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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칭의와 부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신학자들은 중요하다고 강조를 하지만 일반 교인들은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주제 둘을 꼽으라면 아마 칭의와 부활일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기독교에는 칭의보다는 속죄가, 부활보다는 십자가가 더 부각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상 초대교회시절, 제자들이 전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주님의 부활하심이었고 죄사함보다는 의롭다 하심을 더 중한 복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중세를 거치며 기독교가 대중성을 띄게 되고 권력화 되면서 손쉬운 포교를 위한 주제를 찾게 되고 그런 면에서 부활은 증거로 보여줄 것이 없지만 십자가는 눈에 보이는 상징으로 적합하고 또 사람들을 죄인이라 정죄해 놓으면 통제하기 쉬운 점도 있고 해서 칭의보다는 속죄를, 부활보다는 주님의 십자가를 더 부각시키다보니 점차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가 아닌 희생의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여타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이 그저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인 줄 아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실상 희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부활의 복음으로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사도행전 4:2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사도행전 4:33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사도행전 17:18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사도행전 17:32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사도행전 23:6
부활은 신약에서만 나타나는 용어입니다만 구약에도 부활에 대한 믿음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께서도 아브라함을 언급하실 때 그가 “나의 때” 볼 것을 기뻐하다가 보고서 즐거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 후 초대교회에서 증거 된 부활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전한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살아나신, 즉 부활을 증거 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기독교의 중점내용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부활을 증거 하지 않거나 주님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강조점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선언함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해역사는 가장 중요한 점을 두 번째로 중요한 점으로 교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틀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게 되니 빠져나갈 구멍을 얻는 것이요, 진리의 참 능력이 나타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는 방법이 됩니다. 사단은 이런 방법을 계속해서 사용하여 왔습니다.
실상 의로움, 즉 칭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물론 표현의 생소함으로 인한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생활에서 의로움에 대한 동기부여도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세기 6:9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세기 17:1
이 구절들에는 ‘완전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종종 노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의롭다는 말과 함께 사용되곤 합니다. 즉 의로움과 완전함은 같은 상태에 대한 다른 표현 정도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한글에 사용된 완전함은 마치 영어의 perfect를 연상케 하고 있지만 실상 blameless 즉 떳떳함, 혹은 당당함의 의미를 가진 용어입니다. 성경에는 인간에게 대하여 perfect의 개념을 적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의롭다는 표현도 우리가 이해하기는 떳떳함, 혹은 당당함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었을까요? 불완전한 사람이었을까요? 모든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하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특성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완전하다면 그 사람은 사람답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처럼 그분도 역시 불완전한 사람이었기에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와 다른 점을 발견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분도 우리처럼 불완전한 존재였다는 사실에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불완전하고 허물 많은 모습으로 오셨던 것은 역시 그러한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이는 우리 구속의 목표가 완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구속의 목표는 하나님 앞에 떳떳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하지 말고 떳떳한 사람이 되라고. 세상의 교육은 능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일반인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상을 줍니다.
거기 어디에도 자기다움에 주는 상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그저 나다움에 두고 그것을 칭찬하시고 의롭다하신 것입니다. 주 앞에 의롭다 함은 하나님 앞에 떳떳하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이를 두고 아담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아니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창2:25) 아담이 그러하였던 것은 그가 아직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그 자체로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적 산물이었기 때문이고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나 우리 자녀들이 스스로에게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다움으로 떳떳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님이 하나 되어 계시기 때문이고 이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도 떳떳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 되어 계시기 때문이고 이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의 당당함이요, 안이 공허한 자가 아니요, 주님의 빛으로 가득 차 있는 자입니다. 이것이 칭의, 의입니다.
흔히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속죄는 주님의 십자가와 연관이 있고 칭의는 부활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이겠으나 내용적인 면으로 들어가 보면 이도 저도 다 주께서 우리와 하나 되심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신학에서 말하는 바를 좇아 칭의를 부활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에 대한 언급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활을 바라보는 시각의 비교 - 바울, 베드로, 예수님
주님의 십자가 장면을 살펴보려면 4복음을 서로 비교해야 합니다. 한 편 강도에게 오늘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것은 누가복음에만 나타나고 속옷에 대한 언급과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고 있습니다. 또 마태는 주님의 죽으시는 순간 자던 성도들의 몸이 일어난 것과 병사들의 하는 일을 자신들이 알지 못함으로 이를 사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조금씩 다른 점을 보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므로 4복음을 서로 비교하면서 실상을 아는 것은 적합한 해석의 방법이 됩니다.
부활과 종말에 대하여 바울의 신학적 관점과 베드로의 관점은 분명 차이를 보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옳고 그름보다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부활을 언급하신 내용과도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한 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보기보다는 부활에 관하여 하신 주님의 말씀과 바울의 서신, 그리고 베드로의 서신에서의 관점들을 비교하여 참된 인식을 갖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흔히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새 하늘 새 땅을 크로노스적 시간의 종말 이후 오는 새로운 시간 혹은 무시간의 시대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영원의 세계는 이미 우리가 크로노스적 시간을 살아간다고 인식하는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인정해야 합니다. 즉 부활의 문제는 시간의 흐름의 문제가 아니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인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굳이 크로노스적 시간과 카이로스적 시간[1]에 비교하여 본다면 주님이 언급하신 부활과 천국의 의미는 크로노스적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카이로스적 시간이라고 해야 합니다.
성경 저자들이 부활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1) 역사적 사건 : 주님의 육체의 부활을 하나의 역사적 사실, 사건으로 인식하고 이 소식을 전하는 것
2) 예언의 성취 : 위의 사건적 사실이 역사적 예언이 성취된 것임을 증거하는 것
3) 사건의 동일시 : 주님의 육체적 부활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4) 구원의 의미 : 주님의 부활이 개인의 구원에 대해 갖는 의미로 파악하는 것
5) 존재적 의미 : 부활이 갖는 개체적 혹은 존재적 의미를 아는 것
신약성경에 나타난 부활 구절들을 위의 방식을 따라 구분해 본다면 아래와 같이 될 것입니다. (실은 구약에는 부활이라는 표현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바울서신 13편은 그 길이 순서대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생각의 변천과정을 보려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하여 각 서신서를 연대별로 재 배열 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 연대별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I. 바울의 여정
A. 회심(A.D.35)
B. 제1차 전도여행(A.D.46-48)
C. 예루살렘 총회(A.D.49)
D. 제2차 전도여행(A.D.50-52)
E. 제3차 전도여행(A.D.53-58)
F. 결박과 순교(A.D.59-67/68)
II. 연대별로 본 바울서신
A. 갈라디아서
B. 데살로니가 전서
C. 데살로니가 후서
D. 고린도 전서
E. 고린도 후서
F. 로마서
G. 골로새서
H. 빌레몬서
I. 에베소서
J. 빌립보서
K. 디모데 전서
L. 디도서
M. 디모데 후서
이 순서를 따라,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언급된 성경 구절을 위의 방식대로 구분하여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역사적 사건)
마태복음 22: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역사적 사건) (사건의 동일시)
마태복음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존재적 의미)
마태복음 22: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존재적 의미)
마태복음 27: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역사적 사건)
마가복음 12: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역사적 사건)
마가복음 12: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역사적 사건) (사건의 동일시)
누가복음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존재적 의미)
누가복음 20:27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이들이 와서 (역사적 사건)
누가복음 20:33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역사적 사건) (사건의 동일시)
누가복음 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존재적 의미)
누가복음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존재적 의미)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존재적 의미)
요한복음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역사적 사건) (사건의 동일시)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존재적 의미)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역사적 사건)
사도행전 2: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예언의 성취)
사도행전 4: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역사적 사건)
사도행전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역사적 사건)
사도행전 17: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역사적 사건)
사도행전 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역사적 사건)
사도행전 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역사적 사건)
사도행전 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역사적 사건)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예언의 성취)
사도행전 24: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역사적 사건)
고린도전서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역사적 사건)
고린도전서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사건의 동일시)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건의 동일시)
고린도전서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사건의 동일시)
고린도전서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존재적 의미) (사건의 동일시)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역사적 사건)
로마서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사건의 동일시)
에베소서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사건의 동일시)
빌립보서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사건의 동일시)
빌립보서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건의 동일시)
디모데후서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사건의 동일시)
히브리서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예언의 성취)
히브리서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사건의 동일시)
베드로전서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구원의 의미)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구원의 의미)
요한계시록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존재적 의미)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존재적 의미)
역사적 사실로의 부활
예수께서는 역사적 인물로서 이 땅에 존재하셨고 부활 사건 역시 역사적 사실임을 제자들이 증거하였습니다. 그 증거는 사실에 대한 리포터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행전에서는 몸의 부활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즉 예수의 특수성이라기보다는 많은 인간들의 죽음과 그 이후에 있는 몸의 부활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현상에 대한 보고형식이었습니다.
예언의 성취로의 부활
몸의 부활을 언급한 것은 그것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49:9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이 사실을 바리새인은 믿었고 사두개인은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 특히 바울은 이러한 기록과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사건의 동일시로의 부활
더 나아가서 구약의 부활의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지만 그것을 비단 예수에게만 국한 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와 같은 조건, 예를 들면 죽으심에 연합하여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다가 죽게 되면, 주님의 부활하심처럼 자신도 동일하게 육체적 부활에 이를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부활의 시기였습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이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는 무리들에 동요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도 부활의 시기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당시에 갖고 있던 몇 가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역사 시대 안에서 개인적인 부활
2) 주님 재림시의 의인들의 순차적 부활(고전15:23), 그리고
3) 악인의 부활입니다.
빌립보서 3:10에 부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마치 첫 번째, 즉 역사시대 안에서 자신이 주님처럼 십자가 지는 삶을 살다가 죽으면 주님의 부활과 변화체처럼 자신도 죽음에서 일어나 변화체를 입게 될 것이라고 믿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어찌 되었던 역사를 통하여 이 첫 번째 가설은 사실이 되지 않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하고 결국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은 주님의 역사적 재림의 시기에 그에게 붙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이 땅에 살아 있는 자는 공중으로 끌어올려져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런 믿음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구원의 의미의 부활
이 표현은 특히 베드로의 서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구원받은 것을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연결시켜 믿고 있는 것과 상당한 대조를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벧전1: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벧전 3:21
물론 바울도 로마서에 우리의 구원을 주님의 다시 사심에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5:10
이러한 부분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인식이나 혹은 예언의 성취적 측면, 자신에게 대입하는 동일시와는 또 다른 관점입니다. 즉 신학적 해석이 개입된 부분입니다.
존재적 의미로의 부활
이 마지막 관점은 주님께서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신 부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중 공관복음은 공히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과의 부활에 대한 변론을 기록하고 있고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마르다와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하신 표현으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부활의 의미를 알게 하십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사두개인들이 일곱 형제를 취하게 되었던 한 여인이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죽은 자의 부활 때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답하십니다. 이는 형식과 제도의 유무를 말하신 것이라기보다는 부활이 육체와 관계된 일이 아니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어서 답답하신 마음으로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말씀하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두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분명 부활과 연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은 이 분들, 즉 이미 육체로는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는 살아있다, 다시 말하면 부활한 존재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런 의미는 요한복음에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더욱 분명하게 언급됩니다. 주님이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하실 때 마르다의 표현, ‘마지막 날 부활 때 다시 살 줄을 아나이다.’는 크로노스적, 역사적 사건을 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11:25-26 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부활이 비단 당시 죽은 나사로의 육체적 부활, 역사적 사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존재적 부활의 의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역으로 이 말씀의 예를 공관복음에서 언급하신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분명 그들은 육체적 죽음을 겪었고 다시 살지 못했습니다. 물론, 아직. 하지만 주님의 표현은 장차 그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이미 산 자, 즉 부활한 자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드는 질문은 ‘그들이 언제 부활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주께서 말씀하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들의 시대에 하나님을 만난 바 되고 그리스도를 약속으로 믿은 연합의 세계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직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역사적으로 성취되지 않은 시대였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이를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셨음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두고 위의 다섯 가지 관점을 비교해 볼 때 먼저는 역사적 사실로서 주님의 부활 사건을 받아들이는 단계, 그 부활 사건이 구약에 예언된 것의 성취라는 해석,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들이 부활하는 것에 대한 첫 사례라는 믿음(이것은 아직까지 단 한 차례도 확인된 적은 없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 구원의 근거라는 신학적 해석,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앞에 존재적 부활의 의미, 이러한 순서로 부활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역사적 사실로의 주님의 부활은 성경이 기록하고 제자들이 증거 한 바를 믿는 것입니다. 다음, 주님의 부활이 예언의 성취인 것도 역시 성경이 증거하고 구약에서 신약이 성립하는 과정에 대한 타당하고 합당한 증거를 성경을 통하여 얻을 수 있으므로 이도 믿는 자에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이제 나머지 세 가지 관점에서 바울이 주로 이야기 했던 주님의 부활과 우리들의 부활의 동일시의 관점은 역사시대 내에서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성립된 적이 없고 크로노스적 시간의 종말에 죽은 자들의 부활과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택하신 자들의 들림은 세대주의적 해석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에 대한 의미를 자신에게 받아들이는 면은 베드로의 해석처럼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었다는 의미를 다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더욱 실질적인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해석이 주님이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신 존재적 의미와 더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육체의 부활과 우리들의 육체 부활의 비교
바울의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주님의 부활과 인생의 부활을 동일 시 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예수께서 인간이 되사 인간의 삶과 죽음을 사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신 것이지만 우리는 피조물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이 둘이 본질상 같지만 또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부활은 그 역할과 의미가 우리의 삶과 구원에 대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우리 각자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의 역할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주님의 부활이 우리 구원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곧 베드로의 해석, 즉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육체의 부활에 대한 이해
주님의 부활은 인간의 모든 제한, 즉 시간과 공간, 인과의 법칙 등을 다 초월하시고 하나님이신 사람으로 일어나신 것입니다. 이는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 각각과 연합하시기 위한 이유였습니다. 즉 주님에게는 벽을 통과하는 능력이 영광이 아니라 죽은 우리의 영혼에 연합하시는 하나님 사람의 임마누엘의 성취가 영광이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의 삶의 능력의 원천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악될 일이 아니고 오직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을 살아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속사람, 우리 영혼에 연합하신 주님의 현 위치를 알 때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하워드 마샬, 스티븐 드레비스, 이안 풀, 서신서와 요한계시록, SPCK, 박대영 옮김, 성서유니온선교회, 2007.
고우즈 하루시게. 그리스 로마 신화사전, 이와나미 서점 1960
연대순으로 나열한 바울의 서신
[1] 카이로스 (고대 그리스어: Καιρός, 라틴 문자전사: Kairos, 라틴어형: Caerus)는 그리스어로 '기회 (찬스)'를 의미하는 καιρός를 신격화한 남성신이다. 원래는 '새긴다'라는 의미의 동사에 유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어에서는 '때'를 나타내는 말이 καιρός (카이로스)와 χρόνος (크로노스)의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시각'을, 후자는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또, '크로노스 시간'으로서 과거부터 미래로 일정 속도·일정 방향으로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한 시간을 표현하고 '카이로스 시간'으로서 일순간이나 인간의 주관적인 시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위의 부활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오늘에 적용되는 부활에 의미는 주께서 우리와 하나 되신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거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영으로 우리 죽은 영에 하나 되심으로 소생케 하시고 살과 뼈가 있는 몸으로 부활하사 우리 온 인격에 하나 되셨고 우리 인격 내적으로는 회복의 역사를 하시고 회복된 우리의 인격을 통하여 택하신 자녀들을 살려주는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이처럼 주께서 자신과 하나 되어 계신다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게 됨으로 우리는 자신다움을 회복하게 되고 이로써 사람들 앞에나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게 됩니다. 이를 부활과 연관한 칭의라고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