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사람 모두 곡을 하다 / 남정언
흔히 시詩로 쓴 역사를 '시사詩史'라 하고,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 하였다. 시 거울엔 동시대 사람들의 바람과 애환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시는 방대한 사료로 구성한 어떤 역사물보다 생생한 기록으로 인식된다. 이안눌의 한시 「사월 십오일」은 시인이 직접 보고 들은 상황을 기록해 둔 것이므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안눌(1571~1637)의 「사월 십오일」 시대 배경은 임진왜란 후 이야기다. 「사월 십오일」을 읽으니, 부산에 있는 특별한 역사관이 떠오른다. 2005년 4월 지하철 공사 중 동래 수안역 근처에서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에 희생된 유골과 전투 무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때 부산시는 지하철역 개통날짜를 미루고 발굴을 진행하여 2011년 역사관을 함께 개관하였다. 바로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안에 역사 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이다.
「사월 십오일」의 내용은 이러하다. 전쟁이 끝난 뒤 이안눌은 선조 40년 동래부사로 부임한다. 어느 날 아침 온 성안이 진동하는 곡소리에 깜짝 놀란다. 늙은 아전을 불러 어찌 된 연유인지 물어보니 음력 4월 15일은 동래성이 왜군에게 함락된 날이라 하였다. 아전은 왜란 때 성안으로 피난 온 백성들이 몰살당해 그날이 되면 살아남은 백성들이 집마다 제사상을 차리며 곡을 한다고 대답한다. 아비가 자식 곡을 하고, 아들이 아비 곡을 하고, 어미가 딸을, 딸이 어미를 곡하는데 이렇게 곡할 사람이 있는 집은 그래도 다행이지만 곡할 사람이 없는 집도 수두룩하다고 아뢴다. 사월 십오일, 그날은 동래성이 함락되고 동래부사가 순절하고 모든 백성이 도륙당해 비참한 날을 되새기는 제삿날이었다.
「사월 십오일」은 동래부사와 고을 아전이 대화하는 구성방식이다. 아전의 구술을 통해 백성의 울음에 연관해서 당시 참혹한 죽음의 사연들이 낱낱이 폭로된다. 이안눌은 16년 전의 사건을 회고하지만 “이야기 끝까지 듣다못해 /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네”라고 중간에 끼어드는 것으로 자기감정을 간단히 표출한다. 그리고 "울어줄 사람 있으면 그래도 덜 슬프지요"라는 아전의 구술로 계속 이어지다가, "온 가족 칼날 아래 쓰러져 / 울어줄 사람 하나 없이 된 집 얼마나 많다고요"라고 끝을 맺는다. 지금 들리는 저 울음소리가 끔찍했던 전쟁을 떠오르게 하여 더욱 비통하고 울음소리조차 슬프고 슬프다는 뜻이다. 집 안의 곡소리가 바깥으로 퍼져나가 여운을 남기며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수안역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엔 유명한 〈동래부 순절도〉도 있다. 동래성 전투의 시작과 끝을 한 폭 그림에 담아 「사월 십오일」에 일어난 잔혹한 상황을 짐작케 하는 기록화이다. 임진년 1592년 음력 4월 13일에 왜국 700여 병선이 동래로 물밀듯 밀려왔다. 이틀 사이에 1만 8,000여 왜군에 의해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고립무원이 된 동래 부사 송상현과 군민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순국한다. 그림은 동래 읍성을 중앙에 두고 성 내부에 동래부사와 군사들을 배치했고, 성을 겹겹이 둘러싼 왜군들이 동래성을 포위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왜군은 전투에 앞서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적은 목패를 전달하였다. 송상현 동래부사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며 항복을 거절하는 그림에는 '길을 빌려 달라'와 '길을 빌려주기 어렵다'고 적힌 작은 팻말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항복하면 살려주고 저항하면 다 죽이겠다는 왜군에게 목숨을 잃으면서 저항하는 백성들과 도망가는 군사까지 그린 적나라한 묘사에 소름이 돋는다.
역사의 비극은 가문의 멸망과 함께 개인의 비극을 동반한다. 동래부사는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쓰린 마음을 함께 하며 그날의 슬픔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동악집』에 실린 「사월 십오일」에서 '형제나 자매나 따질 것 없이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곡을 하지요, 이맛살 찡그리며 듣다못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네.'라는 구절을 쓴 시인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왜적에게 길을 빌려주지 않아 살아남은 사람 모두가 곡을 하게 되고 하늘도 울고 땅도 울게 만든 참상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 비통함은 문학작품이 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마치 지금도 눈앞에 펼쳐진 일인 듯 여전히 우리는 비분강개한다.
동악 이안눌은 시문에 뛰어나 이태백에 비유된다. 정조대왕은 "동악의 시를 두고 갑자기 보면 무미한데 다시 보면 오히려 좋아진다. 비유하면 근원이 샘물이 콸콸 솟아 일시에 천 리까지 쏟아져 횡으로나 종으로나 스스로 문장을 이루네."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동래부사 시절에 남긴 그의 정갈한 시詩가 부산 범어사 대웅전 옆 바위에 남아 있어서 그가 느꼈던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으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과거 조선은 십만 양병설을 흘려듣고 왜적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 그 대가로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살아남은 사람 모두가 곡을 했던 그날을 기억하며 한시를 음미하며 그날을 되새긴다. 최근에도 반성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하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왜국을 보면서 결코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어선 안 될 일이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역사를 통해 기록문학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다. 이제 우리는 울지 말고 살아남은 사람 모두를 보듬으며 살아가야 하겠다.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우리숲이야기공모전 우수상. 부산수필문예 올해의 작품상. 수영구독후감공모전 대상. 수필집 《그림책을 읽다》《숲, 섬을 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