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본기(百濟本紀)] 수수께끼】(6).hwp
【[백제본기(百濟本紀)] 수수께끼】(6)
[三國史記卷第二十四(삼국사기권제24)百濟本紀第二(백제본기제2)<仇首王(구수왕)>]
○<仇首王>[或云<貴須>.], <肖古王>之長子, 身長七尺, 威儀秀異. <肖古>在位四十九年薨, 卽位.
구수왕[혹은 귀수라고도 한다.]은 초고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신장이 7척이고 풍채가 특이하였다. 초고왕이 재위 49년(214)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28. <구수왕(仇首王)> 수수께끼】
[백제본기(百濟本紀)]에서는 <구수왕(仇首王)>도 출생연월일(出生年月日)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런데 <열도사서(列島史書)> [고지기(古事記)]와 [니혼쇼기(日本書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그리고 곳곳의 <고분(古墳)>과 <신사(神社)>의 기록(記錄)에는 <구수왕(仇首王)>과 그 아버지 <초고왕(肖古王)> 이야기가 [백제본기(百濟本紀)]보다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면 <열도(列島)>의 건국시조(建國始祖) 가운데 하나인 <스사노오노미고도(素戔鳴尊)>가 <신라(新羅)> 땅 <소시모리(曾尸茂梨)>에서 <열도(列島)>로 건너가 <이즈모쿠니(出雲國)=지금의 시마네겐(島根縣)>을 정복(征服)했습니다.
[고사기(古事記)]에는 <스사노오노미고도(須佐之男命)>가 <이즈모쿠니(出雲國)=지금의 시마네겐(島根縣)>에 내려가 <야마타오로찌(八俣大蛇)>를 퇴치하고, 그 곳 <수가(須賀)=속고(速古)>에 살면서 <오호쿠니누시노가미(大國主神)> 등 여러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호쿠니누시노가미(大國主神)>는 <도또리현(鳥取縣)>의 <야카미(八上)> 공주(公主), <니이가타(新潟)>의 <누나가와(沼河)> 공주(公主), <후쿠오카(福崗)>의 <타기리(多紀理)> 공주(公主) 등등과 결혼하여 자손을 남겼습니다.
<스사노오노미고도(素戔鳴尊)>가 AD.166.에 <열다라(十濟)>에 돌아와 <초고대왕(肖古大王)>이 될 때 <이즈모쿠니(出雲國)>를 물려받은 그 아들 <오호쿠니누시노가미(大國主神)>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에 장대를 끼운 광창(廣槍), <야찌보코(八千矛)>로 <퍌도(八島)>를 정복(征服)하여 <오사카(大阪)>로 진출(進出)하여 <화전(和田)>에 <대국성(大國城)>을 짓고 다스렸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스사노오노미고도(素戔鳴尊)>가 머물렀다는 <신라(新羅)> 땅 <소시모리(曾尸茂梨)>는 <소의 머리> <우수주(牛首州)>로써, <신라(新羅)>와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가 각축(角逐)했던 땅, 지금의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 지방입니다.
처음 <신라(新羅)> 땅이었던 <소시모리(曾尸茂梨)=우수주(牛首州)> 성주(城主)로 있었던 <신라(新羅)> 아찬(阿湌) <길선(吉宣)>이 <열다라(十濟)>로 망명(亡命)한 사건이 AD.155.에 있었습니다.
[백제본기(百濟本紀)]와는 달리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신라(新羅)> 아찬(阿湌) <길선(吉宣)>의 망명(亡命) 기사(記事)가 10년 늦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열도사서(列島史書)]를 종합해 보면, <졸본부여(卒本夫餘)> 시조(始祖) <고두막한(高豆莫韓)> <동명성왕(東明聖王)>의 후예(後裔) <구태왕(仇台王)>의 아들 <초고대왕(肖古大王)>과 그 아들 <구수대왕(仇首大王)>의 수수께끼가 풀어집니다.
<초고대왕(肖古大王)>이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우하량(牛河梁)>에서 <한반도(韓半島)>로 진출(進出)하여 AD.155.에 <신라(新羅)> 아찬(阿湌) <길선(吉宣)>을 정복(征服)하여 <우수주(牛首州)=지금의 강원도(江原道) 춘천(春川) 지방>를 점령(占領)했다가, 다시 AD.160.에 <열도(列島)로 건너가 지금의 <시마네겐(島根縣)>에 있던 <호스마쿠니(秀眞國)>를 정복(征服)하여 <이즈모쿠니(出雲國)>를 세우고, <스사노오노미고도(素戔鳴尊)>가 되어 다스리다가, AD.166.에 <열다라(十濟)>로 돌아오면서 그 아들 <구수대왕(仇首大王)>에게 <열도(列島)>를 물려준 것입니다.
<초고대왕(肖古大王)>과 그 아들 <구수대왕(仇首大王)>이 <열도(列島)>에서 낳은 자손(子孫)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AD.214년에 <초고대왕(肖古大王)>이 죽자, <열도(列島)>에 있던 <오호쿠니누시노가미(大國主神)>가 <열다라(十濟)>로 돌아와 <구수대왕(仇首大王)>으로 즉위(卽位)했습니다.
○三年, 秋八月, <靺鞨>來圍<赤峴城>, 城主固拒, 賊退歸. 王帥勁騎八百, 追之, 戰<沙道城>下, 破之, 殺獲甚衆.
3년(216) 가을 8월, 말갈이 적현성에 와서 포위했으나 성주가 굳게 수비하니 적이 퇴각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여, 사도성 밖에서 격파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병이 많았다.
○四年, 春二月, 設二柵於<沙道城>側, 東西相去十里, 分<赤峴城>卒, 戍之.
4년(217) 봄 2월, 사도성 옆에 두 곳의 목책을 세웠다. 동서의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의 군사를 나누어 이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五年, 王遣兵圍<新羅><獐山城>, <羅>王親帥兵, 擊之, 我軍敗績.
5년(218),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장산성을 포위했다.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七年, 冬十月, 王城西門火. <靺鞨>寇北邊, 遣兵拒之.
7년(220) 겨울 10월, 왕성 서문에 화재가 났다.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략하므로 군사를 보내 방어하였다.
○八年, 夏五月, 國東大水, 山崩四十餘所. 六月戊辰晦, 日有食之. 秋八月, 大閱於<漢水>之西.
8년(221)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40여 곳의 산이 무너졌다.
6월 그믐 무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한수 서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九年, 春二月, 命有司修堤防. 三月, 下令勸農事. 夏六月, 王都雨魚. 冬十月, 遣兵入<新羅><牛頭鎭>, 抄掠民戶. <羅>將<忠萱>領兵五千, 逆戰於<熊谷>, 大敗, 單騎而遁. 十一月, 庚申晦, 日有食之.
9년(222) 봄 2월, 관리에게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게 하였다.
3월, 명령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여름 6월, 서울에 물고기가 비와 함께 떨어졌다.
겨울 10월, 신라의 우두진으로 군사를 보내 민가를 약탈하였다. 신라 장수 충훤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웅곡에서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대패하고, 단신으로 도망하였다.
11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一年, 秋七月, <新羅>一吉湌<連珍>來侵, 我軍逆戰於<烽山>下, 不克. 冬十月, 太白晝見.
11년(224) 가을 7월, 신라의 일길찬 연진이 침입하였다. 우리 군사는 봉산 아래에서 그들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겨울 10월,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十四年, 春三月, 雨雹. 夏四月, 大旱, 王祈<東明廟>, 乃雨.
14년(227) 봄 3월,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어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곧 비가 내렸다.
○十六年, 冬十月, 王田於<寒泉>. 十一月, 大疫. <靺鞨>入<牛谷>界, 奪掠人物. 王遣精兵三百, 拒之. 賊伏兵夾擊, 我軍大敗.
16년(229) 겨울 10월, 왕이 한천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말갈이 우곡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은 정예군 3백 명을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十八年, 夏四月, 雨雹, 大如栗, 鳥雀中者死.
18년(231) 여름 4월, 밤알 크기의 우박이 내렸다. 이에 맞은 새들이 죽었다.
○二十一年, 王薨.
21년(234), 왕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