 안타까워서 하는 말인데 이런 기회란 김사장 평생에 두 번 다시없는 기회야.
김사장이 마음먹기 따라서는 한평생을 편하게 잘살 수 있는데 웬놈의 고집이 그리 쎄노.
우선 몇 억을 챙기고 나서 생각 해 보라구. 그러면 김사장 마음도 달라질 거야.
김사장의 강직한 성격이나 정의감을 모르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요즈음 세상에
누가 그걸 알아 주냐 그러야. 그래 4천만 인구 중에 몇천명이 저들에게 헤까닥 했다고
한들 그것이 김사장에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이놈들은 우리가 아니어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침투를 하고 말텐데. 김사장이 무슨 재주로 막어? 솔직히 말해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4억원을 줄테니 무조건 백지에 도장 찍으라면 안 찍을 놈이
있을 것 같어? 좀 세상 물정을 알고나 고집을 부리라구. 나중에 김사장이 깡통 차고
길바닥에 돌아다니면 누가 아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아? 지금이니까 여러 사람들이
김사장에게 충고라도 하지만 나중에는 다 쓸데없는 소리라구. 내가 하도 답답해서
말해주는데 김사장은 이놈들 싸움에서 지게 돼있어. 이놈들이 김사장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실속이나 차리라구. 김사장이야 좋아서
한다지만 아니 왜 나중에 가족까지 고생시킬 필요는 없지 않아? 못이기는 척 하구
주는 돈이나 받아두라구. 이건 정말 김사장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구.
내가 한 가지만 더 말해줄까?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정치적 문제이기도 해.
국무총리가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김사장 같이 강직했고 한 명은 적당히 차관도
들여오고 와이로도 먹었으나 결국 국가적으로 볼 때 경제 플러스가 되었다 이거야.
그래 그 강직한 국무총리가 한 일이 무엇이야? 가난뿐이란 말야. 그런데 김사장이
혼자 고집을 부린다고 세상이 맑아지느냐 이거야.』
심지어는 나의 허벅지까지 꼬집으면서 꿈에서 깨라고 하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존’과 Z는 무슨 뜻인지는 잘 몰라도 협상이 될 것 같은 기분인지 가끔 서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한참 李이사와 실랑이를 하고나니 새벽 4시가 되었다.
나는 李이사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하니 李이사는 『그래 그게 뭐요?』라며
반색을 하고 물었다. 나는 李이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사장님 여지껏 하신 말씀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내가 후회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어려운 일에 핑계를 대고 사리사욕을
먼저 차리기 때문에 사회비리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번 이 사람들의
교육문제는 유비무환과 사회정의 차원에서 그 본보기로 만들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입니다.
외세에 대한 주인의식이 너무 결여된 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사장님이 한 가지만 약속하여 주시면 나의 모든 고집을 포기하고 협상을 받아들이겠습니다.』
李이사는 『그래 그것이 무엇이오. 이야기를 해야 내가 약속을 할 수 있지 않소...』
하여 재촉했다.
『지금 이사장님의 아드님이 K대 2학년이죠? 그 아드님에게 이 교육을 시키시고
그 사실이 확인되면 나의 모든 고집을 포기하겠습니다. 물론 이사장님의 학교문제도
일관적으로 해결할 것입니다.』 李이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저었다.
『에이, 김사장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아들에게 ‘S'를 시키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마시오. 요즈음 나도 그것을 그만 두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오.,』
그는 질색을 했다.
『그것 보시오. 자기 자식에게는 시키기 싫고 남의 자식에게는 괜찮다는 이유 때문에
모두 남의 일 같이 이 사건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쫓겨난 사장님]
나를 도저히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정식으로 해임통고를 했다. 합법적이었다.
믿고 항상 상의했던 내 친구이며 내가 끌어다 이 자리에 앉혀준 L까지도 저쪽에 가담하여
내 해임에 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장에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인 ‘맥스’가 선임되고
부사장에는 내 친구 L이 임명되었다. 외국인들은 L이 이사회에 참석하여 혹시
나의 유임에 가표를 던질까 우려하여 이사회에 참석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사회 직전 회사의 선심으로 1주일간 홍콩여행을 마치고 잠시 얼굴을 비친 후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그를 찾아 다녔다. 밤이 되어서 그를 발견한 곳은 그의 형이
경영하는 어느 치과에서였다. 그는 늦은 저녁 환자도 없는 텅 빈 병원의 소파에 기댄 채
침을 흘리며 코를 골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앞에 우뚝 섰다.
한참 코를 골던 L도 느낌이 이상한지 잠에서 깨어나더니 나를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김형이 여기 웬일이오?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나는 그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면서,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소?』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그의 두 손을 잡았다.
『L형 우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좀 합시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왜 나를 배반했소?』 L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 개인에 대한 배반은 좋아요. 그러나 우리를 믿고 입사한 저 직원들은 이제
어떻게 됩니까? 쫓겨나지 않으려고 저들이 시키는 대로 그 괴상한 교육을 받을 것 아니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L은 반박했다..
『별거 아니 예요. 그 사람들 미친 사람들도 아니고 건강효과도 있는 것 아니오』
어이없는 입씨름이 오고 갔다. 결국 그의 주장 밑바닥에는 돈이 있었다.
즉, 내가 L의 개인부채를 해결해 주기로 한 약속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존’을 돕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자기도 따로 생각이 있으니
더 이상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를 만나 실상을 알리고 설득하여
용서하고 함께 싸우리라 했던 생각은 다 깨지고 말았다. L은 사업이 도산하고
이민사기를 당하여 생계마저 어려웠었다.
그래서 친구로서 그의 부채를 해결해 주기로 하고 이 회사로 데려온 것이었는데
그 부채의 절반이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었던 점에 그는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외국인들이 그 부채 해결을 조건으로 그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인 것일까.
어쨌든 나는 단 한 사람이나마 나의 지지자가 있었다고 생각한 이사회에서 완전히
외돌토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아직 이사였다. 사장직은 쫓겨났을망정 말이다.
대표이사에서 제거된 이틀 후 ‘존’으로부터 또 다시 협상 연락이 왔다.
내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존’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고 매우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삭발을 하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부탁]
‘존’이 마지막 부탁이라며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첫째, 회사는 공동대표제로 둘째, 나의 대표이사 봉금 1백 20만원과 차량은 계속 지원
셋째, 개인사업 자금 등 4억원을 지원하나 회사 참여는 자율적이고 단, 그들의 교육을
반대하지 않는 조건 넷째, 정계 / 학원/ 경제계 등을 대상으로 그들의 묵상기도 실적과
동조자 확장여하에 따라 자금은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으니 자기들의 사업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의 회의와 똑같이 협상은 결렬되었다.
C부장 등 간부직원들은 실리를 먼저 취하고 나중에 저들의 뒤통수를 치자는 똑같은 이야기였고 ‘존’과 Z는 만약 내가 이번 협상마저 거부하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하리라고 달랬다.
나는 ‘존’에게 말했다.
『당신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희들의 정당치 못한 조직을 위하여
사원과 조국을 팔수는 없다. 그리고 당신들의 스승에게 전하라. 지금은 너희들의 조작에
당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너희들의 자칭 ‘세계정부’의 실상을 다 폭로할 것이며
그 때는 너희가 더 후회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의 교육을 포기하고 합작사업만을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철수하라. 회사를 놔두고 철수하면 그 이익금은 약속대로 송금해 줄 것이다.』
‘존’은 듣는 둥 마는 둥 자신만만한 듯 미소를 띄고 있었다.
협상이 결렬된 후 나는 사원들에게 약속했다.
『우리나라에 법이 있는 한 몇 년이 걸려도 대표이사직을 다시 찾아
여러분과 함께 일할 것이니 저들의 이상한 교육에 넘어가지 마시오.』
그러나 아무도 미래의 승리나 약속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안됐다는 표정과 함께 믿을 수 없는 표정, 약간은 의혹에 찬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이었다. 두고 보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회여론에 호소하리라.
그러면 이 부당한 횡포와 음모는 곧 분쇄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부질없는 오산이었다. 5천만원의 주주이자 이사인 나는
주주총회 통보도 없이 법인등기부 상에서 말소되었다. 사장이 된 지 1년 8개월 만이었다.
마지막 협상에서 실패한 S는 아예 밀어붙이기 작전으로 나온 것이다.
‘존’은 나만 없으면 회사에서 교육재개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사원들도 교육의 비리를 나를 통해 알 만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뜻대로 따라가지는 않았다. 교육장에 모이라고 해도 아무도 가지 않았다.
부르고 쫓아내고 소리를 질러도 간부 몇 사람 밖에 말을 듣지 않았다.
월급인상, 추가 보너스 등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들은 월급을
지급치 않고 정상작업도 시키지 않고 교육을 부르짖다가 사원들이 집단으로
항의를 하자 이번에는 4월말에 사원 2백 50명을 모두 해고시키고 말았다.
그 후 그들은 텅 빈 공장을 걸어 잠그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원들은 수출회사의 직원에서 하루아침에 모두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간부들은 자취를 감추고 웅성거리고 있던 사원들은 나만이 이사건의
해결사이기라도 하듯 매달렸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외국인업체라고 믿고 자랑하며 들어왔고 건강에 좋다니까,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적을 이룰 수도 있다니까 멋모르고 시키는 대로 교육에 더러 참가했을 뿐 아닌가.
[외국인 문제입니까?]
우리는 비로소 한데 뭉쳐서 경찰과 노동부에 이 사실을 신고했다.
사전사후 일체 한 마디 통보도 없었던 부당해고는 근로기준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외국인 문제입니까?』경찰이고 노동부 관계자고 간에
우선 그것부터 확인했다. 그리곤 자신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입국목적에 위배되는 부당한 포교이며 근로기준법의 명백한 위배입니다.』
문제점을 거듭 강조했으나 『무슨 다른 일이 있는 것 아닙니까? 주도권 다툼으로
외국인들이 화를 내고 가버린 것 아니예요? 잘못해서 소문이 나쁘게 나면
우리나라에 투자하려는 외국기업가들에게도 영향이 좋지 못할 건데요.
사실 대로 내막을 얘기 해봐요.』라고 하는 담당자도 있었다.
『우리나라에 법이 있는데 걱정말고 며칠만 푹 쉬십시오.
상부에 보고하였으니 곧 결과가 있을 겁니다.』 라던 B서 정보과 Y형사의 위로도
아무 소용없었다. 법도 규정도 전혀 모르는 근로자 몇 사람들과 내가 여기저기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회사를 다시 가동시켜 보고자 애쓰고 있는 동안 그들은
K변호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공장을 매각해 버렸고 어이없게도 나를
7천 5백만원 공금횡령죄로 고소해서 나는 부질없이 검찰에 들락거리며
그것이 무고임을 증명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들의 고소는 증거자료가 전혀 없어 수사도 진척되지 못했고 출석요구서가 가도
고소인 자신이 출두하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그 동안 국내진출 외국은행 쪽에
심어두었던 신용마저 공금횡령자라는 그들의 전화질로 인해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들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의 사주를 받은 퇴직사원 5명이 나를 걸어
진정을 해왔다. 내가 사장으로서 기도교육을 강요하는 등 노동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사건을 해명하러 다니기 바빴고 무고죄로 다시 그들을 고소했으며 공장도
불법매각임을 통보하고 내가 대표이사직에서 해임된 것도 정식 이사회도 열지 않은
불법해임임을 걸어 끈질기게 그들과 법정 싸움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길 수 없었다.
하나씩 하나씩 그들은 출국해 버렸고 결국 내 곁에는 고소인 없이 계속되던 고소장과,
공금횡령이라는 오해와 일부 사원들의 원성과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으니까
그랬을테지 하는 의혹만이 쓰레기처럼 남은 것이었다. 대체 S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은 왜 ‘세계정부’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걸고 거금을 투입해서
이 땅에 기반을 잡으려고 한 것일까. 그들이 평소 수군대던 말. 한국은 외래 종교가
침투하기도 쉽고 성장하기에도 아주 좋은 적지이며 추종자가 5만이 되기만 하면
이 땅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두컴컴한 방에 짙은 향을 피우며
괴기한 사진 앞에 꿇어 앉아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주문을 외우다가 깜박깜박 졸았던 일.
오래 수련하면 공중을 날아다닐 수가 있다는 선전, 기도로서 온 세계가 하나의
통일정부가 되어야 한다던 그들의 외침, 스위스 산기슭 그 천당 같은 호반에 위치한
그들의 본부, 그것이 진정 올바른 종교이거나 건강증진법이라면 왜 떳떳이 정식 허가를
얻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일까. 만약 그들의 의도가 성공해서 이나라 국민의 일부가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합숙생활을 하며 주문을 외우고 무보수로 일하며 재산을 헌납하고
시키는 대로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하나의 작은 방파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나로 인해 첫 상륙이 좌절되었으나 결코
그대로 물러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이라면 무조건 호의적이며 믿어주고 존경해마지않는 우리 국민성도 반성할 일이다.
우리 국민의 명예나 손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외국인의 신상에 무슨
조그만 훼손이라도 생길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내말을 곧이듣지 않던
일부 담당자들도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제 그와 같은 괴이한 단체가 사업이라는
탈을 쓰고 다시 들어오지 않기를 바랄뿐이었다.
[후일담]
그러나 우려는 적중했다. 그들은 다시 소규모 그룹으로 관광 비자를 받아 재입국했다.
나는 몇 년 후 거리에서 나를 고소했고 공장을 불법 매각했으며 모든 사건의 장본인이었던
그 주역이 내 앞으로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큰 키에 우아한 미소를 짓더니 나를 향해 어이없게도 혀를 쑥 내밀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시 돌아왔다. -끝-
〚당선소감〛 金正道 (사진생략)
축하한다는 전화를 받은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정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몽에서라도 깨어난 듯 지난 7년간의 만감이 교차되었다.
결코 불순외세가 두렵거나 문제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끄러울 정도로 많은 사회 지도층이 개입된 동족의 권모술수는 무서웠다. K변호사 등의 있을 수 없는 법률적 술수 때문에 전 재산과 직장을 빼앗기고 오히려 도둑이란 누명을 쓴 채 억울한 조사를 받게 한 등의 고통과 질시를 견디다 못하여 귀머거리(우측난청 및 이명)가 된 현실이 사라지고 지금과 같은 답답한 금속성의 고통스런 소리와 통증도 없이 시원하게 뚫려 다시 한 번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하였다.
나는 뜻밖의 반가운 소식에 어쩔 줄 모르고 눈망울이 젖어있는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무던히도 잘 참아주던 내조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나와 아내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기쁨]이란 의미가 무엇인지 가슴속 깊이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기에 결코 당선의 기쁨일 수만은 없었다.
(약력)1940년 함경북도 명천출생 •경복 중학교 졸업 •現 SCI-KOREA(주)대표이사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