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5. 24.
- '재벌 때리기' 운동권 정서 속에 투기 자본도 正義의 사도로 둔갑
- 기업을 斷罪 대상으로만 보면 일자리 창출·투자는 쪼그라들어
"매판 독점자본을 타도하라."
1980년대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울려 퍼졌던 구호다. 매판 독점자본은 삼성·현대·LG 와 같은 대기업들을 지칭했다. 매판자본(買辦資本)은 중국 청나라 말 서구 기업과 결탁, 폭리를 취한 상인을 지칭하는 용어다. '외세의 앞잡이 자본'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운동권은 재벌을 독재 정부와 함께 '타도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제 매판자본이라는 용어 자체가 한국에서 사멸(死滅) 단계이다. 사카린 밀수하고, 밀가루 수입으로 폭리 취하던 싸구려 재벌은 더 이상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재벌은 반도체·휴대전화·자동차로 선진국 자본과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싸움을 벌이며 경제 영토를 확장해왔다. 제3세계 민족자본의 성공 모델 중 하나가 한국의 재벌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이 풍부한 천연자원에도 경제 발전에 실패한 것은 매판자본의 탓도 크다. 기업들이 외국 상품을 수입해서 비싸게 파는 손쉬운 장사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재벌도 출발은 비슷했지만 정부의 개발 계획과 기업가의 모험 정신·경영 능력, 근로자의 헌신이 모여 수출 주도형 산업자본으로 도약했다.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기업과 자본에는 민족도, 국가도 무의미할 수 있다. 애플 등 서구 글로벌 기업들은 세금 회피를 위해 막대한 이익금을 해외 조세회피처에 쌓아두고, 제품 생산은 인건비 저렴한 중국에 맡긴다. 그러나 동양적 정서가 강한 일본과 한국의 기업은 어느 정도의 애국심과 사명감이 있다. 일본의 도요타는 국내 생산량 300만대 유지를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일본은 2010년대 엔화 가치가 치솟아 기업들은 수출할수록 손해였다.
도요다 아키오 사장은 "국내 생산 유지가 어렵지만, 일자리 유지를 위한 사명감으로 버텨야 한다"고 했다. 삼성과 현대차 등 한국의 재벌들도 고임금, 강성 노조, 높은 세금, 각종 규제, 적대적 시민단체에도 한국에 생산기지를 유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자본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에는 1980년대 운동권의 시각으로 재벌을 매판자본 취급하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까지 일자리 확대를 위해 법인세 인하 등 대기업에 파격적 특혜를 제시하지만, 한국은 대통령의 강요로 기부금 낸 기업 총수까지 구속했다. 우리 대기업들이 수많은 나라로부터 세금 낮춰주고 땅 줄 터이니 공장 지어달라는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눈 감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투기 자본조차 재벌을 징치하는 정의(正義)의 사도로 둔갑했다. 현대차그룹의 지배 구조 개편에 반대하는 엘리엇의 주장에 외국은 물론 한국 투자자문사들도 줄줄이 동조했다. 단기적인 주주 이익을 우선하는 엘리엇 논리라면 한국 기업들은 세금과 임금이 모두 낮은 나라로 공장과 본사를 옮겨야 한다. 공장 짓고 고용 늘려야 할 투자 자금은 배당과 주식 소각에 쏟아부어야 한다. 그래서 '경영학의 대가' 로저 마틴 교수는 "단기 이익만 추구할 뿐 회사의 장기 계획, 장기 고용 안정 등에 관심이 없다"고 엘리엇을 비판했다.
재벌을 개혁과 규제, 단죄의 대상으로 본다면 미래를 위한 투자도, 일자리 창출도 점점 쪼그라들 것이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천문학적 세금을 쓰는 정부에서 17년 만에 최악의 실업률을 기록한 역설(逆說)이 발생한 이유이다. 통상 마찰, 금리 인상, 내수 침체, 고령화 등 경제 환경이 험난해지고 있다. 투자 여력이 있는 대기업이 신바람 나게 뛰어야 경제에 피가 돌고 활력이 생길 수 있다. 재벌에도 햇볕정책이 필요하다.
차학봉 기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