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異邦人
〈漢陽村庄〉 한양촌장
十里平沙細雨過 십리평사세우과
一聲長笛隔蘆花 일성장적격로화
直將金鼎調羹手 직장금정조갱수
閒把漁竿下晩沙 한파어간하만사
漢陽 촌집
십리 모래밭에 가는 비 지나가고
외론 피리소리 갈대 저쪽에 기[長]네
국 끓일 솥과 사람 데리고
낚싯대 한가히, 저녁녘 모래벌로 내려가네.
이것은 고려 말엽의 유명한 대관이요, 문장가였던 한양부원군漢陽府院君 한종유韓宗愈(1287∼1354)가 당시의 한양 풍경을 노래한 시다.
십리평사十里平沙라는 것이 어느 곳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아마 마포麻浦 서강西江이나 노들, 뚝섬 등 한강 가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면 현재의 4대문 안팎을 가지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그곳에는 모래밭이 있을 뿐 아니라 갈대숲이 우거지고 갈대 저편에서는 외로운 피리소리가 들려오고, 강(혹은 개울)에는 맑은 물이 흘러서 족히 한가하게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다 하니, 그런 곳은 지금의 서울은커녕 서울서 백리쯤 떨어진 곳을 가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6백여 년이란 세월이 긴 것도 사실이지만, 한 고장의 풍경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하기는 서울 이야기를 하는데, 왕조까지 다른 6백 년 전 시를 끄집어낸 것이나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6백년은 고사하고 내가 아는 서울, 60여 년 동안의 서울만 가지고 말해도 서울은 정말 딴판으로 변했으니 말이다.
60여 년 전만 해도 서울은 도시라느니 보다도 아직 전원적이었다. 4대문 안에 논밭과 앵도밭이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가 있으며 하늘에서는 새가 지저귀었으니 말이다.
청계천은 이미 더러웠었지만, 삼청동 개울물은 아직 맑아서 여름철이면 개구쟁이들이 미역을 감기에 알맞을 만하였다.
인가 근처에 이곳저곳 약물터가 많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다. 취운정翠雲亭 약물도 유명했지만 물맛으로는 화동花洞 ‘복주우물’ 과 삼청동 꼭대기 ‘성주우물’을 쳤다. 물맛 좋기로는 무악재 ‘악박골 약물’이 제일이었지만 그곳은 ‘문밖’이라 경기京畿 감영監營(현, 적십자 병원 앞)서 전차를 내려 오리쯤 걷거나 사직단社稷壇 뒤 바위 언덕을 넘어가거나 해야 했기 때문에 ‘문안’ 사람들은 여간 큰 마음 먹지 않고는 가기 힘든 곳이었다.
약물터라 하면 ‘노구메’ 생각이 난다. 여름철이면 아낙네들이 인가에서 떨어진 약물터를 찾아가 빨래도 하고, 노구솥에 밥을 지어 산신령께 고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노구메를 끝내고 바가지에 담아 먹는 음식 맛은 또 각별하였다.
동대문 안, 지금의 혜화동, 명륜동 일대는 모두 앵도밭이었으니 서울은 ‘전원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서울 속에 전원田園이 실지로 있었던 것이다. 구 서울대학교 본부와 도서관 근처에는 논이 많았고, 어의동於義洞 양사골[養士] 일대에는 김장밭이 많았다.
하늘도 서정적敍情的이었다. 저녁을 일찍 먹은 날이면 나는 곧잘 집 뒤 동산에 올라가 노을 낀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한참씩 황홀해 하였는데, 그맘때면 으례 왜갈거리며 천천히 하늘을 날아 도는 종묘宗廟 안 왜가리떼를 쳐다보는 것이 즐거웠던 것이다.
왜가리 뿐 아니라 서울 하늘에는 소리개도 많았다. 한 손으로 고기 덩어리를 받쳐 든 채 한 눈을 팔고 길을 걷던 젊은 비녀婢女가 소리개한테 고기를 앗겼다 하면 지금 사람들은 아마 안믿으려 할 것이 아닐까.
밤이 되면 쥐죽은 듯이 고요한 것이 또 그때의 서울이었다. 구름이 낮게 드리운 밤 늦게 자리에 들면 곧잘 커브를 도는 전차소리가 삐익- 하고 멀리서 들려왔다.
북촌北村에서 남대문 정거장은 꽤 되는 거리지만 정거장 기적 소리마저 들려오는 때도 있었다. 기적 소리란 날카롭고 호들갑스런 것이지만 밤중에 고요를 뚫고 들려오는 기적 소리는 짧으면 짧은대로, 길면 긴대로 이상스레 애조哀調를 띄고 있어서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 틈엔가 슬며시 꿈나라를 헤매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60여 년 전 서울을 전원적이었다 하는 것은 자연 풍경보다도 생활조건이 또한 반은 시골 취락聚落 같았기 때문이다. 서울은 그때에도 물론 인구가 13만인지 17만인지 되기는 하였지만 나에게는 서울은 그저 친구들, 일가들, 그리고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친구 어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골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우리집과 자주 내왕하는 분들의 집은 대개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러한 서울의 낭만이 차차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3.1운동이 지난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였다.
언제부터인가 일가집, 아는 집들이 한집 두집 낙향하기 시작하더니 소위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로는 그 템포가 빨라져서 서울에 남은 사람들도 대부분 누대累代 살아오던 큰집을 팔고 문밖 초가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이 살던 굵직굵직한 낡은 집들은 사정없이 헐리고, 그 자리에 집장사의 조그만 새 집들이 수없이 들어섰는데, 그런 새 집의 주인들은 대개는 낯모르는 생소한 사람들이었다.
30년 전 한창 팔팔하던 시절, 집을 나서면몇발짝 안가서 으례 친구요, 아는 사람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왜 그렇게 반갑기는 했던지, 게다가 하고 싶은 말은 왜 그리 또 많았던 것인지, 만나면 으레 ‘아시아’나 ‘멕시코’로 가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었지만, 조금 기분이 내키는 때면 신간 책도 볼 겸 곧잘 진고개까지 걸음을 뻗기도 하였다.
술은 먹고 싶은데 주머니에 돈이 없을 때에도 걱정할 것은 조금도 없었다. 종로 네거리서 파고다공원 사이를 한 두 번만 왔다 갔다 하면 으례 그날밤 술을 사겠다는 친구를 만나게 마련이었으니까.
그렇던 나의 서울이요, 서울의 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인구 7백만이 가까왔다는 서울 거리에서 지금 나는 완전히 이방인이 되었으니! 높은 빌딩이 임립林立하고 자동차 소음이 귀를 째는 대낫 서울 거리에 서서 대하大河의 흐름같이 오가는 수천 수만의 군중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낯익은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나의 친지, 나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왔다는 것인가.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오늘도 내가 이방인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것은 오직 저 삼각산 뿐이다. 우람찬 집현봉集賢峰에서부터 북동으로 뻗어 푸른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백운대, 노적봉, 인수봉의 낯익은 얼굴들! 북한연봉北漢連蜂이 내 눈앞에 있는 한 서울 거리에 낯익은 사람이 아무리 없어도 나는 서울 사람임이 틀림없다.
可憐靑木未藏龍 가련청목미장용
蕭瑟千年鵠嶺松 소슬천년곡령송
鐵犬寥寥東向吠 철견요요동향폐
白雲飛盡見三峰 백운비진견삼봉
애닲다 松都는 용을 감추지 못해
鵠嶺 소나무만 천년을 소슬하네
鐵犬 쓸쓸히 동을 향해 짖는데
흰구름 다 걷히니 우뚝 솟은 세 봉우리.
이것은 유득공柳得恭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중 송도[開城]를 읊은 한 수다. 신승神僧 도선道詵이 고려 태조를 위해 송악 남쪽 기슭을 도읍으로 잡아주었지만, 구름이 걷힌 후에 동남으로 한양 쪽을 바라보니 삼각산 연봉이 하늘가에 솟아 있어서, 놀란 도선은 삼각산 기운을 누르기 위해 철견鐵犬 열두 마리를 만들어 동을 향해 짖게 했다는 것이다.
아, 서울의 진산鎭山이여! 삼각산이여! 네가 내 눈앞에 버티고 있는 한, 나는 이방인이 아니라 서울 사람이다!(출전:《젊은날의 自畵像》, 1976. 7.5, 博英社 刊, 博英文庫 115/ 《女性東亞》, 1975.12월호)
* 취운정翠雲亭:취운翠雲의 뜻은 푸른翠 구름雲이다. 1686년(숙종 12년)에 지었고, 창덕궁 낙선재 구역에 있는 정자, 현재 비공개 구역이라 일반 관람객들은 가까이서 볼 수 없다.
* 화동花洞 ‘복주우물’:종로구 화동 47번지에 있던 우물.
* 무악재 ‘악박골 약물’:현재의 서대문구 안산의 금화산 자락 악바위 밑에서 나오던 샘물, ‘영천靈泉’이란 지명이 붙은 유래.
* ‘노구메’:산천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기 위하여 노구솥에 지은 메밥.
* 어의동於義洞 양사골[養士]:어의동於義洞은 종로5가와 연지동에 걸쳐 있던 마을, 효종의 잠저인 어의궁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양사골은 어의동을 중심으로 동대문 부근에 동부학당이 있었고, 이곳에서 선비들을 길러냈으므로 양사골[養士]로 불렀다.
* 진고개[泥峴]: 중앙우체국 옆에서부터 세종호텔 뒷길로 이어진 낮은 고개, 남산의 산줄기가 명동성당으로 뻗어내려 오다가 잘룩하게 형성된 이 고개는 늘 흙길이 질퍽댔기에 붙은 이름. 이 일대를 남산골이라고 불렀는데,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다 해서 ‘남산골 샌님’,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고 해서 ‘남산골 딸각발이’라고 불렀다.
* 가능한 한 현재의 철자법에 따랐으나, (문장의 정감情感 유지를 위해)원문을 그대로 살린 부분도 있음을 밝힙니다.〈편집자〉
유진오
본관 기계杞溪, 서울 출생(1906∼1987),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대법문학부 법학과 졸업, 보성전문학교 교수, 대한민국 헌법기초 법제처장, 고려대학교 총장, 신민당 총재, 국회의원/ 《華想譜》, 《滄浪亭記》, 《구름위의 漫想》, 《김강사와 T교수》, 《유진오 단편집》, 《젊은 세대에게 부치는 서》, 《젊은 날의 自畵像》, 《憲法의 基礎理論》, 《憲法解義》, 《民主政治에의 길》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