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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의 건설과 바울의 서신서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칭의 되는 믿음과 뼈대가 되는 율법>
할렐루야!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십자가 대속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자가 이렇게 온 세상에 복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영광이요, 감사요, 찬양입니다. 주 예수여! 주님의 영광의 광채가 온 세상을 비추길 원합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감동하심으로 세상의 것들로 가득찼고 복음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했던 자가 이렇게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전하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한이 없습니다. 평범하지도 못한 모든 것에 부실한 인간을 선택하시어 언제나 참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죄악의 길로 갈 땐 징계로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모든 영광이 주님께만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와 목자와 성도를 통해서 큰 도움을 받게 하시고 위로받게 하셨습니다. 가족과 친구와 좋은 주님의 종들을 통해서 늘 힘을 얻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세세무궁토록 빛나길 원합니다. 주님 감사드립니다. 저는 주님의 영광중에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속히 이 땅에 이루어져서 모든 세상의 성도가 나라와 인종을 초월해서 하나가 되고 주님께 이 세상을 통치하시려 주신 율법이 성령의 인도로 인해서 속히 실천이 되어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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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의 건설과 바울의 서신서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칭의 되는 믿음과 뼈대가 되는 율법>
목차≫≫
제 Ⅰ 편 비밀이 밝혀지는 데 2000년이 걸린 이유
1. 복음이 속히 전해져야 하는 하나님의 뜻
2. 바울과 초대 교인의 모습
3. 설명이 가능한 현대 기기의 등장(압축 파일, 빙산)
제 Ⅱ 편 바울의 심정에 대한 이해
1. 당시의 이스라엘과 로마의 상황
2. 바울의 외침
3. 온 세상을 품은 로마서와 바울
제 Ⅲ 편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믿음과 뼈대가 되는 율법에 대한 이해
1. 서론
2.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는 믿음
3. 하나님 나라 뼈대가 되는 율법
4. 논의의 요약
제 Ⅳ 편 덧붙이는 간증
제 Ⅰ 편
비밀이 밝혀지는 데 2000년이 걸린 이유
1. 하나님의 뜻
2. 바울과 초대교회의 모습
3. 압축 파일, 빙산의 일각
제 Ⅰ 편
비밀이 밝혀지는 데 2000년이 걸린 이유
1. 속히 복음 전파의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하늘과 지구를 만드신 후 지구에 사람을 비롯해서 만물을 만드신 후 사람에게 명령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사람들이 지구상에 퍼져 나가서 살게 되었다. 이로부터 약 1700년이 지났을 때 사람들이 지구상에 나누어져서 살고 있는데 모두가 죄를 짓고 오직 노아와 가족만 의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인정받았다.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물로 온 죄악으로 물든 온 세상을 심판하시었다.
그 후에 노아의 후손이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퍼져서 살고 있었는데 온 인류 중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선택을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후손이 민족이 되고 나라가 되어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나온 후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으니 구약이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율법이 잘 지켜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셨다. 그런데 다윗 왕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왕들과 귀족과 백성이 율법을 배우지도 지키지도 않았기에, 약 1000년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의 시간이 끝이 나고 택한 민족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런 와중에도 구약의 모세 오경 즉 율법을 잘 보존하고 그들의 역사를 역사서로 기록했고 노래와 찬양과 시를 모아서 시편으로 그리고 언제나 변함없이 올바른 길로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한 예언자들의 기록을 모아서 구약 39권을 완성했고 이를 헬라 시대에 70인 역으로 온 세상에 전했다.
이렇게 약 140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기록된 구약 성경은 글자 한 자 바뀜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잘 보존이 되었는데 이를 기록한 이스라엘 민족도 구약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때가 차매 구약의 약속대로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에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오시었다. 오직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 그리고 성전에서 살던 여인과 지극히 일부의 사람만 메시아를 알아보았지만 그의 부모도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당할지, 혹은 하실지를 잘 몰랐다.
이 예수님은 천지의 창조주요, 그리스도시오, 그리고 인류를 죄에서 건질 구세주가 되시는데 30세쯤 되셔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어부 등을 제자로 부르시고 모든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다. 이제 이 땅에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땅에 건설하시고자 하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선 예수님께서 오셔서 2000년이 지났지만 그 논의도 드물고 그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는 사람도 역시 드물다. 이는 죄악에 물이 든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 이미 예수님 오시기 전 약2200년 정도를 하나님을 잊고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선택이 되어서 이를 바로 잡아야 했지만 이스라엘도 실패했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게 이 땅에 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이 지구상으로 퍼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다. 약 2000년이 지났는데 이제 온 세상에 복음이 대부분 전파가 되었다.
우리가 사는 한국에까지 복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는데 약 1800년이 걸렸다. 이와함께 아직도 예수에 대해서 듣지 못하는 종족이 있고 이슬람 제국과 북한과 같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강제로 막는 나라들도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온 인류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며 국가와 인종을 초월해서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와 민족이 먼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가장 바라셨고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고 그 나라의 법인 율법을 잘 지키며 이 땅에 성령 안의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것은 다음으로 생각하신 듯 하다.
이제 예수님 오신 후 2000년이 지났다. 복음이 이제 지구의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에게 전파가 되었고 온 지구의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때가 되었다고 믿는다. 저는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이 되어서 훈련과 교육을 받고 이를 전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올바른 믿음의 기초 위에 하나님의 나라의 법, 즉 가장 세상에서 정의롭고 공평한 법이 믿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에게 시행이 됨에 있다. 법이 없는 나라는 설 수가 없고, 법이 온전치 못한 나라는 절대로 정의로울 수가 없다. 인류가 이 땅에 살기 시작하면서 모든 민족과 집단과 나라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법은 시대에 따라 국가의 이익에 따라 집단의 이익에 따라서 변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법학자가 똑똑해도 인간이기에 모든 세상의 사람이 다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 법을 아무도 지금까지 만들지 못했다.
오직 사랑과 정의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만 온 인류가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 법을 만드실 수가 있으니 그 법이 모세 오경의 율법이다. 이 법을 이스라엘 민족이 다양한 고난 중에도 잘 보존했고 지금도 잘 지키려고 하고 오직 이 법을 통해서 온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이해에 있어서도 천주교와 개신교가 일치하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법인 율법에 대해서도 천주교 개신교 모두가 다 그들의 성도가 그 법을 지킴에 있어 소극적이다. 이렇게 중요한 율법이 왜 지금까지 이런 대접을 받고 있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왜 이렇게 모두에게 멀리 있게 느끼어지는 것인가?
비록 성경의 이해에 있어 지금과 같이 온 세상의 교회가 통일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일을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로 여기셨기에, 교회들이 성경을 서로 조금 다르게 이해하고 있더라도 우선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도록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역사하셨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 세상의 교회들과 교인들의 모습을 온 지구상에서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복음이 내포하는 내용의 전적인 완전한 이해에 교회들이 다다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의 구원이 일어나면 이를 용납하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개신교가 태통하고 500년이 흘렀지만 서로 교리에 있어 다르고 하나가 되지 못했지만 개신교를 통해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영국의 400년의 영화와 미국이 누리는 수백년의 영광과 스페인과 유럽의 열강의 번영과 쇠퇴에도 복음이 전해진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인내가 있으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누구도 지난날의 신학적인 주장에 대해서, 유럽 제국의 1.2차 대전과 번영과 쇠퇴에 대해서 함부로 비판, 비난, 정죄해서는 절대로 아니 되는 것이다. 복음을 통해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함부로 해석하고 판단해서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분명히 밝히고 새로운 2000년대를 맞아서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기를 향한 뜻으로 믿는다. 모든 천주교, 개신교 성도가 그리고 정교회 성도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진리가 밝혀지기 전에 우리가 알고 믿던 모든 일은 지나간 일이다. 누가 누구를 비난하고 심판하고 할 권리가 없고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다. 다만 진리를 접하고도 순종치 않을 때는 이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자신이 져야 할 것이다. 새롭게 밝혀지는 서신서에 대한 비밀은 천주교 개신교가 500 년 동안 서로 쉬지 않고 논쟁을 벌이면서도 해결을 보지 못한 “칭의 되는 믿음”에 대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새롭고 올바른 “칭의 되는 믿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반드시 모든 성도가 지켜야 하는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을 설명할 것이다.(이신칭의에 대한 논쟁이 칭의 되는 믿음에 대한 이해로 풀리기 된다.)
이 “모세 오경의 율법”과 “칭의 되는 믿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하나님의 나라의 뼈대와 기초로서 이에 대한 이해가 없이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설 수가 없다. 2000년을 셀 수 없는 신학자, 성경학자, 그리고 신실한 성도가 성경을 읽었지만 잘 이해가 되지 못했던 부분이 한국에 사는 무명의 목사에 의해서 밝혀짐은 때가 되어서 온 지구상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깨닫게 하심을 통해서 이다. 이는 나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른 부분이 있어서나 우월함이 있어서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부족한 사람을 들어서 쓰시는 것은 아무도 이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이렇게 귀한 일에 쓰임을 받는 것에 대해서 영광스러울 뿐이며 모든 면에서 보통 이하이고 흉악한 죄인에 불과한 사람으로 모든 영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보혈과 십자가 대속의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망극하신 사랑과 그리고 성령님의 함께 하심과 감동하심에 돌린다.
주의 이름이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시며 그분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임하길 바랄 뿐이다.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2. 바울과 당시의 상황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초기 기독교의 사정은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그리고 사복음서를 통해서 너무나 자세하게 알 수가 있다.
농경과 목축, 그리고 어업이 주가 되던 시대 로마가 영토를 넓히며 지중해 주변을 통치하던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농부와 어부 그리고 목자들과 같이 지내시면서 들판에서 이들에게 천국을 전하시고 진리를 전파하셨다. 그리고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셨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성령을 기다려 선물로 받으라고 하시면서 승천하셨다.
이제 성령께서 오셨다. 마가 다락방에 모인 모든 무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성령 받은 사도들의 전도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이들 모두는 나의 것 네 것이 없이 서로 모두가 형제로 함께 나누고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전도했다.
나중에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믿게 되었다. 대부분이 유대인 성도였다. 이들에 의해서 안디옥 교회가 설립되고 바울과 바나바가 사역하며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그리스와 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했다.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친히 본 사람들이다. 그리고 100%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는 처음에는 이들을 이상하게 생각했고 유대교에 적이 되는 무리라고 믿어 잡아서 가두고 이들을 심히 박해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눈이 멀게 되고 아나니아를 만나서 예수님의 이름의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들이 사복음서와 바울 서신, 신약의 서신서를 쓴 것이다.
이들의 모습과 같이 되어야 당연히 바울 서신이나 복음서를 잘 이해할 것인데 모든 이후의 성도는 예수님을 직접 육신으로 만날 기회가 없고 성령을 받음에 있어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고, 이들 모두가 성령을 받고 복음의 증인 예수님의 증인이었는데 후대의 우리는 학교에서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고 배움으로 그 이해에 있어 한계가 있을 수가 있다.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는 성경을 깊이 이해할 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바울 서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초대 교회 교인과 같이 반드시 성령을 체험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며 모두가 예수님을 비록 육신으로 뵙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야 한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이런 가운데 성경을 날마다 읽고 정리함을 통해서 그 깊은 진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가야 하고 신학을 할 때 자신이 배우는 신학에 그냥 맹목적으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성경에 대한 이해가 어디에서 비롯이 되고 내가 믿는 성경의 믿음이 어떤지 스스로 살펴보기를 바란다.
천주교인은 천주교의 망토 속에 있고 개신교인은 개신교인의 망토 속에 있다. 그래서 개신교인은 오직 믿음이라 하고 천주교인은 그렇지 않다 하는 것이다. 이를 500년 동안 해오고 있다. 한 권 같은 성경을 두고 이렇게 서로 큰 교파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그냥 그대로 믿고 이해하는 것이다.
루터, 캘빈 시대에 성경을 가진 이는 오직 루터나 신부 같은 분이셨고 라틴어 성경이 조금 있었고 각국어로 된 성경은 없었다.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해서 활자로 책을 찍어서 읽던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지금은 모두가 컴퓨터 핸드폰을 가지고 있고 각국은 자국어로 된 여러 가지 버전의 성경책이 있다. 루터가 성령이라는 단어를 성경 전체에서 찾고, 그 단어가 들어가는 구절을 독일어로 쓰려고 했다면 이 작업 하나만 해도 수년이 걸릴 수도 있고 평생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온 지구상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제는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성경앱을 열고 검색창에 성령이라는 단어를 넣고 검색하면 수초 안에 성령이 들어간 모든 구절을 성경의 책별로 찾아서 보여준다. 이를 복사해서 동시에 수십 수백 명이 공부를 할 수가 있다.
그래서 모든 지구상의 성도는 다 캘빈과 루터만큼 그보다 훨씬 더 성경의 이해에 있어 깊이 갈 수가 있다. 단지 망토 속에 갇힌 성도가 수백 년 천 년 전의 가르침을 성경을 통해서 검토없이 맹목적으로 그냥 따라가는 것 뿐이다. 모두에게 묻는다. 루터가 이친칭의를 논할 때 과연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 구절이 하박국서 2장 4절에서 인용이 되었는데 그가 하박국서로 가서 그 올바른 의미를 이해했는가? 묻고 싶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라야 되는지 친절하게 설명한 로마서 4장 17-22절을 이해를 했는지 묻고 싶다. 루터가 이를 확인하지 않고 오직 로마서 1장 17절과 3장 21-26절에만 필이 꼽혀 이를 주장했다면 우리는 속히 이를 이제라도 확인을 해 보아야 한다. 제 글은 이 부분에 대한 확인이다.
루터와 캘빈이 신학자로서 성령도 없고, 전도도 없이 로마서를 읽고 설명했다면 이는 온전한 이해가 절대로 될 수가 없다.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의 이해를 500년 동안 이와 같은 신학자 목사들이 답습하고 있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천주교는 왜 율법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율법을 온 나라가 배우고 지켰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너무나 달라졌을 것이다.
이제라도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는 이 부분을 바로 잡아야 한다. 주님의 나라를 진실로 이 땅에 세우고 싶다면 이신칭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칭의 되는 믿음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이해를 바탕으로 율법에 대해서 온 세상의 성도가 다 올바로 이해해야 하는데 지구상의 모든 성도이다.
3. 현대 기기와 압축 파일 그리고 빙산의 일 각
로마서는 바울이 기원후 약 57년경에 고린도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런데 이때 바울의 나이는 복음을 전한 지 적어도 20년이 지났을 때이다. 바울이 신앙적으로 전도 경험으로 혹은 교회를 세우고 치리하던 측면에도 성숙한 때이다.
그래서 바울의 로마서만 하더라도 그 작은 글 속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를 현대적으로 볼 때 압축 파일이라고 부르고 싶다.
긴 파일은 압축해서 보관하고 이를 보낼 수가 있는데 그 내용을 보고자 할 때는 이를 풀어서 즉 압축을 풀어서 보아야 한다. 이와같이 로마서도 먼저 사복음서의 내용을 잘 이해를 해야 되고, 또 사도행전도 잘 이해를 해야 하고 또 모세 오경으로부터 예언서까지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있은 후에 로마서의 이해로 가야 한다. 구원이라는 단어도 올바른 이해를 하고자 하면 먼저 창세기의 죄로 인한 인류의 타락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바울이 이전에 자신이 알던 사람이신 예수님의 이해에서 구약을 통한 예언의 성취를 통한 예수님의 이해로 왔듯이 우리도 반드시 예언서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
믿음에 대한 부분도 창세기를 이해해야 하고, 율법에 대한 부분도 예언서와 율법서를 올바로 이해를 해야 한다. 이들이 다 압축이 되어 있으니 성경 각 권으로 가서 이를 풀어야 비로소 로마서의 구절들이 정확하게 보인다.
로마서는 16장으로 1173장의 신 구약의 내용을 짧게 압축을 해놓았다고 보면 되니 신약 244장 구약 929장을 반드시 잘 읽고 로마서의 이해로 가야 한다. 이를 생략하고 압축된 내용을 풀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로마서를 읽기에 우리는 로마서의 이해가 부실하고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빙산은 보이는 부분은 적지만 그 물속에 잠긴 부분은 거대하다.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한 타이타닉이 침몰한 것이다. 로마서도 이와 같은 부분이 있으니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타이타닉과 같이 로마서의 이해에 있어 침몰할 수가 있다.
사도라는 의미도 지금 시대에 사도라는 자들이 있는데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도는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12명만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나중에 이 사도들의 인정에 따라서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구원이라는 의미도 지금까지 그 정의가 참으로 명확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는데, 단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이해는 천주교 개신교에서 다르게 이해가 된다. 이를 성경앱을 통해서 찾아보면 한국어 개역 개정으로 약 500개 정도 구원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데 이를 대별하면 죽음에서 살린다, 억압에서 해방한다. 자유하게 한다, 어떤 상태를 회복한다. 질병에서 놓임을 받는다, 저주에서 벗어난다, 높인다, 곤경에서 건진다 등의 의미가 있으니 이런 의미가 내포된 예수님의 구원 행위를 잘 알아야만 비로소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의미도 그렇고 믿음이라는 의미도 오늘 믿는 믿음인지 왔다 갔다 하는 믿음인지 놀다가 믿는 믿음인지 반드시 이해를 해야 칭의 되는 믿음에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근간이 되는 율법의 이해도 율법이라는 두 단어 속에 있는 모세 오경의 의미와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등을 정말로 올바로 이해를 해야만 비로소 율법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다. 절대로 율법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로마서의 올바른 의미로 갈 수가 없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신 분이라는데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복음은 사랑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는 정의가 있다. 이 정의로부터 이신칭의가 나오는데 이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목이 마르지 않으면 절대로 로마서의 이해가 어렵다. 세상에서 불의로 온갖 역경을 겪고 정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절망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별로 목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혜택 하에서 수십 년 수백 년 먹을 것을 쌓아두고 대대로 자녀가 돈의 고통에서 해방이 되었다고 믿고 그렇게 살고자 한 자는 모두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침묵하게 되고 목이 마르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단언코 로마서의 절반도 이해가 되기 어렵다. 하바드든 옥스퍼드든 예일이든 이렇게 된 신학자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샌달이나 혹은 롤스의 정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한국에서 샌달에 넋이 나간 사람이 수백만이나 된다.
정의에 목이 말라 샌달을 찾고 롤스를 찾지만 가장 정의의 선봉이며 으뜸이며 완성자인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선 많은 성도가 그냥 침묵하고 관심도 없다. 잘 사는 것이 삶의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추상과 같은 의가 표현이 되어 있고 이 의로부터 믿는 인간에 대한 의가 나오는데 이 의가 숨겨진 의미에 대해서 깊은 바다 차가운 빙산을 보기 위해서 용기를 내어 내려간 자가 로마서의 깊은 차가운 물에 잠긴 부분을 보게 된다. 이는 전도를 통해서 오고 세상에서 하박국과 같이 살면서 불의에 대해서 치를 떨고 불의로 모든 소망이 다 없어졌을 때 모세 오경을 볼 때 비로소 안도와 희망을 가져 본 자가 비로소 로마서의 율법이 아니고 믿음이다란 의미를 이해하고 로마서와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말씀이 절대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케 하려고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
성령 부분도 갈라디아서와 같이 성령을 받고 성령과 동행하며 전도를 해 본 전도자의 심정이 되어야만 비로소 이해가 된다. 성령에 대해서 온 생애를 통해서 교회와 성도가 가장 잘 나타내신 분이 한국에 계셨던 조용기 목사님이시다. 기독교 2000년 동안 성령님을 가장 몸으로 삶으로 목회로 성도와 함께 잘 나타내신 분이시니 조용기 목사님의 사역을 통해서 성령을 이해하시고 로마서를 읽기 바란다. 로마서는 이와같이 참으로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성경으로 그래서 오랜 시간 서로 다투며 논쟁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의 올바른 이해를 원하는 모든 성도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고 전도를 하고 교회를 개척해서 바울과 같이 목회를 하고 그리고 바울과 같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정의롭게 살면서 세상과 싸우며 살 때 비로소 로마서가 그에게 잘 열리리라 믿는다.
이렇게 전하는 저도 목회 경험이 없고, 교회에 대한 목회 경험이 없기에 많은 부족이 있고 영어나 헬라어에 또 많은 부족이 있기에 역시 로마서를 이해하는 데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그래도 부족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깨달은 것을 함께 나눈다. 부디 바울과 같은 위대한 일꾼들이 이 땅에서 속속 등장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큰일을 감당하기 바란다. 한국에서 이와 같은 위대한 세계적인 일꾼이 등장해서 온 세상의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사는 이곳 한국에 주님의 평화와 위로와 축복이 임하길 간절히 빈다.
이것이 내 자녀와 후손에 가장 복된 삶을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가 남겨주는 것이다. 공부를 많이 시키고 돈을 많이 물려주는 것도 귀한 일이나 인구가 줄고 젊은이가 직장이 없고, 자살자가 쉬지 않고, 정도 메말라지고 온 한국의 땅에 마음 놓고 마실 물이 없고, 미세먼지로 마스크가 없이 살 수가 없는데 나 홀로 이 땅에 남아서 형제도 없이 정을 나눌 친구도 없이 오직 물질만 가지고 삭막하게 산다면 무슨 행복이 있겠는가?
자유경쟁으로 경쟁에서 이긴 자도 실상은 살맛이 사라지는 곳이 한국이다. 오직 희망은 그대! 정의에 목이 마른 그대! 성도이다.
제 Ⅱ 편 바울의 심정에 대한 이해
1. 당시의 이스라엘과 로마의 상황
2. 바울의 외침(모든 이들이 하나가 됨, 율법의 역할, 지금의 유대인을 전도함)
3. 온 세상을 품은 로마서와 바울
1. 당시 이스라엘과 로마의 상황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유대인은 여러 계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로마의 속국으로 종교적으로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제사장이 있어 공회에 예배를 드리고 로마 전역에 흩어져 살면서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을 방문했다.
그리고 바리새파 즉 율법학자와 같이 율법의 조문을 잘 배우고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고, 대부분의 유대인은 구약을 믿고 그대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사장과 율법학자(서기관)등이 지도층이 되어서 율법대로 살려고 했고 바울도 율법을 배우고 지킴에 있어 첫째가 되려고 하던 사람이다.
그 전통이 지금의 유대인에게도 전해져서 유대인 중에서 자녀들을 모세 오경부터 모든 학문에 앞서서 배우게 하고 특히 레위기를 외우게 한다. 그리고 이를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 유대인들은 로마와 헬라의 문화와 그리고 자신들이 흩어져서 사는 곳의 관습과 풍습을 지키며 유대인의 정체성을 늘 유지하려고 했다. 초대 교회는 대부분 유대인들이 그 구성원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유대교의 전통을 그대로 지키려고 했고 율법에 대해서도 할례와 머리를 깎는 것 등에 있어서 유대교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배우고 체험한 대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늘 잊지 않았다. 이런 바울 사도의 복음이 당시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 보낸 바울 사도의 서신서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서신서를 쓴 바울 사도의 심정을 이해해 보도록 하자. 이 이해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율법에 대해서 필수적이다.
2. 바울의 심정과 외침
바울 사도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 어려서부터 베냐민 지파의 사람으로 율법을 배우고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에게 수학했다. 율법을 조문조문 흠이 없이 지키려고 했고 이 유대교에 대해서 큰 신념을 가지고 오직 유대교 즉 구약만 믿고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전통을 지닌 유대인만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다윗 왕과 같은 강력한 구세주가 나타나 자신의 민족을 당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나타나 구세주라 하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었다.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으로 인한 일들이 다 끝이 난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 후에 성령께서 오셔서 성도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이 확산되자 이들을 유대교를 위협하는 무리로 믿고 잡아서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
그렇게 바울은 유대교에 열정적이었고 자신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고 택한 백성으로서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데반이 잡혀서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서 스데반을 죽이는 무리와 하나가 되었다. 바울로서는 이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 무리를 잡아서 가두는 일에 광분하고 있던 바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었다. 예전의 육체로 있던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시자 말을 타고 가다가 바로 눈이 멀면서 말에서도 떨어지게 되었다. 바울 자신이 살면서 한 번도 꿈도 꾸어 보지 못한 일이 자신에게 발생하자 자신이 지금까지 믿고 있던 모든 신념 체계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었다.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서 혼이 나간 상태에서 누구시냐 물으니 음성이 들리는데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하시니 그대로 그 음성에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는데 이 지구상의 어떤 인간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면 온전히 제 정신으로 있을 사람이 절대로 한 명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잘났다고 온갖 고난에도 자신을 꺾지 못했던 욥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꼬꾸라진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명령이 예수님으로부터 내리는데 성안에 들어가면 아나니야란 사람이 있으니 그를 만나 예수 이름의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이제 눈이 멀어버린 바울이 할 가장 최우선 순위가 아나니야를 만나 눈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는 일은 이제 바울의 마음에서 1%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완전히 자신이 하던 일이 잘못되었음을 순간적으로 인식한 바울은 아나니야를 만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고 하나님께서 완전히 이렇게 회개한 바울 사도에게 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성령을 받으니 성령께서 자신이 너무나 깊이 잘 알고 믿고 있던 구약의 모든 내용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요, 말씀임을 알게 하신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기도와 훈련을 받은 후에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힘 있게 예수님을 전하니 당시에 예수를 믿던 유대인들이 자신을 핍박하던 자가 변해서 도리어 예수를 전하니 이상하게 생각을 하는데, 바울이 그간의 경위를 말하자 베드로 등이 형제로 받아들이고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삼층천에도 가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면서 다양한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예전의 바울이 조금도 누리지도,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자신에게 생기고 성령께서 음성으로 순간순간 명령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는 것을 쉬지 않고 들었고, 다양한 핍박을 받으면서 언제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며 자신을 사랑하며 돕는 것을 늘 체험하였다.
이렇게 놀라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며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능력을 체험하면서 복음을 전하며 약 20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 그 모든 지식과 경험의 바탕에 성령의 감동으로 비로소 로마 성도들에게 로마서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자신이 세운 교회에 들어온 어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성령을 받고 자신과 같이 되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이 예전에 믿던 모습대로 율법을 먼저 지키고 의롭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이런 무리를 많이 보게 되었으니 바울 사도로선 격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들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너무나 위험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원하시는 일이 절대로 아니었다.
이들이 회개도 없이 예수를 믿는 무리 속으로 들어와서 율법을 먼저 알고 배우고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자신이 사랑하는 성도에게 가르치니 이 무리를 바울이 그냥 절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이 무리를 쫓아내고 이무리들에게 배운 성도들을 바로 잡고자 로마서를 비롯한 편지(갈라디아서)를 쓴 것이다.
이 바울의 마음을 그대로 이해를 해야 한다. 그의 마음속의 외침을 우리는 먼저 들어야 한다. 그리고 당시의 이런 상황을 반드시 로마서를 공부하는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흩어져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아! 그들 유대인들이 가르치는데로 그렇게 믿으면 절대로 아니 된다. 그렇게 살아서도 아니 된다. 예수를 먼저 알고 올바로 믿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예수를 믿으려면 먼저 회개를 하고 예수 이름의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 실제로 사도행전의 바울의 사역을 보면 예수 이름의 세례를 받은 자, 요한의 세례만 받은 자, 성경은 많이 아나 성령세례에 대해서 모르는 자들에게 모두 성령을 소개하고 받게 한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이미 이렇게 믿고 성령까지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잘못된 우대인이 성령도 모르니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고 선을 행함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을 당연히 몰랐다. 단지 성령의 인도에 앞서서 우선 율법의 준수만 강조했고 실제로 이들은 예전의 엄격한 율법을 지킨 바울과 달리 율법을 자신들도 지키지도 않고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격도 없는 자가 선생이 되어 성령을 받은 착한 이들을 꾀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들에게 속아서 흔들리는 성도도 있었던 것 같다(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나려고 하느냐 하는 표현)바울 사도는 이런 상황을 바로 잡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로 성령을 받고 올바로 가던 성도를 꾀어서 잘못 가게 하니 다시 이제는 처음부터 다시 가르치는 것이다.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다시 이를 다시 반복해서 설명하면 회개도 없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율법을 조금 알고 자신은 지키지도 않는 못된 유대인 무리가 예수를 잘 믿는 무리 속으로 들어와서 율법을 먼저 알고 배우고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자신이 사랑하는 성도에게 가르치니 이 무리를 바울이 그냥 절대로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예전 예수님도 모르던 시절의 모습으로 가도록 성도들에게 이들이 가르치니 이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아니다! 행위도 아니다! 먼저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이제는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하며 사랑을 완전케 해야 한다. 성령을 받고 능력도 행해야 한다. 이 부분은 현실을 보면서 내가 강조를 한 것이다. 실제로 이미 성령을 받은 당시의 성도는 다시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이 충만만 받으면 될 것이다.> 율법으로 절대로 의롭게 되어 천국에 갈 수가 없다. 죄는 예수를 믿고 용서를 통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 그렇게 믿는 것이 절대로 예수를 올바로 믿는 것이 아니다.
즉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죄를 용서받고 성령도 받고 의롭게 되는 길이 이제 새롭게 열렸다. 나도 전에는 몰랐는데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고 능력을 행하면서 전도하다 보니 이 길이 진리로서 진실로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예수를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순서를 지켜라! 먼저 예수를 믿어라! 회개하라! 그리고 죄의 용서를 받아라! 그리하면 성령께서 오셔서 나를 완전히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한다. 내가 거듭나게 되면 마음이 부드럽게 되어 과거에 할 수가 없던 율법을 완성시킬 수가 있다. 차원이 다른 세계가 있다. 율법을 지킴을 통해서 절대로 도달 할 수가 없는 세계가 있다. 나는 그 세계를 누리며 산다 모든 유대인과 유대인 성도는 낮은 과거의 율법의 단계에 있으면 절대로 아니 된다. 내가 새롭게 완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죽으심 덕분에 이를 믿고 성령님의 선물과 충만케 하심으로 새롭게 창조가 된다. 나는 과거의 나를 볼 때 과거에 내가 알고 믿던 것들이 전부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상태에서 보니 그것들은 배설물과 같다. 지금 나의 상태는 과거와 비교가 아니 된다.
사랑도 온전히 못했고 정의롭게 살지도 못하고 율법에 얽매여 사망의 길로 가던 예전의 나와 같이 절대로 그렇게 살지 말라.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된다. 아니다! 아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절대로 되지 않는다. 예수를,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내 죄를 속하기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라! 예수를 믿는 일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이렇게 회복을 하라는 것이다.
제발 예전의 나와 같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 그렇게 살면 사랑도 정의도 없고 천국도 없다. 그리고 지금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만민을 구원하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유대인 만의 하나님이 절대로 아니고 온 세상의 창조주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바라신다.
이제는 제발 예수님을 먼저 믿어라! 이렇게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외치는 것이다. 이미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잘못 가고 있으니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절대로 율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없다. 절대로 율법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는 일을 우선해서 하라는 외침이다. 이를 반드시 이해하고 로마서를 읽어야 하고 갈라디아서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누구도 율법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지 못하게 이렇게 사는 것이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는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고 로마서 3장 31절에서 말씀하신다.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어떻게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서 율법을 세우는가? 과거엔 바울이 자신의 힘으로 율법 조문을 배워서 조문조문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고 자신은 스스로 그렇게 사는 자신을 보면서 흠이 없고 의롭다 여겼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학자에게 조문조문을 다 잘 지키고 더욱 중요한 의와 신과 사랑을 실천해야 된다고 책망한 일에 대해서 이해를 절대로 하지 못했고 도리어 예수님을 율법학자들이 도대체 네가 무어냐 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일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바울도 이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면서 참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성령의 인도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이기며 살다 보니 예전에 죄로 여겨지지 않던 일들이 죄로 분별이 되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살다 보니 진실로 율법의 조문조문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사랑과 의와 신에 대해서도 그대로 지켜지는 것을 확인을 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을 완성시킨다고 했고 죄와 사망의 법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긴다고 했다. 결국은 이렇게 자신이 새롭게 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고 복음을 전하다 보니 이제는 이렇게 정말로 과거에 그렇게 홀로 지키려고 해도 완전히 지키지 못한 율법을 다 지키면서 사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이를 로마서 3장 31절에서 믿음으로 도리어 율법을 세운다고 표현을 한 것이다.
그리고 율법을 알아야만 죄에 대해서 깨달을 수가 있다고 했으니 율법을 알기에 성령의 감동이 있는 경우 분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착각하고 율법을 지키면서 의롭지도 않은데 의롭다 믿고 산 것을 잘 알고 어떤 누구도 예전의 자신과 같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런 마음으로 모든 편지를 쓰고 로마서를 쓰고 갈라디아서를 쓰는 것이다.
얘들아! 예수를 믿는 것을 우선시 않고, 도리어 율법을 믿고 이를 통해서 의롭게 되려면 우선 회개가 없고 죄에 대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가 없다. 그래서 불의가 그대로 존재하기에 절대로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의롭다 인정치 않으신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성령께서 죄가 있는 사람에게 절대로 임하지 않는다. 성령의 세례나 선물이 없다면 이 사람은 거듭나지 않았기에 자신의 힘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니 죄의 문제도 해결이 되지 않고 성령도 없고 영생도 천국도 없게 되는 것이다. 속지 말라!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 사도는 그렇게 살지 말라! 내가 예전에 하던 모습대로 너도 하지 말라! 그 다음에 바울 사도가 할 한 마디가 바로 예수를 믿어라! 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렇게 가르치는 유대인에 대해서 모든 교회의 성도가 경각심을 가지고 그런 사람을 따르지도 말고 교회에서 용납하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율법이 아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예수를 믿어라는 것으로 성경 로마서에 표현이 된 것이다. 즉 율법으로 예수님을 누르려고 하나 실상은 예수님을 믿고 도리어 율법을 완성을 시켜야 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이며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이미 예수도 믿고 성령도 받은 성도가 거짓된 자를 만나서 예수를 버리고 율법으로 가니 예수를 믿어라 하는 것이다. 또 다시 처음부터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을 하면서도 혹히 누가 율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할까 봐서 로마서 3장 31절에서 율법을 무시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율법은 모세 오경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법이다. 이 법을 인간이 아무리 바울 사도라 해도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절대로 폐지가 되었다고 하고,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는 없다.
하늘과 땅에서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에서 분명하게 율법에 대해서 잘 지켜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제 이 세상의 누구도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성도에게 얼마나 큰 죄를 짓는지 깊이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란다.
의문 규정 즉 제사 규정은 예수님께서 제사법이 되시고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성취하셨기에 그대로 우리가 짐승의 제사는 지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부분도 잘 배워야 예수님의 사역을 잘 이해하게 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속히 논의가 있어 성도들에게 잘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이런 심정으로 로마서와 바울 서신을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제 이전의 글을 그대로 올리면서 이신칭의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믿음에 대한 설명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뼈대가 되는 율법을 설명을 드릴 것이다.
이미 순서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죄를 사함 받고 성령을 받은 무리가 대부분이었던 초대 교회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들이 다 그러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을 용납했고 따라갔고, 바울 사도는 똑바로 서서 이들을 책망하고 못된 무리를 용납하지 말라고 했는가?
그 이유는 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나는 사도행전 2장 37-38절의 설명대로 성령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통해서 오시고 내게 두려움을 주셨다. 성경을 볼 때 고린도 전서 13장을 통해서 내 모습이 거울과 같이 보이는데 나는 사랑하는 모습이 조금도 없는 완벽하고 흉악한 죄인 이었다. 너무나 잘못된 나의 모습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보고 바로 눈물이 나고 하나님께 나를 도구로 써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과거 나의 사랑 없는 모습으로 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는 과거의 내 모습이 너무나 악한 존재임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였는데 어찌 과거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완전히 회개하고 고린도 전서 13장과 같이 살려고 5년을 몸부림쳤다. 정말로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100% 그렇게도 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강력하게 과거의 내 모습을 부인하고 힘을 다해서 사랑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991년 5월 19일 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봄이 오기전의 겨울 서울의 신림동 선민교회에서 당시 박기수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 갑자기 우셨는데 예수님께서 성전을 가득 채우시며 오셨다. 큰 얼굴의 수염이 있으신 흑백의 분이셨다. 그리고 입에서 빨간색의 불을 내 가슴에 뿜어주셨다. 내 마음속에 촛불과 같은 작은 불꽃이 몇 개가 이는 것이 보였다. 큰 불이 아니었다. 손에 땀이 나며 누군가 예수를 믿는 사람을 만지면 반드시 낫을 것이란 믿음이 왔다. 그리고 3일을 천국에 있는 것과 같았다. 행정 고시 1차 시험에 붙어서 곧 2차 시험을 쳐야 하는데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 예전의 세상의 모습으로 가야 하는데 생각했다. 그리고 만지면 병이 치유가 되고 방언이 통변이 되고 다양한 기적들이 나타났다. 누구에게 함부로 말도 못할 너무나 좋은 놀라운 체험이었다.
행정고시에서 1점 차 낙방하고 목사가 되기로 하고 성경을 읽고 정리하고 신대원 준비를 했다. 많은 일들을 겪고 2011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때 전도자의 입장에서 본 교회 성장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사도행전 2장 37-38절의 말씀을 보면서 비로소 베드로 등에게 일어난 일이 똑같이 나에게도 일어난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성령을 받고 약 18년 정도가 지난 후에 알게 된 것이다.
행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당연히 나는 그동안에 성경도 깊이 몰랐으니 교회에서 시키는 데로 배웠다. 늘 교회는 잘 다녔지만 직분도 없었다. 전도팀에서 전도를 주로 했는데 이제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어야 하니 성경을 배우면서 교사도 3년을 했다. 당연히 담당 목사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순복음 교회에서 약 5-6년 가량 신림동에서 고시 공부를 할 때 성경 공부 등을 배우고 설교를 들었는데 이 배움을 그대로 가지고 천주교를 믿던 전처와 결혼을 해서 너무나 많이 싸웠다. 할 수가 없어서 성당에도 가고 전처가 잠실교회에도 왔다(1994년 결혼을 해서 잠실교회에 출석 지금까지 다니고 있음) 그리고 천주교 평신도 신학도 배우고 로마서 강의도 들었고 아내가 보던 다양한 책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전처가 떠난 후에 4년을 불면과 우울의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려서 전도를 시작했고 재혼을 하고 신학도 재개했다. 전처가 떠난 자리가 너무나 컸고 전처의 온전한 헌신이 나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나는 스스로 성령을 받고 고시도 1첨차로 떨어질 정도로 잘 공부를 했기에 너무나 자부심이 강했다. 실상은 성경도 신앙도 잘 모르는 초보였는데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로 전처는 나의 위대한 선생이었는데 사랑으로 나를 가르쳤다. 전처를 통해서 사랑할 구석없는 죄인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았고 절대로 천주교를 옳지 않다고 할 수가 없게 되었고 내 스스로 천주교 서적을 보았지만 좋은 점만 보였다. 정말로 깊이와 정확성이 있었다. 그리고 4년의 지옥과 같은 생활도 나에겐 성경을 깨닫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새로 온 처는 정교회의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이었는데 백인과 모든 면에서 너무나 같았다. 약 20년을 살면서 쉬지 않고 싸웠다. 모세가 200만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고 이끄는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내 하나 간수하는 데 힘이 들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너무나 힘이 들었다. 얼마나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지구상에 한 명의 남자로 내가 있다 해도 절대로 나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내 신앙은 이렇게 형성이 된 것이다.
성령을 받았지만 나는 성경도 잘 모르고 성숙한 신앙인이 아니었고 누가 나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목사가 아니니 당연히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약 30년의 세월을 성경을 읽고 정리하고 기도를 쉬지 않고 전도도 쉬지 않고 극심한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살았다. 은행에서 나온 1983년 이후 늘 쪼달리며 살았다. 40년이 넘게 가난에 시달렸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다 인도하셨으니 위의 일들을 한 것이다. 내가 이런 믿음과 율법에 대해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100%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이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거짓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에게 속은 이유가 이해가 될 것이다. 이를 이해시키려 이렇게 길게 설명한 것이다. 성령을 받아도 성경도 배워야 하고 전도도 몸으로 직접 해야 하고, 다양한 공부를 잘 해야 한다. 절대로 절대로 성령을 받았다고 모든 것을 다 한껏번에 알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 우리는 성령을 받고 먹어야 하고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일이 있다. 결혼생활, 가정생활, 그리고 직장생활도 해야 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와 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을 교회가 어디에서 먹여주는 곳이 있는가? 오히려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 목사를 교회가 먹이지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을 받은 신자를 인정하고 먹이고 하는 교회는 현대에 없다. 도리어 성령을 초대 교회와 같이 받은 이들이 이들 목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교회의 법에 순종해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어 살고 있는데 이들을 보면 너무나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너무나 잘 배우고 큰일을 할 사람들이 일생을 그렇게 그냥 보내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면 혹은 성령을 받으면 너무나 대단한 자부심이 생긴다. 정말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릴 수도 있는데 내가 대표적으로 그렇게 산 사람인데 그래서 전처와 지금의 내 처와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힘이 든 것이다. 성령을 받고 겸손하고 그래서 성경을 잘 배우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인데 성령 충만, 은사 충만, 그리고 늘 기적이 있으면 다른 무엇을 배우고 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이 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갖고 순복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랑이 많은 천주교인 여인을 만나 사랑만 받고 그녀를 죽도록 힘들게 하고 스스로 떠나게 했고, 이제 성경을 가장 잘 배우는 통합에서 와서 목사가 되려고 성경을 공부하는데 정교회 여인을 만나서 죽도록 싸우고 이렇게 변한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그런데 역시 많은 흠이 있으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를 참고해서 늘 겸손하게 반드시 성경을 잘 배워야 한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안배이니 내가 나를 주장할 것이 없고 못나고 부족한 자를 먼저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늘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언제나 나를 감동하시고 깨닫게 하셨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 덕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덕분이다. 그리고 두 아내가 온 힘을 다해서 사랑해 주고, 가족이 나를 돌보고 교회가 기도와 섬김으로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이들에게 큰 도움을 받은 것이다.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모든 분께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위로와 축복이 임하길 빈다.
3. 온 세상을 품은 로마서와 바울
로마서가 이해가 어려운 것은 로마서가 온 세상을 다 품고 있고, 바울 사도도 유대인의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역시 온 인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법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이미 2000년 전에 죄형 법정주의를 논하고 있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를 그 논의의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으니 과거에 율법이 없던 시대의 사람은 양심의 법에 의해서 그리고 율법 이후의 시대의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 그리고 예수님 오신 이후의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아니 믿고에 따라서 심판을 받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야만인이나 헬라인이니 혹은 로마인이나 혹은 유대인이나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세상의 사람에 대해서 그의 죄와 구원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그 스케일이 모든 시간을 포함하며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한다. 그래서 그 시간적인 길이와 모든 세상에 사는 사람 모두를 다 포함하기에 그 넓이로 인해서 이해가 어렵다.
이제 2000년이 지난 현대를 살면서 이슬람의 복음화와 유대인의 복음화와 그리고 미 전도 종족과 그리고 이들이 서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하는데 로마서는 현대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진실로 구원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모든 필요한 것을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2000년 전의 저술이 현대에도 한 치의 오차가 없이 그대로 다 수용이 되니 어떤 인간이 이렇게 글을 쓸 수가 있겠는가? 바울 사도의 성령의 영감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시대는 천주교가 개신교가 그리고 정교회가 로마서를 서로 조금씩 다르게 이해를 하고 구약을 전해 준 이스라엘은 오직 구약과 모세 오경 즉 율법을 잘 배우고 지키려고 한다. 이때 우리가 유대인을 전도하려고 할 때 야! 율법은 왜 지키냐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제 예수님만 믿으면 돼! 하고 전하면 영원토록 유대인을 전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로마서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래 너희가 율법을 잘 지키는데 그것은 참으로 귀하고 올바른 일이야!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조문 조문 잘 지키는 것을 원하셨어! 단지 그렇게 하다가 형식에 치우쳐서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정의와 믿음을 놓칠까 봐서 당시의 율법학자에게 혼을 내신거야! 하면서 바울 사도도 율법을 무시하지 않았어! 너희가 홀로 온 세상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나 어렵짢아? 우리도 율법을 인정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고 정의로운 법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주신 법으로 인정해! 그래서 예수를 믿고 더욱더 잘 지키려고 해. 우리도 율법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싶어! 절대로 너희가 잘 믿는 율법을 무시하지 않아! 하면서
바울 사도와 같이 예수님을 믿어야 해 그래서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받아서 이제는 정말로 율법을 완성시킬 수가 있는 거야. 이제 너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꼭 믿어야 해 라고 하면서 접근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과연 바울 사도는 유대인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고 지금 유대인에게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전도하기를 원하실까?
나는 후자로 간다. 로마서의 이해에 따라서 지금의 유대인을 전도하는 전략이 너무나 달라지는 것이다. 과연 그때나 지금이나 유대인은 한결같이 율법을 잘 배우고 오직 율법대로 살려고 하고 예수님은 믿지를 않고 있는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돌아오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나는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대로 유대인을 만나면 그렇게 설명을 할 것이다. 이들에게 이런 내용을 이미 에스겔서를 통해서 주셨으니 이 구절이 유대인을 돌아오게 할 것이다. 함께 보면서 본론으로 들어갈 것이다.
겔 36: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제 Ⅲ 편 이신 칭의의 믿음과 율법에 대한 이해
1. 서론
2. 하나님 나라 기초가 되는 믿음에
대한 이해
3. 하나님 나라 뼈대가 되는 율법에
대한 이해
4. 논의의 요약
1. 서론
전도자 Evangelist ・ 2021. 6. 26. 5:35
할렐루야!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늘 함께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코로나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모이기를 힘쓰면서 서로 교제하며 하나님을 함께 찬양해야 하는 우리 믿음의 형제들은 속히 다시 모이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비도 많고, 하늘이 맑은 날도 많고, 유월이 끝나가는데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선선합니다. 코로나로 세상의 기후도 영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변이종이 또 생겨서 끝날 조짐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이런 시기를 기도로 그리고 준비로 인내하며 잘 보내어 다시 모일 때 더욱더 하나님을 잘 찬양하게 하소서! 부패와 불의가 오직 성경의 기준으로 분별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시대를 율법이 없이 세상의 법과 각자의 소견으로 이기려고 합니다.
부디 오천만 국민과 일천만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법인 율법을 잘 배우고 잘 지키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샬롬! 오랜만에 이곳에 다시 옵니다. 최근에 오천만의 성경 정리를 위해서 이미 올린 글들을 모아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서문으로 위의 제목의 글을 썼고 이를 올립니다.
이신칭의에 대한 믿음은, 처음 우리가 배우는 ‘모든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고 교회에서 배운 배움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제가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세례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은 후에 성령을 선물을 받았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계속하면서 나중에 칭의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고 '전도자에게 보여주신 이신칭의'란 간증문을 통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 주된 내용을 아래의 그림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의 이해를 중심으로 위와 같이 그렸습니다. 그리고 칭의 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죄의 용서가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로마서 공부의 워밍업 부분, 갈라디아서와 하박국서를 정리하면서 아래와 같이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최근의 이해입니다.
이런 이해에 도달하기까지는 저는 위의 과정과 같이 칭의를 이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로마서의 이해의 선행단계인 하박국서의 이해를 통해서 성도에게 칭의가 일어나는 시기를 성령을 선물을 받고 믿음으로 사는 어느 때로 조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그러한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모든 글이 오천만의 로마서 블로그와 다음 카페에 있으니 참고하시면 될 것이고 혹시 자료가 필요하신 분은 제가 책으로 정리한 자료를 보내 드릴 테니 받을 주소를 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자료는 다 블로그와 카페에 있으니 참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연락처와 주소는 오천만의 로마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 나라 기초가 되는 칭의 되는 믿음에 대한 이해
로마서 1장 17절의 믿음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 믿음이다. 동시에 두 사람의 믿음과 관련된 설명이다. 단순한 믿음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첫째, 두 가지 의미는 먼저 시간적인 연속성을 지닌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의롭다고 함을 얻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이고, 혹은 이제 갓 시작한 믿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지속해서 변치 않고 믿는 믿음이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로마서 4장 17~22절로 설명이 되고 있다.
다음으로 또 한 가지의 칭의가 되기 위한 믿음은 고난 중이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정의롭게 사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하박국서 2장 4절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칭의 되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렇게 시간이 가도 변치 않는 한결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이와 아울러서 나라가 망하고, 모든 동족이 불의를 행하는 중이라도 언제나 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또 온 세상이 다 불의를 행한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정의롭게 사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칭의 되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 가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변치 않을 뿐만 아니라, 고난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으며, 반드시 정의롭게 하루하루 삶을 사는 믿음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에서 신자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는 믿음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단호하게 그리고 타협 없이 증거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논거에 대해 로마서에 인용이 된 믿음의 표본이 되는 두 인물의 삶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살펴봄으로써 믿음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자.
먼저 창세기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창조주가 되시며, 전능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시간이 가도 변치 않고 굳게 믿었다. 인간으로서 실현도 생각도 불가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실천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이 믿음은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가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결국 100세가 되어서 약속의 아들을 받았고 하늘의 별과 같이 수많은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됨은 물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 로마서 4장 17~22절의 말씀이 이를 증거한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즉, 순간 혹은 일시적, 혹은 처음 시작하는 믿음이 아니라 시간이 가도 불가능한 약속을 그리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변치 않고 믿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이다. 반드시 믿음이라는 단어 이면에 있는 이런 의미와 배경을 절대로 우리는 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성경의 내용을 보자.
롬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17.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워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17. As it is written: "I have made you a father of many nations." He is our father in the sight of God, in whom he believed -- the Go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things that are not as though they were.
18. Against all hope, Abraham in hope believed and so became the father of many nations, just as it had been said to him, "So shall your offspring be."
19. Without weakening in his faith, he faced the fact that his body was as good as dead -- since he was about a hundred years old -- and that Sarah's womb was also dead.
20. Yet he did not waver through unbelief regarding the promise of God, but was strengthened in his faith and gave glory to God,
21. being fully persuaded that God had power to do what he had promised.
22. This is why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개역 개정, 공동 번역, NIV 순)
그다음에 하박국서의 하박국의 믿음에 대해서 알아보자.
로마서 1장 17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개역 개정에 번역이 되어 있어 의인은 믿음이 있기에 생존한다, 혹은 산다로 되어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 로마서의 구절은 구약의 하박국서 2장 4절에서 인용이 되었다. 그래서 하박국서를 로마서 1장 17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박국 선지자의 말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하박국서 2장 4절에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하박국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가 2장의 앞과 뒤의 상황을 알아야만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로마서를 정확하게 그리고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는 반드시 하박국서를 펴놓고 찬찬히 본문을 전부 읽어보아야 한다. 다행히 하박국서는 단지 3장으로 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가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기원전 약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후 홀로 남은 남 유다마저 많은 선지자의 경고를 외면하고 불의한 길로 행하여 곧 멸망이 임박한 가운데 남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예언자이다. 그는 기원전 약 609년부터 605년까지 예언했다. 남 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지만 이미 605년과 598년에 바벨론의 1.2차 침입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남 유다의 마지막 예언자라 할 수가 있다.
하박국 선지자 당시 남 유다의 타락상(부패성)은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더 이상 살 수가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율법은 사라졌고, 제사장과 고관과 온 백성이 불의를 행하고 있었다. 이럴 때 이런 불의와 맞서서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하박국과 같은 의인들은 더 이상 올바른 생활이 불가하여지자 이 불의의 사람들이 자신의 동족임에도 이 불의한 참상을 하나님께 고발하였다. 하박국은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타락한 백성을 심판하시지 않고 보고만 계십니까? 하고 하나님께 묻는다. 이는 마치 구한말 천주교의 탄압시 황사영이 백서로 로마교황의 군대의 파견을 요청한 사정과 같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결코 보시고만 계시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당시에 온 세상을 정복하던 악한 나라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남 유다를 심판하시겠다고 대답하신다. 이에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남 유다가 악하다 할지라도 바벨론만큼은 악하지는 않은데 어떻게 더 흉악한 바벨론을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하고 다시 하나님께 질문한다.
이 하박국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답이 우리가 아는 너무나 유명한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인용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으로 하박국서 2장 4절에 있다. 이런 전후의 상황을 보면서 이제 하박국서 2장 4절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 보도록 하자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4.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4.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개역 개정, 공동 번역, NIV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교만한 바벨론을 절대로 좋게 보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바벨론 역시 그 악행의 대가로 처참하게 멸망 당할 것을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역시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박국 선지자의 예언대로 멸망 당했다.
본 문장을 보면, 그러한 바벨론은 하나님의 인정도 사랑도 받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는 의인들은 믿음으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약속을 성취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불의한 동족 남 유다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이 남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을 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박의 믿음은 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의인이 더 이상 살 수가 없는 불의한 세상을, 비록 그것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족속이라 해도 심판하시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정의롭게 사는 자를 언제나 어디서나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또한 이렇게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종국에는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다.
하박국 2장 4절과 로마서 1장 17절은 이 믿음으로 의인이 산다는 것이다. 산다는 의미는 개역 개정에서 번역된 바와 같이 그런 믿음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생존한다, 살아남는다고 하는 의미도 부분적으로 내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정확한 의미는 영문의 기록 will live와 같이 그들이 믿음의 삶을 하루하루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박국 당시는 참으로 정직하고 정의로운 자가 자신의 순결을 유지하며 올바로 사는 것이 힘든 세상이 되었다. 동족의 불의는 만연하고, 나라는 멸망하게 되고, 강대국 바벨론의 침략과 수탈과 그리고 죽음과 포로가 되는 삶이 연속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합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6. 그 소리를 듣고 나의 뱃속이 뒤틀립니다. 입술이 떨리고 뼛속이 녹아내리며 아랫도리가 후들거립니다. 우리를 덮쳐오던 백성에게 재앙이 떨어지는 날만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개역개정, 공동 번역)
하박국의 표현대로 정말로 정상적으로 평안하게 살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이런 환란, 고난 가운데서도 언제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눈동자같이 보호해 주시는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절대로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정의롭게, 순결하게 하루하루를 잘 견디며, 믿음의 삶을 반드시 살 것이다. (믿음을 가진 자의 타당한 삶)
이런 믿음을 가지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인으로 인정하신 다는 말씀이 바로 하박국서 2장 4절의 말씀이다.
믿는 이, 믿지 않는 이 누구나 본문을 영문과 다른 한글로 된 여러 번역으로 보면 이렇게 쉽게 본래의 이 문장의 의미를 알 수가 있게 된다. 이제 변명의 여지도 또 얕은 믿음의 의미도, 온전치 못한 이해로 갈 여유도 모든 이에게 허용이 되지 않는다.
오직 로마서 1장 17절의 칭의 되는 믿음의 의미는 시간의 연속성을 지닌 한결같은 변치 않는 믿음이라는 사실과, 또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으며, 정의롭게 삶을 사는 행동하는 믿음이라는 사실만이 존재한다. 이를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박국서의 내용이 증명하며 이런 믿음에 대한 의의 인정도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이다. 할렐루야!
이런 내용의 이해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은 누구를 비판하거나 정죄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 부분의 이해에 어떤 분이 잘못이 있다면 누구든지 바로잡기 위함임을 꼭 밝힌다.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원하시지 정죄와 처벌을 원하시지 않음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글을 읽다가 자신의 잘못이 보이면 바로 잡고 올바로 살면 될 일이다. 과거의 일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것이고 돌이키는 자를 하나님께서 더 이상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3. 하나님 나라 뼈대가 되는 율법에 대한 이해
이제 우리는 칭의 되는 믿음보다 더욱 크고 비교도 할 수 없이 중요한 주제인 율법과 믿음과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법이다 라고 누군가가 선포했다. 또 어떤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성도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려 법을 주셨다 라고 했다. 정말로 놀라운 통찰력이 있는 말이다.
법을 전공한 법대생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인간 세상 질서의 유지와 공동체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반드시 법이 존재해야만 됨을 믿는다. 인간은 어떤 시대에도 어떤 인간의 조직도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서 법과 규칙을 제정했다.
공동체를 규율하는 법과 규칙이 없다면, 각자는 자기 마음대로 소견대로 살게 되어 결국은 약육강식의 세상이 될 것이고 무질서와 혼돈과 그리고 파괴와 죽음만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법을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며, 공동체의 안정과 번영을 추구했으니 고대 함무라비법을 비롯해서 로마법, 고조선의 8조 법금, 그리고 현대의 각국의 헌법과 하위법인데 이 법들은 성문화되어 존재한다.
인간의 법인 이들의 법과는 달리 율법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법이 아니다. 천지의 창조주가 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를 통해서 주신 모든 세상에 존재하는 법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정의롭고, 모든 구성원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최고 최선의 유일한 법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이 율법을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직접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셨다.
신명기 4: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선포하는 이 모든 법만큼 바른 규정과 법규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 어디 또 있겠느냐?
8. And what other nation is so great as to have such righteous decrees and laws as this body of laws I am setting before you today? (개역 개정, 공동 번역, NIV)
느헤미야 9:13 또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그들과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그들에게 주시고
13. "You came down on Mount Sinai; you spoke to them from heaven. You gave them regulations and laws that are just and right, and decrees and commands that are good. (개역 개정, NIV)
시편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편 119:86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시편 119:142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시편 119:151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시편 119:172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율법의 정신 혹은 성격에 대한 구절, 개역개정, 공동 번역)
왜 율법이 이렇게 인간이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고, 질서를 유지해서 행복하게 살게 하는 지상 최고, 최선의 유일한 법인가? 이는 율법 속에 하나님의 속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믿음이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으니 누구나 법을 전공하신 분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연구하면 이런 진리를 발견할 수가 있다.
모든 성도도 역시 마찬가지로 조금만 율법의 조문을 주의해서 보면 하나님의 속성들이 율법속에 나타나 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율법을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직접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셨다.
사랑이시고 정의로우시며,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며 신뢰를 유지하며 정의롭게 살기를 바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위해서 주신 법이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지 않고,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를 건설할 규정들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근간은 율법이며, 율법이 하나님 나라의 기본법이 됨이 너무나 분명하다. 율법을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고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 배우고 지킬 것을 명하신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이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일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시기 위해(구원하시기)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아울러 세상에 계실 때 율법에 대해 어떤 제자도 율법 학자도, 신학자도, 율법에 대해서 왜곡시키지 못하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20.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개역개정, 공동 번역 순)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 이후 즉 사복음서 이후의 예수님을 뜻을 받들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편지를 쓴 사도들의 모든 글은 이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말씀에 비추어 말씀의 범위 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역시 그렇게 해석됨이 성경의 질서로서 너무나 타당하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친히 하신 율법에 대한 말씀을 그분의 제자들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께서 건설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면서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실로 바울의 모든 삶이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이 하나님의 나를 세우는데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의 모든 서신은 율법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전적으로 부합하지 어떤 내용도 위의 말씀에 저촉이 되거나 혹은 위반됨이 진실로 한 점도 없다고 확신하며 모든 세상의 성도는 이런 믿음으로 로마서를 읽고 이해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후대의 신학자가 이를 잘못 이해하고 해석해서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말씀을 조금이라도 훼손시킨다거나 무시하게 하거나 혹은 어긋나게 한다면 이는 성령을 받은 사도들의 잘못이 절대로 아닐 것이다. 오히려 후대의 신학자나 성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 혹은 설교자들이 서신서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를 속히 확인해 보시기를 바란다. 미룰 시간적이 여유가 절대로 없다.
당연히 칭의에 대한 믿음의 부분도 하박국서를 먼저 읽고 잘 이해한 후에 로마서의 이해로 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로마서를 읽기 전에 먼저 보아야만 하는 이유는 6장으로 된 갈라디아서는 작은 로마서로 불리우며 로마서의 내용과 같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서보다 먼저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기에 로마서를 읽기 전에 갈라디아서를 반드시 먼저 읽고 이해를 하는 것이 로마서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필수적인 일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오천만의 로마서 네이버 블로그와 다음 카페의 로마서 공부의 워밍업란에 있으니 모든 분이 참고를 바라며, 새로 정리한 오천만의 성경 정리 제1탄 하박국서 정리, 제2단계 갈라디아서 정리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여기서는 중요 쟁점이 되는 내용만 간략히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이제 이런 율법의 이해를 바탕으로 모든 로마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성도는 먼저 갈라디아서를 보고 그다음에 로마서를 읽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씀은 말씀 그대로 이제는, 과거의 율법의 시대 즉 이스라엘 홀로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며 살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신 믿음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자각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고 의롭게 되는 과거 이스라엘 방법을 접어두고 온 세상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의롭게 되는 길인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인류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다. 우선 죄인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시고 다스리신다.
이제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의 할 일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도 받고 의롭게 되니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더도 덜도 없이 딱 이 말씀이다.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면 이제는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고 의롭게 되는 방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믿어야 하는 그 분이 바로 온 세상의 구주 예수님이시니 이제는 먼저 예수님을 이방인 유대인 불문하고 믿으라는 말씀이다.
이런 예수님을 여전히 믿지 않으려고 하고, 또 구약의 방법대로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고자 하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당시 갈라디아 교회와 로마 교회 등에 존재했기에, 바울 사도께서 이렇게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들에 문제를 일으켰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다. 심지어 율법을 행하지도 않았는데, 과거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모르고 믿지도 않고 율법을 믿으며 율법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과 같이 그들은 율법을 신자들에게 강요하고 예수님을 믿는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막고자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편지(로마서)에서 위와 같이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바울이 세운 교회와 로마교회의 성도는 처음에는 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성령으로 시작해서 잘 믿고 있었는데 유대인 거짓 교사가 가만히 들어와서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되고 율법을 우선시 해야 된다고 하니 이들의 유혹에 빠져서 첫 믿음과 성령의 인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를 바울 사도가 바로잡고자 또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 라고 바로 잡아 주는 것이다. 다시 올바른 길로 가던 자신의 성도를 바로 잡아 주어야만 했다.
따라서 당장 율법도 없이 그냥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우리(예를 들면 한국인과 같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생각해 보시기를 바란다. 날 때부터 율법도 모르고 배우지도 않고 신자가 되어서도 율법에 관심도 없다면 이런 이방인 성도에게 율법을 논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종국에는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임을 믿는다.
그리고 현실적이며 시급한 문제로서 우리와 같이 율법이 없이 예수님을 믿고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신자와 당시 이방인 신자들에게 과연 세상에서 살면서 해야 되는 행동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 신자 즉 바울 사도와 당시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신자들의 행동의 기준에 대해서도 같이 생각할 수가 있다.
예수님을 이미 믿고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된 성도의 삶은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 문제가 여전히 지금이나 그때나 남아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까지 오직 믿음이다라고 주장할 사람은 지구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오직 믿고 살아라 하면 성도 개개인은 매일 매일 순간순간의 삶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서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는데 오직 믿음이라는 가르침은 너무나 막연하고 답답하고 개개인의 판단이 요구가 된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렇게 성도가 기준도 없이 세상에 내 팽개처 지고 개개인의 자의대로 살도록 하지 않으셨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질서 속의 그리고 성령 안의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이 땅에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때 예수님의 사복음서의 율법에 대한 말씀은 가장 먼저 우리의 행위(성령의 인도를 받는)의 기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마태복음 5장 17-20 절에서 살펴보았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말씀은 율법의 조문 조문을 잘 지켜야 하고, 더 나아가서 사랑과 정의와 신의에 대한 조항의 이행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율법의 조문 조문의 이행을 하려고 사랑과 정의와 신의의 조항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율법을 조문 조문 잘 지키고 그렇게 지키도록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작은 조문이라도 어기거나 어기도록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세상의 누가 이 예수님의 엄격하신 말씀에 도전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도전하고 율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자(모든 부분에 있어 율법은 폐지되었다. 혹은 모든 부분에 믿음이면 되니 행위는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 가더라도 지극히 작은 자로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이다.
여전히 율법은 살아있고, 행위의 근거가 되며,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신약의 성도는 성령을 약속대로 받고 성령의 인도로 혹은 주님과 동행하면서 율법을 완성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성도가 성령도 없고(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율법도 없이(율법을 배우지도 실천도 안 하고) 세상 법에 완전히 몰입된 삶을 사라는 말씀이 절대로 아니다.
믿음이냐 혹은 율법의 행위냐를 설명하시는 말씀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잘못된 유대인들에게 맞서서 먼저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라는 당시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고 모든 것에 우선해서 먼저 다른 생각을 말고 예수님을 절대로 믿으라는 말씀이다. 불신 이방인과 유대인이 무엇을 통해서 구원받느냐, 혹은 의롭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결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이후의 성도, 그리고 의롭다 인저을 받은 성도의 삶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닌 줄로 우리는 굳게 믿는다.
그래서 결코 구원받은 신자가 혹은 의롭게 된 신자가 이방인 신자, 유대인 신자 불문하고 세상에서 살면서 모든 올바른 삶의 결정의 근거가 되는 율법을 멀리하고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말씀이 1%도 아님을 또한 우리는 굳게 믿는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이 늘 변치 않고 지속은 되어야 하겠지만 즉 믿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야 되겠지만 믿음의 적용을 신자의 행동의 기준이 되고 예수님께서 반드시 지키라고 명하신 율법에까지 확대 적용해서 성도들이 율법에 대해서 오해하도록 해서는 절대로 아니 될 것이다.
모든 일에 믿음으로 행하는 것 또한 필요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행한다고 법도 질서도 없이 막무가내로 성도 마음대로 하라는 것도 절대로 아니지 않겠는가? 이 기준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세워주셨고 그 기준을 어떤 세상의 성도가 허물어서는 절대로 아니 될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불복이며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목자는 이런 말씀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의 성도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도의 율법의 준수의 문제에서 모든 율법을 문자적으로 다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조항 중에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친히 성취하신 제사나 제물, 제사장에 관한 규정, 성막에 관한 규정 등은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율법의 더 중요한 바 의와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어떤 조항을 행할 때 각각의 상황에서 문자적 이행이 아니라 문자를 넘어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예수님 말씀 마태 23:23).
그리고 신약의 모든 성도는 반드시 율법을 하나님 나라의 기본법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어려서부터 배워야 하고 부모는 자기 자녀를 가르쳐야 하고 지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모든 신앙생활과 행위의 기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또 주님과 동행하면 성령께서 그리고 주께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율법의 요구를 수행하고 완성시키는 방향으로 인도하실 것이 분명하다.
절대로 성령께서 혹은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이 율법을 어기면서 이 세상에서 살도록 하시지 않을 것이다. 즉 그분들께서 율법의 내용과 위반되는 방향으로 성도를 인도하시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마태복음 5장 17-20 절의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어찌 성도를 율법의 내용과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시겠는가?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다만 성도가 율법과 다르게 불의를 행하며 사는 것은 성령도 무시하고 주님의 뜻도 저버리고 오직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사사로이 행하며 사는 것이 될 것이다.
성경 말씀, 성령님, 예수님은 모두 일치되어 있고 율법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 말씀은 어긋남이 없고, 모세 오경의 율법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니 성령님의 감동이나 인도와 틀림없이 일치함이 분명하다.
일천만의 성도가 있기에 모든 한국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바로 잡아서 정의롭고 공평하며 살기에 행복한 세상을 틀림없이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된 한국에서 너무나 많은 백성이 참고 더 이상 살기에 힘든 불의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율법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이를 누구나 반박할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증거를 성경적으로 제시한다.
한국의 모든 심각한 문제는 집 문제 땅 문제에서 비롯된다. 나라를 망치는 빈부의 격차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좁은 땅에서 집도 부족한 상태에서 집과 땅을 인간의 죄성을 조금도 인정하지 아니한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서 마음대로 가지도록 한 지금의 헌법하에, 사람이 더 이상 살 수가 없는 불평등과 불의가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를 안 사람은 별로 없었고, 모두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취해 있다. 그리고 율법의 중요성과 필수성과 정의로움에 대해서 가르치는 이는 별로 없다. 이로 인해서 이 율법(모세 오경의 율법)이 모든 일천만 성도가 국법에 앞서서 배우고 지켜야 할 천국 백성의 유일한 법임도 알지 못하고, 오늘도 수많은 신자가 세상의 법을 따라서 죄악의 길로 가고 있다.
물론 많은 세상의 법이 건전하고 질서를 세우며 사람들이 평안하게 사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만든 법으로 하나님의 법과 달리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거나 정의롭지는 절대로 아니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집값과 땅값이 더욱더 상승해서 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한국의 근로자 중에서 하루에 일당이 15만 원인 집이 없는 근로자가 자신의 집을 가진 근로자와 같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하자. 자신의 소유의 집과 땅이 없는 근로자는 하루에 15만 원 버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서울과 경기에 집과 땅을 가진 근로자의 경우 그 수입이 집이 없는 근로자와 완전히 다르다.
지방에 집과 땅을 가진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재인 정부와 그 이전의 정부도 역시 집값이 오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함에도 최근의 예를 보면 서울의 아파트 가격이 5년 동안에 8억이 올랐다고 하면 일 년에 약 1억 6천만 원이 오른 것이다. 그리고 이를 매일 매일로 계산하면 하루에 약 45만 원씩 올라서 그 아파트를 가진 사람의 수입이 매일 그렇게 느는 것이 된다.
그는 일당도 15만 원씩 매일 벌고 또 이와는 별도로 집을 통해서 매일 그렇게 버는 셈이 된다. 국민의 48%는 집이 없으니 일하는 날 일당 15만 원이 전부이나 서울 경기에 아파트나 집이 있는 사람들은 일하지 않는 날을 포함해서 매일 집값 상승분 45만 원에 플러스 일을 하는 날 15만 원의 수입이 발생하는 것이다.
국토의 가용국토 100% 중에서 국민의 약 30%만 그 모든 토지를 소유하고 국민의 약 70%는 자신 소유의 땅이 한 평도 없는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 그래서 땅이 있는 30%의 사람들은 또 집값 상승과 별도로 땅값이 오름에 따라 땅이 없는 백성 70%와 달리 땅값 상승으로 인한 수입이 매일 매일 발생한다.
이런 틀림없는 한국의 현실은 한국 헌법에 보장된 모든 국민의 권리 즉 자유권, 행복 추구권, 평등권, 재산권 보장, 교육에 대한 권리, 참정권, 생명의 존엄 등의 모든 권리를 모든 국민이 누리게 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헌법을 유명무실(이름은 있으나 실익이 없는 상태를 설명함)하게 하는 망국적인 현실이다.
아무런 노동도, 노력도 없이 자고 나면 수입이 느는 정의와 공평의 관점에서 너무나 불의하며 불공평한 일이 발생한 것으로서 나라의 붕괴가 일어날 수도 있는 타락(죄로 인한 낭패)이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누가 자본주의 제도하에서 이런 불의와 불공정을 지적하고 바로 잡겠는가? 집을 가졌거나 땅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집이 있고 땅이 있는 국민의 52%는 매일 매일 이를 계산하며 춤을 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오른 집값과 땅값으로 무엇을 하지 어떻게 돈을 쓸까에 골몰할 것이다. 그러나 집이 없는 국민의 48%는 그리고 땅이 한 평도 없는 국민의 70%는 한숨과 탄식과 그리고 삶에 대한 체념과 포기가 그들의 일상이 될 것이다.
이들 중에서 너무나 살기가 힘이 들고 주변의 사람이 보기가 싫어서 매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하루에 40명이 넘는다. 그 나라가 우리가 사는 한국이다.
한 국가가 망하는 것은 국민의 통합이 와해 되고 적국이 쳐들어와도 그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열의가 사라질 때 혹은 적군의 침략을 방조할 때 이루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살 수가 없다고 체념한 사람들이 늘 때 나라는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무너질 때 가장 큰 피해는 잘 사는 사람들이 된다.
이 일을 바로잡는 일을 모든 믿는 이들이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사명이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먼저 본을 보이고 이들도 그렇게 살도록 해야 되는 의무가 모든 크리스천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도 우리는 절대로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율법의 건재함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살면서 많은 불의를 경험하고 때론 실망하고 때론 격분하였다. 어디에다 호소도 못하고 권력과 강자에게 당하면서 기댈 곳 없는 소망 없는 존재와 같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모세 오경의 율법에 주목하게 되고 큰 빛과 소망을 보게 되었다. 모세 오경의 율법 속에 진정한 정의와 평등이 있고 이 법이 세상에서 지켜지게 되면 모든 인간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됨을 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안도하였고,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드는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실로 40년의 고통스러운 삶이 주님으로 인해서 보람되고 축복이며, 반드시 견디어 내어야 하는 삶임을 보았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런 한국의 망국적인 문제를 고칠 유일하며, 정의롭고 공평한 지상 최고 최선의 법이 율법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능하시고 정의로우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법이며, 특별히 믿는 사람의 국법이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심판의 기준이 되는 준엄한 법이 바로 모세 오경의 율법이다.
그리고 인간 누구도 일점일획도 침범할 수 없고 하늘과 땅과 모든 만물이 사라진다 해도 온전히 그대로 존재하는 엄위한 법이다.
이런 위대한 율법이 있으므로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늘 율법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제 이 율법에서 어떻게 집 문제와 땅 문제를 말씀하시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이 율법과 관련된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우선 땅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그 소유자가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늘들과 지구)
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그리고 레위기 25장 23절에서 토지가 하나님의 소유이며 사고파는 것이 제한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레 25: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2)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3 No land may be permanently bought or sold. It all belongs to me--it isn't your land, and you only live there for a little while.
진실로 하늘과 지구는 하나님께서 무에서 창조하셨기에 존재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부동산 즉 토지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며 사고파는 것이 제한이 됨을 밝히고 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이 잠시 이 땅에 살다가 가는 나그네 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라의 경계를 분명하게 정해 주셨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예를 보고 다른 민족의 예도 보겠다.
시편 74:17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104:9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출 19: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민 34:3-11 너희 남쪽은 에돔 곁에 접근한 신 광야니 너희의 남쪽 경계는 동쪽으로 염해 끝에서 시작하여 서쪽 경계는 대해가 경계가 되나니 이는 너희의 서쪽 경계니라
북쪽 경계는 이러하니 대해에서부터 호르 산까지 그어라 그 경계가 또 시브론을 지나 하살에난에 이르나니 이는 너희의 북쪽 경계니라 너희의 동쪽 경계는 하살에난에서 그어 스밤에 이르고 그 경계가 또 스밤에서 리블라로 내려가서 아인 동쪽에 이르고 또 내려가서 긴네렛 동쪽 해변에 이르고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1)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6 From one person God made all nations who live on earth, and he decided when and where every nation would be.
27 God has done all this, so that we will look for him and reach out and find him. He isn't far from any of us,
신 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8 that God Most High gave land to every nation. He assigned a guardian angel to each of them,
이렇게 하나님께서 민족과 나라의 경계를 정했다고 함은 어떤 국가 강해지더라고 함부로 국경을 넓히기 위해서, 혹은 주변의 약한 나라를 침범하고 수탈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의 국경을 범하지 말아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영웅은 어떤 국가의 영웅은 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그 나라를 강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배웠다. 칭기즈칸, 진시황, 광개토 대왕, 그리고 알렉산더, 시저 등을 영웅으로 생각하며 자랐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면 이들이 절대로 영웅이 될 사람들이 아님을 보게 된다. 성경에서 타국을 함부로 범하고 사람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간 나라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하심을 보았다. 반드시 그런 나라들은 망하거나 쇠약해진다는 것인데 이런 사실이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맞음을 우리는 본다.
만약에 이 시대에 중국이 강해져서 주변국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괴롭히면 틀림없이 중국도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받을 것을 믿는다. 이 복음을 중국에 전해야 한다.
그리고 정해 준 경계를 함부로 옮기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신 19: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29:17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당연히 이스라엘을 비롯한 이스라엘에 사는 개인은 국가의 국경이나 개인의 경계를 하나님께서 정해 준 대로 반드시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각 민족이나 국가의 경계를 정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제사장 지금의 목사는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였다.
18:1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목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1 The people of the Levi tribe, including the priests, will not receive any land. Instead, they will receive part of the sacrifices that are offered to the LORD,
한글 번역은 분깃이라고 해서 애매하나 영어는 land 즉 땅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땅을 가진 목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또 땅을 가지고 계시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온 백성이 12지파로 이루어져 있다. 12지파가 다 모이면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 전부가 모이는 것이다. 이들에게 당시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이 땅을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나누어 주었다. 이들도 역시 이 경계를 반드시 지키면서 살아야 했다.
이스라엘엔 국가의 경계가 있고, 그리고 모든 사는 부족의 경계가 또 정해졌다. 힘이 강성해져도 다른 나라를 침범해서 국토를 넓혀도 아니 되고, 그리고 국민도 자신의 영역을 마음대로 조정하지 못하고 정해진 지역에서 오직 (죽으나 사나)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판 토지는 언제든지 되물을 수가 있고, 50년 즉 희년이 되면 토지를 본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 집과 땅을 함부로 사고 팔지 못했고 백성 중에 집이 없고 땅이 없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하신 것이다. 부동산을 통해서 즉 동족이 가질 집과 땅을 홀로 마음대로 소유할 근거를 아예 처음부터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 율법을 지켰더라면 집과 땅이 없는 사람이 없어서 누구도 삶의 기본은 갖추고 살았을 것이었다. 인간이 발을 딛고 사는 근거가 되는 땅과 그리고 사는데 가장 필수적인 집을 가지고 절대로 장난을 치지 말며, 집과 땅이 없는 백성이 절대로 한 명도 없게 하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배려인가?
그리고 이제 우리나라와 같이 땅과 집을 주변의 이웃을 무시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자.
이사야서에 있는데 우리에게도 틀림없이 적용되는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 말씀은 아무리 인간이 무시하고자 해도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는 틀림없이 모든 인류에게 적용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런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즉 이웃을 사랑하기 포기한, 동족을 사랑하기 포기한 무정한 사람들에 대한 징계에 대한 말씀이다.
사 5:8.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9.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개역 개정)
8.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집을 연달아 차지하고 땅을 차례로 사들이는 자들아! 빈터 하나 남기지 않고 온 세상을 혼자 살듯이 차지하는 자들아!
9. 만군의 야훼께서 내 귀에 대고 맹세하신다. "많은 집들이 흉가가 되어 제아무리 크고 좋아도 인기척이 없게 되리라.
10. 포도밭 열흘갈이에서 술 한 항아리밖에 나지 아니하고 종자 한 섬에서 곡식 한 독이 가까스로 나리라." (공동번역)
진실로 이 경고의 말씀이 멸망한 이스라엘에 그대로 실현이 되었다. 불의한 이스라엘(남 유다가 망함)이 망하고 당시의 고관대작과 제사장과 왕족들은(당시의 왕은 시드기야)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고, 그리고 그들이 소유했던 집과 땅은 땅이 없던 빈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렘 39:6. 바벨론의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
7.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
8. 갈대아인들이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었고
9.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잡아 바벨론으로 옮겼으며
10.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날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그런데 이 사건이 남의 일이 아닌 것이 정말로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 적이 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토지 조사사업을 시행했다. 민비를 시해하고 왕을 폐하고 왕자들을 일본으로 잡아갔다.
이전의 국토의 왕토 사상으로 글도 모르는 백성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는데 이 사업으로 개인의 토지 소유에 대해서 새로운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600년 한반도를 지배한 이씨 왕조가 해체가 되고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고, 그리고 한국의 토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어 개인이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시대는 왕족과 양반, 그리고 중인과 백성, 그리고 천민과 노비의 신분제도가 너무나 엄격했고, 조선 시대의 노비는 우리가 아는 흑인 노예 못지않게 인권의 침해를 당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인이 동족의 노비제도에 대해서 비판하고 잘못이 된 제도라고 말하는 이는 드물고 흑인 노예제도만 잘못된 제도라고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 수백 수천 년의 못된 폐습에 도전을 한 천주교의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평등하다는 가르침과 양반과 종이 형제로 되는 사상은 왕과 왕족 그리고 양반에겐 비수와 같고 독과 같았다. 예수님을 믿는 도가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에 도전하자 100년 동안 천주교를 믿는 성도 약 1만 명 이상을 목을 치고, 너무나 다양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죽였다.
그리고 이런 일을 자행한 왕과 왕족 그리고 양반이 있는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 망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역사의 가르침도 배워야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역시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역사의 주관자 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성경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생겨야 비로소 역사의 주관자인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 모두가 부동산 광풍에 싸여있다 해도, 일천만 성도는 절대로 이에 기웃거리지도, 보지도, 따르지도 말고 율법의 규정을 지키며, 세상이 이렇게 망하는 쪽으로 가는 길에서 멀어져야만 할 것이다.
모든 한국의 성도와 세상의 성도는 먼저 한국의 땅이 그리고 온 지구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븓 율법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즉 이웃에게 해가 되는 집과 땅의 소유를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어린아이도 좁은 한국에서 오천만이 살고 있는데 내가 땅을 많이 가지고 집을 여러 채 가지면 땅과 집을 갖지 못하는 이웃이 발생함을 알 수가 있다.
집과 땅이 없는 국민은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가 어렵다. 결혼도 어렵다. 그리고 평안한 삶을 절대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헌법에서 보장하는 모든 권리를 절대로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이런 사정을 잘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진실로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모세 오경의 율법을 잘 배우고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한국의 문제가 해결되고 한국이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율법이 해이 해지고, 불의가 만연하면 반드시 정의롭게 사는 자의 탄식이 있고 이런 불의한 세상에서 더 이상 소망을 품지 못한 자들의 이상행동이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민족이나 국가 혹은 집단을 망하게 하시는 것이 진리이다.
이것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법이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고치지 않고 방관하면 반드시 북의 핵에 의해, 혹은 동쪽과 남쪽의 지진에 의해, 혹은 강대국 중국이나 러시아, 일본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가장 큰 피해는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세상에서 불의한 이익을 누리는 자들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율법을 배우고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조문조문 잘 지키고 또 정의와 자비(사랑 혹은 긍휼), 신(믿음)에 관련된 더 중요한 내용도 잘 지키라고 하셨다. 율법을 등한시하는 자는 이 땅에서 비록 어떤 삶을 살았던지(큰 교회 목사, 큰 부자, 혹은 큰 장로, 큰 신자 등등) 천국에서는 결코 큰 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이니 그대로 될 것이다.
한국의 교회를 세우고, 나라를 지키며 국민의 행복과 평안을 얻는 길이 모든 성도가 율법을 잘 배우고 지키는 일에 달려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국가나 집단이나 민족이 복을 받고 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 모든 나라의 성도보다 한국의 성도가 앞서고 한국의 교회가 앞장을 서서,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나라,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믿고 살만한 세상을 이 땅에 만들어 주님의 인정을 받고, 또 보호를 받는 나라가 되길 소망한다.
이에 대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분은 오천만의 로마서에 있는 로마서 공부 워밍업 부분의 하박국서 정리와 갈라디아서 정리를 참고하길 바란다.
4. 논의의 요약
마지막으로 이때까지의 논의를 요약한다.
믿음의 문제는 아브라함과 하박국의 예를 보면서 이해한다. 아브라함은 시간적으로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지고 의롭다 인정받았고, 하박국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믿고(하나님께서 불의한 동족 이스라엘을 바벨론을 사용해서 멸망시킨다는 믿음, 바벨론도 역시 심판을 받는 믿음, 정의롭게 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호한다는 믿음) 정의롭게 삶을 사는 믿음의 소유자를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설명함을 보았다. 이 둘 모두(하나님을 믿고, 정의롭게 행동하는 믿음과 시간이 가도 변치 않는 믿음)를 지닌 사람의 믿음이 의롭다 인정받는 믿음이다. 구약의 예
신약에 와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는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고 이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도 주시고 발걸음도 인도를 하신다. 주와 동행이라는 표현도 맞다. 이렇게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구약 시대의 믿음을 여기에 그대로 대입하면 신약의 성도는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 생활을 언제나 변치 않고 해야 할 것이고, 또 하박국서와 같이 고난이 온다 해도 변치 말고 하나님(하나님께서 불의를 척결하시는 정의로우신 분)을 믿고 정의롭게 살아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 대한 인도도 틀림없이 이렇게 인도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하루하루 믿음 생활을 하는 중에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위해서 늘 사랑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도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늘 주와 동행하게 되고 또 율법을 완성하는 방향으로 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언제나 우리의 선택이나 행위가 올바른 것인지 우리가 행동하기 전에 율법과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반드시 율법의 규정을 보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음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온 감동이 율법(모세 오경)적으로 올바른지 역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을 잘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느 때 적절한 시간에 의롭다 인정을 하실 것이다. 내가 나를 혹은 목자가 성도를 마음대로 너는 의롭게 되었다, 혹은 나는 의롭게 되었다고 마음대로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주의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신약의 로마서의 이신 칭의이다.
칭의는 구원보다 후에 혹은 죄 사함, 성령 선물, 혹은 성령의 인치심, 혹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후에 하나님께서 합당한 분(변치 않는 믿음 생활과 하나님을 믿고 정의롭게 행동하는 사람)께 적절한 때에 의롭다 인정을 하시는 것으로 이해한다.
아울러 하박국의 예를 보면서 세상은 갈수록 불의해지고 사랑은 식고 믿음은 찾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또 속히 오시길 기도한다. 주께서 오시면 모든 불의는 제거되고 심판이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상과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말세에 하박국이 가졌던 그 믿음을 가지고 이 말세를 정의롭게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취하지도, 세상의 급변에 취하지도 말고 오직 말씀을 붙잡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복음을 전하며 선한 삶과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런 자리에서 모든 이렇게 살고자 하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늘 위로하고 격려하실 것이다. 정의롭게 사는 기준은 언제나 구약의 율법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정의롭게 사는 모든 성도여! 힘을 내자!!!
율법의 문제는 반드시 율법을 모든 성도가 잘 배우고 지키는 쪽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이다. 어떤 신학적인 주장이 있다고 해도 성도들은 절대로 흔들리지 말고 율법을 멀리하거나 혹은 등한시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나라를 살리고 교회를 세우고 나와 내 자녀가 이 땅에서 정의롭게 평안하게 행복하게 사는 길은 오직 율법을 잘 배우고 지키는 일에 달렸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그리고 성령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도록 하셨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과 함께 율법의 일점 일획도 잘 지키게 하셨다. 사랑의 구제적인 실천이 율법에 있고 정의의 구체적인 실천도 역시 율법에 잘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성도가 세상에서 이렇게 살게 되면 이런 성도가 사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율법이 완성될 것이다.
정의와 공평이 있고 질서가 유지되며 모든 구성원이 서로 믿고 행복하게 사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부름을 받고 구원받고, 그리고 사역하고 있다.
자! 자 이제 마지막으로 위의 내용과 함께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신 율법 완성의 내용을 무엇인지 모두가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동물과 식물의 피 흘리는 제사 없이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 언제나 하나님께 바로 기도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릴 때 늘 주님과 보혈과 대속의 은총을 먼저 찬양하고 감사함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선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이 행하던 하나님을 뵈옵기 위한 율법과 절차를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레위기를 통해서 볼 수가 있는데 여러 가지가 있고 대표적인 것이 자신이 키우던 흠 없는 짐승을 성전에 가져가서 죽여서 피를 흘리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쳤다. 예수님께서 이 역할을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하셨다. 이에 대한 이해가 없이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할 수가 있을까?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이루셨다하고 이제는 관심도 공부도 지킴도 없이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 할 수가 있을까?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셨으며 친히 피를 흘리시고 제물이 되셔서 이룬 부분에 대한 율법의 완성에 대해서 우선 깊이 이해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율법을 지킬 필요를 너무나 큰 희생으로 줄여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더욱더 힘을 내어서 헌신해야 한다.
이와함께 율법으로 제사를 통해서도 용서가 없던 죄가 있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서 살인의 죄, 간음의 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어떤 죄는 사형이나 돌에 맞아서 죽어야만 했다. 율법에 의해서 절대로 용서가 없는 죄가 존재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제는 간음한 여인도 돌에 맞아 죽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 하더라고 용서받을 길이 열렸다. 이 부분은 율법으로 살 수 없던 사람이 이제는 용서를 받게 됨으로써 율법의 구원하지 못한 사람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죄를 용서받고 구원의 길이 열렸다. 물론 각국의 법에 따른 처벌은 피할 수가 없다. 어떤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있어서 율법으로 불완전하던 부분이 예수님을 통해서 더욱 완전하게 된 것이다.
남은 모든 율법이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사랑을 실천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고 선하게 살아야만 되는 의무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율법이 아니고 행위도 아니고 오지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가? 율법은 폐지가 되었다고 가르쳐서 이 세상에 살면서 율법을 지킬 마음조차 갖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또 사랑도 실천하지 못하게 그 삶에서 구체적인 율법의 조건(조항)들을 가르치지 않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에 현실이 이렇다면 성도가 세상에서 어찌 법(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모세 오경의 법)대로 사랑하며 정의롭게 살 수가 있겠는가?
또한 성령에 대한 왜곡으로 성령을 받지도 못하게 하면서, 오직 믿음만 외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믿음 하나로 모든 신앙적인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하면서 모든 성도를 세상의 법만 죽도록 배우고 또 추종하도록 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은 모든 율법을 지키게도, 완성하게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로 인해서 법도 사랑도 없이 자신의 소견대로 마음대로 세상에서 사는 크리스천이 가득하지는 않는가?
만약에 진실로 교회가 이렇게 성도를 가르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현실의 상황이 과연 누구의 잘못인지 때가 되면 틀림없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말씀을 사랑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율법을 사랑하고 배우고 지키는 것이다. 이 모든 율법을 지킬 의무를 예수님께서 친히 어떤 부분에 대해선 율법을 완성하셨기에 이를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구약의 제사 제도) 이제 짐이 너무나도 가벼워진 성도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복음을 전하며, 또 선을 행함으로 남은 모든 율법을 완성시켜야 할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통치는 법의 통치였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건설하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통치의 근거는 무엇인가? 사랑하면 된다! 성령의 인도만 받으면 된다! 틀림없이 정확하게 맞는 말이다. 또 혹자는 주님과 동행하면 된다고 할 것이다. 이도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성도가 이렇게 살면 모든 율법이 자동으로 완성되기에 이렇게 사는 것이 틀림없는 답이다.
이제 사랑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혹은 성령의 인도가 맞는가? 혹은 주님의 동행이 확실한가를 살피려면, 우리는 먼저 나의 어두운 세상 길에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 되시는 말씀 즉 율법의 규정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의 규정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바른 길로 가야 할 것이다.
가족 중에 누군가 암을 진단받아 수술을 해야 한다고 가정하자.
의대에서 잘 배우고 의사로서 암 환자 수술의 경험이 있는 의사에게 수술받게 하는 것과 아무런 지식도 없는 일반인에게 암을 수술받게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너무나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과 자기 가족이 암에 걸렸다. 이제 수술만이 사는 길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수술 절차에 대해서 잘 아는 경험이 있는 의사에게 당신과 가족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수술만 하면 되니 수술의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는 일반인에게 수술을 맡길 것인가?
100% 모든 사람은 수술 경험과 지식이 있는 의사에게 자신과 가족을 맡길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면서 우리의 성도를 세상에 내어 보내는 우리 목사들은 어떤가?
그들이 사랑할 대상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너무나 분명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율법을 우리 교회는 가르치고는 있는가?
심지어 우리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도록 ‘믿기만 하면 돼, 율법은 폐지가 된 것이야’ 라고 그들에게 가르치고 설교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성도들이 온 세상에서 사랑의 대상인 세상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대하게 가르치는 것이 정신이 올바른 목사들이 할 일인지 반드시 우리는 잘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마치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게 수술(자세한 절차, 방법, 교육과 실습)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고 가서 수술만 잘하면 된다. 하고서 세상에 의대생을 내보내서 환자를 수술하게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육체의 생명은 겨우 100년만 살지만, 영혼의 문제는 영원한 시간의 삶의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목사와 교사는 성도가 세상에서 정말로 법(모세 율법)대로 사랑하고 법대로 믿고 법대로 행하게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 법이 바로 모세의 율법이며 예수님께서 반드시 모든 성도가 지켜야 한다고 하신 법이다.
우리는 모든 성도를 가르치는 분들이 이런 원리를 이해하고 반드시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정의를 행해야 되는지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가르쳐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성도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고 우리에게 물을 때 우리가 그들에게 ‘기도하고 하세요’라고 하면 부족하다. 그렇게만 하고서 성도를 세상에 내 보내서는 아니된다.
우리가 먼저 모세의 율법을 잘 배우고 이들을 잘 가르쳐야 할 줄로 굳게 믿는다. 우리는 모든 성도가 세상에서 하루하루 순간순간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쪽으로 행하도록 반드시 지도해야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근간은 율법(모세의 법)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법치이다. 이 나라는 모든 성도가 율법을 잘 배우고 반드시 모든 행위에 있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되는 나라이다.
그리고 그 인도가 온전한지 반드시 성도가 율법에 비추어 보고 행동해야 되는 나라이다.
율법(모세의 법)이 온 세상에 잘 알려지고 모두가 율법을 잘 지켜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우리는 간절히 소망한다.
제 Ⅴ 편 덧붙이는 간증
은행에 다니다 그만두고 대학에 들어가서 고시공부를 시작한 나에게 하나님께서 1986 년경 김성수 장로님께서 주신 성경책을 통해서 찾아오셨다.
불교에 심취해 법정과 성철에 푹 빠져서 살던 나에게 갑자기 하나님께서 오셔서 성경을 읽게 하셨다 두려움을 주시고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나에게 전도자가 준 성경책이 보이고 이 책을 펼쳤는데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한 말씀이 나의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데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서 들어왔다.
스스로 정의롭고 도덕적이고 선하다고 굳게 믿던 나의 진정한 모습이 성경에 의해서 거울을 보듯이 낱낱이 드러나는데 어느 곳 하나 좋은 모습이 없는 완벽한 죄인으로 흉악한 인간인 나의 본 모습이 드러나자 나는 바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과거의 나의 모습대로 절대로 살 수가 없어서 고린도 전서 13장의 모습으로 살기를 몸부림쳤다.
너무나 어려웠다. 5년을 그렇게 하고 1991년 5월 19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장유 반석교회에서 성경석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92년 어느 겨울날 서울의 신림동 선민교회에서 박기수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데 예수님께서 환상으로 오셨다.
성전을 가득 채우시며 오셨는데 그분의 입입을 통해서 빨간색의 불을 내 가슴에 뿜어 주셨다. 작은 촛불과 같은 불꽃이 내 가슴에 몇 개가 보였다 흑백의 예수님의 모습이셨는데 불의 색은 틀림없이 빨간색의 칼라였다.
손에 땀이 나고 아픈 믿는 분을 내가 만지면 나으리라는 믿음도 함께 왔다. 3일을 행정고시 공부도 잊고 천국에 있는 것과 같이 보내고 또 일상의 생활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양한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이 쉬지 않고 일어났다. 여러가지 질병이 있는 사람들을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방언이 통변이 되고 쉬지 않고 전도가 일어나며, 성경의 이해가 쉽게 되고 성경을 읽고 정리하는 일이 시작이 되었다.
1983년 은행에서 나온 지 40년 그리고 성령을 받은 후 약 30년 너무나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다. 전처는 소리 없이 집을 나갔고 나는 4년을 불면과 우울의 체념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재혼해서 아들을 낳고 회복했지만 여전히 경제적인 문제와 세상의 밑바닥에서의 삶은 험악했다. 대학원을 두 곳 졸업한 사람이 성령을 받고 정의롭게 살며 복음을 전하는데 세상은 참으로 불의하며 소망이 없이 보였다.
이때 성경의 율법을 보게 되고 너무나 반가웠고 비로소 안도하게 되었다. 이 불의한 세상을 고칠 유일하고 최고 최선의 법을 만났기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큰 희망이 타올랐다.
성경의 정리와 전도를 통해서 성령께서 성경의 이해를 크게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진리를 깨닫는 너무나 큰 기쁨을 쉬지 않고 주셨다. 그리고 쉬지 않고 언제나 함께하시며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셨다.
나는 때론 심각한 죄를 짓기도 하고 하나님께 큰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시고 나를 품어주셨다.
그리고 미군 부대에 2015년부터 김현철 전 대령의 배려로 근무하게 되어 영어를 공부하며 성경을 영어로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책을 약 10권 즉 전도, 교회 성장, 성경 전체 정리, 로마서의 이해, 깨달음의 글, 한국 교회의 성장과 미래 등으로 정리하고 이를 영어로 번역해서 하바드, 예일, 옥스퍼드, 그리고 프린스턴의 신학교 교수에게 보내게 되었다(제목 서울 보고서)
이 내용을 오천만의 로마서란 제목으로 네이버 블로그와 다음 카페에 조금씩 2018년부터 올렸는데 약 100개국에서 32만 명 정도가 보았다. 이런 하나님께서 큰 죄인에게 베푸신 큰 은혜를 요약해서 온 세상에 위와 같이 전한다.
흉악한 소망 없는 죄인에게 일어난 일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일과 너무나 일치했다. 전도를 하고 신대원 논문을 쓰면서(2010년 경)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성령을 받고서(1992년) 십 년이 훨씬 더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나에게도 틀림없이 그대로 일어 난 그 구절을 전한다.(앞에서 설명함)
행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성경에 기록된 일들은 지금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 나 뿐만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난다. 진실로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큰 소망을 발견하고 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역시 에스겔서의 말씀으로 위의 저의 모든 주장이 하나님의 뜻과 완벽하게 일치함을 알게 해 주셨다.
모든 일이 시간이 가면서 순서에 따라 일어나고 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건설이 될 것이고 율법의 완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완성은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내가 그 나라의 일에 동참하고 있는가이다. 에스겔의 내용을 보자.
겔 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36: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성도가 율법을 잘 지키기를 원하신다. 이스라엘이 잘 지키지 않아서 멸망했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죄인의 죄를 용서받을 길을 십자가와 피 흘림과 죽으심을 통해서 열어놓으셨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게 되면 성령께서 선물로 누구에게나 오신다. 이렇게 된 성도는 마음이 부드럽게 된다. 그래서 율법을 이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잘 지키게 된다. 이렇게 해서 율법이 잘 지켜지게 되고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이 된다. 그 나라는 다윗 왕 때 이스라엘과 같으며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이다.
정의가 이 땅에 꽃이 피려면 정의로운 법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그 법을 구성원이 배우고 지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집단에 질서가 서기에 비로소 평화가 그 공동체에 임하게 되고 그 공동체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 일이 이 귀한 율법을 지니고도 1000년의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 속에서도 이스라엘를 통해서는 실패하게 되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권하고 권해도 이스라엘이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위의 에스겔서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물로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예수님 이름의 물세례) 물론 먼저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 있다. 그리고 이를 믿는 성도에게 성령께서 오신다. 새 마음 즉 새 사람이 우리 안에서 창조가 된다. 우리는 이를 새로운 피조물이라 부른다. 이 새 피조물은 성령으로 인해서 마음이 부드럽게 되어 율법을 이제는 잘 지키게 된다.
이를 율법의 완성으로 부른다. 이로 인해서 비로소 이 땅에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진실로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일이 개인 구원으로 그 후에 성도가 어떤 제도에든지 빌붙어 오직 부자로 살기를 바라시는지, 아니면 이를 넘어서 성도가 성경의 율법을 성령의 인도로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으로 잘 지킴으로 이 땅에 진실로 율법이 잘 지켜져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인지 깊이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보혈과 십자가 대속으로 새롭게 창조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신자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꼭 이글을 통해서 바로잡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위로와 평안이 임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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