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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 정의롭다.
2023 09 06. - {젊라42030정의}
훌륭한 사람은 바르다고 한다. 굽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가야할 길과 행해야 할 일을 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훌륭타’를 실현하는 것은 혼자서 살아가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터전 안에서 서로 부딪히며 활동하면서 실현하는 것이라 한다. 훌륭타를 실현하는 과정은 그 사람의 생애 전체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긴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노력에서 성취의 폭발이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도 스스로를 닦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는 나이를 보면 열여섯 정도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어린 나이에 중이 되려고 하면 스님들이 고등학교는 마치고 오라고 하며, 그 나이 이전에는 부모의 허락을 받으라고 한다. 고아원에서 사회로 내보내는 나이도 열여덟이라 한다. 고아 그 나이에 이 사회, 현재의 이런 사회로 나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사회 제도가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고아원에서 출원에 대해, 어느 글에서 산업사회 시대의 변화에서 열여덟의 출세간은 가혹하다면서 스물넷으로 올려야 한다고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젊은이를 자유롭게 자주와 자치를 실행할 수 없는 사회이다. 사회가 열여덟에 한 인격으로, 세상을 함께 살아갈 정도로 대우하지 못하는 사회는 반사회적이고 야만의 사회이다. 즉 인간이 잘났다고 하지만, 왕정에서 자본주의에서 제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조폭의 똘만이들이 설치는 성숙하지 못한 사회의 반증이다.
열여덟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사회라는 터전에 마주할 수 있는 교육과정의 일반화도 중요하다. 그 일반화를 특수화 시키는 것도 그리고 개성에 맞는 교육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사회를 이루는 일반화의 교육은 서로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일반화의 조화를 이루는데 매우 중요하다. 교육은, 나라에서 인민이 기본이기에, 세계사의 추세는 고등교육까지 무상화, 보편화(남녀평등), 무종교화(탈노름화)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인민이 기본이자 인민이 최종심급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화 교육을 받았기에, 상식과 양식을 통해 합의와 평결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지도하는 선생님도 중요하다. 게다가 어린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더욱 소중하다. 이런 시대에 선생님이 세상을 버려야 하는 시대가 가슴 아프다. 선생님은 그 어린애들과 청소년의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사회와 세상을 함께 가는 길동무이자 동지일 것이다. 상층에서 지배와 명령하는 자들은 이 사회에서 경제나 법률의 잣대로 이익을 차지하고 자기 자식만의 요구를 하는 자들은 못된 자들이며, 훌륭타와 거리가 멀고, 착취와 수탈의 다른 논리를 배워 착각에 빠진 것이다.
훌륭타는 개인의 활동에서만 규정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의 도시국가인 폴리스 속에서 인간들 각각에게 훌륭타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려 했다. 폴리스라는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도 있고, 도시의 업무를 하는 관료들도 있고, 그리고 중대사를 한해 또는 두해를 맡아서 이끄는 국가적 인물들도 있다. 그들 각각은 자기의 일 또는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각 분야에서 오랜 과정을 겪으면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그 일과 더불어 가정을 꾸리고 먹고 산다.
폴리스 사회를 함께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플라톤은 크게 3부류로 보았다. 우선 농부, 직조인, 배만드는 이, 구두장이, 양떼를 키우는 이들 등등 생산에 종사하는 이들이라 한다. 이들에게는 과도하지 않게 또한 모자라지 않게 생산하여 사회를 윤택하고 안락하게 한다. 이들이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필요에 따라 능력을 발휘하는 노력을 하는 덕목(훌륭타)을 절제(소프로시네)라고 불렀다. 그리고 둘째 부류로서 도시가 다른 제국에게 먹히어 시민이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적을 막는 군인이 있어야 하고, 군인들은 시민들을 보호하고 적들에게는 용감하게 싸우는 덕목이 필요하다. 이 덕목(훌륭타)을 용기(안드레이아)라고 한다. 셋째 부류로서, 폴리스 사회의 제도 안에서 국민의회와 행정을 그리고 법률과 재판을 다룰 수 있는 노련하며, 일들의 과정을 잘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필요하다. 이런 이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과정의 교육을 받고 또한 절제의 노력도 할 줄 알고, 전투에서 용기 있게 행동하는 장년을 지난 이후, 도시의 업무를 배워서 익힌 관료들 중에서 도시를 이끌 인물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정치와 통치를 하는 인물에게 덕목(훌륭타)이 필요한 데, 이를 지혜(소피아)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통치자를 철학자로 착각하는데, 지혜의 인물을 철학자라고 할 필요는 없다(예를 들어 중국의 순임금은 요즘말로 하천 토목건설가 였다). 소크라테스 당시에 민주적 선출에 의해 뽑힌 통치자는 페리클레스는 철학자라기보다 장군이었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도시가 원활하게 유지하는 데는 생산자들의 소프로시네(sōphrosynē, 절제), 군인들의 안드레이아(andreia, 용기), 의회와 행정을 이끄는 통치그룹에게는 소피아(지혜, sophia)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폴리스에서 자유롭고 잘 살기 위해서는 이런 세 가지 덕목들이 조화로워야 한다고 하면서, 그 조화로운 덕목(훌륭타)을 바르다(디카이오쉬네, dikaiosyne 정의롭다)라고 하였다. 절제, 용기, 지혜의 조화로서 정의이다. 요즘 정의와 공평을 주창하면서 ‘좋빠가’를 부르짖는 것은 디카이오쉬네도, 디케의 눈물도, 디케 눈도 아니다.
현 정부는 법과 공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에서 플라톤의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의 변형으로 로마의 보편(유니베르스)에서 나온 평균적 정의를 의미한다. 평균적 정의는 분배를 먼저 실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결과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지, 삶의 토대로부터 과정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나로서는 이런 우리 사회의 현실이 그리스철학의 조화보다 로마의 신화(그리스 모방신화)에 기대고 있다고 본다. 로마의 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변형한 것으로 기원과 이유에 대한 것보다 결과와 목적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디카이오쉬네에서 눈을 뜨고 깊이 보아야할 것이다. 디케의 눈물은 눈으로 보기 전에 눈물이 날 것이라 하는데, 원래 디케의 여신의 눈을 천으로 감고 천칭과 칼을 들고 있는 것은 저울의 평형을 위해 무거운 쪽(가진 자)를 사정없이 칼로 내리치라는 것이다. 극우들의 사고에서 가진 자들이 가난한자에게 칼을 내리치고 있는 형국이니, 그러면 저울이 뒤집어 질 것 같은데, 이 뒤집어지는 전복을 역사는 혁명이라 부른다.
서양에서 신화의 신들이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을 뭐로 생각했겠는가? 신화에 이어 로마의 황제(참주)제도를 이어받은 유일신앙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며, 이들이 1600여년을 이어오다가 계몽기를 지나 근대 국가의 형성에서도 마찬가지로 상층은 무지렁이 인민과는 별개로 생각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산업화 과정에서도 이 소수의 상층은 목적을 먼저 두고서 만든 국가제도가 우선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다수의 부르주아가 등장했다. 이들도 상층으로 살고 싶어 하는 욕심으로 인민의 편이라기보다 상층으로 지위 상승으로 돌아섰다. 이는 마치 일제 잔재인 부역자들이 상층 일본에서 상층 미국으로 돌아서서 ‘좋빠가’하면서도 부역자들과 숭배자들과 장단을 맞추는 것과 같다. 이런 국가 제도가 근대 사회이후로 기껏 200여년 지나면서 제국주의를 만들고, 이어서 20세기 현대에서 자본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이 제국은 국가의 권력 위에, 종교의 권한 위에 학문의 권위위에 군림하는 실재성 없는 상징성의 체계이며, 우화적 이야기를 실재성으로 착각하고 있다.
로마의 참주제, 종교의 유일자, 국가의 권력자 등으로 이어지는 사고방식을 철학으로 옮겨 놓은 것이 앵글로 색슨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함께 조화롭게 산다는 것보다, 조폭처럼 위계질서를 만들고 상명하복으로 명령을 강조한다. 이들의 체계에게 벗어나 저항하면서 살아가는 인민이 자치적이고 자주적일 수 없지만, 그래도 외세에 흔들리지 않을 때, 그 제도에서 저항과 자유추구를 훌륭타고 한다. 그런데 마치 70년대에 미국이 기침하면 일본이 감기 걸리고 우리나라는 몸살 한다고 하였듯이, 지금처럼 미국에 매달리고 일본의 지시를 받는 방식으로 나가고 있는 집권세력의 모습에서, 자유는 고사하고 자주와 자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자유 기나긴 역사란 인민이 스스로 쟁취하는 과정이었다. 젊은이는 진실로 자주와 자치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숙고해야 할 것이다.
잘 들여다보고 깊이 살펴보면, 거의 모든 방송과 신문에서 인용하는 사람이 어느 사람인가? 그리고 우리 삶에 외부로부터 들어와 있는 문화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보라. 어제 인가 사무라이 채권이라는 말이 트위터에 올라와서, 블룸버그 통신이라 하는데 가짜 뉴스이겠지 하고 있지만, 그 사무라이들이 조선조 말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에 저항하고 항쟁을 했던 동학군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생각조차하지 않는 것이 현 시국이다.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의 건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환인에서 단군 할배의 홍익인간이 있었고, 고구려 시대에는 활쏘기의 신과 같은 주몽으로부터 을지문덕장군 등등, 고려 시대에 강감찬 장군과 불교의 지눌 스님 등이, 조선시대에는 유학자인 조광조와 서경덕만이 살았던 것이 아니라 이순신도 휴정 대사와 사명대사도 있었다. 이 기나긴 과정에서 딱 잘라서, 절단하고, 파편으로 만들어, 어디서부터라고 하는 생각을 하는 사고를 앵글로색슨 사고라고 부른다. 그 사고는 미국을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이 250년 전으로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로 이어간다면 그 나라는 인디언 원주민이 주인이기 때문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 아마도 일본은 1500년 이전으로 올라가면 백제와 가야의 문화가 등장할 것이다. 단절의 사고가 우리의 허리를 잘랐는데, 그 단절의 사고에 젖다니, - 새로운 사유, 새로운 입말(우리말), 새로운 벗(동지)을 만들며 산다는 것은 삶을 훌륭하게 조화롭게 사는 길이리라. 절단의 사고자들은 언제나 단절 위에 자기 이익의 확대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이 – ‘위기는 기회다’는 자본주의가 정복을 위해 만든 구호와 같다. - 위기 속에 절대적 이익이 있다고 하며, 전쟁을 건다. 이들에게는 인민과 함께 조화롭게 산다, 세계가 조화롭게 이룬다는 생각이 없다.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상층 49 퍼센트 대 심층 51퍼센트를, 또는 모든 평의회와 위원회는 남녀 동수로 하고 의장은 여성으로 한다는 새로운 터전 만들기를, 빨갱이 취급한다. 다시 말하지만 빨갱이를 입에 올리는 자는 자기 눈안에 대들보 같은 잘못을 감추기 위해 남의 눈에 티끌을 빨갱이로 몬다. 인민과 함께 하는 쪽은 빨강이이고 자본주의와 제국에 빌붙는 자를 파랭이이다.
지정학적으로 태평앙의 연변에서, 일본인들이 영국과 독일로부터 근대화를 배워서 동양의 선두라고 여기고 있는데, 이는 산업의 경우이지 문화와 역사에서 얼마나 후진이었는지를 그들이 더 잘 안다. 윤 집단이 그 일본의 방식을 따라간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지를 우리 젊은이들이 더 잘 안다. 절단하지 않는 사유에서, 잘려진 역사 이전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홍범도 장군의 생애가 훌륭타고 하지, 지금의 대통령을 훌륭타고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젊은이는 역사와 문화를 통시적으로 엮어가는 사유를 할 수 있다. 사유를 오랜 훈련으로 계속하면 몰라도, 나이 들어 습관에 젖어 전도된 사고에 빠지면 자유로운 사유가 잘 안된다. 게다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마치 9만평방 킬로미터에 사는 5천만을 생각하는 것도 잘라서 사고하는 것인데, 이에 비해 우리는 이 한반도에서 예전에 만주까지도 포함하고, 지금은 해외에 흩어져 사는 우리말(한글)을 하는 이들을 포함하여, 8천 5백만은 통상 우리들이다. 터전이 잘라지지 않아 걸어서라도 여행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인민들에게는 세계시민(코스모폴리탄)과 더불어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이다. 이제 젊은이는 8천오백만과 21만평방킬로가 넘는 터전을 사유하면서 노력할 때, 우리는 속 좁은 이성의 노름(사기)에 빠지지 않고, 호걸 또는 덕후 처럼 대범하게 세상을 누비며, 소통을 넓혀 갈 것이다. 차범근, 손흥민, 김연아 등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BTS의 아미들도 그리고 넷 플리스에서 오징어게임을 보는 친구들과 조화를 이루며 훌륭한 인물이 될 노력하기 바란다. 먼저 공자가 예를 들 듯이 길동무 셋은 중요하다. 이미 우리는 그 길 동무들로서 열락당(說樂堂) <학문을 배우고 익히면 기쁘고(열, 說), 세계에서 벗을 만나면 즐겁다(락, 樂)는 작은 모임을 이루는 것>) 형성하기를 바란다고 했었다.
우리가 스스로 자주하며 자치를 이루어 갈 때, 남북을 가로지고 동서로 펼치는 리베르떼르(libertaire)로, 휴머니떼르(humanitaire)로 살 수 있을 것이다. 학습과 친구, 연구과 동지, 이론과 실천은 인민의 토대이자, 열락당의 기본이다. 어느 시대나, 고대로부터 황제시대에도 인민은 토대이면서, 기본심급이었고, 또한 현대에서도 최종심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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