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윳따 니까야(각묵스님 옮김), 제1권 게송을 포함한 가르침, 제1주제 천신 상윳따(S1),
제4장 사뚤라빠 무리 품 - 돌조각각 경(S1:38』
돌조각 경(S1:38)
Sakalik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맛다꿋치의 녹야원에 머무셨다.187)
2. 그 무렵 세존께서는 돌조각에 부딪혀 발에 상처를 입으셨다.188) 그래서 세존께서는 심한 고통을 느끼셨는데 그 육체적인 느낌은 고통스럽고 격심하고 쓰라리고 신랄하고 참혹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正念正知]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셨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자리를] 만들게 하신 뒤 발로써 발을 포개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 오른쪽 옆구리로 사자처럼 누우셨다.
3. 그때 칠백 명의 사뚤라빠 무리의 천신들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맛다꿋치를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어떤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감흥어를 읊었다. [28]
"존자들이여, 참으로 사문 고따마는 힘센 코끼리(나가)이십니다.189) 그분에게 생겨난 그 육체적인 느낌은 고통스럽고 격심하고 쓰라리고 신랄하고 참혹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만 그분은 힘센 코끼리(나가)와 같은 태도190)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 [正念正知]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십니다."
4. 그러자 다른 천신이 세존의 면전에서 이 감흥어를 읊었다.
"존자들이여, 참으로 사문 고따마는 사자이십니다.191) 그분에게 생겨난 그 육체적인 느낌은 고통스럽고 격심하고 쓰라리고 신랄하고 참혹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만 그분은 사자와 같은 태도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십니다."
5. 그러자 또 다른 천신이 세존의 면전에서 이 감흥어를 읊었다.
"존자들이여, 참으로 사문 고따마는 혈통 좋은 말이십니다.192) 그분에게 생겨난 그 육체적인 느낌은 고통스럽고 격심하고 쓰라리고 신랄하고 참혹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만 그분은 혈통 좋은 말과 같은 태도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십니다."
6. 그러자 또 다른 천신이 세존의 면전에서 이 감흥어를 읊었다.
"존자들이여, 참으로 사문 고따마는 황소이십니다.193) 그분에게 생겨난 그 육체적인 느낌은 고통스럽고 격심하고 쓰라리고 신랄하고 참혹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만 그분은 황소와 같은 태도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십니다."
7. 그러자 또 다른 천신이 세존의 면전에서 이 감흥어를 읊었다.
"존자들이여, 참으로 사문 고따마는 힘센 소이십니다.194) 그분에게 생겨난 그 육체적인 느낌은 고통스럽고 격심하고 쓰라리고 신랄하고 참혹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만 그분은 힘센 소와 같은 태도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십니다."
8. 그러자 또 다른 천신이 세존의 면전에서 이 감흥어를 읊었다.
"존자들이여, 참으로 사문 고따마는 잘 제어된 분이십니다.195) 그분에게 생겨난 그 육체적인 느낌은 고통스럽고 격심하고 쓰라리고 신랄하고 참혹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만 그분은 잘 제어된 모습으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십니다."
9. 그러자 또 다른 천신이 세존의 면전에서 이 감흥어를 읊었다.
"잘 닦은 삼매와 잘 해탈한 그분의 마음을 보십시오. [그분의 마음은] 앞으로도 기울지 않고 뒤로도 기울지 않았으며 [그분의 삼매는] 억지로 노력하여 억압하고 억누른 것이 아닙니다.196) 이러한 인간 가운데 힘센 코끼리(나가)요, 인간 가운데 사자요, 인간 가운데 혈통 좋은 말이요, [29] 인간 가운데 황소요, 인간 가운데 힘센 소요, 인간 가운데 잘 제어된 분에게 해를 끼치려고 생각하는 자는 실로 눈이 먼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0. [세존]197)
"다섯 베다198)를 잘 배운 바라문들이 있어
백 년 동안 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마음 바르게 해탈하지 못하나니
저열한 성품으로는 저 언덕에 이르지 못하노라. {125}
갈애에 계박되고 서계와 계율에 묶여서
힘든 고행 백년간 행한다 하더라도
그들 마음 바르게 해탈하지 못하나니
저열한 성품으로는 저 언덕에 이르지 못하노라." {126}
[천신]199)
"자만에 빠진 자에게 길들임이란 없고
삼매에 들지 못한 자에게 성자의 삶이란 없으니
홀로 숲에 거주하나 방일하여 지내면
죽음의 영역에서 저 언덕으로
결코 그는 건너지 못하옵니다." {127}
[세존]
"자만을 제거하고 바르게 잘 삼매에 드는 자는
고결한 마음으로 모든 곳에서 해탈하였도다.
그는 홀로 숲에 거주하면서 방일하지 않아
죽음의 영역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도다." {128}
187) 라자가하(Rājagaha) 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 「소나 경」 1(S22:49) §1의 주해를, 여러 녹야원에 대해서는 제3권 「무아의 특징 경」 (S22:59)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188) 데와닷따(Devadatta)가 세존을 해하려고 독수리봉 산에서 굴러 내린 바위의 파편에 발이 상하신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바위는 깨어졌지만 그 파편이 발에 피를 나게 하였다. 데와닷따의 비행에 대한 자세한 일화는 『율장』 (Vin.ii.184~203)에 나타나고 있다. 이 사건은 아래 「돌조각 경」 (S4:13)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데와닷따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분열 경」 (s17:31) §3의 주해를 참조할 것.
189) "힘이 세다(balavanta)는 뜻에서 '나가(nāga)'라 한다. '나가와 같은 태도(nāga-vatā)'란 나가와 같은 상태(nāga-bhāva)를 말한다."(SA.i.80)
190) '힘센 코끼리(나가)와 같은 태도'는 nāga-vatā를 옮긴 것이다. 보디 스님은 이 단어를 nāgavant의 도구격으로 보지 않고 여기서 vata를 산스끄리뜨 vrata(삶의 태도, 서계, 작용)로 이해하고 있다.(K.R. Norman의 견해라고 밝히고 있음) 역자도 이를 따랐다.
191) "두려움이 없기(asantāsana) 때문에 '사자(sīha)'라 한다."(SA.i.80)
192) "배운 것을 잘 행하기(byattaparicaya) 때문에 혹은 바른 방법과 바르지 못한 방법을 잘 알기(kāraṇa-akāraṇa-jānana) 때문에 '혈통 좋은 말(ājānī-ya)'이라 한다."(SA.i.80)
193) "대적할 자가 없기(appaṭisama) 때문에 '황소(nisabha)'라 한다."(SA.i.80)
194) "짐을 잘 감당하기(dhuravāha) 때문에 '힘센 소(dhorayha)'라 한다."(SA.i.80)
195)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nibbisevana) 때문에 '제어된(danta)'이라고 한다."(SA.i.80)
196) "여기서 '삼매(samādhi)'는 아라한과의 삼매(arahatta-phala-samādhi)이다. '잘 해탈했다(suvimutta).'는 것은 과의 해탈로 잘 해탈한 것이다. '앞으로 기운다(abhinata).'는 것은 마음이 탐욕에 빠진 것(rāga-anugata)이고 '뒤로 기운다( apanata).'는 것은 마음이 성냄(dosa)에 빠진 것이다. '억지로 노력하여 억압하고 제어한 것이 아니다(na ca sasaṅkhāra-niggayha-vāritavataṁ).'는 것은 한시적으로 억지로 노력하여(sappayogena) 오염원(kilesa)들을 억압하거나 저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와는 달리 오염원들을 완전히 뿌리 뽑았다(chinnattā)는 것이다."(SA.i.80)
"'앞으로 기운다.'는 것은 대상을 향하여 나아감으로서 일어난다는 뜻이고, '뒤로 기운다.'는 것은 싫어하여 떠남으로서 일어난다는 뜻이다. 이 삼매는 억지로 노력하여 어떤 반대되는 법을 대체하여(tadaṅga-ppahāna, 『청정도론『 XXⅡ.112 참조) 오염원을 버렸거나 세간적인 禪의 마음(lokiyajjhāna-citta)이나 통찰(vipassanā)을 하여 억압으로 오염원을 버린(vikkham-bhana-pahāna) 것이 아니라, 오염원들을 완전하게 뿌리 뽑았기 때문에(sabbaso chinnatāya) 성취된 것이라는 말이다."(SAT.8.102)
보디 스님은 여러 판본을 비교하면서 '억누른'으로 옮긴 vāritavata에 대한 자세한 고찰을 하고 있다. 그의 학문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보디 스님 371~374쪽의 주해 88번을 참조할 것.
197) 여기에 나타나는 {125~128}의 네 개 게송들은 누가 읊은 것인지 문맥이나 내용상 분명하지 않다. 보디 스님은 경을 합송하여 결집한 분들이 앞의 신들의 감흥어를 게송으로 추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본경의 {127}과 {128}은 위의 본서 「자만에 빠진 자 경」 (S1:9)의 {15}와 {16}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그곳에서 {15}={127}은 천신이 읊은 것으로 나타나고, {16}={128}은 세존께서 읊으신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본경에서도 이 두 게송을 이렇게 간주하여 옮겼으며, {125~126}은 세존께서 읊으신 것으로 옮긴다. 미얀마어 번역본에는 이 네 개 게송들이 모두 세존께서 읊으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198) 일반적으로 초기불전에서 베다(veda)는 3베다로 언급되거나 4베다로 언급되는데 여기서는 5베다로 언급되고 있다. 주석서는 4베다( 『리그베다』, 『야주르베다』, 『사마베다』, 『아타르와베다』 )에다 역사(itihāsa)를 넣어서 5베다로 설명하고 있다.(SA.i.81)
이것은 "역사를 다섯 번째로 하는(itihāsa-pañcamā) 3베다(ti vedā)" ( 『디가 니까야』 「암밧타 경」 (D3) §1.3)라는 경문이나, 여기에 대해서 " 『아타르와베다』 (Āthabbaṇaveda)를 네 번째로 하고 '참으로 그러하였다(iti ha āsa).'는 말과 상응하여 오래된 이야기(purāṇa-kathā)라 불리는 역사(itihāsa)를 다섯 번째로 한다고 해서 역사를 다섯 번째로 하는 베다들이라 한다."(DA.i.247)라고 설명하는 『디가 니까야 주석서』 의 견해와 일치한다.
199) {127}과 {128}은 본서 「자만에 빠진 자 경」 (S1:9)의 {15}와 {16}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설명은 그곳의 주해들을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