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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허물을 짓고 살아간다. 자기 자신에게 건, 가까운 사람에게 건, 역사와 민족에게 건, 심지어 하찮은 미물에게 건.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삶 자체가 허물을 짓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부끄러움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이만현이 지은 치암고택은 원래 도산면 원촌리에 있었다. 안동댐이 건설돼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자 1976년 현재의 안막동으로 옮겼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호인 치암고택은 본채 22칸 165㎡ ㅁ자형 기와집으로, 5칸의 솟을대문과 바깥채가 있다. 안채 지붕보다 사랑채 지붕이 더 높은 것이 특징이다. 사랑채 왼쪽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오른쪽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인 팔작지붕으로 꾸며져 있다. 사랑채에 감실(龕室)이 있고, 높다란 헌함(軒檻) 마루가 특색이다.
상방, 중방, 부엌, 창고, 화장실 등이 있다. 사랑채는 아랫방인 성명재(誠明齋), 윗방인 경업재(敬業齋), 중간마루인 낙성당(樂聖堂), 누마루방인 호도재(浩道齋), 누마루인 청풍헌(淸風軒)으로 구성돼 있다. 문간채는 동쪽방인 일건재 (日乾齋), 서쪽방인 석척재(夕齋), 중간방인 학구재(學究齋), 화장실인 졸성실(卒性室), 샤워실인 탁청실(濯淸室)로 나뉜다. 바깥채인 불원재(不遠齋)에는 북쪽방인 상덕재(尙德齋), 남쪽방인 계명재(繼明齋), 아랫방인 수덕재(修德齋), 아랫방 서재인 간이재(簡易齋), 아랫방 거실인 대화당(大和堂)이 있다. 본채 동편에는 잠룡당(潛龍塘)이라는 연못도 있다.
치암고택은 크지 않다. 대신 거실과 사당, 정자 등이 오밀조밀하게 어우러져 있다. 문을 들어 올리면 사랑방에서 별당까지 한 공간이 된다. 이동수 씨는 “고조할아버지께서 고택 장단점 연구를 많이 해 공간 활용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숙박하는 사람들은 탈 만들기, 김치 만들기, 떡 만들기 등의 전통문화 체험을 할 수 있다. 특히 매주 토요일 오후 7시에는 가야금 연주도 경험해 볼 수 있다. 군자리에서부터 봉화 청량사까지 30㎞ 구간 내 문화유적이 100여개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종교와 사상을 초월해 새로운 관광문화 패러다임을 만들자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유교문화협회장이기도 한 이동수 씨와 용수사 주지 정왜 스님 등을 주축으로 5월 30일 국학진흥원에서 ‘도산구곡 문화연대’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1895년) 때 항일의병 운동에 나섰고, 1910년 나라를 뺏기자 24일 만에 굶어죽었다. 향산의 장자인 이중업((李中業, 1863~1921) 선생과 부인 의성김씨 김락(金洛, 1862~1929) 선생 또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김락 선생은 일제의 고문으로 실명했으며, 그의 아들 이동흠(李棟欽, 1881~1967)도 아우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이만도 선생 일가 또한 퇴계 후손이다. 처마 끝 빗물받이의 투닥거리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각성(覺醒)의 소리였다.
#머물 곳 일반 가족들은 문간채가 좋고, 바깥채에서는 취사도 가능하다. 취사 시 1만원이 추가된다. 일건재, 학구재, 석척재 등은 3만원.
#가볼만한 곳
#찾아가는 길 도산서원 방향 2㎞ 지점에 있다. 대중교통은 안동버스터미널을 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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