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 4: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요한 계시록에는 보좌라는 단어가 46회 나온다.
땅에는 세상의 왕과 왕의 보좌가 있다. 그러나 땅 보다 훨씬 거대한 세계인 하늘의 세계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당시 로마 황제는 하늘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교만하게도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며 세상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이 열린 하늘 문을 지나 하늘 세계를 보니 이 땅의 황제는 가짜 권력자이고 온 우주의 진짜 황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서 하늘 위의 세상과 하늘 아래의 세상을 다스리고 계셨다. 우리는 땅에 살지만 땅의 황제를 두려워하거나 아부하거나 섬길 필요가 없다.
전염병이 돈다고 모여서 예배하지 말라고 한다고 세상 사람들과 세상 권력의 비난이 두려워서 모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늘 시민이 아니다. 하늘 시민들은 땅에 살지만 땅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는다고 해도 예배를 멈출 수 없다. 하늘 보좌에 앉아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 씨가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김정은 씨가 급사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사실처럼 믿었다. 그런데 며칠 후 갑자기 김정은 씨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자 김정은 씨가 죽었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망신을 당했다. 그러면서 가짜 뉴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별의 별 소문이 다 있었다. 혈관이 막혀서 수술을 받다가 수술을 제 때 못해서 의식 불명이라는 소문이 횡횡했고, 최근에는 아예 이미 죽은지 며칠이 지났다고 확신하는 국회의원들이나 기자들이 북한에 사변이 일어났다는 기사를 마구 써서 배포했다. 그런데 김정은 씨가 갑자기 북한 비료 공장 준공식에 딱 나타나서 자신의 모습을 TV로 통해 드러냈다. 심장병이니 혈관병이니 어쩌고 저쩌고 했는데, 담배를 꼬라물고 유리 재떨이에 담배재를 탈탈 털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상상해서 이야기하던 언론사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거짓 뉴스는 코로나처럼 문제이다. 아니, 코로나는 진정될 기미가 있지만, 거짓 뉴스는 진정되지 않고 항상 유행한다. 지금 유행하는 전염병의 이름은 코로나이다. 거짓 정보 유행병의 이름은 '인포데믹'이다.
옛날부터 거짓 정보 유행병은 사람들의 정신을 병들게 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거나 죽으신 것인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보좌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인간에게 퍼져 있는 가장 큰 전염병이다.
24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하나님이 모든 만물에게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바울도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것들에 대하여 강압적이고 통치하시는 분인가?
요한이 하늘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의 아래 네 생물이 뭔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고, 24명의 장로들도 하나님 앞에서 계속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특히 장로들은 하나님이 내려 주신 금관도 쓰고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모든 존재들을 일방적으로, 강압적으로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자식들이다. 심지어 지옥까지도 하나님의 계획하에 창조되어진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 나라 왕들의 이야기 속에 아버지가 아들을 쌀독에 넣어 굶겨 죽인 비극적인 이야기가 있다. 영조 대왕이 사도 세자를 쌀 독에 넣어 굶어 죽인 이야기이다. 영조가 왜 사도 세자를 죽였는지 역사가들이 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사도 세자가 연쇄 살인마처럼 사람들을 100명이나 죽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죽였다는 주장도 있고, 당파 싸움 때문에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들 사도 세자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혹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고 해도, 아들을 그렇게 죽게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현재의 왕과 앞으로 왕이 될 왕자는 동격이다. 지금 세대와 앞으로 올 세대는 지배 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동격 관계이어야 한다. 그런데 영조는 다음 세대의 왕인 사도 세자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았다.
영조는 자신의 나이 42세 때 얻은 사도 세자를 너무나 아꼈다. 아들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일찍 죽어서 아들이 없었던 터였다. 사도 세자가 태어나자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후계자인 세자로 책봉하였다. 사도 세자는 매우 영리해서 세 살 때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러나 영조의 사랑은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사랑이었다. 사도 세자가 청년으로 성장했을 때 책을 읽는 것 보다는 무예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들과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사도 세자가 15세 되었을 때 영조는 아들에게 양위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그것은 좋은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홧김에 한 것이었다. 겨우 왕의 업무를 대신 보는 대리청정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는데, 왕의 업무를 보는 사도 세자의 늠름한 풍체와 위엄 있는 자세와 목소리는 대신들을 압도했고 감히 사도 세자에게서 고개를 드는 신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조는 그런 아들이 무조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도 세자가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고 있는 때에 사도 세자의 뒤에 앉아서 입을 닫지 않았다. 하루는 어떤 어려운 일에 대하여 신하들이 방책을 물었다. 사도 세자는 너무 어려운 문제인지라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뒤에 앉아 있던 영조가 "도대체 그런 거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거냐?"라고 신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 또 어떤 일에 대해서는 주도적으로 결정해서 처리하려고 하면 "네가 왕이냐? 그런 일은 왕인 나에게 먼저 물어보고 결정해야지."라고 하며, 신하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한 번은 아들과 싸우다가 아들에게 칼을 주며 자살할 것을 명령한다.
”내가죽으면조선의사백년종사가다망하겠지만,네가죽으면종사는보존할수있을것이니네가죽는것이옳으리라”
사도 세자는 그 칼로 자살하려고 했지만 대신들이 다 뜯어 말려서 겨우 일단락이 되었다.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 아버지 밑에서 대리청정을 하며 사도 세자는 점점 미쳐 갔던 것이다. 그렇게 이상행동을 하게된 사도 세자를 영조는 쌀독에 넣고 음식과 물을 주지 않았다. 7일이 지나 사도 세자는 죽었다. 조선 왕조 최고의 비극이라고 평가되는 일이었다.
이것이 어찌 영조와 사도세자의 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린이 주일을 맞아서 자녀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생각하게 만드는 역사적인 사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셨다고 해서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대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의 대속 제물로 삼으실 때도 아들을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죽이시지 않고 충분한 의논을 하셨다고 판단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지시기 직전까지 당신의 아버지와 소통하고 있었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우리를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신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시고 로보트처럼 움직이시는 분이신가? 하나님 아버지가 그런 아버지라면 자기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못마땅해서 쌀독에 넣어 죽인 영조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요한에게 왔을 때도 요한은 자기를 잃지 않았다.
(계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임하신다. 성령에 감동된다는 말 자체가 마음이 부드럽게 열린 사람에게 성령님이 오신다는 뜻이다. 성령님은 일방적이거나 강압적으로 우리 마음을 점령하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은 무당이 귀신이 들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무당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 있다. 가짜 무당 말고 진짜 무당은 귀신이 들려야 점을 칠 수
있다. 귀신이 무당에게 들어와서 무당의 입을 빌어서 말을 한다. 무당은 귀신이 들리면 점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반말을 하거나 욕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무당은 그런 점이 좋다고 자랑을 하기도 한다. 반말이나
욕을 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에게 들어온 할아버지 귀신이나 할머니 귀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나이가 어려도 할아버지 귀신이 오면 점을 보러 온 사람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반말도 할 수 있고 욕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에게 귀신이 씌이면 그 순간 동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점을 보러 온 사람들이 이미 반말과 욕지거리를 다 듣고 난 다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도리어 점보러 온 사람들에게 묻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녹음을 해서
들려 주기도 한다고 한다. 귀신이 씌이는 것은 무당의 영혼이 점령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그런 식으로 오지 않으신다. 성령은 결코 사람에게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와서 영혼을 점령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영이 오시면 우리의 영혼과 교류, 교통이 이루어진다. 성령은 결코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칠 무렵 예루살렘을 방문하려고 하였다. 한 무리의 선지자의 무리가 성령에 감동되어 바울에게 말하길 예루살렘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해 주었다.
(행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그러나 바울 역시 성령에 감동 되어 자신은 예루살렘에 가겠다고 말한다. 선지자들에게 오신 성령님과 바울에게 오신 성령님은 같은 성령님이시다. 그러나 성령님은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임하시지 않는다. 바울은 성령의 음성을 들었으나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행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여기까지가 성령이 바울에게 하신 말씀이고 바울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자기가 작정한 대로 예루살렘으로 갔고, 결국 거기서 체포되어 로마까지 압송되고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맺음)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을 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감사를 드린다.
영광과 존귀와는 다른 것이 감사이다. 감사는 인격과 인격이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 대 인격으로 대하신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을 대적하게끔 창조되어진 마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마귀는 한 가지를 결코 하지 않는다. 감사이다. 감사는 하나님이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주시는 존재들만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