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TV나 유튜브를 통해서 자주 보고 듣는 것들중 하나가 우리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에 관한 것이다. 한국인의 조상은 누구인가? 고조선과 부여의 후예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한반도에 집중 분포된 고인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산강유역의 고분과 유물들의 주인은 누구인가? 김해 대성동에서 발굴된 금관가야의 유적에서 우리는 무엇을 짐작할 수 있는가? 많은 관련학자들이 가설을 세우고 증명해가며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관심이 없을 수 없는 주제들이다.
그밖에도 관심이 있는 것은 가문과 선조에 관한 것이다. 족보가 있고 선조들에 대한 이러저러한 기록들이 있지만, 모호한 부분이 많아 무엇이 옳은지 잘 알수 없는 경우도 있다. 700년 내지 2,000년에 이르는 동안 한반도에서 살아온 필자의 집안인 '능성 구씨'는 선대에 어떠한 사람들이 어떻게 집안을 형성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책에서 배우는것처럼, 우리 한국인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궁금해하기도 하지만 김씨, 박씨, 이씨 등 각 집안의 내력에 관한 것들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언어가 북방 우랄알타이어계이지만, 오래전에 갈라져 나오고 중국어 등의 영향을 받아 좀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언어학적으로 그렇하다는 것이고 물리적인 인체의 구성은 북방 우랄알타이계인 터어키·몽골·퉁구스와 더불어 중국 및 남방계와의 결합이 얼마간 이루어졌을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역사속에서 끊임없는 다양한 족속들과의 혼혈가능성은 크지만 주된 줄기는 북방계와 남방계가 7대 3정도로 혼합되어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들 하고 있다. 원래 한반도를 형성하던 고대인들이 남방계일 수도 있는데 수백수천년을 차이를 두고 여러 갈래의 북방계가 내려와 정착했다고 할 수도 있고, 북방계가 순서없이 여러 갈래가 정착하여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약간의 남방계가 이주·결합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우리 선조들은 일찌기 고조선을 형성했고, 그후 부여를 거쳐서 고구려와 백제를 이룩했다. 한편 남방의 신라는 박, 석, 김 세 가문이 왕조를 이루는데, 마지막 왕조를 형성한 김씨는 북방흉노족의 일파인 김일제의 후손으로서 가장 늦게 이주한 터인데, 무덤양식이며 부장품들이 흉노족의 것들과 유사함이 증명되고 있다. 근래에는 소국으로 여겨졌던 가야국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이들의 영토는 경남일원만이 아니라 전라도 일부지역까지 이르렀음이 확인되고 있으며, 무덤양식과 부장품에서 이들이 부여계임이 증명되고 있다. 최근 김해 대성동에서 대단위로 발굴되는 무덤의 양식이며 부장품들이 선비족의 것이냐 부여족의 것이냐 비교연구가 진행되었고, 중국 라마동의 대단위 무덤과 유물군이 선비족의 것이냐 부여족의 것이냐는 논쟁이 있어 왔는데, 라마동이며 대성동의 유적이 모두 부여족의 유물들로 결론이 나는 것 같다.
이 가야는 여러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바다 넘어 많은 나라들과 교역이 이루어 졌음이 소용돌이 모양의 파형동기들이 부장품으로 발견됨으로 인해 유추되기도 하는데, 이 가야국들은 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과 구씨(仇氏)인 왕족들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로 칭성되었다. 가야는 인도와 교류가 컸었는데, '붓다' 즉 부처를 표현하는 한자 불(佛)이 없던 터라 그 당시 비슷한 발음과 의미를 지닌 구(仇)를 썼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때 일부 구씨(仇氏)들은 그대로 구씨(仇氏)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 일가가 고려건국시 큰공을 세우게되고 발음같은 한문자인 구씨(具氏)성을 하사받게 되어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가 돠었다. 이때도 일부 구씨(仇氏)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가 이조 정조때 또한 구씨(具氏)성을 하사받게 되었다. 물론 이부분들은 필자가 유추한 구씨가계도의 한 시나리오이다.
고려건국 300년 후, 구씨(具氏) 시조와 존함이 같아 혼동을 주기도하는 중시조께서 몽골침략을 피해 중국에서 도피하여 주잠(朱潛)일행과 함께 전라도 능주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그 지역에는 이미 많은 구씨(具氏)들이 살고 있었다. 신라말~고려초에 구씨들은 그 지역의 큰 해상세력이었고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공신집안으로 존재했었다. 300년후 구씨 일행이 그 지역에 안전히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제로 중국에서 왔든, 그 지역의 구씨청년이었는데 주잠의 사위가 되었든, 그 지역에 구씨가문이 융성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 당시의 내용들이 각각 구전·기록되다가 명확한 사실규명없이 족보에 기록되어 시조와 중시조이어야 할 분이 같은 이름의 같은 분으로 오해되어 앞뒤 않맞게 굳어져 온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도 필자의 유추로 보면 된다.
요즈음 DNA분석을 통해 신라·가야의 왕족을 형성했던 가문들이 누구일지를 분석해본 분이 있는데,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2000년 이상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집안들중 한그룹은 경주김씨·안동김씨·광산김씨이고, 또 한그룹은 박씨, 김씨, 유씨, 최씨 등인데 이에 구씨도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광범위한 조사쌤플이 이루어졌는지는 알수없지만 이러한 기사들을 보고 필자도 유추의 날개를 펼쳐 본것이다. 요즈음은 DNA염기서열분석이 매우 정교히 분석되고 부계·모계의 유전자분석이 가능하기에 선조들에 대한 궁금증이 좀 더 명확히 규명될수도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