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사람 : 예수와 사람의 아들의 수수께끼(월터 윙크)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제5부 유대교 신비주의와 영지주의 속의 참사람
영지주의 속의 참사람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하는 정의는 없다. "그노시스(Gnosis, knowledge)"는 "영지주의"나 "영지주의자들(Gnostics)"과는 구별해야 한다. 후자는 2세기에서 4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일종의 신지학을 말하며, 그 특징은 집단 무의식과 거친 형이상학적인 사변에 대한 직관적 파악에 있었다.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이 악한 세상을 만든 것은 (최고신이 아니라) 데미우르고스(a demiurge, creator god)라고 말했다. 어떤 경우엔 영혼과 육체에 대한 철저한 이원론으로 인해 금욕주의로 이어지기도 했다. 다른 한편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바울을 비롯해서 모든 초기 기독교 저자들이 사용했는데, 단순히 내적인 혹은 영적인 지식을 뜻했다. 헨리 고르빈에 의하면, 그노시스는 "구원을 위한 지식"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내적인 변혁을 가져오는 덕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노시스에 대한 그런 정의는 사실상 영성의 길에 들어선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마이클 윌리암스는 "영지주의"란 19-20세기 학자들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지주의"와 같은 광범위하고도 정리되지 않은 현상을 정의한다는 것은 묵시론, 신비주의, 기독교, 유대교, 혹은 특수성과 일관성이 결여된 보편적 범주를 정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모든 범주들은 서로서로 어음새가 느즈러져서 흐리고 불분명한 주연부를 형성하고, 때로는 다른 일반적 범주와 중첩되기도 한다. 따라서 영지주의는 기독교와 커다란 중첩부를 지녔고, 거의 같은 정도로 유대교와도 중첩되고, 이방 종교와는 좀 적은 부분이 겹친다. 그런 주연부 속에는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고, 경계선에서는 그런 차이들이 거의 그 정체성을 흐리게 만들 지경이 된다. 나는 "영지주의"가 참사람 같은 분인 하느님에 대해, 또 "사람의 아들"의 정체성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에만 주의를 국한하기로 한다.
유대교 신비주의 안에 나타난 참사람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매력은 2세기에서 4세기에 걸친 영지주의자들 가운데 밝은 빛을 내며 타올랐다. 영지주의자들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수수께끼 속으로 누구보다도 깊이 파고들었다. 이들 두려움 없는 신지학 숭배자들은 에스겔이 본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겔 1:26)인 하느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많이도 했다. 눈부신 이미지들 속으로 상상력을 활용하여, 그들은 참사람인 하느님에 대해, 또한 참사람의 자녀인 "사람의 아들"에 대해 흥미롭고도 흔히 당황하게 만드는 생각들을 남겼다. 그러니 영지주의자들이 "그 사람의 그 아들(the son of the Man)"이란 말을 그토록 자주 사용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어 표현으로 두 개의 정관사가 붙어있는 "그 사람의 그 아들"에 대한 의미있는 해석을 내어놓았는데, 그들의 해석은 뒤의 말 "그 사람(the Man)"은 하느님(God)을 가리킨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1)
영지주의의 한 분파인 발렌티누스 파는 그들의 신앙의 독특한 성격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요약했다.
만물의 시조인, 시작 이전에 있는 자 혹은 생각 이전에 있는 자를 "참사람 같은 한 분(the Human One)"이라고 부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것이 위대하며 또한 숨겨진 신비라는 점, 즉 모든 것 위에 그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이 힘을 참사람(the Man)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구세주는 자기 자신을 그 사람의 그 아들이라고 명명한다.
"주요 교단" 기독교회는 참사람에 대해 사실상 침묵하고 있었지만, 영지주의자들은 그것이 바로 구세주라는 인물의 탁월한 지칭들 가운데 하나라고 여겼다. 분명히 그 표현을 "정통" 교회에서는 사용하기를 회피했는데, 영지주의자들이 그 표현을 접수하여 제멋대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아버지,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로고스(Logos, 말씀), 소피아(Sophia, 지혜) 등의 칭호도 사용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참사람", "그 사람의 그 아들" 등을 비교할 수 없는 높이에 치켜 올려서, 거룩한 신을 위한 새로운 언어를 창조했다. 의심할 바 없이 영지주의자들은 재담을 즐겼다(아담의 아들=사람의 아들=인간=참사람의 아들=하느님의 아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인간 아담의 아들이요 하늘 보좌 위의 참사람의 아들이다. 여기에서도 또 다시, 이해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인간"으로 여겨졌다.2)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50회 이상 나오는 나그함마디 도서의 영지주의 문서들을 탐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그리고 초기 교부들의 저작들 속에서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2차 보고들을 조사한 후, 『헤르메스의 문집』속의 포이만드레스(Poimandres)로 마감하기로 한다.
A. 나그함마디 도서 속의 참사람
나그함마디 도서를 구성하고 있는 필사본들은 1945년에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그때까지 발견되었던 영지주의 운동에 대한 정보들 가운데 가장 풍부한 자료였다.
영지주의 작품들에서 종종 그렇듯이, 나그함마디 소책자 『에우그노스토스(Eugnostos)』에서 "사람의 아들(son of man)"은 신의 이름인 "참사람(Man)"과 연결된다. 이는 이미 예상된 바로서, 만일 "참사람의 아들(son of Man)"이 있다면, "참사람(Man)"이라고 이름 지어진 아버지-하느님이 존재해야 하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있을 때면 언제나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Tripartite Tractate 51:14-15, NHL 1). 대문자로 쓴 것(Man에서)은 의미가 있는 문제다. 사실상 성서의 모든 영어 번역본에서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라고 읽는데, 두 번째의 정관사를 생략할 뿐만 아니라, 아들(Son)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써서 그 단어가 사람(man)이란 단어보다 더 의미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만일 우리가 대문자를 두 번째 단어인 사람(man)쪽에 사용해서 "son of Man"이나 "the son of the Man"이라고 바꾸면, 강조되는 부분이 변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의미에 공헌하여 이 참사람(Man)이 누구며, 또 누구의 아들이 세상의 구세주였는가를 깊이 생각했다.
더글라스 패로트는 『에우그노스토스(Eugnostos)』속의 다섯 가지 중요한 신적 존재를 열거한다;(1) 알 수도 없고, 태어나지도 않은 시조, (2) 자기-아버지(Self-Father)라 부른 그 시조의 반영, (3) 자기-아버지가 위격으로 실체화된 권능인 남녀양성의 불멸의 사람, (4) 불멸의 사람의 남녀양성인 아들, 참사람의 아들(Son of Man), (5) 참사람의 아들의 아들인 남녀양성의 구세주 등이다. 하느님의 여성적 측면들은 태어난 지혜, 위대한 소피아, "처음 태어난 소피아, 더러는 사랑이라고 부른 우주의 어머니" 등이 있다. 시조는 "우주의 아버지"이며, 『에우그노스토스(Eugnostos)』속에는 아직 창조된 질서에 대한 적대감은 없었다. 나중에 사실상 모든 『에우그노스토스(Eugnostos)』를 통합한 후대의 『신앙의 소피아』라는 문서는 그런 적대감을 덧붙였다.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신에 대한 이런 모든 인간적 이미지들을 자기의 표상으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단지 각 개인의 인격을 하늘에 투사한 것뿐만 아니라, 초인격적인 우주적 자기를 넌지시 비추는 것이기도 한데, 그 우주적 자기는 경계선들도 없고 우주와 함께 같은 공간에 걸치는 동연(同延, coexistensive)의 것이다. 이처럼 영지주의자들은 우리가 이제까지 조사한 저작들처럼, 새로 등장하는 인간됨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에서 페르시아로, 그리고 마침내 마니교를 통하여 중국에 이르기까지, 뭔가 강력하고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의 정신의 깊은 곳에서 끓어올라, 인간성을 그 최고의 잠재성에까지 이끌어 올렸다.
『세계의 기원에 대하여(On the Origin of the World)』에서는, "불멸의 광명의 참사람"이 높은 하느님으로, 혹은 적어도 높은 신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멜기세덱』에서도 신적인 "빛의 참사람"을 말한다. 신적 존재들을 인간으로 묘사한 영지주의 자료들은 많이 있다.3)
이처럼 하느님을 참인간으로 언급한 대부분의 이런 언급들의 배경에는 여러가지 방향으로 가다듬어 설명한 에스겔서 1장이 있다. 필로는 플라톤적 원형의 언어를 사용했다. 다른 사람들은 신화적 생각들을 엮어서 하늘의 "참사람"이 "참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타락한 세상의 인간을 구원하는 여러가지 방식들을 말한다. 그것은 논리적이었다. 즉 만일 하늘에 인간의 원형이 존재한다면, 그건 천상적 인간이고, 그 인간은 최고의 하느님으로부터 그 아래 다른 천상적 존재들에 이르는 것들의 융합일 것이다.
『부활에 대한 보고서』에서는, "이제 하느님의 아들은....사람의 아들이었는데....인간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므로 죽음을 정복했을 것이고, 다른 한편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충만함에로의 회복이 일어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원래 위로부터 왔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의 아들을 알아왔고, 그리고 우리는 그가 죽은 자들 가운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어왔기 때문이다. 이가 바로 우리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죽음을 격파했다....'고 하는 분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주요교단 기독교 신학자들이 말하는(그들이 사람의 아들을 언급하는 한) 그런 예수의 인간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그 역할은 반대라서, 사람의 아들은 구원자에게 올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4)
『진리의 증언』에서는 일부 정통 기독교인들의 희망, 즉 자신들의 순교가 육체적 부활을 보증할 것이라는 공허한 희망에 반대하여 논증한다. 이 책에서는 참된 영적인 부활은 사람의 아들에 대한 지식, 곧 자기에 대한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사람의 아들을 알게 되었으니, 곧 자기 자신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참사람은 초인적인 실재, 신의 형상, 내면의 신성이다. 그것은 죽음(혹은 순수한 가능성)에서부터, 이 책이 "부활"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가져온 생명이며, 보다 적절하게는 "중생"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중생을 통하여 얻은 자기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것이다. 그것은 참사람이라는 산파를 통하여 탄생한 인간 실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참사람은 사람 속의 진정한 자기, 즉 모든 역할들, 이미지들, 정체성들, 성취한 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 남은 잔유물, 상실했던 본질이 회복된 것과 같은 그 무엇이다. 이 본질은 내성을 통해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계시자인 참사람이 가져온 영적인 실재의 참된 성격의 계시에 대해 내면으로부터 개방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다.
『아담의 묵시록』의 주인공은 세트(Seth), 아담의 셋째 아들이다. 아담이 세트에게 말하기를, "나도 저 참사람의 이름으로 너를 부르리니, 저는 위대한 종족의 씨앗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그 "이름"은 세트인데, 그는 혈통으로는 "아담의 아들"인 동시에, 신적인 본성으로는 "사람의 아들"이다. 아담/인간의 아들인 이 세트가 마지막 강림에 나타나서 "죽음의 날에서 영혼들을 속량할 것"이며, 권세들보다 우월한 살아있는 몸의 인간 형체로 성육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권세들과 통치자들을 경멸하기 위해 표적들과 기적들을 행할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이 세상의 신이 사람의 아들인 그 참사람에 대항하여 큰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하여 그 영광은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가현설의 견해인데, 그 견해에 따르면 그의 인간의 형체는 고난을 당하고("그들은 그 사람의 육신을 처벌할 것이다."), 반면에 그의 신적인 측면은 그것이 왔던 영적인 세계로 돌아간다.
『요한의 경외서』에서는 참인간으로 나타난 하느님을 본 에스겔의 첫 씨앗과 같은 환상이 일련의 천상적 유출을 지닌 형이상학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유출들에 포함되는 존재는 완전한 인간 아다마스(Adamas)와 그의 아들 세트(Seth), 곧 사람의 아들(the son of the Man)도 있다. 여기서 계시된 궁극적 신비는 신의 이미지를 지니고 또 중재한 "첫 번째 사람"이 성서 이야기의 아담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먼저 초월적이며 남녀양성인 첫 번째 사고(First Thought)이며 참된 하느님의 자기 이미지라는 점이다.
그리고 한 음성이, 높여진 영원시대 위로부터 유출되었다; "참사람[아다마스(Adamas), "Man"]이 존재하고, 그리고 그 참사람의 아들[그 "사람/아다마스의 아들," 세트(Seth)]도 존재한다." 그러나 처음 통치자 얄타바오트는 그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이 그것의 어머니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몰랐다.
하느님은 여기서 본질적으로 참인간으로 보여지고, 그렇게 계시된다. 그러나 만물의 아버지는 "그들의 텐트 안에서"(요한복음 1:14과는 의식적으로 반대되게) 로고스처럼 단지 보일 뿐이다. 즉, 그는 "그 모습의 비슷함"으로 나타났지, 정통주의자들이 믿는 그런 육신이 되지는 않았다.
"왜 하느님은 첫 번째 참사람이라고 불러졌는가?" 하고 영지주의 전문가인 한스-마르틴 쉔케는 질문한다. 그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성의 원형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원형에 대한 생각은 창세기 1:26이나 플라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필로에 의해, 그리고 히브리서의 저자에 의해 발전된 것이다.
히폴리투스(170-235년)에 의하면, 영지주의자 모노이모스는 "인간(anthropos)이 모든 것(All, to pan)이다"라고 깜짝 놀랄만한 주장을 했다. 자아(the ego)에 대한 선언이라고 읽고 보면,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팽창이요, 바로 인간중심주의, 생태학적 황폐,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최악의 형태로 인도할 자만(自慢)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아무에게도 그리고 아무것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선언이라고 보면, 그 말이 주장하는 바는 온 우주에 스며있고 각개의 작은 알맹이에도 나타나 있는 궁극적 신비는 사실상 우리가 최상급으로 올린 가장 인도주의적인 성격들로 특징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에스겔이 본 거룩한 전차 보좌에 앉은 "참사람"은, 아무리 "정통적"인 신자들의 감수성에는 충격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신비에 대한 진리다. 마침내 정관사들(그 사람의 그 아들"the Son of the Man")이 에스겔이 본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언급으로서 완전히 이치에 맞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빌립의 복음서』에는 8번 나오는데, 거기에서 그 말은 "그리스도", "완전한 인간"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완전한 인간의 자손들", "아담/인간의 아들"은 "죽지 않고 매 순간 태어나고 있다". 하느님이 "참된 인간"이다. 이런 모든 칭호들은 변혁의 원형들이고, 혹은 융이 "초월적 기능"이라고 부른 것들이다. 동일한 혈통의 출생들이 81:14-24에 반영되어 있다.
사람의 아들이 있고, 사람의 아들의 아들이 있다. 주님은 사람의 아들이고, 사람의 아들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을 통해 창조하는 분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에게서 창조할 능력을 받았다. 그는 또한 나을 능력도 가지고 있다. 창조할 능력을 받은 자는 창조된 자이다. 나을 능력을 받은 자는 자손이다. 창조하는 자는 낳지 못한다. 낳는 자는 창조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
참사람은 자손을, 즉 없어지지 않을 종족을 나을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는 어린이를 낳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보고자 하는 그것 자체가 되지 않고서는 실재의 영역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진리의 영역 속에서는 인간이 이 세계 속의 인간들과는 같지 않은데, 인간들은 자신들이 태양이 되지 않고서도 태양을 보며, 하늘이나 땅이나 등등 그것들이 되지 않고서도 본다. 그보다는 오히려, 만일 당신이 거기서[진리의 영역 속에서] 무엇인가를 보았다면, 당신은 그것이 되고 만다. 만일 당신이 영을 보았다면, 당신은 영이 되었을 것이고, 만일 당신이 기름 부은 자(그리스도)를 보았다면, 당신은 기름 부은 자(그리스도)가 되었고, 만일 당신이 아버지를 보았다면, 당신은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처럼 여기 세계 속에서 당신은 모든 것을 보지만, 당신 자신은 보지 못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당신은 당신 자신을 본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이 보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우리가 보기를 욕망하는 바로 그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는 그 아이디어가 놀라운 인식을 가지고 거꾸로 되었으니, 우리가 된 그 무엇을 우리는 본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그것 자체가 되지 않고서는 실재의 영역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거리는 없어진다. 바라보는 것이 더 이상 거리, 관점, 휘말려들지 않음을 얻는 수단이 되지 않는다. 그 대신, 바라보는 것이 존재속에 수렴하고, 독립적인 것이 동일함에로 흡수되며, 독특한 것이 합일에 굴복한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그렇게 그는 보는 것이다"라고 썼을 때, 그는 이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도 역시 성립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이 본 그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참사람의 자녀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참사람은 단지 존재함으로써 그리고 바라보아짐으로써 낳는다. 밴 하비는 이를 요약해서, "우리 인간들은 특수한 삶에 직면하였을 때에만, 단지 일반적인 삶에 대한 진리를 결정하는 것만 같다"고 말한다. 참사람을 본다는 것은 지배체제의 기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참사람을 본다는 것은 하나의 참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기름 부은 자(그리스도)를 보았다면, 당신은 기름 부은 자(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이는 마술이 아니다. 이것은 진리의 힘으로서, 방어해줄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지와 부패화 속임수의 밤을 몰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빛이다.
『빌립의 복음서』의 "영지주의"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의식하는 "정통파" 기독교인이 지지하는 것보다 더 과격하지는 않다.5) 그러나 『빌립의 복음서』는 또한 놀랍게도 포이어바흐와 비슷한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 "태초에 하느님(God)이 인간을 창조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이 하느님을 창조한다. 이게 바로 세상에서 하는 짓인데, 인간들이 신들을 창조하고 그들의 창조물들을 경배한다. 신들이 인간을 경배하는 것이 더 온당할 것이다."*)
* 참조, 야훼는 만유의 주요, 예수는 온 인류의 스승
얼핏 보기엔, 이는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를 조롱하는 전형적인 모습 같다. 그러나 인간들이 "신들"을 창조한다고 말하기보다는,『빌립의 복음서』서두에는 "하느님"을 거론한다. 이것이 문장을 뒤집어서("신들"을 창조한다고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인간들이 그들 자신의 신-이미지들을 만든다는 주장으로 만든다. 물론 『빌립의 복음서』는 처음에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확신에서 포이어바흐와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빌립의 말에서, 모든 사람이 숨겨두고자 했던 심연의 입구를 열어 제친 것처럼 느낀다. 즉, 인간 변혁의 계시는 인간(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었는데)과 하느님 사이의 상호 협력적 공동창조의 행동이라는 심연 말이다.
빌립이 말하는 "완전한 인간"이란 말도 종말론적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그 때, 나는 말했다. "선생님,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아버지가 보내신 진리의 영의 존재를 보여줄 참사람이 모범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때까지다. 그러면 그가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축성(기름 발라줄)해줄 것이며...그러면 그들은 권세자들의 것이었던 죽음을 자기들의 발로 짓밟아버릴 것이다."
이런 진술은 요한 1서 3:2과 너무도 비슷해서, 혹시 이것이 그것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이나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어쨋든 이 두 본문들이 반영하는 것은 하느님의 인간성 속에 인간적인 계획의 최종적인 성취를 열망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복음서』속에는 기억할 만한 사람의 아들 말씀이 있다;
"아무도 너희에게 '여기를 보아라!' 혹은 '저기를 보아라!'라고 말하면서, 너희를 곁길로 나가게 인도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이 너희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뒤를 따르라! 그를 찾는 사람들은 그를 찾을 것이다. 그럼 나아가 왕국의 복음을 전파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넘어서는 어떤 규정들도 만들지 말고, 율법을 주는 자처럼 율법을 주어서 네가 그 율법에 속박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슬퍼했다. 그들은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가서 사람의 아들처럼 왕국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들이 그[사람의 아들]를 살려두지 않았다면, 어찌 우리들이라고 살려두겠습니까?"라고 했다.
참사람이 누가복음의 병행구절들 속의 하느님의 왕국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누가 17:21]). 더욱 정확히는 사람의 아들이 그 왕국이 되었다. 추종자들이 전파한 하느님 왕국의 복음은 사람의 아들이 "왕국"이란 말의 최종목표요 내용이란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와 교회들 모두 속에서, 선포하는 자가 선포된 자로 되어버렸다. 종교의 과제는 예수가 한 것을 계속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구세주로서 신격화된 예수를 사람의 아들과 연합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 "너희 안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마리아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마리아가 예수에게 묻기를, "주님, 이제 환상을 본 그녀는 그것을 혼을 통해서 봅니까, 영을 통해서 봅니까?" 구세주는 대답하기를, "그녀는 혼을 통해서 보는 것도 영을 통해서 보는 것도 아니고, 그 둘 사이에 있는 마음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이는 마치 헨리 코르빈이 "상상의 영역"이라고 부른 것과 같이 들린다. 참사람은 "내부에서" 경험하는 것이며, 감각이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상에 의해 하늘의 왕국에 인도된다. 혹은 그 반대도 옳을 수 있다; 상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참사람의 왕국과 함께 우리가 하나됨을 깨닫게 하는 비법을 전수한다.
이처럼 철저한 내향성과 상상을 강조하는 것은 영지주의가 세계 종교들에게 남겨준 위대한 선물들 가운데 하나다. 위대한 교회가 영지주의에 의해 위협을 느낀 나머지 그 심오한 통찰들을 거두어들이기보다는 쓸어없애버리려고 노력한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우리로서는 영지주의자들에게 "정신내적 단순화"(정신의 내부 세계가 외부 세계보다 훨씬 큰 중요성을 갖는다고 보는 경향)를 피하도록 권고하고 싶다. 왜냐하면 참사람은 "이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들, 나의 형제자매들 가운데"(마태 25:3)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7:21에 대한 최초의 주석자가 말했듯이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또한 너희 밖에도 있다"(도마복음서 3).6) 신비가로서의 믿는 자는 하늘의 실재에 직접 접근할 수 있고, 더 이상 교리나 규칙들의 도덕주의자가 명령하는 대로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넘어서는 어떤 규정들도 만들지 말고, 율법을 주는 자처럼 율법을 주어서 네가 그 율법에 속박되지 않도록 하여라". 율법으로부터의 이런 자주적 자유는 마가복음 2:23-28에서 참사람의 권위 및 요한복음서의 사랑 명령의 권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의 직접적인 추론 결과나 다름없다. 나그함마디 문서들로부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의 권면이 방탕과 무법에로 인도하지 않았고, 금욕주의와 때로는 성적(性的) 활동을 절제하는 것에로 인도했다는 점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참사람은 내부에 그리고 상상의 영역 속에 있다. 원형적으로는, 참사람은 말하자면 "완전한 사람"이고, 자기를 충만한 완성에로 이끄는 자석이다.
....
1) 꼽트어(Coptic) 나그함마디 문서들은 일반적으로 "the son of the man"이라고 두 개의 정관사를 다 사용했으니, 네 복음서 전통에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2) 시몽 뻬뜨레밍은 영지주의적 구원자 신화의 아이디어는 3세기의 마니교보다 먼저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보다 더 일찍 영지주의적 사고를 이해하는 데 사용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사람의 아들이란 이름은 영지주의 신화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을 '사람(Man)'이라고 부른 영지주의적 신화가 복음서 기자들의 '사람의 아들(Son of the Man)'에 의해 설명된다.
3) 사도바울의 기도문(The Prayer of Apostle Paul 17-18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그리스도라기보다는 "영, 진리의 성령"으로 보인다. 세기의 기원에 대하여는 하느님을 사람으로 말한다; "나는 빛의 사람의-즉 그 이름이 "사람"인 초월적인 하느님의- 권능을 통하여 너[archons]의 일을 파괴하려고 왔다." 또 다른 영지주의 문서들에서는, 모든 것의 아버지가 "당신의 스스로 발생하는 마음속에서 그리고 그 생각과 완전한 아이디어 속에서 '참사람(Man)'을 출생하였다고 예배를 통해 찬양 받는다...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이 당신이옵고,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의복들처럼 입었으며, 창조물들을 자신의 둘레에 겉옷처럼 둘러쌌습니다. 이 분이 바로 모두가 알기를 기도하는 참사람(Man)입니다." 이 사람이 구원의 대리자이다. 이는 땅의 존재가 아니라, 신적인 로고스에 비슷한 그 무엇이다.
4) 복음서들 속과 영지주의 속에서 참인간의 자녀는 매우 다르다. 타인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비천하고, 집도 없고, 별 볼 일 없는, 혹은 보통의 인간으로 처참한 죽임을 당한 예수는, 영지주의 문서들 속에서는 지상의 고통과는 사실상 관련이 없는 신적인 존재로 대체된다.
5) 빌립의 복음서는 정경 복음서 밖에서 발견되는 몇 안 되는 진짜 비유들 가운데 하나를 포함하고 있다. "주님이 레위의 염색 작업장에 들어갔다. 그는 72가지 서로 다른 색깔의 염료들을 한 통에 집어넣고, 건져내었더니 모두 하얗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바로 그렇게 사람의 아들은 염색공으로 왔다'라고 했다". 그가 무엇이었든, 인간의 아들은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변혁시키는 자다. 흰색의 언급은 그들이 깨끗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6) 도마는 신적인 만남을 인간 심리내부의 것으로 단순화하는 것을 피한다. 77의 말씀을 보라("나무를 쪼개어 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돌 한개를 들어 올려보라, 거기에서도 너는 나를 볼 것이다"). 그리고 113("아버지의 왕국이 땅위에 퍼져 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