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한국으로의 귀환] 코마노에서만 피난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어떠한 이유인지 정확하게는 기억하진 않았지만 코마노에서 시마노케로 다시 한 번 이동 하였다. 시마노케의 생활도 코마노와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난 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마을에서 배척을 받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큰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따라서 재산을 계속 탕진 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배에다가 막 차고 왔다고 하데.” “피신을 갔다가 우리 집을 그대로 나두고, 나고야 집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시마노케에서 바로 한국으로 넘어왔잖아” “[얼마나 걸려서 도착하셨습니까?] 모르지 어찌나 파도가 치는지.……큰 배라 연락선 큰 배.” “부산 저저 자갈치에 도착했지 2 부두에 도착했지…… 한국에 오니까 귀환 동포라고 사람 취급도 안했어. 그 당시에 막 소동을 막 부리고 그란데 한국 사람은 일본 사람 때문에 못살겠다고 귀환 동포 우환 동포라 해가지고 얼마나 고통을 많이 당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중 전쟁이 끝나고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이후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대다수는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서 귀환 명령을 받고 귀환하였다. 그때 어르신의 가족도 정책에 따라 귀환하였다. 어느 항구를 통해 어떤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 왔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 거주 지역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나고야에서 귀환선으로 이용된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에 도착한 이후 아버지의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갔다. 외가 친척들도 고향인 진해로 돌아갔다. “합천을 갔지 가 가지고 마 저 저 예전에 돈 벌어 가지고 큰집에 논 사고, 집 사고 핸거 그런 거는 마 입 싹 딱아 삐고 얼마나 배를 많이 골았는지 모른다.” “[돈을] 다 때먹었어. 우리 엄마, 아부지가 [돈을] 보냈는데 그걸 마마 동생이 [돈을] 보내주서 [논, 집을] 샀다하는 것을 쌀도 옳게 한 되 주도 안하고 배를 많이 골다 왔어.” “내 밑에 동생은 우리 큰엄마가 즈그 아들은 밥을 주고 우리 동생은 그 얼마나 먹고 싶겠노. 배가 고픈데. 옛날에 촌에는 봉창을 내놓거든 벽에다가 부엌에다가 반찬 같은 거, 밥 같은 거 갖다 놓는데 거기에 들어가서 즈그는 밥을 먹는데 우리 동생은 ‘엄마 밥도’ 하니까 도랑까 가서 엄마한테 혼나고. 얼마나 배를 많이 골았는지.” 귀환한 이후 가족의 생활은 힘들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와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매달 합천의 큰집에 땅을 사두라고 돈을 송금하였다. 그러나 큰집이 횡령하였고, 일본에서 모아둔 재산도 태평양 전쟁 피난에 거의 탕진하였다.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친척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어르신 가족에게 큰 힘이 되지 못하였다. 자신들에게 의지할까봐 어르신들의 가족을 꺼렸던 것이다. 어르신의 가족은 친척들의 냉대와 멸시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귀환이 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사건이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귀환은 ‘민족의 땅’을 되찾아가는 이동인 동시에, 식민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람들의 이동이었던 것이다. 해방된 조선으로의 귀환은 새롭게 건설될 국가의 국민이 되는 과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독립한 지역의 국가 건설 과정에는 ‘국민’이라는 공동체 인식의 확산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당시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귀환 동포 구호에 정부가 많은 힘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귀환 동포를 환영하는 정부의 발표를 시작으로 이후 귀환 동포의 구호를 위한 많은 활동이 벌어졌다. 즉 귀환민은 이차적으로 해외 동포로 호칭되고 국내 동포에 의해 구호를 받은 다음 ‘국민’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귀환 동포는 본국에 살고 있는 국민에게 있어서는 골칫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1945년 9월 30일 조선 원호 단체 대회를 비롯하여 많은 전재민(戰災民) 원호 활동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구호금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강제 할당 방식을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관공서, 회사, 공장 등의 직원 월급에서 일정액을 각출하는 방식에서 정(町)과 동(洞) 단위 등 행정 단위로 강제 할당식이 진행되었다. 이런 ‘자립적’으로 거출(醵出)한다는 명분의 강제 할당식에 대해서 원주민들은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고, 귀환 동포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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