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캄보디아 좌파 : 초기 국면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는 6단계로 나누어진다.
(1) “인도차이나 공산당”(Indochinese Communist Party: ICP)의 출현: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 단체의 회원은 거의 다 베트남인들이었다.
(2) 프랑스와의 10년에 걸친 독립전쟁 중, 베트남의 후원을 얻어 독자적인 캄보디아 공산당이 건설된다. 명칭은 “캄푸치아[혹은 크메르] 인민혁명당”( Kampuchean[=Khmer] People’s Revolutionary Party: KPRP).
(3) 1960년 KPRP의 제2차 당대회 이후 살롯 사(Saloth Sar: 1976년 폴 포트[Pol Pot]라고 개명함) 및 훗날의 크메르루즈 정권 지도자들이 당권을 장악해가는 기간.
(4) 혁명투쟁기간: 1967-1968년 사이에 크메르루즈 반군이 태동하여, 1975년 4월 론 놀(Lon Nol) 정권이 붕괴할 때까지의 기간.
(5)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시대: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 사이의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즈 정권 시대.
(6) 1979년 1월 KPRP의 제3차 당대회 이후의 기간으로, 베트남 하노이 정부가 캄보디아 정부 및 공산당에 대해 효과적인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의 많은 부분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는데, 특히 민주 캄푸치아(크메르 루즈 정권) 시대에 이루어진 연속적인 숙청으로, 과거의 경험을 진술해 줄 생존자가 소수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운동 속에서 크메르 민족과 베트남 민족 사이의 긴장관계가 주된 이슈 중 하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크메르 루즈가 승리하는 약 30년 사이에, 보다 강력한 운동이었던 베트남에서 공산주의가 크메르 민족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념적 도구로 사용됨을 자각하게 되자, 서구적 교육을 받은 지식인과 일부이긴 하지만 조직화되지 않은 가난한 농민들에 대해 호소하던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의 방식은 변화한다. 19세기에 유교의 “[오랑캐] 개화”라는 관점에서 크메르 영토를 잠식해 들어온 응우옌 왕조와 베트남 공산당 사이의 유사성은 점점 더 설득력을 얻어갔다. 그리하여 1960년 이후로는 민족주의와 혁명적 호소를 결합시킨 토착적 공산주의가 출현하게 되었고, 가능한 한 크메르 민족의 증오심 섞인 반-베트남 정서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크메르 루즈 시대 문학작품을 살펴보면, 베트남에 대해 앙코르 시대부터 그 연원을 가지는 “요운” (youn: 야만인, 오랑캐)이란 명칭을 빈번히 사용함을 볼 수 있다.
1930년 호치민은 이미 1920년대에 통킹, 안남(Annam), 코친차이나 지역에 출현했던 3개의 작은 공산당 조직을 통일해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다. 이 명칭은 곧 “인도차이나 공산당”(ICP)으로 바뀌었고, 캄보디아와 라오스 출신의 혁명가들을 포함했다. 하지만 가장 최초의 멤버들은 거의 예외없이 베트남인들이었다. 2차 대전 종전 무렵에 소수의 캄보디아인들이 간부급으로 들어왔지만,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캄보디아 내 운동에 대한 이들의 영향은 미미한 것이었다.
프랑스에 대항해 전쟁을 치르는 동안, 비엣 민은 종종 캄보디아 내 군사기지를 습격했고, 1947년까지 태국의 정권을 장악했던 좌익정부와 연결된 무쟁투쟁 단체 "크메르이싸락" 운동의 친-좌파 계열 분파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1950년 4월 17일(25년 후 이 날,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함락한다), "크메르이싸락"의 최초의 전국대회가 열리고, “이싸락통일전선”(United Issarak Front: UIF)이 출범한다. 그 지도자는 손 웟 민(Son Ngoc Minh)으로 아마도 민족주의 지도자 손 웟 탄(Son Ngoc Thanh)의 형제뻘이었을 것이다. 이 "이싸락통일전선"의 지도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 내에서 3번째 고위직에 해당했다. 역사가 데이빗 챈들러(David P. Chandler)에 따르면, 비엣민과 연합한 이싸락 내 좌파 그룹은 1952년 무렵 캄보디아 영토의 6분의 1 가량을 점령하고 있었다. 또한 제네바 협약 전날 밤에는 전국의 절반 정도를 통제하고 있었다.
1951년 “인도차이나 공산당”(ICP)은 3개의 국가단위 조직으로 재편되는데, 그것은 각각 “베트남 노동자당”(Vienam Worker’s Party), “라오스 잇살라”(Lao Itsala), 그리고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PRP)이었다. 재편 직후 발행된 문서를 보면, 베트남 노동자당이 계속해서 보다 작은 조직인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운동을 지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KPRP의 지도자와 고위간부들은 대부분 크메르 끄롬(Khmer Krom)과 캄보디아 내의 베트남계 사람들이었다. 이 조직이 토착적인 크메르인들을 포섭하려는 노력은 그다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민주 캄푸치아(크메르루즈)가 편찬한 <공산당사>를 보면,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 비엣 민이 캄보디아 내 공산반군의 대리인 자격을 얻는 데 실패하여, KPRP를 위한 정치적 역할에 실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이들 공산계열은 농촌의 많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최소 5,000명의 무장조직원에게 명령권을 지니고 있었다. 제네바 회의 이후 손 웟 민을 포함한 KPRP의 약 1,000명의 당원들이 베트남으로의 “대장정”에 올라, 그곳에서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1954년 후반, 캄보디아에 남아있던 공산주의자들이 합법적 정당을 결성했다. “인민당” (Pracheachon Party)이 바로 그 정당으로, 1955년과 1958년의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1955년의 선거에서, 이 정당은 4%의 지지율을 획득했지만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인민당은 시하누크의 "성꿈 리어스 니욤”(Sangkum Reastr Niyum: 대중사회주의공동체) 바깥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지속적인 탄압과 구속위협에 시달렸다. 정부는 1962년 선거에는 아예 참가하지 못하도록 압박했고, 결국 지하로 숨어들고 말았다. 시하누크는 국내 좌파에 대해 습관적으로 “크메르루즈”(Khmer Rouge: 붉은 크메르인)란 명칭을 붙이곤 했는데, 훗날 이 이름은 폴 포트, 이엥 사리(Ieng Sary), 키우 삼판(Khieu Samphan) 및 그 연합세력의 정파를 의미하게 되었다.
1950년대 중반의 기간에 KPRP 내부에는 또우 사모웃(Tou Samouth)이 이끄는 “도시위원회” (urban committee)와 시우 헹(Sieu Heng)이 이끄는 “농촌위원회”(rural committee)란 분파가 출현했다. 그 이름과 마찬가지로 이들 분파는 서로 다른 혁명노선을 신봉했다. 베트남의 지원을 받고 있던 주류적인 “도시파”는, 시하누크 덕분에 프랑스에서 해방되었음을 시인하고, 중도주의와 미국에 대한 불신을 가진 시하누크야말로 진정한 민족적 지도자이며 남-베트남 “해방”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하노이 측의 가치있는 자산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계열에서 가장 충실하게 노선을 견지했던 이들은 시하누크를 우파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여 좌파의 정책을 수용토록 설득할 수 있기를 바랬다.
한편, 농촌의 가혹한 현실에 익숙한 시골지역 핵심당원들의 지지를 얻고있던 또 다른 분파는 “봉건주의자”(feudalist) 시하누크를 즉각적인 투쟁으로 전복시키자고 선동했다. 1959년에 정부에 투항한 시우 헹은 보안군으로부터 농촌지역 조직의 90% 이상이 파괴되었다는 이야길 들어야만 했다. 비록 또우 사모웃이 관할하던 프놈펜과 여타 도시의 공상당 조직은 상황이 좀 낫긴 했지만, 1960년 무렵이 되면 단지 수백 명의 공산주의자들만이 활동하게 된다.
5. 파리의 유학생 그룹
1950년대 파리에 있던 크메르 학생들은 독자적인 공산주의 운동을 조직했다. 만일 그 이름이 있었다면 자신들의 조국에서는 대단한 탄압을 받고 있던 정당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1960년대에 남녀 유학생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당세포 조직을 관할하는 본부를 만들었고,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시하누크 및 론 놀에 대항하여 효과적으로 반군을 이끌었다. 그리고 민주 캄푸치아(크메르 루즈 정권)을 수립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01BB1249DF694D73)
1960년대에 공산주의 운동에서 지도력을 발휘한 폴 포트(Pol Pot)는, 프놈펜 북부에 위치한 껌뽕 톰(캄퐁 톰) 도에서 1928년 출생했다(어떤 자료들은 1925년이라고도 한다). 그는 프놈펜에서 기술고등학교를 다녔고, 1949년 전파전자학(radio electronics)을 공부하러 파리로 떠났다(다른 자료에서는 인쇄출판에 관한 학교에 다니면서 토목공학을 공부했다는 설도 있다). 한 자료에서 “차라리 부지런히 노력하는 조직자(plodding organizer)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기술한 바와 같이, 그는 결국 학위 취득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프랑스 카톨릭 신부였던 프랑소와 뽕쇼(François Ponchaud)의 연구에 따르면, 폴 포트는 프랑스 문학은 물론 맑스(Marx)의 고전들에도 심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01351249DF6AE38D)
파리 유학생 그룹의 또 다른 인물로는 이엥 사리(Ieng Sary)가 있다. 그는 화교계 크메르인으로 1930년 베트남 남부에서 출생했다. 프놈펜의 명문 리셰 시소왓(Lycée Sisowath)을 졸업한 후, 프랑스에 있는 파리정치학원(Institut d'Etudes Politiques de Paris: “Sciences Po”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에서 무역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당대 최고의 수재”라 불렸던 키우 삼판(Khieu Samphan)은 1931년생으로, 파리에 있는 동안 정치와 경제를 공부했다. 재능 면에서 키우 삼판의 라이벌이었던 호우 유온(Hou Yuon)은 1930년 생으로, “신체와 정신 모두 놀라울만큼 강인한” 사람으로 불렸다. 그는 파리에서 경제학 및 법학을 공부했다. 1930년생인 손 센(Son Sen)은 교육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1932년생인 후 님(Hu Nim)은 법학을 전공했다.
아마도 이들이야말로 아시아 공산주의 역사에서 가장 고급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일 것이다. 키우 삼판과 호우 유온은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후 님은 1965년에 프놈펜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국비유학생으로 파리에 갔던 이렇게 엘리트에다 재능있는 사람들이, 훗날 현대 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게 하고 가장 급진적인 혁명 정권을 수립했다는 것은, 돌이켜보면 불가사의한 일이기까지 하다. 이들 대부분은 지주나 관료 집안 출신이다. 폴 포트와 호우 유온은 왕가와도 혈연관계가 있을 수 있다. 폴 포트의 누나는 모니웡 국왕의 후궁이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76E71149DF6C3863)
파리 유학생 그룹 중 세 사람은 혁명투쟁과 당내 투쟁의 수 년 동안 존속할 결연을 맺고 있었다. 폴 포트와 이엥 사리가 각각 키우 뽄나리(Khieu Ponnari) 및 키우 티릿(Khieu Thirith: “이엥 티릿”이라고도 알려짐) 자매와 결혼해 의도적으로 키우 삼판과 친족관계를 형성했다. 이 두 명의 지식인 여성들 역시 민주 캄푸치아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프놈펜과 지방에서 건너온 이들 크메르 젊은이들에게, 파리에서의 지적인 숙성은 혼동스러웠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맑스-레닌주의의 교조적 이설에서 피난처를 찾곤 했다.
1949년과 1951년 사이의 어느 때인가, 서유럽에서 가장 철처하게 훈련받은 동시에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던 공산주의 운동이던 “프랑스공산당” 내에서 폴 포트와 이엥 사리가 조우한다. 이 프랑스공산당 역시 매우 반-지식인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1951년 이들 두 사람은 동-베를린에서 개최된 청년축전에 참석한다. 이 경험은 이들의 이념적 발전에 있어서 전환점 역할을 했다.
비엣 민과 연합해 투쟁 중이던 크메르인들을 만나면서, --- 훗날 그들 역시 베트남에 지나치게 영합한 자들로 평가해버리지만 --- 이들은 무장투쟁을 위해 철저히 훈련된 정치적 조직과 확고한 의지만이 혁명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 획신하게 되었다. 이들은 200명 전후의 파리 유학생들이 가입해있던 “크메르 학생연합”(Khmer Students' Association: KSA)을 민족주의 및 좌파 이념을 가진 조직으로 전환시켰다. “맑시스트 서클”(Cercle Marxiste)로 알려진 이 KSA 및 이후의 계승 조직들은 비밀조직이었다. 조직은 3인 내지 6인으로 구성된 세포조직으로 결성되어,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조직의 전체적 구조를 알지 못하는 점조직 형태로 구성되었다.
1952년 폴 포트, 호우 유온, 이엥 사리 및 여타 좌파들은 시하누크를 “유아기적 민주주의의 교살자”라 부르는 공개서한을 보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이듬해 프랑스 당국은 KSA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하지만 1956년 호우 유온과 키우 삼판은 새로운 조직인 “크메르 학생연맹”(Khmer Students' Union)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한다. 이 조직은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맑시스트 서클”이 주도하고 있었다.
호우 유온과 키우 삼판은 각기 자신들의 박사논문에서, 훗날 민주 캄푸치아 정부가 채택할 정책의 근간이 될 기본적 주제들을 다루었다. 호우 유온은 1955년 자신의 논문 <캄보디아 농민과 근대화에 대한 그들의 가능성>(The Cambodian Peasants and Their Prospects for Modernization)을 통해, 국가 발전에 있어서 농민의 중심적 역할을 신봉하였다. 이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반드시 발전의 초기에 나타난다는 전통적인 관점에 반하는 것이었다. 1959년 발표한 키우 삼판의 논문 <캄보디아 경제와 산업 발전>(Cambodia's Economy and Industrial Development)의 주제는, 국가는 자주적이어야만 하며 선진 세계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종식시켜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키우의 논문은 “종속이론학파”(dependency theory school)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종속이론학파는 산업국가들의 경제적 지배에 대해 제3세계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던 학파이다.
6. KPRP의 제2차 당대회
폴 포트(Pol Pot)는 1953년 캄보디아로 돌아온 이후 정당 활동에 투신한다. 그는 또우 사모웃(Tou Samouth)의 “도시위원회”에 들어가, 처음에는 껌뽕 짜암(Kampong Cham) 도에서, 그리고 이후에 프놈펜(Phnom Penh)으로 지역을 옮겨 활동한다. 여기서 그는 제도권 좌파 정당과 비밀 지하조직 공산주의 운동 사이에 연락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 그의 동지인 이엥 사리(Ieng Sary)와 호우 유온(Hou Yuon)은 사립고등학교인 “리셰 깜부봇”(Lycée Kambuboth)의 교사로 재직했는데, 이 학교는 호우 유온의 조력으로 설립된 학교였다.
키우 삼판(Khieu Samphan)은 1959년 귀국해, 프놈펜대학 법학과 교수를 하면서 프랑스어 좌파 출판물 <관찰>(L'Observateur)을 창간했다. 이 정기간행물은 얼마 안 있어 프놈펜의 협소한 학계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듬해 정부는 이 신문을 정간시켰고, 시하누크의 보안경찰들이 공개적으로 그를 구타해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나체로 만든 후 사진까지 찍었다. 이 사건에 대해 쇼크로스(Shawcross)는 “결코 용서하거나 잊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베트남 남부에서 발생한 미국의 행동에 반대하는 연합전선 세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키우 삼판으로 하여금 시하누크와 협력하게 만드는 데 방해가 되지는 못했다. 이미 앞서 기술한 바 있듯이, 키우 삼판, 호우 유온, 후 님은 성꿈에 합류하거나 시하누크 왕자의 정부로부터 관료로 임명되어 제도권 내에서 활동하기를 강요받기도 했다. 반면 폴 포트(Pol Pot), 이엥 사리(Ieng Sary), 손 센(Son Sen)과 같은 강경파들은 무장반군활동을 주장했다.
1960년 9월, 프놈펜 역의 빈 방에서 KPRP의 지도자 21명이 비밀회의를 열었다. 이 중요한 사건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데, 이 회의의 결과가 친-베트남계와 반-베트남계 크메르 공산주의 세력 사이에 --- 역사적으로도 다시 기술되면서 --- 논쟁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하누크와 협력하느냐 아니면 저항하느냐 하는 문제가 이 자리에서 논의되었다. 협력을 주장한 또우 사모웃이 서기장으로 선출되었고, KPRP는 “캄푸치아 노동당”(Workers' Party of Kampuchea: WPK)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그의 동맹자였던 누온 찌어(Nuon Chea)가 부서기장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새로운 이름의 정당에서, 폴 포트와 이엥 사리는 정치국 서열 3위와 5위를 차지했다.
당명의 개정은 의미가 컸다. 노동당이라고 직접적으로 부르게 되자,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은 “베트남 노동당”과 대등한 지위를 주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친-베트남계 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헹 삼린 정권)은, 1960년 개최된 회의가 KPRP의 단순한 2번째 회의였을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1962년 7월 20일, 또우 사모웃이 캄보디아 정부 당국에 의해 살해되었다. 일각에서는 당권 장악을 위해 폴 포트 그룹이 그를 제거한 것이란 설도 제기했다. 1963년 캄보디아 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폴 포트가 또우 사모웃에 이어 서기장으로 선출됐다. 또우의 동맹자였던 누온 찌어(Nuon Chea)와 께오 미어(Keo Meas)는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었고, 그 자리를 손 센(Son Sen)과 원 웻(Vorn Vet)이 대신했다. 폴 포트 및 파리 유학 시절의 친족적 동료들이 당 중앙을 장악하면서, 친-베트남계로 여겨진 구시대의 전사들은 외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1963년 7월, 폴 포트와 중앙위원회 위원 대부분은 로따나끼리(Ratanakiri) 도에 반군 기지를 건설하러 프놈펜을 떠났다. 시하누크가 34인의 좌파 명단을 발표해 정부로 들어오라고 소환했고, 시하누크만이 국가를 영도할만한 유일한 지도자라는 서명을 받게 한 바로 그 직후의 일이다. 그 명단의 인물들 중 폴 포트와 쪼우 쩻(Chou Chet)만이 탄압을 피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다른 모든 이들은 정부에 협력한다고 동의해야만 했고, 24시간 경찰의 감시망이 따라 붙게 되었다.
폴 포트와 동료들이 옮겨간 곳은 소수민족 크메르 로으(Khmer Loeu)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재정착과 강제적 동화정책을 포함해서 중앙정부의 강압적 태도는 이들로 하여금 게릴라 투쟁에 기꺼이 나서도록 만들었다. 1965년 폴 포트는 수 개월간 북-베트남과 중국을 순회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분명 중국에서 모종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고, 이 점은 그가 캄푸치아 노동당이 장악한 해방구로 귀환했을 때 우월적 지위를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시하누크와 중국은 우호적 관계였지만, 중국은 폴 포트의 방문을 비밀로 해주었다.
1966년 9월 캄푸치아 노동당은 비밀리에 당명을 “캄푸치아[=크메르] 공산당”(Kampuchean [혹은 Khmer] Communist Party : KCP)으로 개명했다. "공산주의자"(Communist)라는 명칭을 추가한 것은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이 단순한 "노동자들의 당"(workers' party: 노동당)인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보다 진전되었다는 것과, 중국과 동등한 수준의 전개양상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당명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 수년 후까지도 이 당명으로 당원이 된 사람은 없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