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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다른 점!
사도행전 7:54-60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질문은 “기독교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독교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질문은 기독교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조차 “기독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양한 주장들을 쏟아내면서 혼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회복지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사회의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정치개혁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교회가 이런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앞서서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어렵게 여기는 것은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히 세속화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바르게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원화된 오늘의 시대에 우리 각 개인과 교회 전체에 정말 필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 진정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는 기독교의 신앙과 정체성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스데반 이야기의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관한 내용은 앞 절에서 끝났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세워진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당한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사렛 예수가 구약성경이 말하는 모든 표상의 마침이요,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에 체포되었습니다. 법은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당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던 유대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판에 대한 정당한 판결문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살해당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스데반은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특별히 세 명의 인물을 통해 그들이 저질렀던 잘못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한 일은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조상들의 행위를 ‘핍박’과 ‘살해’라는 범주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즉 ‘핍박’에 관하여는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는 말로, ‘살해’에 관하여는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다”는 말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예리한 지적은 역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비록 짧은 적용에 지나지 않지만 단어 단어와 구절구절마다 유대인들의 완악함에 대하여 서릿발 같은 준엄한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후벼 파는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이 보였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본문 5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당시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은 인본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구약성경과 조상들의 전승을 편협하게 왜곡해서 해석했습니다. 이에 대해 스데반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아주 탁월하게 해석을 하면서 저들의 잘못과 오류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스데반의 탁월한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은 “마음이 찔렸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마음에 찔려”라는 단어가 두 곳에 나옵니다. 하나는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2장 37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무리들이 보였던 반응입니다. 그런데 우리말로는 “마음에 찔려”라고 같은 단어로 번역했지만, 헬라어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무리들이 “마음이 찔렸다”는 헬라어는 ‘케테뉘게산’이라는 단어로 “그들이 찔려 관통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즉 그들의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후회와 절망감에 사로잡혀 마치 그들의 마음이 창에 찔린 듯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무리들이 “마음이 찔렸다”는 헬라어는 ‘다에프리온토’라는 단어로 “마음에 조각조각으로 톱질되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극한 분노가 일어나서 그들의 마음이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NIV영어성경에서는 “그들은 격노하여 펄펄 뛰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마음이 뒤틀린 그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앞서 “마음이 찔렸다”는 것이 내적인 표시였다면, “이를 갈았다”는 것은 극한 감정과 분노의 외적인 표시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그들의 분노가 스데반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은 물론이거니와 말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 설교가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권위가 있고 설득력이 있는 설교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얼마든지 거부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성령 충만하고 의로운 자의 부르짖음에 어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격분과 분노로 속이 뒤틀리고 이를 갈면서 돌을 들어 의인을 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한 설교라도 때때로 엄청난 반대와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처럼 극히 대조적인 반응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똑같은 장소와 시간에 똑같은 말씀을 전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통회하며 순종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감정이 뒤틀어지고 대적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이처럼 대조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초대 교부였던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문제를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교리에서 이해를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태초에 예정하신 사람이요, 말씀 앞에 분노하고 대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태초에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적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의 마음에 성령의 빛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무리들이 보였던 반응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무리들이 보여주었던 결과와는 너무나도 판이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이 완악하지 않도록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심령에 넘치는 은혜가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의 묵은 땅을 갈아엎어서 새롭게 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유대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5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마음이 뒤틀려 이를 갈던 유대인들의 반대는 무자비한 행동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데반을 질질 끌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 돌로 쳐 죽였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돌로 칠새’라는 말은 그들이 한두 번 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격정과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해서 돌을 던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악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의 추악한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탄의 사주를 받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본래 불의에는 사랑과 자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짓밟는 일에는 눈곱만큼의 자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당신의 자녀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승천과 오순절 강림 사건으로 태동한 교회 역사에서 첫 순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끊임없이 뿌려질 순교의 첫 핏방울이며, 이후에 이어질 수많은 순교의 모델이 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본문의 사건은 기독교가 진정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놀라운 그림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기독교가 무엇을 의미하며, 기독교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해 주는지를 알고 싶다면 오늘의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스데반 사이에 중대한 대조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러나) 스데반이 ….” 한글개역성경에는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이나 다른 한글 번역성경에는 ‘그러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여기 눈에 확 띄는 놀라운 대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는 단어 자체가 그 대조를 아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자신을 향해 이를 갈며 분노하고 있는 무리들 앞에서 스데반이 취한 행동은 비그리스도인과 상반되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속이 뒤틀리고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함 가운데 하늘의 환상을 기쁨으로 바라보는 스데반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보다 더 대조되는 모습은 없습니다. 기독교가 오늘의 이 모양이 된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교회가 세상과 너무나 흡사하며, 세상이 교회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을 구별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앙이나 품행이나 행실이나 외양을 비롯한 모든 영역의 기준이 낮아져 버렸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들 보다 훨씬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치 창세기 6장 1절에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았던 것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지려고 안달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됨으로써 그들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과 행동은 복음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보다 세상과 달랐던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께로 끌렸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그들과 같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과 엄청나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 교회가 세상 속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다른 점을 찾아보기가 너무나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기준이 낮아지면서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할 수 있는 선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놀라울 만큼 철저하게 대조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전하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비해 조금 개선된 사람이거나, 외모가 조금 세련되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거듭난’ 사람이며, ‘새로워진’ 사람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선량한 사람이나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스데반과 산헤드린 권력자들의 대조되는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그 차이점은 도저히 놓칠래야 놓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를 빚어내는 것, 그 차이를 설명해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태어날 때부터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연히 타고난 기질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천성적으로 선량하거나 특별한 자질이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우리의 됨됨이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복음이 선량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저는 예수 믿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만약 복음이 특별한 자질이 있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면 저는 이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을 뿐 아니라,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위대함이고,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특정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 대조되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그들은 성령을 거스렸기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스데반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사랑하는 여러분, 차이가 보이십니까?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에게는 성령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거스려 저항했습니다.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성령이 그의 됨됨이를 전부 빚으셨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와 지도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보다 더 명백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 요소는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밖에서 오는 것,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과의 차이는 서로 다른 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본문에서 우리는 아주 끔찍하고 악한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악한 행동은 육에 속한 사람의 영에게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없는 자들에게는 이런 특징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이고, 본성입니다. 얼마나 무섭고 끔찍하고 비열합니까!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보인 행동은 극도로 부당하고 잘못된 것이며, 비정하고 광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이 사람은 어떤지 보십시오. “(그러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 얼마나 대조가 되는 모습입니까? 그 비결이 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겸손하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동정심과 이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같은 자들을 만들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은 온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스데반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그는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돌림질을 당하며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대체 그가 무슨 악한 짓을 했기에 그와 같은 끔찍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까? 그는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그와 같은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돌에 맞아 죽은 것은 단지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였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자신을 고발했던 유대인들뿐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큰 선을 행하고 기적을 행하며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갈며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돌로 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로부터 이와 같은 악마적인 대적을 당하면서도 스데반이 취한 행동을 보십시오. 본문 6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돌에 맞아 육신은 갈가리 찢겨지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에 처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의 마음에는 자비와 긍휼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로 인해 탄식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하고, 이 죄 때문에 그들을 벌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들이 모르고 하는 것임을 알기에 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는 자신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행동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지각과 시각만 주는 것이 아니라 영과 본질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네가 나를 쳤으니 나도 너를 치겠다! 내 권리를 지키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거룩한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원수를 용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죽음을 맞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은 돌들이 우박처럼 날아오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돌에 맞아 비참하게 죽었는데도 마치 자는 것 같았습니다. “자니라.” ‘잠들었다’는 말은 다시 깨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스데반의 죽음을 놓고 “잠들었다”고 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의 몸은 수많은 돌에 맞아 흉하게 찢겨져 싸늘한 시체로 변했지만, 그의 영혼은 영광 중에 계신 예수님께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천군 천사들과 함께 다시 강림하시는 그날, 그의 육체까지 부활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스데반, 그는 잠들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도 이렇게 잠을 자듯이 평안 가운데 죽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영광 중에 계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복된 시간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시고, 어서 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이 계신 영원히 복되고 즐거운 천국으로 입성하는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비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죽음의 모습을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 때 가장 화려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었던 행복은 그의 장례식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죽어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 괴로워하며 고통 중에 버려졌습니다. 음부에서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는 부자의 말로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온 몸에 종기 투성이였던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집 대문 앞에 기거하면서 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굶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세상에 이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의 그의 불행과 비참함은 죽는 순간 끝이 났습니다. 그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영광을 맞이했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들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과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구원과 영벌의 심판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죽음 이후에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사가 잘 풀릴 때에는 이론만 있어도 괜찮습니다. 인생에 대한 이론들을 검증하는 방법은 위기가 닥치고 고통이 닥쳤을 때, 가슴이 무너지고 찢어질 때, 특별히 ‘맨 나중 원수’인 죽음을 맞을 때 도움이 되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여기 스데반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 직접 죽음을 맞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역사입니다. 스데반은 그 첫 번째 예일 뿐, 다른 예들도 무수히 많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기독교의 첫 번째 순교자로서 그가 보여준 모습을 다른 참된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이 보여주었습니다. 순교를 당하느냐, 자기 집에서 죽으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런 모습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순교자의 귀한 군대’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각기 다른 방식, 다른 모양으로 스데반의 죽음을 그대로 되풀이했습니다.
여기 스데반과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의 죽음에는 두려움도 없고 공포도 없고 놀람도 없습니다. 스데반은 흥분하거나 광분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이를 갈고 격분하는 불쌍한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달리 그가 얼마나 차분했는지를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죽게 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비그리스도인들과 달리 목숨이 몇 개나 되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목숨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목숨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죽음 앞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이 물음에 아주 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과 영혼을 구분할 줄 알기 때문에 스데반처럼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의 전적인 비극은 자기 자신을 사실상 육신에 불과한 존재로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이 소멸되면 당연히 다른 것들도 전부 사라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죽으면서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임종의 장면을 보십시오. 사람은 결코 동물들과 같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허무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죽으면 육신의 몸은 끝나지만, 그 이후에 계속되는 영원의 삶이 있습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 영원한 시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임종 직전에야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의 시간 앞에서 불안해하고, 초조해 합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요, 서서히 다가오는 망령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이 두 곳 가운데 한 곳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예비해 두신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믿음을 거부했던 비그리스도인들은 사탄과 마귀가 다스리는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세상의 삶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죄에 빠진 타락한 곳이라는 것과 잠시 지나갈 곳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비그리스도인의 정신과 큰 대조를 이루는데, 사도 바울은 그 대조를 ‘이제’와 ‘그때’를 비교해서 아주 빈번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비결이었고, 요셉과 모세의 비결이었습니다. 모세가 애굽 궁정에서 펼쳐질 찬란한 미래를 포기하고, 비참하고 불쌍한 백성들과 함께 했던 이유는 “상 주심”을 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습니다(히 11:10). 이들은 세상에서의 삶을 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 55절은 우리를 흥분하게 하고, 소망으로 가득 차게 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다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우러러’ 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는 기쁨의 땅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하나님과 영화로운 천사들과 더불어 거하는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압니다. 스데반은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이 사실을 죽음의 자리에서 명확히 확인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 죽음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눈앞에 보이는데 인간의 악의나 날아오는 돌들이 대수이겠습니까? 스데반은 자신이 그곳으로 갈 것을 알았습니다. 그 영광을 충만하게 보고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서 우리를 더욱 감격하게 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우리 주님은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대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서 계십니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예수님께서 고통 받는 자기 종을 보시고 그를 영접하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발자취를 영광스럽게 좇으면서, 죽음 가운데서도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자기 영혼을 영광스러운 주님의 손에 맡긴 충성된 종 스데반을 영접하기 위해 서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발자취를 영광스럽게 좇아 사명을 충성되게 잘 감당하고 죽는 순간 우리를 영접하시기 위해 서서 두 팔로 맞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위해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우리 교인들은 잘 죽을 것”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 죽을 것입니다. 그 마지막 자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비그리도인들과 구별 짓는 완벽한 표시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장차 닥칠 죽음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습니까? 당장 오늘밤에 죽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죽음! 스데반의 죽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이쪽인지 저쪽인지 본인은 알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으면 ‘독수리 날개에 업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있는 그곳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있을 때와 죽을 때 구원받을 것이며, 주와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할 것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마치는 순간 주님께서 서서 두 팔 벌려 맞아주시는 영광스러운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