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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百濟本紀)] 수수께끼】(5)
[三國史記卷第二十三(삼국사기권제23)百濟本紀第一(백제본기제1)<肖古王>(초고왕)]
○<肖古王>[一云<素古>.], <蓋婁王>之子. <蓋婁>在位三十九年薨, 嗣位.
초고왕[소고라고도 한다.]은 개루왕의 아들이다. 개루왕이 재위 39년(166)에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었다.
【25. <초고왕(肖古王)> 수수께끼】
<열다라(十濟)>의 초기(初期) 왕계(王系)를 살펴보면 나이가 어울리지 않게 많아 부자계승(父子繼承)을 믿기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온조왕(溫祚王)>은 어머니 <소서노(召西奴)>와 함께 <고구려(高句麗)>를 떠난 것이 BC.42.이고, 형 <비류(沸流)>를 떠나 <열다라(十濟)>를 세운 BC.18.에 나이가 최소한 서른 살이었으며, 46년 재위했으니 죽을 때 나이는 여든 살 쯤 됐을 것입니다.
AD.10년에 태자로 책봉된 제2대 <다루왕(多婁王)>은 AD.28.에 왕위(王位)에 오를 때 나이가 서른 살은 됐을 것이며, 50년 재위했으니 여든 살 넘어 죽었을 것입니다.
제3대 <기루왕(己婁王)>은 AD.33.에 태자로 책봉되어 AD.77.에 왕위(王位)에 오를 때 나이는 최소한 예순 살이었을 것이며, 52년 재위했으니 백 열 살 넘어 죽었습니다.
제4대 <개루왕(蓋婁王)>은 태자 책봉은 없고, <기루왕(己婁王)>의 아들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어서 나이를 알 수 없으나, 아들이 아니라 증손자이거나, 왕계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초고왕(肖古王)>도 역시 <개루왕(蓋婁王)>의 아들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어 수수께끼입니다.
그런데 <열도(列島)> <교또(京都)>에 있는 <야사카신사(八坂神社)>의 연기(緣起)에 따르면 제신(祭神) <고스텐노(牛頭天王)>는 <신라국(新羅國)> <우두산(牛頭山)>에서 모셔온 <스사노오노미고토(須佐之雄尊)>이라고 신사 기록돼 있습니다.
<스사노오노미고토(須佐之雄尊)>는 <소시모리(曾尸茂利)=지금의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의 <우두산(牛頭山)>에서 <열도(列島)>로 건너가 AD.160.에 <아마데라스오미가미(天照大御神)=<연오랑(燕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호스마쿠니(秀眞國)>을 정복(征服)하여 <이즈모쿠니(出雲國)>를 세워 다스렸습니다.
[고지기(古事記)]와 [니혼쇼기(日本書紀)]의 건국시조(建國始祖) <스사노오노미고토(須佐之雄尊)>는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속고와우(速古王)>이라고 기록됐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고왕(肖古王)>입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의 <속고와우(速古王)>는 <온조(溫祚)>의 후예(後裔)가 아니라 <졸본부여(卒本夫餘)> 시조(始祖) <동명성왕(東明聖王)>의 후예(後裔)로써 <열도(列島)>에서 <이즈모쿠니(出雲國)>를 다스릴 때 자손(子孫)을 많이 남겼습니다.
한편 <지나사서(支那史書)>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따르면 AD.121년에 <후한(後漢)>의 <현토성(玄菟城)>을 포위했던 <고구려(高句麗)> 연합군(聯合軍)을 쫓아낸 <졸본부여(卒本夫餘)> <구태왕(仇台王)>도 시조(始祖) <동명성왕(東明聖王)>의 후예(後裔)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지나사서(支那史書)>, <열도사서(列島史書)>를 종합하면 <내몽고(內蒙古)> <적봉(赤峰)>에 있던 <졸본부여(卒本夫餘)> <구태왕(仇台王)>의 토벌군(討伐軍)이었던 <초고왕자(肖古王子)>는 AD.121년에 <고구려연합군(高句麗聯合軍)>을 쫓아낸 후에 AD.155년에 <열다라(十濟)>로 진출(進出)하여,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의 <소시모리(曾尸茂利)>의 성주(城主) <신라(新羅)> 아찬(阿湌) <길선(吉宣)>의 <우수주(牛首州)>를 점령하고 있다가, <열도(列島)>로 건너가 AD.160년에 <호스마쿠니(秀眞國)>을 정복(征服)하여 <이즈모쿠니(出雲國)>를 세워 다스렸으며, AD.166에 <열다라(十濟)>로 돌아와 <초고왕(肖古王)>이 된 것입니다.
○二年, 秋七月, 潛師襲破<新羅>西鄙二城, 虜獲男女一千而還. 八月, <羅>王遣一吉湌<興宣>, 領兵二萬, 來侵國東諸城. <羅>王又親帥精騎八千繼之, 掩至<漢水>. 王度<羅>兵, 衆不可敵, 乃還前所掠.
2년(167) 가을 7월, 군사를 몰래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에 있는 두 성을 격파하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 신라왕이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동쪽의 여러 성을 침공하게 하였다. 신라왕은 또한 직접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뒤를 이어 한수까지 진격해왔다. 왕은 신라군이 많아서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곧 이전에 빼앗았던 성을 돌려주었다.
○五年, 春三月丙寅晦, 日有食之. 冬十月, 出兵侵<新羅>邊鄙.
5년(170) 봄 3월 그믐 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二十一年, 冬十月, 無雲而雷. 星孛于西北, 二十日而滅.
21년(186) 겨울 10월, 구름 없이 우레가 쳤고,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二十二年, 夏五月, 王都井及<漢水>皆竭.
22년(187) 여름 5월, 서울의 우물과 한수가 모두 말랐다.
○二十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出師攻<新羅><母山城>.
23년(188)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군사를 출동하여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二十四年, 夏四月丙午朔, 日有食之. 秋七月, 我軍與<新羅>戰於<狗壤>, 敗北, 死者五百餘人.
24년(189) 여름 4월 초하루 병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우리 군사가 신라와 구양에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죽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二十五年, 秋八月, 出兵襲<新羅>西境<圓山鄕>, 進圍<缶谷城>. <新羅>將軍<仇道>, 帥馬兵五百, 拒之. 我兵佯退, <仇道>追至<蛙山>, 我兵反擊之, 大克.
25년(190) 가을 8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공격하고, 더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했다. 신라 장수 구도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퇴각하는 척하자 구도는 와산까지 추격해왔다. 이 때 우리 군사가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二十六年, 秋九月, 蚩尤旗見于角·亢.
26년(191) 가을 9월, 치우기별이 각성과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26. <치우기(蚩尤旗)> 수수께끼】
<치우기(蚩尤旗)>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이곳 한번 보입니다.
천문관측(天文觀測) 기록입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혜성(彗星)>의 꼬리가 깃발처럼 구부러진 모양을 <치우기(蚩尤旗)>라고 하는데,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치우릉(蚩尤陵)>에서 제사(祭祀)드릴 때, 붉은 색 상서로운 기운(氣運)이 뻗어 올라 마치 혜성(彗星) 꼬리처럼 보였다고 해서, 혜성(彗星)을 <치우기(蚩尤旗)>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치우기(蚩尤旗)>가 관측(觀測)되면, 상서로운 일이나 병란(兵亂)이 일어나 왕이 사방을 정벌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치우(蚩尤)>는 <배달국(倍達國)> 14대 <환웅(桓雄)> <자오지천왕(慈烏支天王)>을 <사마천(司馬遷)>이 <지나사서(支那史書)> [사기(史記)]에 <황제(黃帝)> <헌원(軒轅)>과 싸운 <동이(東夷)> <천자(天子)>를 폄훼(貶毁)한 이름입니다.
5년 전인 21년(AD.186) 조와 13년 후인 39년(AD.204) 조에도 <혜성(彗星)>이 관측됐는데, 이때는 <치우기(蚩尤旗)>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AD.191년의 <치우기(蚩尤旗)> 관측(觀測) 기록은 <요동왕(遼東王)> <공손탁(公孫度)>이 <부여왕(夫餘王)> <구태(仇台)>에게 딸을 바쳐 결혼동맹(結婚同盟)한 일을 은유(隱喩)해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三十四年, 秋七月, 地震. 遣兵, 侵<新羅>邊境.
34년(199) 가을 7월, 지진이 났다.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三十九年, 秋七月, 出兵攻<新羅><腰車城>, 拔之, 殺其城主<薛夫>. <羅>王<奈解>怒, 命伊伐湌<利音>爲將, 帥六部精兵, 來攻我<沙峴城>. 冬十月, 星孛于東井.
39년(204) 가을 7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요차성을 공략하고, 성주 설부를 죽였다. 신라왕 나해가 분개하여 이벌찬 이음을 장수로 삼아 6부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사현성을 치게 하였다.
겨울 10월, 혜성이 동정 성좌에 나타났다.
○四十年, 秋七月, 太白犯月.
40년(205) 가을 7월, 태백성이 달을 범하였다.
【27. <태백범월(太白犯月)> 수수께끼】
천문관측(天文觀測) 기록인 <태백범월(太白犯月)>도 <치우기(蚩尤旗)> 관측(觀測) 기록과 비슷한 은유(隱喩)로 보입니다.
<온다라(百濟)>는 <졸본부여(卒本夫餘)> 시조(始祖) <동명성왕(東明聖王)>의 후예(後裔)인 <구태왕(仇台王)>이 <대방고지(帶方故地)>에 세웠다고 했으나, <대방군(帶方郡)>은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AD.204에 설치한 것으로, <구태왕(仇台王)>이 직접 세울 수 있는 연대(年代)가 아닙니다.
<구태왕(仇台王)>의 아들이나, 손자가 <공손강(公孫康)>이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에 <졸본부여(卒本夫餘)> 백성을 나눠 이주시켜, <온다라(百濟)>를 세운 것을 <태백범월(太白犯月)>이라고 은유(隱喩)한 것으로 보입니다.
○四十三年, 秋, 蝗, 旱, 不順成, 盜賊多起, 王撫安之.
43년(208) 가을,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물어서 곡식이 잘 익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그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四十四年, 冬十月, 大風拔木.
44년(209) 겨울 10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四十五年, 春二月, 築<赤峴>·<沙道>二城, 移東部民戶. 冬十月, <靺鞨>來攻<沙道城>, 不克, 焚燒城門而遁.
45년(210) 봄 2월, 적현성과 사도성을 쌓고 동부의 민가를 그곳으로 옮겼다.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에 와서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성문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였다.
○四十六年, 秋八月, 國南, 蝗害 , 民饑. 冬十一月, 無氷.
46년(211) 가을 8월, 남쪽 지역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1월, 물이 얼지 않았다.
○四十七年, 夏六月庚寅晦, 目{日} 有食之.
47년(212) 여름 6월 그믐 경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四十八年, 秋七月, 西部人<茴會{荀會}> 獲白鹿, 獻之. 王以爲瑞, 賜 一百石.
48년(213) 가을 7월, 서부 사람 회회가 흰 사슴을 잡아 바쳤다. 왕이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곡식 1백 석을 주었다.
○四十九年, 秋九月, 命北部<眞果>, 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冬十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王薨.
49년(214) 가을 9월, 북부의 진과에게 명령하여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겨울 10월, 말갈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우술천에 이르렀다.
왕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