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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아산-삼척-충북-천안 스크랩 남겨진 역사의 뒤안길에서..인각사(군위)
산수유 추천 0 조회 79 08.11.27 15: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 인각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서 신라 선덕왕 11년(서기 642)에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였다

 절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기린이 뿔을 바위에 얹었다고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麟角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충렬왕 10년(서기 1284)에 일연성사가 중창하고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인각사 '보각국사 정조지탑' 및 비가 있다.

이 탑비는 충렬왕 19년에서 21년(서기 1293 ∼ 95)사이에 죽허(竹虛)대사가 중국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해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크게 훼손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그 외에 절 앞에는 만월당(滿月堂)과 청진당(淸眞堂)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인각사 미륵당내 석조좌상 (지방 유형문화제 자료 426호)  

인각사 경내에서 동쪽으로 약 60m 떨어진 밭에 위치하는 미륵당에 안치된 좌상이다.

우측팔과 두부(頭部)가 결실되었고 앞면도 박리가 심한 상태이다.

석불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두부(頭部)의 결실부와 목은 석회로 복원해 두고 있다.

두부의 원형은 알 수 없으나, 얼굴의 상(相)은 옆으로 가늘게 표현된 눈과 도톰한 입술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

 귀는 목 상단까지 표현되어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의 흔적이 확인된다.

의첩(衣褶)은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후면에 접힌 가사표현(袈裟表現)은 매우 정교하다.

팔이 결실되어 명확하지 않으나, 좌수는 무릎에 올리고, 우수는 항마인(降魔印)을 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의 형상은 전조(全彫)이다. 가늘고 길게 표현된 눈과 사실적으로 처리된 입, 의첩의 정교한 표현 등에서

불상의 조성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고,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중에서도 우수한 것에 해당한다.

  

  

보각국사비(보물  제428호)

고려 충렬왕 15년(1289)에 입적한 보각국사 일연의 사리탑과 그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탑비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룬 승려인데, 노년에 인각사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침에 해가 뜰 때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연스님 어머니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탑은 자연석으로 된 바닥돌 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윗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받침돌 역시 8각으로, 동물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윗받침돌은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단조롭고 소박한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몸도 8각으로 정면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이란 탑이름이 있고, 뒷면에는 문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과, 연꽃 위에 서있는 보살상(菩薩像)을 새겼다.

지붕의 두꺼운 추녀 밑은 위로 느리게 들려 있고, 낙수면은 급한 편이며 지붕선 끝부분에 꽃장식이 달려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올려져 있다.

탑비는 국사의 제자인 법진에 의하여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으며,

글씨는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문화재청) 

 

석불좌상

이 불상은 인각사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행정구역상 군위군 고로면 괴산2리에 자리하고 있는 사지에서

1963논에 인각사로 옮겨온 불상이라고 한다. 현재 신축 중인 대웅전 앞 마당에 모셔 놓았다.

    

  

 

 

보각국사정조지탑(寶物 428호, 총고 2.42m)

 

인각사의 본전인 극락전 오른쪽 마당가에 지대석까지온통 드러내고 서 있는 탑이 보각국사탑, 즉 일연스님의 부도이다.

전체 높이는 약 2.42m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에 의해 도굴되어 화북3리 둥딩마을 뒷산 부도골, 비명에서 말하는

'인각사의 동쪽 언덕'에 넘어져 있던 것을 고로면 사무소로 옮겼다가 1962년에 다시 인각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신라 이래의 가장 보편적인 부도 양식인 팔각원당형을 따르고 있다.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진 지대석 위에 희미하게 복련이 새겨진 하대석이 놓였으며, 그위에 팔각의 중대석과 상대석이 차례로 올라갔다 

 

중대석에는 우주로 구분된 8면에 동물상이 조각되었으나 무슨 상인지 분명하진 않다.

유난히 두꺼운 상대석에는 겹꽃 여덟 장을 선각으로 돌리고 그 사이를 다시 홀꽃 연잎으로 메웠다.

상대석 위에 탑신 역시 8면으로, 정면 광곽내에는 두 줄로 '보각국사 정조지탑'(普覺國師 靜照之塔)이라는 글씨를 새기고

 뒷면에는 문비를 조각한 뒤 나머지 여섯 면에는 사천왕입상과 연화좌 위의 보살입상을 얇게 새겼다.

탑신을 덮은 팔각의 옥개석에는 아무런 새김도 없으며 추녀마다 귀꽃이 있지만 마모가 심하다.

두꺼운 처마 밑은 전각에 이르러 느린 반전을 보이고 있다.

낙수면은 급한 편이며 여덟 가닥의 우동이 내려온 끝 부분에 단조로운 귀꽃을 조각하고 있다.

상륜부에는 앙화, 보륜 그리고 불꽃무늬에 감싸인 보주만 남아 있다. 사리공은 탑신 상면에 마련되어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퍽 둔중하고 짜임도 정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새겨진 조각도 평면적, 형식적이다.

고려말기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양식적으로 퇴화해가는 자취가 뚜렷하게 보인다 그렇더라도

국존이라는 지위에 있던 인물의 부도치고는 너무 초라한 느낌이다.

인각사는 언제 가봐도 황량하고 인적이 드물어 찬바람이 돈다.

『삼국유사』라는 소중한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준 일연스님에 대한 이 시대의 대접이 지나치게 소홀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인각사  http://www.ingaksa.org/

 

 

 

 

 

 

 

   

 

 

 

  

일연성사께서 저술하신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를 최초로 기 록해 놓았을 뿐 아니라

문화와 사상, 불교관계 등 삼국사기 에서 서술하지 아니한 민족의 귀중한 유산을 종합적으로 집대성한 역사서 이상의 가치가 있는 민족의 성서이다.

때문에 인각사는민족의 주체성을 고증하는 사적지로서 소중히 보존· 전승되어야 .....

 

 

 

  

 

 

 

 

 

 

 

화수삼거리에서 고로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위천 주변은 한폭의 산수화같이 경관이 빼어나서  여 름철 가족단위의 피서나 야영지로 환영을 받는 곳이란다.

 이곳 주변은 혼자서 사색하기 좋고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찾아도 좋을성 싶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달빛이 비춰 질 때 찾은 학소대.., 좀더 일찍 찾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은 이곳에 오면  화산산성에 오르는 것도 잊지 않는단다.

여름이면 매미소리 시 원한 산길로 약 8.5km 가량을 올라가면 별천지가 나타난다고 한다. 오염되지 않는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 인듯하다.

 

   

 

  

 

해가 기운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인각사 주지스님이 나오셔서 인각사에 대해 문화해설사님이 못다한 이야기를 해 주신다.

어둠이 깔리는 골짜기에서 마치 보물찾기를 한 기분이다.

말없는 문화 유산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알아가는 가운데 늘 아쉬운 부분은 역시 보존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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