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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화
질병과의 전쟁
인류는 그 동안 겪어온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다. 예컨대 천연두, 스페인 독감, 흑사병, 말라리아, 에이스, 에볼라 등이 그것이다.
근자에 와서 국내를 시끄럽게 했던 사스, 메르스, 신종 플루에다 조류 독감이 지나간 듯 했으나 다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폐렴이 중국 본토를 강타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신종 바이러스를 박멸시킬 백신이 개발 중에 있어 방역만으로 전염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노릇이다.
지구 곳곳에서의 전쟁과 테러 그리고 각종 사고가 터지고 있는 터에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에 의하면, 신종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은 인류의 8억 명까지도 감염될 수 있으며 1억8천 만 명의 희생자를 낼지도 모른다고 전한다.
더구나 개신교 계열의 「요한계시록」을 인용한 “말세론”은 방역당국의 불신을 증폭시키며 민심의 동요에 한술 더 거들고 있으니 암담하기 짝이 없다.
▩ 사회적․의학적 위기에 처한 인류
지구 위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분들이 타고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적인 삶을 보여 준 예는 무척 많다.
실제로 그 분들의 장애는 오히려 축복의 메시지라고 돌릴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희구하는 현대인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물며 불치, 난치병인들 물리칠 수 없을 것인가! 이러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분들도 질병자체를 극복과 투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선대의 가족력이나 숙명으로 돌려 질병 자체에 동화된 채, 동고동락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분명 있다.
하긴 우리네 전통의술에서는 불치, 난치병이란 없다는 주장이 대세인 건 사실이다. 인간에게 따라다니는 질병에는 이를 치유할 수 있는 약재가 틀림없이 지구위에 존재한다는 관점이 녹아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녕 인간의 모든 질병은 치유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주변 인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따뜻한 봄날에 혹독한 겨울을 만나기도 하고, 잔인한 봄날에 훈훈한 겨울을 맞기도 한다. 어린 시절 감기에 시달리기도 하고, 눈병에 걸려 병원신세로 전전하는 경우도 쉽게 접한다.
때로는 병마보다 더 한 불치의 교통사고를 겪기도 하며, 부모의 훈육과 함께 학교교육에 의지하여 두뇌가 발달되면서 육신도 자라난다. 가족관계를 벗어날 즈음, 우정의 절실함과 이성의 애틋함이 뼈에 사무치기도 한다.
얼마쯤이나 살아 온 것일까?
변화무쌍한 처절한 환경을 극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돈과 명예조차 얻어 큰 소리 치며 떵떵거리고 살아갈 수도 있다. 이 때,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부처님의 가피(加被)의 덕분으로 돌리기도 하는 인생의 긴 여정이 흘러간다.
반면에, 금 수저를 물고 나와 금 수저의 환경 속에서 탄탄대로를 보장받고 큰소리치며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경우도 여럿 본다. 이들이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다.
금수저들은 갑 질을 하면서도 을의 입장은 안 중에도 없으며, 이들에게는 종교나 건강조차도 금 수저의 권위와 금력의 위력에 매달려 승승장구 하고자 각종 비리와 반칙을 일삼는다. 그런데 그들이 유린하고 왜곡한 윤리․도덕을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양심(良心)」이라는 가치를 잘 지켜내며 그들의 만행을 규탄하지만 세상은 악인의 권세에 희생만을 강요한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 주변의 크고 작은 일로 부모의 심기가 불편했을 경우 “아이고, 내 팔자야! 이 놈의 세상을 어찌할꼬........”라며 푸념 섞인 넋두리를 하는 경우를 종종 듣곤 하였다. 또는 제대로 계획했던 일이 순항을 못 하였을 때에도 ‘팔자타령’을 하는 이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정서 속에 녹아있는 ‘팔자’란 다분히‘운명’이나 ‘숙명’이라는 언어와 엮여있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쯤 서양문물이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만해도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신랑․신부의 혼사를 ‘사주팔자’를 보고 간택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생면부지의 인생들이 부모의 결정에 따라 무조건 일생을 같이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년해로한 부부가 많았다니 오늘에 비추어보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들은 과연 운명이나 숙명이 ‘사주팔자’에 묶여있다는 확고한 신념에 쌓여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사주팔자’라는 가치는 오늘의 시대에도 유효한 것인가?
우리는 서울의 미아리고개를 위시하여 시내 곳곳에 걸려있는 <점집>을 무심코 지나쳐버린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전국 각지에 <점집>이 눈에 띠게 많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상 종교적 가치를 운운할 필요도 없이 현대인의 장래에 대한 불안, 초조를 반증하는 것이 “사주․관상”집이 많다는 현실로 대변된다. 그러면 앞서 언급한 <유전자>와 <사주팔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우리 모두의 생명은 유한하다. 그래서 유한의 생명을 질병 없이 무한의 생명으로 확장하고자 선진문명의 지혜가 모아지고 있다. 더구나 생명과학자들과 뇌 과학자들은 대뇌와 뇌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아무튼 이들의 연구 성과를 기대해도 좋겠지만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 또 다른 사회적 문제의 시발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우리들 모두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져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우리는 죽음과 고통과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우매(愚昧)하지 않다.
불가(佛家)의 말대로 무명(無明)에 갇혀 있거나, 아니면 기독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에게 포로가 돼 있다고 할지라도 이미 우리는 <빛(광명)>의 문명을 만끽하고 있다.
빛의 문명이란 잃어버린 잉카와 마야가 구가한 태양의 원시과학이 아니다.
이미 현대과학은 플라즈마를 경험한 지식정보와 광통신이 결합된 첨단테크놀로지의 시대로 접어든지 꽤 오래 되었다.
바야흐로 우리가 숨 쉬며 살고 있는 세상은 3차 산업혁명인 지식·정보산업시대를 넘어 4차 산업혁명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아시다시피, 4차 산업혁명은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세계 굴지의 기업인 <구글>의 “알파고”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는 인간과의 바둑대결에서 프로그램의 첫 승리로 데이터 기반의 인공 지능이 인간을 앞설 수도 있다는 충격을 주었다.
어릴 적, 기계가 인간을 정복할 수도 있다고 만화에서나 보았던 일들이 현실로 들어 났으니 4차 산업혁명은 정말 무서운 괴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질병을 완전정복하기 위한 <생명과학>의 노력은 아직까지도 요원해 보이니 이를 어쩌랴!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마침내 북극곰과 돌고래의 개체수가 날로 줄어들고 있는 자연환경을 또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여기에 더하여, 북한의 핵위협 속에서 중동의 맹주를 자처하던 이란과 미국의 갈등과 분쟁은 실력행사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히로시마 핵폭격에 우리나라의 희생자들은 아직까지도 고초를 겪고 있는 터에, 이제는 「드론」이라는 신무기가 귀신같은 살생의 위용을 뽐내고 있으니 끔찍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 더하여, 앞서도 <전염병>에 대하여 잠시 언급했지만,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인류가 극복해야 할 최대의 난제임에 틀림없다. 특히 바이러스를 퇴치할 백신의 개발에 생명과학분야와 의학부문의 모든 힘을 다 모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국 간의 경제전쟁과 종교전쟁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지금도 지구 곳곳의 지도자들은 자원전쟁과 자국의 경제이익에만 골몰하여 무역전쟁에 사활을 걸고 평화라는 가치는 간데 온데 없으니 이를 어쩌랴.
사회학에서 사회진화론의 문제점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 무시. 두 번째, 잘 못된 인식의 묵인을 꼽는다.
실제로 인류가 근대 산업화와 현대화를 거치는 동안 추구했던 발전 모델은 서구중심의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이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가진 이성 즉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은 경제이론에 의해 무참히 소외되었다. 그러다 보니 순수이성에 의한 사고와 사유 그리고 실천이성으로서의 도덕과 양심은 본거지를 떠나 변방에 머물러야 했다.
지나간 지식정보통신사회에서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에 따른 인간발전의 필요성이 총체적 발전 모델로 많은 진화가 있었 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서방세계는 데카르트와 뉴턴의 기계론적 환원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칼과 총의 논리를 앞세운다. 과학을 무기로 사용하며 경제식민화를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결탁해서 만든 산물이다. 이런 와중에서 인간발전을 포함한 총체적 사회발전의 진정한 모델과 패러다임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근자에 활발한 신과학운동은 이제 일부학계의 새로운 과학이론이나 현대문화의 병폐에 대한 단순한 저항의 차원을 벗어나, 현대세계의 기존질서와 인류문명의 근본적인 개혁을 꾀하는 사회-문화 운동으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부분적인 현상보다는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대자연의 섭리를 추구한 신과학자들의 개념들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생물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그리고 문학에까지 신선한 충격과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켜 이제는 그 개념이 아주 다양한 양상으로 증폭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신과학의 이론들이 제시하는 생태론 적(ecological)이고 전체적인(holistic) 새 시대적 조망에 초점을 맞춘 진지하고 열띤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초기의 신과학운동의 인식론적 근거와 세계관적인 기반이 학문 쪽에서는 무엇보다도 현대의 양자물리학과 천체물리학이 제공했다면, 사상적인 전통분야에서는 당시 서구의 젊은 세대를 열광시켰던 요가·불교·역경·노장사상 등 동양의 전통종교사상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상 동양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불가, 도가, 유가의 통일체적 세계관은 현대문명의 고질적 문제를 탈피할 수 있는 사회학적 대안으로 충분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본다.
예컨대, 약육강식의 질서, 문명 간의 충돌 등 세계사적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묘책이 이 안에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동양사상의 비주류로 취급되는 우리 한민족사상에는 세계사적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실제로, 서양의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이 한국을 ‘지나(China)의 패러디’로 본 이래로 많은 동서양의 학자들은 한국문화를 지나(支那)문화에 포함시켰다.
심지어 <라이샤워(O. Reischauer)>와 <페어뱅크(John K. Fairbank)>도 한국문화는 ‘지나 문화의 일 변형(變形)’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나(支那)나 왜국과 다른 한국문화의 독자성에 대한 자각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동양학 중에서도 한국학(Korean Studies)의 독자적이며 독창적인 자리매김이 여러 형태로 시도되고 있다.
특히 한국철학과 관련하여 한신대학교의 <김 상일>은 한 사상(Hanism)의 『한』은 하나와 많음을 동시에 의미하는 개념이므로 한의 고유성은 일(一)과 다(多)의 비 시원적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한사상은 이원론이 아닌 비 이원론이며 실체적이 아닌 비 실체적이며, 시원적인 것이 아닌 비 시원적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은 하나와 많음을 하나로 표현하는 종합개념이므로 한 철학은 서양철학의 이원론과 실체론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한국문화의 고유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한사상은 동양사상 중에서도 가장 비 이원론적이고, 비 시원적이며, 비 본체론적이라는 주장도 함께 한다.
이 같은 주장은 한편으로 보면 우리의 입장에서 상당 부분 수용 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4차 산업혁명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한민족 철학의 관점에서 이 책 후반부에 제시하게 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양질이든 악질이든 수많은 정보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정보의 선별로 대응책을 세워 나간다는 노릇은 분명 쉽지 않다. 또한 지구환경의 심각한 변화를 개인이나 나라의 힘으로 막아낸다는 일조차 힘에 부치는 게 사실이다.
아울러 자기 자신이 처해있는 사회 환경 또한 개인의 힘으로 막아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건강은 위협받을 수밖엔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상 현대인의 질병은 정신적, 사회적, 육체적 부조화(不調和)로 인한〝불안(不安)〞과〝스트레스(Stress)〞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래 전, 프로이드(S. Freud, 1856~1939)는 내적 실리적 갈등이나 외부에서 오는 압력으로 생기는 정신체계의 긴장과 인격 적 변화를 「노이로제」라고 정리했다.
우리가 불안을 억압하면 충격이 나오는데 그 충격이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신체를 공격한다. 이런 것을 “히스테리 현상”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현대인의 대부분은 이러한 노이로제와 히스테리에 시달리며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날 일이 아니다.
이러한 노이로제와 히스테리는 개인으로부터 사회로 번지고 다시 지도자들의 심성을 자극하여 국가로까지 파급효과를 넓힌다. 예컨대 사회적 갈등과 지역 간 분쟁, 종교 간의 적대감정 유발과 무역전쟁 등 이 모든 상황의 불씨는 결국 개인의 노이로제와 히스테리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노이로제와 히스테리를 우리의 삶에서 걷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물리학에서의 ‘기계론’은 인간을 부분적으로 쪼개어 분석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이 병이 났을 때는 고장 난 기계의 부품을, 수술을 통한 물리적 요법이나 약물을 투입하는 화학적 요법으로 수선하여 고장 난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가도록 만든다.
이 때 서로 다른 신체의 부품은 각각의 「전문의」가 맡아서 수리하게 된다. 때문에 의사는 더 이상 병을 낫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슨 납땜을 하거나 갈아서 기계를 고치는 기술공이나 수선공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특히 요즈음 뇌 과학이 발달하면서 뇌 과학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열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모순이 끼어있다.
뇌는 오로지 몸의 신경 작용을 교류하는 신경 중심기관 일 뿐이다. 우리 몸의 장기와 같이 뇌도 신경활동을 하는 한 기관에 불과하다. 우리의 피부도 시각 작용을 할 수 있고, 우리 몸의 한계를 넘어서도 감각을 인식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이 우리의 전부일수 없듯이 뇌도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의 잘 길들여진 관념은 행동을 바꾸고, 행동은 습관을 바꾸며, 습관은 뇌구조를 바꾼다. 그리고 운명도 바꾼다.
그러나 현재의 뇌 과학으로는 인간에 대한 그 어떤 비밀도 밝혀낼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2009년 뇌 과학계의 <알바 노에>가 『뇌 과학의 함정』에서 단언한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즉 우리는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밝혀내기 위해서는 뇌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과 철학의 성배라 일컬어지는 「의식 자체」를 곧 ‘신경’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여러 사례를 통해 거대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아울러 현대 과학의 철학적 빈곤과 그로 인해 야기된 인간에 대한 위험한 착각을 파헤치며, 의식-마음-자아의 비밀, 즉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 “의식-마음-자아”라는 관계는 우리전통의 고전적 관점에서 몸이라는 생체의 그릇 속에 형상화 되는 “감정-기운의 흐름-감각”이라는 등식과 비교 될 만 하다.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근본적으로 퇴치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너무나 많아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뇌 과학과 연관된 「생체시계」라는 학설에 귀 기울여 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캘리포니아 소크 생물학 연구소의 생체리듬 전문가인 <사친 판다>교수는 “생체리듬의 과학(The Circadian Code)”에서 21년간 연구해온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생체시계의 비밀을 들려준다. 간단한 생활습관의 변화만으로 당뇨, 고혈압, 심혈관질환 등 치료약이 거의 없는 만성질환들을 예방하거나 발병을 늦출 수 있다는 얘기다.
아무튼 살아있는 거의 모든 생물은 체내에 타이밍 시스템, 즉 생체시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생체시계는 원시시대의 생활습관에 맞춰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술적 진보와 노동형태의 변화로 낮과 밤의 생체리듬이 언밸런스인 채 살아가고 있다. 바꿔 말해, 낮 동안의 생활에서는 자연광을 접할 기회가 줄고, 밤 시간은 환한 빛에 노출돼 생체리듬이 깨져 버린다는 자각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활습관의 시정”이 약과 병원을 찾기에 앞서 예방의학적 차원에서 그리고 질병 퇴치라는 인류의 딜레마를 극복할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이와 함께“「마음의 정제」와 관련된 노력”이 “인류의 장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단초가 되지 않을까?
▩ 유전자와 면역체계에 대한 이해
옛말에 우리의 질병을 ‘탈’ 또는 ‘덧’이라고 불렀다. 흔히 쓰고 있는 배탈, 입덧 등이 이를 대변한다. 탈과 덧이란 외부로부터 덤벼드는 악의 세력이 인체에 침입한 사건을 나타낸 말이다.
우리들이 어떤 질병에 걸렸을 때에는 ‘병들었다’고 하고, 병이 쾌차하였을 때에는 ‘병이 나았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직까지 질병과 관련하여 이를 연구하고 치료하는 분야를 <의학>, <의술>이라 하고 있다. 의학의 <의(醫)>라는 글자의 고문자를 보면 ‘毉’라고 표기돼 있다.
글자 상부좌측(上部左側)의 ‘医’는 활이라는 ‘시(矢)’의 무기를 갖춘 ‘갑(匣)’을 의미한 것이고, 우측의 ‘수(殳)’도 원래 병기의 일종인 ‘창’이다. 하부의 ‘무(巫)’는 ‘무당’을 상징한 것이다.
이렇듯 ‘毉’자는 병을 일으킨다고 믿는 정령과 악마를 무당이 몰아내기 위하여 화살(矢)이나 창(殳) 같은 무기를 사용한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하부의 ‘巫’가 ‘酉’로 변하여 ‘醫’가 된 것은 의술이 무당이라는 주체를 떠나 ‘술[酒]’ 또는 ‘탕액(湯液)’이라는 약제의 출현으로 개념이 변화하게 된 뒤다.
아무튼 옛 문자에서 보여주듯, 태초의 의사는 주술과 예언을 하는 사제의 역할을 수행한 <무당(巫堂)>으로 원시사회공동체의 총체적 치료자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약제의 개념이 도입됨으로서 의료와 종교가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문자의 형태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류가 추구한 의학의 주된 연구는 <질병>과 이에 따라 이르게 되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주 대자연의 법칙>은 인간이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자신의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수명을 주었다. 이런 까닭에 여자의 경우 남자보다 조금 더 오래 살기 마련이다.
100살을 넘기는 사람 중에 여자가 남자보다 다섯 배나 더 많은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일 것이다.
생명과학자들은 앞으로 당분간은 계속해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속도는 인간이 자신의 자연수명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느려질 것이라 전한다. 그 범위는 80~100살이 될 것이며, 그 이상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인간 수명의 한계를 115살로 보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장수 기록을 세우는 사람들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일 뿐이다. 만약 죽음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심혈관계 질병과 악성 종양 등을 완전히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 안과의사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130살까지 살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님이 된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의사들이 완벽하게 작동 할 수 있는 “인공 눈”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볼 뿐이다.
한편, 생명공학에서 일정의 프로그램화된 “세포의 죽음(programmed cell death)”은 우리가 어느 기간 동안 살다가 어떤 이유로 죽게 된다는 정보가 이미 유전자속에 나와 있다고 전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장기와 기관은 ‘여분의 힘’과 ‘사용 기간’이 적혀진 채로 대물림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를 조절하는 기술을 배워야 수명은 늘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인간이 자연수명을 끝까지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약 백 년 전만해도 전쟁, 전염병, 천재지변과 사고 등 노화와 관계되지 않은 결과로 인간의 80%가 죽었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원인으로 죽는 비율은 겨우 15%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유전자에 쓰여 지어 있는 자신의 수명을 다 살다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적인 자연수명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 할 것인가?
과학자들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다방면에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내과의(內科醫) <강 승완>의 “암 알아야 이긴다,”라는 책에서 밝힌 이야기에 주목해 보자.
인류 문명은 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자연 생태계뿐만 아니라 몸 안의 생태계는 심각하게 황폐해져 가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진실로 이 주장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든다.
현대인들의 면역력이 갈수록 저하되고 암을 비롯한 각종 만성질환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체내 생태계의 위기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인간은 결코 자연 생태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으며 그 자체가 작은 생태계이므로 이 작은 생태계를 잘 보존하고 가꾸는 것은 바로 개개인의 건강유지와 질병 치유의 근간이 된다는 주장이다.
우리 몸 안의 생태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수많은 세월 동안 진화의 역사를 함께 해 온 우리 세포 속의 미토콘드리아, 그리고 점막과 피부에 사는 미생물들과의 공생시스템이다.
인간은 체내에 서식하고 있는 미생물들, 그리고 미토콘드리아와 활발한 유전적∙대사적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활동을 영위하고 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인간은 지구상에 탄생할 수조차 없었다. 이 체내 공생시스템이 건강과 질병에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최근 「메타지노믹스」와 「미토콘드리아 학」의 빠른 발전에 힘입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몸속의 세포호흡에 관여하는 세포 기관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고유한 DNA를 가진, 한때 독립된 생명체였던 것이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고등생물의 세포 속으로 들어와 공생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미토콘드리아가 핵을 가진 세포 속에서 안정적으로 생존하고, 세포는 미토콘드리아를 통해 호흡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공생관계는 인간을 비롯한 많은 고등생명체들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처럼 세포의 엔진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생존과 정상적인 기능유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면역력을 좌우한다.
이러한“미토콘드리아에 기능이상(mitochondriopathy)”이 일어나면 우리 몸속의 세포들은 에너지를 제대로 생산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면역기능이 저하된다. 뿐만 아니라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적 변이 자체는 암 발생의 중요한 메커니즘으로 밝혀지고 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불행한 현실」이라는 과제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환경을 찾아 우리 세포 속으로 들어온 미토콘드리아를 병들게 하는 주원인이 된다.
또한 우리 몸에 사는 미생물총(叢, 미생물들 집합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초제, 살충제, 중금속, 인공색소, 방부제, 일부 약물 등 인간이 만들어낸 합성화학물질, 그리고 이로 인한 「산화스트레스」라는 것이 미토콘드리아를 병들게 한다.
이처럼 생명과학의 연구 성과는 대단하다. 또한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새로운 발견이 앞을 다툰다.
인간의 몸속에는 세포수의 10배가 넘는 미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이런 미생물의 절반 정도가 대장에서 산다고 한다. 이들을 장내 미생물이라고 하는데, 나쁜 균의 증식과 독소 유입을 차단하며, 섬유질을 발효시켜 장 점막을 양육하고 항체 생성을 촉진하는 등 인체의 정상적 발달과 대사, 면역기능, 해독 등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통 장내 미생물총은 오랜 진화과정과 전통적인 식문화에 따라 조성된다. 오랫동안 한식을 먹어온 우리나라 사람의 장에는 그에 맞춰진 장내 미생물들이 살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서구화된 식습관과 항생제 남용은 이 장내 미생물들의 생태계에 큰 변화를 만들었다.
가공식품, 흡연, 스트레스, 정제설탕이나 흰 밀가루 같은 단순 당, 직접 복용하거나 혹은 육류에 잔류되어 들어온 항생제, 소염진통제, 항암제, 인스턴트 가공식품 속의 각종 화학첨가물질들, 음식물에 잔류된 수많은 환경독소, 방사선, 부적절한 단식 등 현대인의 불건전한 식습관은 모두 유익한 균들의 생존을 억제하고 유해균들의 증식을 불러오는 독인 셈이다.
유익한 미생물들이 줄어들고 유해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 장 점막이 훼손되고, 영양성분 흡수와 독소 배출의 기능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중금속이나 유기화합물, 균이 배출하는 독소 등 나쁜 물질들이 더 잘 쌓이게 된다.
결국 몸속의 해독시스템이 과부하를 일으켜서 염증물질과 활성산소를 과잉 생성하며, 면역기능을 떨어뜨리고, 미토콘드리아를 훼손시키게 되는 것이다.
인체의 면역체계는 장 속의 미생물 총(微生物 叢, 군집되어있는 미생물)과 미토콘드리아, 해독시스템, 항산화 시스템, 자율신경계 등 다양한 시스템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유지된다. 이러한 사실을 그 동안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생명과학의 발전은 우리를 일깨워준다.
현대의학의 위기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활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 스스로 「생태적 삶의 습관」을 실천하는 데 있다.
만성질환은 아직까지 근본적 치료수단이 개발되어 있지 않다. 다만 치료목표는 조기진단으로 질병의 병태에 따른 관리에 달려 있으며 중증합병증의 방지가 현실적 접근방법이다. 따라서 내과 학 분야의 연구는 만성 성인병의 근원적인 발생기 전의 규명과 1차적 예방을 통한 질환의 완치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최근 의학의 발전방향은 개체의 질환수준에서 세포 하 분자수준으로 향하고 있으며 눈부신 업적을 이룩하고 있어 각종 난치성 질환의 원인이 분자수준에서 해석되고 있다. 그러므로 병태의 분자조절이 멀지 않은 장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인간에게 영원한 삶이 꼭 필요한 것일까?
중세까지만 해도 영원한 삶은 신이 내린 가장 무서운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사회발전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영원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앞서 언급한 내과 학의 범주를 넘어선 「뇌 과학(腦 科學)」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 보자.
우리의 뇌는 그 가능성이 엄청나지만 결국에는 그 한계가 있다는 점도 앞 절에서 지적했다. 아무튼 4차 산업혁명시대를 주도하다시피 대세로 떠오른 뇌 과학(腦 科學)은 뇌의 작동 원리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학문이다.
작금에 와서 뇌 과학은 뇌신경계의 신경 생물학 및 인지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미시적 또는 거시적 수준에서 뇌의 구조 및 기능의 근본 원리를 파악해 이를 여러 산업 분야에 응용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뇌는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기관이다. 뇌세포는 ‘뉴런’이라 불리는 신경세포와 보조 세포인 ‘아교세포’로 나뉜다. 뉴런은 약 1,000억 개에 이르고, 나머지 아교세포는 그 10배에 해당한다.
뉴런의 생김새는 마치 전깃줄처럼 보이는데, 하나의 뉴런은 최대 1만 개까지 다른 뉴런들과 연결되어 있다. 1,000억 개의 신경세포에 1만 개의 연결을 곱하면 우주의 별보다 더 많은 연결 고리들이 우리 뇌 속에 있는 셈이다.
뉴런은 뇌에서 정보를 처리한다. 뉴런끼리 연결을 통해 정보 신호를 주고받는다. 뉴런의 연결을 살펴보면 좁은 공간이 있는데, 이를 ‘시냅스’(연결 고리)라고 한다. 이곳을 통해 전기 신호나 화학물질을 주고받는다.
시냅스는 경험이나 학습에 의해서 매우 빠른 속도로 만들어진다. 자주 사용하는 연결은 강화되고, 사용하지 않는 연결은 사라진다.
뇌의 성장 또한 뇌세포 수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시냅스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냅스가 많을수록 뇌의 무게는 늘어난다.
뇌의 활동에 따라 일어나는 전류 또는 그것을 도출(導出)·증폭하여 기록한 것을 「뇌파」라고 한다. 뇌 속의 신경세포가 활동하면서 발산하는 전파.
뇌파는 뇌기능의 일부를 표시한다. 그 내용을 보면 현재로서는 고등한 정신현상, 예컨대 사고·감정·의지 등은 뇌파의 파형으로부터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뇌 전체의 활동상태, 예컨대 눈을 뜨고 있는가, 잠자고 있는가 하는 의식수준정도는 뇌파에 상당히 정확하게 나타난다.
그 밖에 뇌의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그것에 대응하여 이상뇌파가 나타나는 일이 생기고, 특히 극파(棘波:스파이크)라고 하는 이상파형은 전간(癲癎)의 진단이나 치료에 불가결하다.
임상의학 면에서 뇌파는 주파수나 진폭 외에 위상(位相)·파형·파동 량·분포·연속성 등에 대해서 세밀하게 검토된다. 또한 뇌파에는 정상인에서 볼 수 있는 정상뇌파와 병적 상태에서 나타나는 이상 뇌파가 있다.
정상뇌파 이외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상뇌파라고 할 수 있으나 정상뇌파도 개인차가 있고 지문(指紋)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다종다양하다. 그러나 결국은 어느 범위 내로 한정된다.
뇌파와 관련하여 <인지심리학>에 대하여 눈을 돌려보자.
인지심리학은 인간의 마음과 정보처리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현실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매우 많다.
그 일례로 ‘애플’의 아이 폰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디자인과 인터페이스 개발 시 디자이너 뿐 만 아니라 인류학자와 심리학자, 공학자 등이 함께 참여했기 때문이다.
인지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정보처리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이는 당연한 결과다. 필시 초기 심리학자들의 마음에 대한 연구는 비과학적이었다. 주로 사용했던 방법이 내성법 정신물리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험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정직성만을 믿어야 했다. 또한 정직성과 무관한 감각기관의 순응이나 피로로 인한 오류와 편향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제 와서 현대의 인지심리학자들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객관성과 정확성을 확립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사용한다.
뇌는 난로가 열을 내듯이 의식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차라리 악기에 비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악기는 혼자서 음악을 만들거나 소리를 내지 못한다. 사람들이 음악을 만들거나 소리를 내도록 해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뇌라는 클릭의 생각, 더 기본적으로 말해 소화가 위의 현상이듯이 의식이 뇌의 현상이라는 생각은 저절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환상이다.우리가 우리의 뇌라는 생각은 과학자들이 알게 된 무언가가 아니라, 과학자들의 선입견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를 구속하는 편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 과학과 생명과학의 연구목적은 인조인간의 탄생에 있다. 그러한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있는 「생명윤리」의 측면에서 “인간은 소우주”이며, “의술은 인술”이라는 의미를 돼 새겨볼 필요가 분명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생명과학 적 주장을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에서 인간 생명체의 복잡다단한 구조와 면역체계까지도 대략 탐색할 수 있었다. 또한 뇌 과학의 추이와 심리학과의 관련성도 짚어 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과 숙명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동물성에 국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뇌 과학에 열광하지만 과학의 분석적 방법론으로 풀지 못할 숙제는 이미 고대사회에서 모두 다루어진 문제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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