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재
목포해양대 해양산업대학원장, 《한강문학》 수필 부문 등단작가, 한국서예협회 전남지회 초대작가, 《세계인명사전》 (마르퀴즈 후즈) 평생 공로상 수상
‘SARS’의 추억
‘코로나 19’의 전염병으로 인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의 마음엔 근심이 가득하고 얼굴엔 미소가 사라졌다. 작금의 상황을 겪고 보니 오래 전 외국에 체류하면서 유사한 경험을 한 기억이 새롭다. 2002년 11월 중귝의 남쪽 광동성에서 발생한 ‘사스’(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는 2003년 4월 북경으로 전파되어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당시 북경 인민대학에 머물며 정치경제대학원 고급연구과정에서 1년간 수학을 하던 때다. 짧고도 간결한 유학을 하게 된 계기를 들자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그동안 직장생활과 사업으로 심신이 피로하여 어딘가로 도피 또는 떠나고 싶었던 욕망이 지배하였기 때문이며, 둘째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1국가 2체제’ 즉,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병행한 ‘사회주의시장경재체제’를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서울에서 해운기업 용선영업부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인 1992년 한·중 수교가 체결되고 국적선사들이 다투어 중국으로 영업망을 확장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산권 진출을 추진하였다.
이에 편승하여 중국 영업책임을 맡게 되면서 화물선적과 용선계약을 공격적으로 수행하다보니 현지 출장이 잦아지고, 거래 상대를 좀 더 알기 위한 전략으로서 나름대로 중국의 역사와 사회경제체제에 관하여 공부를 하였으나 단편적인 지식습득에 불과 하였을 뿐, 보다 심층적이고 체계적인 이해가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이를 만회해 보려는 동기도 유학의 계기가 되었음이다.
7월 여름이 시작될 즈음 북경에 ‘사스’ 전염병 확산이 심화되면서 IT 및 창업기업들이 밀집한 ‘중관촌’의 모든 건물들은 정부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어 직원들은 재택근무로 전환되었고, 건물 출입문들은 개방된 채 하얀 천으로 만든 붉은 적십자 표시의 줄 몇 가닥만이 쳐져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불거나 하면 허공에 매달린 천이 하늘거리며 맥없이 춤추는 듯한 모습들이 사뭇 공허하고 무서움을 느끼게 하였다. 휑하니 비어 있는 건물들 앞을 지나칠 때면 마치 공포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북경신문(China Daily)에는 연일 ‘사스’와 관련된 보도가 잇따랐다. 그 중 한 기사의 내용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즉, 부모가 감염되어 격리되고 어린아이 혼자만이 조그마한 아파트에 남게 되었으나 감염이 우려되어 당국의 허가 없이는 접근이 불가하였으므로 이웃이 도와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이웃사람들은 매일 밤 전등이 켜져 있는지를 체크하고 아이의 안부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었으나, 어느 날은 불이 켜지지도 않고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었으므로, 모두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어서 안타까워 한다는 것이다.
전염병에 의한 사회적 격리가 가져다주는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간사의 씁쓸한 면모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참 후에 ‘사스‘의 예방약이 서방으로부터 수입되어 일부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의료진들부터 우선 지급되어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였으므로 일반인들에게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북경에 체류 중이던 외국인들은 대부분 감염을 우려하여 자국으로 귀국하였고, 한국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거의 모두 모국으로 귀국하였다. 다행히 나는 교수진의 도움을 받아 대학 교내에서 운영 중이던 병원 의료진용 예방약 주사를 맞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므로 감염에 대한 우려가 덜하여 그대로 북경에 남기로 하였다.
대학도 휴교령이 내려 모든 수업이 중지되었으나 대학원은 일부 허용되어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평소 나에게 다방면의 안내와 도움을 주던 지도교수가 교내 한 기숙사에 격리되었다는 메시지가 휴대폰으로 전달되었다. 내용인즉 자신의 대학원 제자가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동료 제자들과 함께 무심코 병원에 위로 방문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그의 병명이 ‘사스’로 밝혀졌으므로 최근 접촉한 사람들을 역학 추적 조사를 하게 되어 명단에 올랐으므로, 당시 함께 방문했던 6-7명의 모든 제자들과 동시에 같은 장소에 격리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소식을 접하고 격리 수용된 그들에게 위로방문을 하면서 과자나 음료수 등을 교도소 사식처럼 가끔씩 공급하여 주었는데, 한 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열악한 곳에서 각 1인씩 독방에 갇혀 있는 모습들이 매우 안쓰러웠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른바 수시로 “Air Meeting”-얼굴을 창문으로 내밀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라고 격리된 교수가 명명함-을 하면서 매우 여유롭고 유쾌하면서도 즐겁게 생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중국인들은 늘 여유가 넘친다. 비즈니스를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특성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거래가 성사되어 계약에 임할 때에 비록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보이더라도 결코 속내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우회적이고 곡선 적이다. 항상 여유를 남기고 상대방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 계약서에 바로 서명을 하려하지 않는다. 반면 한국인들은 매우 직선적이고 자기 나름대로 중앙 돌파 적이어서 때때로 중국인들로부터 백안 시 당한다. 계약을 끝내고 악수를 할 때는 중국인들의 손바닥에 땀이 촉촉하다. 그만큼 내면적으로 고민을 많이 하였다는 증거다.
중국인들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노자의 사상이 꽤 참고가 될 듯하다. 노자는 직선적인 삶의 방식보다도 곡선적인 삶의 방식이 좋다고 하고 있다. 또한 나아가는 것만 생각하면 일찍이 벽에 부닥치지만 더 멀리 앞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물러서야함을 암시한다. 나무도 꼬부라져 있음으로서 생명을 오랫동안 보전할 수 있다. 곧은 나무일 경우는 목수가 먼저 베어갈 것이므로 생명이 일찍 끊어지리라.
사스는 겨울로 접어들면서 점차 그 위세가 약화되고 사람들이 정상의 생활로 복귀하면서 북경의 시가지는 점진적으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수개월의 사스전염병으로 약 4천여 명 이상이 북경외곽의 소도시 ‘샤오통산’에서 화장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자의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땅에도 더 이상의 희생과 사회적 격리가 없는 예전의 일상이 빨리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