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들어오던 날, 잠을 제대로 못잤음에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멍한 머리를 이고 습관처럼 동네를 걸어다녔다.
익숙한 회색 도시. 너무 빠르게 산업사회에 진입한 이곳은 모든 것이 규격화 되어있다.
재미없는 네모난 건물들. 네모난 도로, 네모난 골목...
여기의 대부분의 것들은 시간과 역사가 묻어있지 않아 인스턴트 도시 같다고 오랜만에 열대성 스콜이 아닌 장마비를 맞으며 나는 투덜거렸다.
'너무 재미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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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행에서 돌아온지도 몇 주가 흘렀다.
여행에서의 하루하루는 늘 의미심장했는데, 일상의 하루는 느리고 더딜 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꿈을 꾸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여행하는 꿈을 꾼다.
그리고 이제서야 지난 한 달간의 여행수첩을 들쳐본다.
여행을 정리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지금 일상이 아닌 여행을 하고 있는 건 아닐테니까.
다시 떠날 때까지 이번 여행이 내게 힘을 주기를.
1.
20020706
지금 시각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10시 40분.
비행기를 탄지 세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백 명정도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이 작은 비행기는 수용인원의 사십퍼센트도 못 채우고 중국땅을 날아가고 있다.
창 밖으로는 도시 혹은 마을의 불빛들이 간간히 보일 뿐 칠흑같은 어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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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11시 15분, 중국시간으로 10시 15분 도착.
공항에서 탑승수속을 마치고 준비되어있는 버스를 타고 Lanhong 호텔에 왔다.
와우! 생각보다는 너무 좋은 호텔.
나의 호텔에 대한 호의는 아마도 중국에서는 질 낮은 숙소가 대부분일 거라는 편견과 이번 여행에서 좋은 숙소는 그닥 기대하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좋다.
창공에서 바라본 중국은 드문드문 보이는 불빛들로 아직은 완전히 개발되지 않은 나라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가끔 보이는 불빛으로 반듯한 직선의 도로가 잘 뚫려있는 계획도시임을 추정하게 했다. 그래, 중국은 얼마 전까지 만해도 사회주의 국가였었지.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성도라는 도시는 우리 일행으로서는 티벳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일 뿐이지만 여기에서는 사천지역의 수도라고 한다.
인구는 천만 명이라던가. 서울보다 조금 적은 인구라고 한다.
새삼 중국의 가진 그 끝도 없이 바글거리는 인구수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공항에서 호텔로 오는 길에 버스 차장 밖으로 본 풍경이 전부지만 어마어마하게 큼직큼직한 건물들과 그게 걸맞은 큼직큼직한 간판들이 역시 거대한 대륙을 가진 나라다웠다.
지금은 우리 일행들과 통성명을 하고 칼스버그 맥주 한 병을 마시고 부랴부랴 일기를 쓰고 있는 참인데 피곤했는지 졸리다.
이뇨제인 다이아막스에 맥주라니, 자다가 일어나서 화장실만 가는게 아닐지.
그리고 다이아막스가 정말 독한 약인지 손끝 발끝이 저릿저릿하다.
참, 우리 일행은 다들 좋은 것 같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 .
20020707
아침 8시 기상. 천천히 준비하고 9시경에 정말 맛없는 아침 식사를 하고 10시경에 일행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무후사를 향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들을 기리는 곳라던가.
여기는 어디선가라도, 어디서든지 뚝딱뚝딱 마치 심시티라는 오락게임처럼 늘 집짓는 소리가 들린다.
무후사도 예외없이 무언가를 재건 혹은 신축하고 있었다.
실은 잘생겼다는 장비나 출사표라는 글의 원본, 그리고 여러 가지 삼국지 영웅들의 뒷 얘기들은 나쁘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지금 중국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비록 차장 밖으로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 밖에 접하지 않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건물들의 행렬과 그 넓게 잘 정비된 도로, 어디서나 거대한 부지 위에 건물을 짓고 있는 보습을 보며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살고 있는 나는 눈이 휘둥그래질 뿐이다.
아직 발전하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아무리 잘 꾸며도 뭔가 어색한 그들이지만 길가의 자전거나 1위안짜리 버스외에의 승용차는 BMW나 벤츠, 폭스바겐 등의 고급차가 또 그렇게나 많은 것을 보며 놀라웠다.
중국은 오늘이 일요일이었음에도 활기차 보인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빠른 속도로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음이 스치면서도 '느껴진다'.
중국의 오만함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몸이 이상하고 낯선 불구의 거지마저 활기차게? 돈을 구걸한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의 여종업원들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우리나라 여자들과는 달리 뭔가 달라보였다.
우리나라 여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당당한 걸음걸이. 어깨를 쭉 펴고 당당하게 걷는 그들.
이들의 친절에서도 자신은 낮추지 않은, 무언가가 느껴졌다면 짧은 시간 스치기만 했을 뿐인 내가 오버하는 것일까.
어쨌건 우리는 무후사를 구경하고 사천 전통요리를 먹으러 갔다.
꽤 많은 음식을 앞에 두었지만 그의 한 30%나 먹었을까.
양도 많았지만 그들 특유의 향료는 도무지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든 음식이 기름 속에 둥둥 떠있다니!
그래도 유명한 마파두부는 아주 맛있지는 않았지만 먹을 만 했고 닭고기를 잘게 썰어 땅콩과 버무린 음식도 먹을 만했다.
하지만 기름 속에 풍덩한 자장면과 고춧가루와 고추기름 속에 담겨진 돼지고기 요리는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식사를 후 차를 마시고 두보초당에 갔다. 한국의 '초당두부'가 생각나는 이름이다. 누가 두부 이름을 지었는지 그야말로 명필.
두보는 총명했지만 과거급제에 운이 없어서 낮은 관직만 두 번 맡았다고 한다.
그 관직은 비록 낮은 것이었지만 왕과 직접 대면하는 관직이라서 나중에는 왕의 총애를 받아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엄청난 규모였는데 가로 60 미터던가.
하지만 굶어죽었다는 설도 있듯이 살아서 부귀영화를 못누렸는데 무덤만 화려하면 뭐하나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두보초당에서 나온 후 우리는 이 곳 성도의 가장 번화가라는 천보광장 주변거리로 향했다. 각종 백화점들과 각종 외국상점들이 입점에 있는 이곳은 정말 거대한 마천루들이 즐비하다.
중국은 워터,라는 영어도 통하지 않았고, 성도는 오기전에 크게 염두해두지 않아서 언어문제로 어찌나 고생을 했던지.
그래도 두보초당에서 만난 중국어를 전공하는 언니를 만나 여기서는 편안하게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맥도날드에서 오렌지 쥬스도 마시고 길거리 음식도 먹고.
이 곳의 백화점이나 거리엔 소위 명품점도 많았고 그 가격들은 한국보다 비쌌다.
물가차를 감안하면 이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액수.
이 곳의 부자들은 정말 엄청나게 잘 살고 이곳 여자들의 과소비는 원래 유명하단다.
그래도 북경보다는 이 곳이 더 깔끔하고 빈부 격차가 없어보인다고 하던데, 얼핏봐도 그 격차가 느껴진다. 물론 60억이 넘는 인구의 중국. 이 곳의 상위 1% 부자들은 우리나라 부호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잘산다던데 그 수만 해도 얼마인가.
어쨌든 우리는 중국의 신흥부자들 사이를 1시간 정도 부유하다 다시 일행을 만났다.
이때부터 비가 쏟아졌는데 역시 중국인지 비도 엄청나게 쏟아지는 폭우였다.
마치 폭포수가 내리는 듯한.
여기서 오늘 만난 언니와 헤어지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번에도 사천요리 정식이었는데 점심식사로 먹은 것보다 덜 자극적일 뿐 도저히 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였다. 내가 여기 사람이라면 달랐겠지만 한국 음식에 길들여진 나는 그 독특하고 자극적인 향과 기름에 절은 음식은 정말.
그나마 누룽지탕은 먹을 만 했다.
이 곳에서는 꽤 좋은 음식점에 가도 그릇이 조금씩 깨져있거나 컵에 이가 나있는 경우가 많았다. 겉보기는 메트로폴리탄 , 세계 대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아직은 중국이 설익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위생적인 면도 아직은 깨끗하지 못하고.
그렇게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중국 전통극을 보러갔다. 1시간 30분 공연에 가격은 무려 160위안! 한국돈으로 환산해도 그리 싼 공연은 아니다.
그렇게 그 유명한 변검(인형을 이용한 변검과 사람이 직접하는 변검) 그리고 경극, 또 자유자재로 인형을 움직이며 했던 극, 그림자쇼 등을 보았다.
그렇게 극의 질이 높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하루 정도 중국의 문화의 느끼기에는 나쁘지 않았던 듯.
2.
20020708
어제는 나의 룸메이트 지선이와 떠드느라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팀의 아침 집합 시간은 새벽 다섯시 십오분. 하지만 우리는 몇시에 모이는지도 알지 못했고 결국은 삼십분 이상을 지각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매일 지각이다. 대체로 나보다 연장자인신데 매번 기다리게 하시다니.
죄송하다. 모두의 눈총을 받으며 다시 성도공항으로!
이번에는 국내선이다. 안개가 자욱해서 일곱시 삼십분 출발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한 시간 정도 연착한 후 라사를 향했다.
중국은 국제선보다 국내선의 취항 횟수나 탑승인원 그리고 규모에서도 국내선이 훨씬 앞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국내선 비행기는 저번 국제선 비행기보다 훨씬 크고, 공항도 좋고, 승무원의 영어실력도 좋았다.
다 좋았는데 이때부터 손, 발에 이어 얼굴이 저리기 시작했다.
슬슬 고산병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시간 정도의 비행을 마치고 라사 공항에 내렸다.
작고 초라한 모양의 라사 공항.
여기서부터는 싸하기도 하고 향냄새 같기도한 라사 특유의 냄새가 나를 맞이했다.
사람들의 피부도 적갈색의 살짝 윤이 나는, 사진 속에서의 그 모습 그대로다.
이때부터 내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멍하게 느껴지는 고산의 느낌 때문에, 그리고 설레임 때문에.
중국에서 시내에서 공항까지 제일 멀다는 라사 공항에서 라사 시내까지 털털거리는 20인승 버스를 타고 1시간 이상 타고 드디어 티벳의 수도 라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지금은 평화반점(Lahsa peace hotel) 309호 침대에 비스듬이 누워 이 글을 쓰고 있다. 모두들 모여서 자신의 고소증세에 대해 얘기하지만 정말로 고소증은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알 수 있단다.
나는 아까까지만해도 미열이 나고 발과 얼굴이 저렸는데 지금은 나 스스로 보기에도 나아졌다. 잠깐 시장에 바나나를 사로 나갈때만해도 그 어지럽고 매캐하고 매콤한 공기때문인지 폐 쪽이 답답하고 아팠는데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오랜만에 맛있고 든든하게 했더니 지금은 여러모로 기분이 산뜻하다.
그런데 내 룸메이트인 지선이는 몸이 매우 안좋아서 누워있어서 걱정이 된다.
내일 아침에는 괜찮아야 할텐데.
라사는 확실히, 공기도 그렇고 사람들의 모습도 그렇고 낮은 건물들과 특유의 문양장식 그리고 여기저기 걸어놓은 천으로 인해 확실히 이국적이다.
대도시였던 성도와는 정말 다르다.
다만 여기저기 중국어가 더 많이 들리고 이 호텔의 주인도 한족. 그리고 종업원들만 티베탄인 것이 씁쓸하다. 여기 말고도 대부분의 상점 주인이 한족이고 종업원들은 티베탄들이었다.
거리에는 못사는 티베탄들이 어찌나 많은지. 간판도 중국어로 쓰여있고 주석달듯 티벳어가 쓰여있다. 라사가 정말로 주와 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성도에서 들었던 설명에 따르면 중국정부가 소수민족 정책을 펼치며 각 민족마다 허락해 주는게 한가지씩 있는데 우리 조선족은 대학시험을 유일하게 조선어으로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며 티베탄들은 칼을 언제나 지닐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학에서도 티베탄들은 장도를 차고 다닌다는데 정말로 티벳탄들이 언젠가는 그 칼로 그들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지키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러운 옷을 입고는 있지만 티베탄들은 느끼기에도 중국인들과는 다른 순박함과 순수함이 느껴진다. 사람 나름이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정말로 잘 웃고 그들의 표정에는 굳이 다른 것 없어도 느껴지는 맑음이 있었다.
내가 어떤 나라, 어떤 민족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고 고정되는 사람의 꼴이라는 것이 절망스럽기도 하고.
선진국은 아니지만 그렇게 못하는 나라도 아닌 고만고만한 나라에서 태어난 나의 삶의 위치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내일은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다른 가치 속에서 살고 있는 그들에 대해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020709
라사에서의 두 번째 날이다.
어제 푹 쉬었기 때문인지 오늘은 정말 다리 저리도록 다녔다.
고산지대라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힘이 든다.
한국에서도 체력이 자신이 없어서 여기서는 정말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
꼭 챙겨먹는 다이아막스에, 끼니때마다 억지로라도 밥을 우적우적 열심히 먹고(물론 성도의 음식에 비하면 여기 음식은 한국음식이다.) 될 수 있으면 무리하지 않는다.
어젯밤에는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잤는데도 싸늘한 라사의 밤기온 때문에 목이 칼칼하니 감기기운이 조금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아픈데는 없어서 다행이다.
아침밥도 나름대로 잘 나와서 맛있게 먹고 조캉사원으로 향했다.
우리 호텔에서 그다지 멀지않아 가이드를 줄래줄래 따라갔다.
가는 길은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있었고 네모난 직사각형의 돌을 박아서 만든 길이었는데 고르지 못했고 지저분했다.
라사의 뒷골목은 어디나 그런 듯.
거리 풍경은 한국의 60년대를 연상케 했다. 1층짜리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풍경.
그리다 길에서 돌 위에 실을 놓고 천을 짜는 아낙들을 봤는데 신기했다. 거리에서 천을 짜다니.
가이드가 물어보니 앞치마를 만드는 거란다. 대답해주는 티벳 처녀의 수줍은 웃음이 참 예뻤다.
티벳인들은 여자들이 결혼하면 앞치마를 두르고 처녀들은 앞치마를 두르지 않는단다.
그리고 라사의 중심인 조캉사원.
그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폰지로 만든 깔개등을 깔고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마주친 그들의 종교적 행위였다.
절문화에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35위안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조캉사원 안에는 티벳인들로 발 디딜틈이 없었다. 그들은 매일매일 이곳에 온단다. 그리고 어디서 부터인지는 생각이 안나지만 조캉사원까지 오체투지를 하며 순례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는 도중에 죽는다고 한다.
그들에게 과연 종교란 무엇일까.
종교가 삶의 중심인 사람들, 현세보다는 내세를 위한 삶을 사는 그들.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어두운 조캉 사원 내를 꽉 채운 사람들이 외는 법문은 웅얼웅얼 그곳 벽을 타고 올려서 소름이 돋았다.
집념으로 뭉쳐진 어떠한 한이 그들이 외는 뜻 모를 법문 속에서 느껴졌다.
내부는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나뉘어 있고 그 안에는 각각의 불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안에 초를 피워 내부를 밝히는데 순례 티벳인들은 들고 다니는 초와 버터를 그 곳에 넣어서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였다.
사람 한 명 한 명이 가져온 기름 한 방울 한 방울이 하루종일, 모여서는 계속 포탈라를 밝힌다고 생각하니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조캉사원을 방문한 후 포탈라도 그날 봤기 때문에 포탈라궁의 내부와 이 곳이 겹쳐 세세하게 기억하기가 힘들어서 안타깝다. 하지만 비교적 한적한 포탈라궁에 비해 티벳인들의 종교적 열의를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꽤 많이 걸어 포탈라 궁 앞의 음식점에서 국수를 먹고 무려 70위안의 입장료가 있는 포탈라궁으로 갔다.
이미 꽤 많은 거리를 걸은데다 작열하는 티벳의 한낮의 태양빛은 포탈라궁으로 가는 우리를 힘들게 했다.
포탈라는 겉으로 보기에도 크고 멋있었지만 내부도 못지 않게 화려했다.
순금으로 된 역대 달라이라마의 시신이 안치되어있는 관. 각종 보석이 박힌 관음보살상. 그리고 달라이라마상. 조캉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티벳인들이 어디서 돈이 났는지 돈을 바쳐서 돈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곳도 많았다.
한 승려는 빗자루로 돈을 쓸어모으기도.
포탈라는 소문처럼 볼 것도 많고 규모도 거대했다. 아직도 미공개된 방도 많다니 놀랍다.
무척 흥미로운 시간이었지만 나는 거의 탈진되었는데 호텔에서 우리는 잠시 쉬고 샤브샤브를 먹으러 갔다.
먹으러 가기전에 시장을 잠시 들렸는데 도살된 동물들의 사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기에도 끔찍해 보이는 곳도 있었다. 물론 독실한 불교 신자인 티벳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접 도살하지는 않고 도살은 보통 이슬람교도들이 한단다. 그래서 의외로 티벳에서는 많은 이슬람교도들을 볼 수 있다. 한 쪽에서는 비둘기가 닭과 함께 닭장에 있던데 여기는 비둘기도 식용인가라는 생각도.
샤브샤브는 맛은 없었지만 식사를 하면서 티벳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길 들을 수 있었서 좋았다.
재작년부터 티벳에서의 독립운동이 없었다는 것과 그리고 대부분의 티벳인들은 노예였기 때문에 시키는 것만 잘하지 무얼 스스로 잘 할 수가 없다고 하시던 가이드 분의 말씀.
그래서 티벳인들은 못산다고 한다.
같은 티벳인이라도 과거 귀족인 사람들은 지금도 공무원인데 노예출신 티벳인들을 무시한다는 티벳의 신분제.
이 얘기는 티벳에 대해 기존에 내가 가졌던 시각과는 전혀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티벳인들의 대한 나의 생각을 많이 재인식하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이들을 어떻게 꼭 판단을 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갑자기 교차된다.
그리고 라사 공기가 나쁜건 공기가 흐르지 않고 정체되어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쓰고 싶은게 많지만 내일은 라사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을 위해 Nice dream!
20020710
어제도 무리한 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은 더한 것 같다.
우리가 라사에 머무는 시간은 4일. 하지만 도착하는 날과 출발하는 시간을 빼면 이틀이 우리에게 주어진 전부의 시간이다. 그래서 무언인가를 보고 그것이 채 소화되기도 전에 또 무언가를 본다. 특히나 좀 느린 내게는 너무 빠르다.
너무 짧은 일정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수박 겉햩기식 여행이 될까봐 두렵다.
오늘 일정도 생각해보면 그래서 까마득하다.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은지라 결국 내게 남은 건 무엇인지.
오늘도 기상시간에 비투게 일어나 빨리 밥먹고 드레풍 사원으로 향했다. 그리 힘든 곳은 아니였지만 어제의 무리 때문인지 매우 힘들었다. .
드레풍사원은 다른 곳에 비해 현지인들이나 관광객들이 적어 한적하게 볼 수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한산한데 아무래도 시내와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어서리라.
겔룩파 사원 중 가장 큰 사원이라던가. 곳곳에 문화혁명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그곳은 여전히 붉은 옷의 승려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다른 문화 유적과는 티벳의 사원들은 그 점에서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석가모니의 매우 큰 상 앞에서는 오체투지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내부는 어제 본 곳들과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좀더 조용하게 공부하기에는 이 곳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캉은 수많은 교인들과 관광객들로 그 사원의 안과 밖이 사람으로 꽉차있었고 포탈라는 아무래도 화려한 볼거리는 많았지만 경건함 같은건 이 곳 드레풍 사원에서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잘 안한다는 스님들의 '난상토론'도 봤다.
두 명의 스님이 질문을 하고 두명의 스님이 대답을 하는 형식이었는데 나머지 스님들은 대답을 잘하면 박수를, 못하면 야유를 보냈다.
여기서 행운을 준다는 실로 만든 목걸이는 바람님이 1위안을 내주셔서 받았는데 지금 보니 잃어버렸다. 내내 하고 다녔는데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내가 돈을 내고 산게 아니라 어차피 행운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아쉽다.
그리고 박물관에 갔다. 여느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석기시대의 돌들부터 시작해서 연대별로 정리된 티벳의 유물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공작털로 만든 청녹색 달라이 라마옷이다. 청나라와의 우의를 다지기 위한 옷이었단다. 그 특이한 색감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또 산호가 주렁주렁 달린 달라이 라마 옷과 13대 달라이라마와 14대 달라이라마가 만났던 모습을 찍은 사진도 인상에 남는다.
또 어딜가나 네팔공주와 문성공주 얘기가 나오는데 이 두 공주가 티벳에 미친 영향은 참 큰 것이었나보다.
그리고 보통의 티벳인들의 전통 주거공간도 봤는데 지금도 많은 티벳인들은 그렇게 산단다. 그렇게 특색이 있는 건 아니였지만 난로에 보석 등이 박힌게 인상적이었다.
티벳인들은 못사는 것처럼 보여도 집에는 보석을 집마다 꽤 많이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또 티벳땅은 우리나라가 호랑이를 닮았든 악귀의 모습을 띄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악귀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각 혈마다 사원을 짓고 특히 그 심장에 조캉사원을 지었다고 이야기는 흥미로왔다. 또 원성공주가 시집오는데 당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서 3년이다 걸렸다는 얘기, 티벳 특유의 해부도와 달력 등도 이색적이었다.
그렇게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와서 식사도 하고 잠시 쉬었다.
그리고 다음 코스는 달라이 라마의 여름 궁전인 노블링카.
14대 달라이 라마가 거처했던 이 곳은 포탈라와 다르게 사람 사는 집 같은 곳이었다.
티벳은 고산지역이라 나무 보기 힘든데 이 곳은 나무도 울창하게 심어져서 시원하고 좋았다. 그래서인지 공기도 맑은 것 같고 숨쉬기도 훨씬 수월하게 느껴진다.
궁의 마당을 지나 본체 건물로 들어가자마자 시계가 걸려있는데 9시 조금 못미친 시각에 고정되어있었다.
달라이라마가 궁에서 달아났던 그 시각이다.
그렇게 궁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잃은 여기는 이제는 그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니 안타까웠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막혀있는 곳도 많았지만 침실, 접견실, 달라이 라마가 공부했던 공부방 등을 보니 지금도 살아있는 달라이 라마의 숨결이 곳곳에 배여 있는 것 같다.
달라이 라마는 지금도 주인없는 궁에 돈을 바치고 온 나라의 사람과 돈과 땅. 그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올 수 없는 이 곳을 어떤 마음으로 떠올릴까.
달라이 라마가 거닐었던 산책길과 휴식을 취했던 정자 비슷한 곳을 돌아 노블링카를 나오면서 마음이 무거웠졌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나도 역시 한 때 식민지였던 나라의 국민이기 때문일까.
그리고 여기서 티벳 전통개도 보았는데 순종은 아니지만 참 든든하게 생겼다. 티벳개는 세계에서 제일 비싼 개이고 승냥이 넷이 덤벼도 한 마리 티벳개를 당해내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리 때려도 주인만을 섬기는 개라고 하던데, 티벳인들과도 닮은 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현지인 집을 방문했다. 적은 돈이지만 돈을 주고 구경하는 진짜 방문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만든 버터밀크차도 마시고 유산균 덩어리?도 먹었다.
그 곳의 가족은 친절했고 이 곳에서 하층민이라고 했지만 고향을 떠나 장사하러 이곳에와서 세를 살고 있는거라니 아주 못사는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못사는 축이라고 해도 이정도라면 그렇게 불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집을 나와서는 우리 일행과 떨어져서 여사님 세 분과 지선, 지영언니와 함께 비구니절- 아미상궁에 갔다.
이미 방문시간을 넘긴 시각이라 그닥 구경은 못했지만 역시 여자들의 절이라 깔끔하고 아기자기 했다. 반들반들 윤이나는 주방기구. 여기저기 화초들로 마당이 꽉찬 그런 절이었다.
스님들은 매우 친절하고 좋았으나 우리가 늦은 시간에 방문해서 바쁜 스님들에게 무례를 범한 듯 해서 죄송했다. 그 후 여사님들과 헤어져 지선, 지영언니와 함께 여행객들에게 유명한 타쉬 레스토랑에 갔다. 이국 음식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오랜만에 익숙한 음식을 먹으며 여독을 풀기에는 좋은 곳인 것 같다.
그 후 피씨방에 갔는데 그 곳 주인은 중국인이 아니라 티베탄이었다.
여기서는 노점상 외에는 왠만한 상점 소유자는 중국인인데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졌다.
쓰다 보니.. 벌써 새벽 두시다. 일곱시에는 기상을 해야하는데.
이만 일기는 접어야겠다. 오늘도 무사한 밤이 되기를. ..
20020812
어제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5인용 도미토리에서 묵기도 했었고 7시간 이상 털털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려왔기에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일행의 세 여사님들의 이야기를 늦게까지 듣느라 쓸 시간이 없기도 했다.
어제는 분노한 신들의 안식처라는 얌드록초를 지났다.
어떤 곳에서 우리 일행은 차에서 내려 구경을 했는데 얌드촉초가 멋지게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풍경은 정말 멋졌지만 그곳은 이미 지나간 관갱객들의 쓰레기로 가득해서 안타까왔다.
그리고 쓰레기 중에는 종종 한국말로 쓰여있는 것도 섞여있어서 창피하기도 했고.
야크를 멋지게 장식하고는 타라며 돈을 받는 티벳 족들. 그리고 우리와 같은 관광객등등으로 번잡했다. 황량한 이 고원길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그 날은 안개가 끼어서 선명한 풍경을 보지는 못했지만 소문대로 장관이었다.
그 곳에서 잠시 쉰 뒤 다시 힘들게 달려 중간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달려 오늘의 목적지 간체에 도착했다.
숙소도 지금까지 머물렀던 2인 1실이 아니라 도미토리에 공용화장실이 있는 곳이었다.
이 곳이 고도가 라사보다 높아서 숨쉬기도 힘들었고 창가자리였던 나는 춥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다만 거기서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몇 번 있는데 한번은 그 숙소 화장실에 다녀온 후 구역질을 한참이나 해댄 것과 간체 쿰붐앞의 티벳 가족이 권해준 가루?와 술을 입에다 넣고는 차마 삼키지 못하고 몰래 차안으로 들어와 다 밷고 구역질을 한 것이 그것이다.
티벳 사람들은 깨끗하지 못하다. 더 지저분한 사람과 덜 지저분한 사람이 있을 뿐 전체적으로 그들은 씻지도 않고 옷도 더럽다. 개나 트럭까지도 티벳 특유의 문양으로 장식하고 보석을 좋아하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이지만 더러움과 깨끗함의 개념은 없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더럽고 무엇이 깨끗한 것이란 말인가.
물론 소수의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티벳인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어른도 어른아이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티벳인이다.
상점이나 거리가 아닌 버스 안에서 내다보이는 티벳인들은 눈을 마주칠때마다 웃음을 짓고 호기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그 얼굴에서 묻어나는 티 없음을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나라 아이들이나 아이들은 귀엽지만 티벳의 어른들에게서 보여지는 그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에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 ..
그리고 숙소에서 여사님들과 오랜시간 대화를 했는데 정말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셨다.
청소년 선도와 여러 가지 일로 올해의 여성상을 타신 분. 그리고 70년대 동일 방직 여공사건이나 민주화, 노동운동 등에 깊이 관여하신 목사님은 김일성을 만난 일화도 얘기해주셨다.
모두들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진보적이시고 생각이 많이 열려 계신 분들이셨는데 역시 그런 과거가 있으시다니.
나도 그렇게 멋진 할머니가 되어야 할텐데 너무나 열심히 살아오신 그 분들앞에서 게으른 나는 참 많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우리 조선족 가이드 아저씨를 보며 티벳을 여행하면서 당연히 갖게 되는 티벳인들로서의 삶에 대해 곱씹듯 우리 조선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인이기도 혹은 중국인이기도 아니면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닌 그런 위치.
물론 중국은 워낙에 소수민족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선족에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은 아침 7시에 일어나 씻고 밥먹고 짐챙기고 또다시 버스를 한참이나 타고 달려 지금은 시가체다.
티벳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시가체.
티벳에는 땅도 넓고 원래 유목민이라서인지 제대로 사람들 보기가 힘들다.
시가체는 그래도 제법 규모도 크고 라사와 비슷하게 번화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55위안이라는 거금을 주고 타쉴훈포 사원에 다녀왔다. 그럼에도 1시간정도 후루룩 사원을 보고 나와서 돈이 좀 아깝다.
그닥 인상적인 사원은 아니었는데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관음 보살상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사전에 이 곳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져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