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百濟의 築城術
백제는 처음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고, 이어서 河南慰禮城 혹은 漢城을 도읍으로 하였다고 '三國史記'는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때가 서기 5세기 후기까지였다. 이후 熊津(오늘날 公州)과 泗 (오늘날 夫餘)를 도읍으로 삼았다. 어떤 학자들은 오늘날 益山 지역에 別都를 경영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라가 줄곧 한 곳에서 도읍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외세의 압력에 의하여 도읍을 옮기곤 했다. 국가성립기에는 이웃한 낙랑군(樂浪郡)과 말갈(靺鞨)이라 불리던 세력에 의하여 도읍이 불타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군현(漢郡縣)을 몰아낸 뒤에는 고구려와 대치한 상황에서 백제는 출성을 통해 방어력을 향상시킬 필요성이 컸다.
그런만큼 한성시기의 백제가 잦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력을 키우려 축성을 해온 것은 곧 백제의 성장과정인 동시에 발전과정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강과 임진강 유역에 자리잡은 여러 옛 성터들은 백제가 국가로서 성장하던 과정에서 축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가장 규모가 큰 중심적인 거승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이러한 강안(江岸)에 위치한 성들은 주변의 산 위에 있는 성들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커다란 방어망을 형성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한편 백제 후기에 이르면 돌로 성벽을 쌓는 안팎겹쌓기(內外來築)와 바깥면을 돌로 수평잡아 굄쌓기를 하고 안쪽을 돌부스러기와 흙으로 채우는 방법(外築內托)이 확인되고 있다. 축조기법의 다양한 발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발전된 축성술은 백제가 멸망한 다음 통일신라로 이어지고, 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성곽의 원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한편 백제의 축성기술은 직접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의 가장 오랜 역사서인 '日本書紀'에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나, 당 연합군에게 국도를 함락당한 뒤 많은 유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대마도와 壹岐, 築紫에 방어병력과 봉수대를 배치하고 水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또 서기 665년 8월에 달솔(達率)(백제의 제2관등) 답발춘초를 보내어 長門國에 성을 쌓게 하고 역사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를 보내어 축자국의 大野, 椽이라는 두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오늘날 대마도에 남아있는 가네다(金田)성과 규슈에 있는 오노조(大野城), 미즈키(水城), 기이조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백제인이 주축이 되어 축조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특별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 성들의 축조에 백제의 지배층이 관련되어 있다는 기록은 현재 성곽의 배치관계와 축조기법 뿐만 아니라 거기서 출토되는 그릇조각이나 기와조각이 부여에서 보는 것과 동일하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2) 百濟의 城郭
백제시대 성곽은 당연히 도읍지였던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풍납동(風納洞)토성(土城)은 서울 강동구 천호대교 아래쪽에 남아있는 평지토성으로 그 둘레가 4Km에 이른다. 현재 동쪽 성벽에는 몇 군데 성문 터가 남아있으나 한강에 면한 성벽은 거의 유실됐다. 이 토성을 백제 초기 도읍인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몽촌토성(夢村土城)은 현재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 목책유구와 토성 외곽에 하천을 파고 한강물을 끌어댄 해자(垓字)의 흔적이 발견되어 하남 위례성의 주성(主城), 곧 궁궐이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타원형의 내성과 그 바깥에 달린 외성으로 나눠져 있으며 총 둘레는 2천2백85m로 8천명 내지 1만명이 살 수 있는 규모다.
광주(廣州)이성산성(二聖山城)은 풍납동 토성, 몽촌토성과 함께 도성 권역에 들어있다. 총 둘레 1천9백25m로 내부면적은 5만평이다.
아차산성(阿且山城)은 풍납동 토성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광장동이 있다. 풍납동 토성과 함께 도성과 함께 도성의 북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주(公州)공산성(公山城)과 부여(夫餘)의 부소산성(扶蘇山城) 및 나성(羅城)은 뛰어난 방어조건을 갖춘 백제 후기의 도성이었다. 여기에 부여 북쪽에 있는 증산성(甑山城)이나 금강하류 대안에 축조된 성흥산성(聖興山城) 등은 모두 부소산성을 겹겹이 둘러싸 보호하는 외곽 방어시설 역할을 했다.
3) 사비성의 構造
백제가 泗 城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AD538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사비성은 漢城(서울)과 熊津(공주)을 거쳐 3번째 도읍으로 자리잡은 도성이다. 오늘날 충남 부여군 부여읍 일대로 압축되고 있다.
사비성은 扶蘇山城과 平地城이 연결되어 둘러쳐진 羅城의 개념을 갖는다. 부소산성을 제외한 나성은 현재의 부여시가지 주위를 에워싼 야산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泗 城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지역에 있었던 백제때의 도성이다. 백제 도읍자체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백제가 협소한 熊津(공주)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포용한 땅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AD538년(성왕 16년) 봄이다. 백제는 사비로의 천도를 국가체제 재정비의 시기로 삼았다. 북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산이 둘러쳐져 외적 방어에 더할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 도읍을 사비로 옮긴 까닭을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해상교통시 유리한 성이 고려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잇다. 사비성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백30년간의 수도가 되었다.
사비도성은 산성으로서 扶蘇山城과 平地城으로서의 羅城으로 이루어졌다. 부소산성은 부소산을 양쪽 머리가 낮게 감싸 두르고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여 半月城이라고도 불렀다. 이밖에 사비성, 所夫里城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4. 백제의 병기
1) 백제의 철기문화
백제는 일찍부터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사신에게 철제 40장을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재 일본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이 신물(神物)로 여기는 가운데 소장하고 있는 칠지도(七支刀) 역시 백제가 일본에 준 단철(鍛鐵)의 칼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역시 근초고왕때 일이다.
그리고 漢城시대(? - ?년) 백제 유적인 서울 성동구 구의동 고분출토 쇠도끼와 철촉을 분석한 결과 실제 高炭素鋼으로 밝혀졌다. 이렇듯 백제는 漢城시대에 이미 철기문화를 꽃피웠다.
▣부소산성 출토의 마름쇠▣
철기문화는 동서나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융성을 좌우한다. 정복국가에서 무기는 철기문화의 꽃이기도 하다.
사비성(泗 城)옛터인 충남 부여읍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얼핏 불가사리처럼 보이는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철기는 마름쇠(鐵 藜)라는 일종의 방어용 무기였다 가시로 이뤄진 마름쇠는 어느 방향으로 놓아도 첨예한 가시 하나가 위쪽을 향해 세워지도록 고안되었다. 그 중에 가장 큰 가시 하나에 구멍이 뚫려 여러개의 마름쇠를 끈으로 연결할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도 이 마름쇠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기막힌 방어용 무기다. 마름쇠를 끈으로 연결, 성밖에 둘러놓으면 가시덩굴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성벽 위에서 던지면 적을 살상하거나 쫓아버리는 무기 구실을 한다"(삼국사기). 마름쇠는 부소산성 출토품이 유일한 실물이다.
▣공격용 무기▣
활과 화살, 쇠뇌(弩)는 공격용 무기이자 원거리 무기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 유물로 전남 나주 신촌리 9호고분 출토품이 있다.
▣환두대도(環頭大刀)▣
칼자루 뒤끝의 둥근 고리 안에 장식무늬가 있는 환두대도 중 나주 신촌리 9호고분에서 나온 삼엽문 환두대도는 특히 유명하다. 철지에 금판을 씌운 타원형 병두고리의 중심 장식이 금동삼엽형으로 되어 있다. 손잡이에는 고기비늘무늬를 돋친 은판으로 감았다. 또 칼자루 끝 고리에 타출문의 돋친 은판을 씌우고 고리 안에는 봉황의 머리를 장식한 고리칼(단봉환두대도 : 單鳳環頭大刀) 역시 이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이밖에 무령왕릉 출토품이 있다. 타원형 고리표면에다 용을 새기고 고리안에서 여의주를 입에 문 용머리를 장식한 고리칼(금동장환두대도 : 金銅裝環頭大刀)이다.
▣동물뼈제조 갑옷▣
갑옷이라고 하면 흔히 쇠를 연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백제인들은 쇠가 아닌 동물의 뼈를 갈아서도 갑옷을 만들었다. 몽촌토성출토품 뼈비늘갑옷 골제찰갑(骨製札甲)이 그것이다. 이렇듯 백제인들이 입었던 갑옷의 윤곽은 밝혀지고 있으나, 투구와 방패가 발견되지 않았다. 본래 갑옷(甲)과 투구(胄)는 일습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두가지를 붙여 갑주(甲胄)라는 말을 쓰고 있다.
'삼국사기'는 갑옷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금갑을 비롯해 금휴개(金 鎧), 명광개(明光鎧)라는 갑옷 이름이 기록되었다. 이들 갑옷은 신라 고분인 금관총(金冠塚)에서 나온 금동갑옷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한다.
5. 百濟의 藝術
1) 百濟의 技術人들
신라의 기술은 본래 백제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신라의 호국사찰 황룡사(皇龍寺)9층탑을 제작한 것은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阿非知)였다. 신라는 삼국통일 직후 왕궁 옆에 못을 파서 안압지를 만들었는데, 그 의장(意匠)이나 기법(技法)은 모두 백제의 궁남지(宮南池)를 본뜬 것이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武王35년(634)3월에 궁성 남쪽에 못을 박고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여 궁남지를 만들었는데 못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속에 인공섬을 만들었는데 方丈仙山에 비겼다고 한다. 뒤에 못가에 望海樓를 지어 국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연회를 즐겼다.
日本측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실로 많은 백제 기술자들이 등장한다. 6세기 초 이래 백제로부터 일본조정에 유교경전이나 의학(醫學), 역학(易學), 역학(歷學)을 지도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파견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뒤로는 사찰건물이나 불상, 기와, 향로를 제작하기 위해 노반박사( 盤博士), 와박사(瓦博士) 등이 파견되었다. 현재 알려져 있는 수많은 금동제 불상이나 武寧王陵에서 나온 각종 제품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백제의 금속공예 기술은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서기 588년 일본왕실의 외척으로 권세가였던 소가(蘇我)씨가 법흥사(일명 飛鳥寺) 건립에 착수했을 때는 실로 많은 백제의 일급 기술자들이 초빙되어 갔다. 당시 일본에 건너간 노반박사 白昧淳은 덕장(德將)이란 관등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문헌기록을 통해서 확인되는 유일한 백제의 금속공예 기술자이다. 한편 '元興寺 가람연기변류기자재장'에는 그를 '누盤士' 白昧淳이라 표기하였는데, 이는 그가 다름아닌 누금세공(樓金細工)기술자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누금세공이란 금사(金 )와 금립(金粒)에 금판(金板)을 붙이는 방법이다.
▣노반박사는 금속공예의 明匠▣
우리는 오랫동안 일본의 기록을 통해 백제의 기술과 공장(工匠)들의 모습을 가늠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이루어진 고고학 발굴에서 그 생생한 백제 기술의 실상을 비로소 가늠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케이스의 하나가 지난해 연말 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라 할 수 있다. 세기적 보물이기도 한 능산리 금동향로의 출현은 백제의 기술과 우선 노반박사(노盤博士)의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등과 같은 일본쪽 기록에 보이는 백제 최고 기술집단의 하나인 노반박사는 금속공예의 명장이고, 바로 능산리 금동향로를 제작한 기술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활동은 불교미술에도 큰 영향을 끼쳐 불상이나 탑의 상륜부(上輪部) 등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일본 나라(奈良)의 이소노카미(石上)신궁에 비장된 백제전래품 七支刀는 백제의 금속공예술이 이미 상당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새김글씨를 금으로 상감한 4세기경의 칠지도는 금속의 정련과 주조기술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6-7세기경 사비(泗 )시대 백제의 기술은 능산리 금동향로를 만들어 낼 만큼 더욱 발전되었다. 심미안적 세공에 의해 제작된 틀, 소재의 정선, 주조술, 가공, 도금술이 어울려 이룩한 걸작의 종합금속예술품이 능산리 금동향로인 것이다.
그리고 瓦博士 역시 넓은 영역에 걸쳐 활동한 공장이다. 단순히 건축물의 지붕을 덮는 기와 뿐 아니라 테라코타불상, 토기 제작에 관여했을 것이다. 특히 삼국 가운데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녹유(錄釉)계통의 토기를 만들어 낸 이들도 바로 와박사로 보여진다. 녹유토기는 후대 고려청자(高麗靑瓷)의 모태를 어느 정도 이루었고, 사비시대 백제의 대가람이었던 益山 彌勒寺 터에서 발견되고 있다.
2) 百濟의 建築
1.고분(古墳)
백제는 한성시대 초기에는 고구려의 기단식 적석총(基壇式 積石塚)을 만들었고 토광묘(土壙墓), 옹관묘(甕棺墓), 석실분(石室墳)이 사용되었다. 공주 지역의 고분은 배수로가 있는 전축분(塼築墳)과 석실분이 가장 대표적인 고분이며, 석실분은 백제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여기서 백제 석실고분은 벽이 안으로 좁혀지고 천정(天井)이 궁륭형(穹 形)으로 활처럼 굽어져서 위에 개석(蓋石)을 덮은 것이 많고 모두 현실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현실이 장방형(長方形)을 이루고 제 고분은 전실(前室)의 아담한 현실(玄室)로서 부드러운 곡선을 이용하고 중국 남조문화를 진취적으로 받아들여 백제인의 창의를 더하여 전축분(塼築墳)을 만들었다.
▣방이동 백제고분군(芳荑洞 百濟古墳群)▣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나 그 도읍지의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방이동 고분군을 비롯하여 가락동, 석촌동 등지에 산재해 있는 고분은 이 근방에 백제의 도읍지가 위치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방이동 고분군에는 백제계의 왕이나 왕실에 가까운 상류층의 분묘로 추정되는 8기의 고분이 나지막한 야산에 산재해 있는데, 4기(제 1, 2, 3, 6호분)는 서쪽 언덕 경사면에, 4기(제 7, 8, 9, 10호분)는 동쪽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초기 한성백제시대의 고분인 석촌동의 적석총(積石塚)과 토광묘(土壙墓), 옹관묘(甕棺墓) 등 봉토분은 낮은 대지에 자리잡고 있고, 방이동 고분과 같은 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은 구릉의 경사면에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인 횡혈식 석실분인 제 1호분의 내부를 살펴보면 석실은 모양이 고르지 않은 포갠 돌을 쌓아서 축조하였는데, 현실의 4벽은 바닥에서 2-3단은 곧게 쌓고 그 위부터는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아서 천정부를 좁히고 큰 판석 1매를 덮어 궁륭형 천장(窮 形 天障)을 이루게 하였다. 봉문 남쪽에서 석실안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연도가 있고, 현실 바닥 중앙에 마련된 시체를 안치하는 시상대는 포갠 돌을 2-3단 쌓아서 축조하였으며, 시상대를 제외한 전면에 작은 냇돌(河川石)이 깔려 있다.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石村洞 百濟初期積石塚)▣
백제시대 초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 적석총은 백제가 가장 왕성했던 4세기경의 문화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사적 제 243호로 지정된 것은 3호분과 4호분으로서 기원전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형식인 기단식 적석총(基壇式 積石塚)이다. 특히, 4호분의 축조방식은 고구려의 적석총과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백제전기에 상호간에 문화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3호분의 규모는 옛 고구려 지역이었던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보다 더 큰 것으로 고구려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유역에 백제를 세웠을 때의 절대권력자의 무덤으로 보인다.
3호분과 같은 왕릉급 고분이 있는 반면 소형 토광묘와 같은 일반관리나 평민의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있어 서로 다른 시기의 무덤들이 중복된 경우도 많이 있어 석촌동 일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계급이나 신분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사용한 고분군 지역으로 볼 수 있다.
▣고분 내부구조 다양▣
백제시대의 고분역시 도읍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그리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사비시대 고분들은 다양한 묘제를 가지고 출현했다. 널무덤(土壙墓)을 비롯, 독무덤(甕棺墓), 화장무덤, 구덩식 돌널무덤(橫穴式石室墳)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백제후기 사비시대 도읍지였던 부여지역에서는 굴식돌방무덤이 특히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백제불교의 일본 전파를 뚜렷이 입증하는 화장무덤과 더불어 여러 점의 뼈그릇(藏骨容器)도 남겨놓고 있다.
사비시대의 굴식 돌방무덤은 언덕 위나 언덕비탈, 언덕 앞자락을 입지로 잡아 축조했다. 또 산기슭이 부채꼴로 펼쳐진 지세를 이용한 흔적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이들 능산리 굴식 돌방무덤의 내부구조는 신라, 가야의 고분보다 다양하다.
백제 굴식 돌방무덤들은 몇가지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의 예가 주검을 안치한 널방(玄室)의 평면이 장방형을 이룬 가운데 사방의 벽을 돌멩이와 막돌을 포개 안쪽으로 기울게 쌓은 형식이다. 이때에 천장은 큰 널돌(板石) 4-5장을 덮어 마감하고 널길은 남벽 동쪽으로 치우쳐 터놓았다. 이 형식의 대표적 고분유적으로 부여 능산리 할석총(割石塚)이 있다.
능산리 벽화고분은 널방의 사방 벽면과 천정을 1장짜리 화강암, 편마암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 거대한 판돌을 물갈음한 뒤에 세우고 나서 그림을 그렸다. 벽면에는 사신도(四神圖), 천정에는 비운(飛雲)과 연화도(蓮花圖)를 그려넣은 이 벽화고분 바닥에는 장방형 벽돌을 깔았다. 벽돌을 가지고 널받침도 만들었다. 한마디로 죽음의 세계를 화려하게 가꾸어준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부여 중정(中井)리에서는 부식된 암반 중심부에 지름과 깊이가 각각 30cm정도인 구덩을 파고 안에 뼈단지를 묻은 다음 돌로 덮은 뼈단지 무덤도 발견되었다. 부여 염창리에서도 비슷한 뼈단지가 출토되는 등 사비시대 도성 언저리의 여러 독무덤 존재는 흥미를 끄는 무덤유적이기도 하다.
특히 제사유적설(祭祀遺蹟說)이 있는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奉萊山香爐)로 출토지점 바로 옆에 능산리 고분군이 있어 두 유적은 같은 역사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