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減膳撤樂[감선철악]이란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근신하는 뜻에서
임금의 밥상에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을 폐하던 일을 말하며 나라의 변고란 천재지변으로
태풍, 홍수, 호우, 폭풍, 해일, 폭설, 가뭄, 지진 등 자연계의 변화로 받는 재난을 말한다
인재가 아닌 자연재해에도 임금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백성의 안위를 살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모든 것을 다 가졌을 것만 같은 조선시대 왕도
자신의 존재기반이 되는 근본은 어디인지를 늘 생각하였다는 뜻이다
조선의 재해재난 전래이야기-바람
풍랑
1.박포장
박화 포장은 훈련도감의 군졸로 위인은 성실하였지만 얼굴이 매우 못 생겨서 궁상이라고 조롱을 받았다. 그는 술을 퍽 즐겼으나 가난하여 마음대로 취할
도리가 없었다. 언제나 군문에서 요미를 타면 곧장 술집으로 달려가 술 한 잔을 받아가지고 혼자 골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꽉 잠그고 몇 날 며칠을 새우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의 아내가 수상하게 생각하여 하루는 문구멍으로 들여다보니, 처음엔 두 손을 모우고 엄숙히 앉아 술을 앞에 놓고 한참이나 음미하며 차마 들고 마시지
못하는 것이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껄껄 웃고는 풀쩍풀쩍 뛰어가서 두 손으로 술대접을 받치고 쭉 들이키는 것이었다.
안주도 먹지 않고 흥치며 일어나서 무릎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다가, 금방 돌아와서 몸을 구부리고 동이에다 병에 물을 기울여 쏟듯 가는 물결을
일으키며 마신 술을 토해내는 데 먼저만큼 동이에 차서 술이 조금도 축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윽고 다시 아까처럼 마시고 토하기를 수십 번이나 반복하니
해가 저물고 밤이 이미 새벽이었다. 이튿날 아내가 곡절을 물었더니,
“내가 주량이 워낙 커서 졸지에 배를 채우기 어렵다네. 한 번 꿀꺽 마시고 나면 갈증을 참을 수 없어, 부득이 그렇게 마셨다가 토해냈다가 하여 아쉬운 대로 목을 추기고 흥을 돋우는 것이지.”
그때 해로로 중국 사신이 떠나는데, 박씨는 포장으로 끼이게 되었다. 대개 옛날엔 중국을 해로로 내왕했는데, 상사·부사·서장관이 각기 배를 따로 타고 표자 문서도 각기 일부씩 소지하여 불의의 사고에 대비했다. 가령 고려 때 상사 홍 사범이 익사하고 서장관 정 몽주가 홀로 살아온 것이 그것이다.
사행선이 장연·풍주 등지에서 출발하여 적해와 백해를 건너는데, 그 사이 수천 리에 허다한 도서를 거치고 바람과 조수를 보아 항로를 택하기 때문에, 항해 중의 필요한 물건과 중국 가서 무역해 올 밑천에 기예 공장 등 세 사람에 이르기까지 두루 구비하여 선적하게 된다.
사행선이 떠나매 지방관이 풍악을 크게 잡혀 전송하고 친족들이 뱃전을 잡고 울음으로 보내는 것이다. 지금 기악에 타루악·선리곡이 있으니, 그때 전해오는 곡이다. 박포장은 상사의 배에 오르게 되었다.
동승한 수행원들은 각기 가산을 기울여 중국 무역을 해 올 셈으로 모두 꾸러미가 풍성했으나, 박 포장만은 빈천한 사람인지라 홀로 냉냉하게 빈 몸뿐이어서 동행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배가 넓은 바다로 나가자 파도가 갑자기 크게 일어 바야흐로 위험이 눈앞에 있었다. 도사공이 말하기를,
“일행 중에 불길한 사람이 있는 때문이오. 이런 위기에 당해서는 상하를 물론하고 각기 입은 옷 한 가지씩을 벗어내야 합죠.”
모두들 그 말을 좇았다. 사공이 그 옷을 차례로 물속에 던지니, 박포장의 옷에 이르러 유독 물에 잠기었다.
“한 사람 때문에 배에 탄 사람 전부 수액을 당할 수 있소· 원컨대 속히 물속에 집어넣어서 온 배의 생명들을 구하십시오.”
사공이 말한다. 상사는 박 포장이 죄 없이 죽음에 나아가는 것이 가련하여 한참 동안 묵묵히 생각하다가,
“이곳 가까이 섬이 있느냐?”
“조그만 섬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읍지요.”
사공이 대답하자, 상사가 뱃머리를 돌리라 명하여 조그만 섬에 배를 대었다. 박 포장을 섬에 내려놓으려는데, 그도 차마 못할 노릇이었다.
“어찌 사람을 죽을 땅에다 내버릴 수 있겠느냐? 풍세가 잠잠해지니 굳이 안 그래도 되겠다.”
하고 닻을 들라고 명했다. 그런데 배가 빙빙 맴돌면서 나아가지 못 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말하였다.
“지금 이 배 안에 틀림없이 수액을 당할 사람이 있소. 시험해 봅시다.”
한 사람씩 하선을 시키는데, 여전히 위태위태 맴돌다가 박 포장에 이르러 자유로이 움직였다. 그래서 만부득이 서로 의논하여 식량·의복·솥·도끼·칼 등속을
내려 주고는 박 포장을 섬에 남겨놓고 떠났다. 회로에 꼭 들려 그를 맞아 함께 돌아가겠음을 언약하고 서로 눈물로 헤어진 것이다.
박포장은 고도에서 혼자 풀로 움막을 얽어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조개·소라를 줍고 청개구리·메뚜기를 잡아서 배를 채우며 지냈다. 염라대왕
외손자라도 꼼짝없이 절해고도의 마른 뼈다귀가 되겠구나 싶었다.
항상 밤에 잠을 못 이루고 귀를 기울여 듣노라면, 매일 새벽 바람소리가 섬으로부터 산을 흔들며 언덕을 스쳐 바다로 나갔다가 해가 지면 소리가 바다로부터 물결을 일으키며 섬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주 이상히 여겨 그때를 타서 나무숲에 몸을 숨기고 엿보았더니, 한 마리 엄청나게 큰 구렁이였다. 대들보 같은 몸체에 길이가 몇 백자나 될지 꿈틀꿈틀하는 괴물이 눈깔을 이글이글 번득이며 굴속에서 기어 나와 곰·사슴·멧돼지 등을 잡아 삼키고 바다로 들어가서 고기류·거북류 등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것이 아닌가. 괴물이 다니는 길로 도랑이 나서 족히 배를 용납할 지경이다.
박 포장은 칼을 예리하게 갈아서 괴물이 다니는 길목 곳곳에 날을 위로하여 묻어두고, 주변의 대숲을 전부 베고 밑둥을 뾰쪽이 깎아놓았다. 황혼에 괴물이
바다로부터 나와 그곳을 통과하다가 주둥이에서 꼬리까지 칼날에 찢어지고 대 끝에 찔려서 주기·낭간·화제 등속이 쏟아져 나와 골짜기에 흩어졌다.
며칠 지나자 비린내가 숲에 진동하고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보니 커다란 이무기가 숲속에 죽어 있다. 괴물의 내장을 들어내니 한 치가 넘는 반짝이는 보물들이 몇 천 개가 될지 몰랐다. 풀을 엮어 싸서 한 말 부피로 대여섯 섬을 만들어 헌 옷가지로 덮어 두었다. 배 돌아오기를 기다린 지 반 년이 흘렀다. 문득 큰 배가 돛을 달고 바다로부터 다가와서 웨치기를,
“박 포장! 박 포장!”
곧 중국을 다녀서 돌아가는 사행선이었다. 서로 손을 잡고 외로하며 배에 태웠다. 동행한 사람들은 중국의 남금·화패·문단·채금 등속을 사서 배에 가득 싣고 돌아온 것이다. 박 포장은 하는 말이,
“여러분은 모두 중국에서 값진 물화를 얻었는데, 나 홀로 고도에 떨어져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 말았으니, 이게 다 운수지.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처자식을 대할지. 섬에서 하릴없이 바닷가에 동글동글한 자갈을 주어 모았는데, 혹시 아내가 상을 고이고 베틀을 받치며 길쌈하는 데 쓰일까 싶소.”
하고 대여섯 섬의 꾸러미를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으나, 한편 불쌍히 여겨졌다. 돌아와서 그것을 시장에 팔았더니, 값이 수백만 냥이어서 박 포장은 동방의 갑부가 되었다고 한다.
2.최척전
전라도 남원에 최척이란 소년이 있었다. 일찍이 모친을 잃고 부친과 같이 서문 밖에 있는 만복사 동쪽에서 살았다. 최척은 부친의 분부를 받들어 부친의 옛날 친구인 성남의 정 상사를 찾아가서 수학을 한다.
하루는 독서를 하다가 시경에 있는 표유매의 미장을 써서 창틈으로 넣어 주는 쪽지를 받아 보고 마음이 들뜬다. 최척은 공부를 파하고 문 밖에 서 있는
청의한 여자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물어보니, 자기는 서울에 살다가 왜란을 피하여 정 상사의 집에 와 있는 이경신의 딸 옥영 소저의 시비 춘생이요,
이 낭자의 분부를 받고 아까 넣어드린 쪽지에 대한 화답시를 받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최척은 그 여비에게 화답의 시를 써 주고 부친을 졸라 정 상사의 집에 가서 청혼하도록 하나, 옥영의 모친 심씨는 최척이 가빈하다고 하여 거절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옥영은 부자하고 어진 선비면 좋겠지마는, 부자이나 어리석은 선비한데는 절대로 출가하지 않겠다고 하며 모친을 졸라 최가에 구혼해
달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최척과 옥영은 결혼을 하고, 오는 가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다.
이 때, 전에 참봉을 지낸 변 토정이란 선비가 의병을 일으켜 영남으로 왜군을 치러 갈새, 의병장은 궁마에 능한 최척을 뽑아 의병을 삼는다. 최척은 전중에서 결혼 날을 맞았으나 여가를 얻지 못하여 그대로 보냈으며, 옥영도 최생이 종군한 후로 돌아오지 않으므로 하여 결혼날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하루하루를 수심으로 보낸다.
이러할 때 이웃에 사는 양성을 가진 부자가 옥영의 자색을 듣고 구혼할 새, 심씨가 매파의 감언을 듣고 승낙하니, 옥영이 알고 모친을 간하다가 듣지 않으매 목을 매어 자살한다. 심씨가 자살한 딸을 구출하고 나서는 양가의 혼사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으니, 옥영도 안심하고 최생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이러한 사실을 부친의 편지를 받고 알게 된 최척이 진중에서 고민하다가 득병하여 중태에 빠지니, 의병장은 할 수 없이 최척을 집으로 돌려보낸다. 집으로
돌아온 최척은 병이 나으매, 정가의 통지하여 옥영과 결혼식을 올리니, 두 연인의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하랴마는, 옥영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한 번 보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최척은 아내를 얻은 후로 가산이 넉넉해졌으나 자식이 늦어감을 근심하던 끝에, 만복사에 올라가서 아들 낳기를 발원하는데, 부처님이 나타나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몽석’이라 했다. 최척과 이 부인은 아들을 얻고서는 더욱 사랑이 깊어졌고, 달 밝은
밤이면 시를 지어 주고 받으며 부부의 사랑을 한껏 즐긴다.
정유년 8월에 왜적이 남원을 함락할 새, 사람들이 다 산중으로 도망하여 숨는데, 최척의 일가도 지리산 연곡으로 피란하였다가, 최척이 양식을 구하러 간
사이에 왜적이 쳐들어와 피난민을 다 죽이고, 한 늙은 왜구가 이 부인을 잡아간다. 이에 최척은 부모와 처자를 다 잃고 방황하던 끝에 명ㄴ라 장수 여유문을 만나 그의 진중에서 지내다가, 명군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매 최척도 명군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간다.
난중에서 다행히 살아난 최공과 심씨는 연곡사의 사승이 구출한 몽석을 찾아 집으로 돌아와 지내며, 각각 아들과 딸의 생사를 알 수 없어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한편, 이 부인을 잡아간 늙은 왜구는 이 부인을 본국으로 데리고 가서, 남복한 이 부인을 남자로 알고 아들과 같이 사랑하나, 이 부인은 여러 번 탈출을
기도하다가 실패하거니와, 늙은 왜구는 이 부인을 상선에 태우고 남장으로 장사하러 다닌다.
이때, 중국으로 들어간 최척은 요흥부에서 여유문과 형제지의를 맺고 지내다가 여공이 병으로 죽으매, 전에 지기지우를 삼았던 송우란 사람을 항주로
찾아가, 송공을 따라 상선을 타고 안남을 왕래한다. 하루는 최척이 안남의 항구에서 고요한 밤을 당하여 향수를 이기지 못해 통소를 불었더니, 왜의 배에서
조선말로 한시를 읊는데, 그 한시는 분명히 아내가 지은 것이고, 그 시를 읇는 소리도 분명한 아내의 목소리였다.
최척은 그 시를 읇는 소리를 듣다가 놀라 기절하였다가 곧 깨어나 왜선으로 건너가서 그 사람을 만나보고자 하나, 주위의 만류로 참고 날이 새기를 고대한다. 이때, 왜나라 배에 있던 이 부인이 명나라 배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들어 보니, 조선의 곡조가 분명하고 또 남편이 자주 불던 곡조인지라, 혹 생각하는
바가 있어 남편과 화답한 한시를 불렀던 것이다.
최척은 날이 새자 왜선으로 가서 어제 밤 한시를 읊은 사람을 찾으니, 이 부인이 자기를 찾는 남편의 소리를 듣고 배에서 내려오자, 최척이 아내를 끌어안고 울부짖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양국의 선인들이 부부임을 알고 고금에 없는 기이한 일이라고 하여 경탄을 마지 않으며, 그 해후를 축복해 주는 것이었다. 이 부인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며 4년을 같이 지냈던 그 늙은 왜구가 더욱 기뻐하며, 이 부인을 남편에게로 돌아가게 하니, 최척과 이 부인은 그 늙은 왜구에게 감사를 마지 않는다.
송공은 장사를 마치고 중원으로 돌아와 한 칸 집을 마련하여 최척의 부부로 하여금 평안하게 살게 하니, 이 부인이 일 년이 지나서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몽선이라 한다. 몽선이 장성하여 신부를 구할 새, 이웃에 살고 있는 홍도라고 하는 처녀가 부친되는 진위경이 임진왜란 때 출전했다가 전사한 조선에 가보고 싶어하다가 이모부를 시켜 구혼하는 지라, 최척은 그 구혼을 받아들여 홍도를 며느리고 맞이한다.
이듬해 청군이 요양을 점령하고 중원을 침공하니, 명나라 황제가 천하의 병마를 동원하매, 최척도 명군에 종군하여 요양으로 출전할새, 이 부인은 남편이
살아 돌아오지 못할까 하여 못내 슬퍼한다.
요양에 출전한 명군이 대패하고, 최척은 도망하다가 청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거니와, 명국의 청병대장으로 출전했던 강홍립이 청군에게 항복하고, 조선의
군사는 다 포로가 되었는데, 남원에 살고 있던 최척의 아들 몽석도 종군하여 왔다가 포로가 되어, 공교롭게도 최척과 한 수용소에 있게 된다. 최척과 몽석은 한 수용소에 있으면서 말을 주고받고 하다가 부자지간이란 사실을 알고는 서로 붙들고 울기를 마지않는다
최척 부자의 신기한 상봉을 들은 한 노호가 그들을 불상히 여겨 고국으로 도망하게 해 주니, 최척은 고국을 떠난지 20년 만에 돌아온다. 최척이 고향인
남원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우연히 등창이 나서 위독하게 되었으나, 진위경이란 화인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어 인사를 하고 보니, 그가 바로
최척이 중국에서 얻은 며느리의 부친이다. 이에 최척 부자가 진공을 데리고 남원으로 오니, 부친은 최공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아들을 보고 기쁨보다도 슬픔이 더하다.
이러할 때, 중국 항주에 남아있는 이 부인은 명군이 대패하여 다 전사했으나, 조선인은 많이 살아서 환국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몽선을 시켜 배를 사게 하고, 며느리로 하여금 양국의 말을 배우게 하며, 조선 옷과 일본 옷을 만들게 하고, 양식을 준비해 가지고 날을 받아 배를 띄워 고국을 향하여 떠난다.
이 부인의 일행이 배를 타고 오다 풍랑을 만나 무인도에 표박하고 있다가, 해적을 만나 배를 빼앗기고 절망에 빠져져 모자와 고부가 서로 붙들고 통곡을 하고 있는데, 이틀이 지난 후 안남에 갔다 오는 조선의 상선을 만나 천행으로 구출된다.
그 상선은 이 부인의 일행을 전라도 순천에다 내려놓는다. 이 부인은 선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하고 아들과 자부를 데리고 남원으로 가니, 남편 최척이 집에 있다가 아내와 아들·자부가 다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달려 나와 맞이하고, 아들 몽석은 모친을 끌어안고 울부짖으며, 심씨는 딸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놀라 기절하고, 화인 진공도 뜻밖에 이역에서 딸을 만나게 되어 기쁨의 눈물을 한없이 흘린다.
이 소문을 듣고 보러 오는 사람이 줄을 이었고, 이 부인과 홍도의 자초지종의 일을 들음에 미쳐서 무릎을 치며 탄복하고 차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서로 다투어 그 얘기를 이웃에 전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최척 부부는 부처님의 가호에 보답하기 위하여 폐사가 되어있는 만복사에 올라가 깨끗하게 소제하고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 이 작품은 이명선의 ‘조선문학사’ 연표에 나오고,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마련된 ‘가람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이다. 단권으로 총 28면, 매면 9행,
매행 30자 평균으로 쓴 한문소설이다. 고대도서관에는 ‘기우록’이란 표제로 된 필사본이 있다.
3.임경업전
임경업은 충청도 충주 달천촌에서 태어났다. 6세부터 동네 아이들과 노는데, 전쟁놀이만 하고 놀면서 스스로가 대장이 되어 호명하니 보는 사람마다
기특하게 여겼다. 임경업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모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독서만 하고 있다가, 2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상경하여 무과에 장원급제를 한다.
이때 병판 이시백이 임경업을 천거하여 백마강의 만호를 시킨다. 임경업이 부임하여 병사를 잘 훈련시켜 강병을 양성한다. 임경업의 칭송이 자자하매,
우의정 원두표가 천거해서 천마산성의 중군을 시킨다. 임경업은 병사를 잘 통솔하여 산성을 완축하고 군정을 잘 다스린다.
임경업은 산성수축의 역사를 마치고, 상사 이시백을 따라 중국에 간다. 그때 마침 호국이 적국의 침략을 받아 명국에 청병해 왔다. 명 천자는 임경업이
천하의 명장임을 알고 임경업으로 청병대장을 삼아 호국을 원조하게 한다. 임 장군은 가달군을 격파하여 항복을 받고 호국을 위기에서 구출해준다. 임 장군은 이와 같이 해서 우리나라의 위력을 중원에 떨치고 4년 만에 환국한다.
이때 호국이 가달을 항복받은 후로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명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정복하고자 먼저 우리나라를 정복하려고 한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임 장군으로 의주부윤을 삼는 동시에, 부원수겸방어사를 삼아 호국의 침입을 막게 한다. 임 장군의 전술을 알고 있는 호군은 의주로의 침입을 피하고
우회해서 침입해 온다. 조정에서는 불의의 내습을 받고는 이를 막을 길이 없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했으나, 사세가 부득이해서 적장한테 나아가 항서를 바치는 국치를 당하고 만다.
의주에서 호군의 내전만을 기다리고 있던 임 장군이 이 소식을 듣고는 대경실색하여 국가의 불행을 슬퍼하다가, 적장 용골대가 세자 형제를 인질로 데리고 온다는 말을 듣고는 호병을 맞아 싸워서 격파한다. 이제 용골대가 진군을 못하고 국왕에게 임 장군으로 하여금 길을 열어주게 해 달라고 한다. 인조의 칙서를 받은 임 장군은 부득이 길을 열어주고 세자의 일행을 만나 통곡함을 마지아니한다.
용골대는 돌아가서 호왕에게 임 장군의 처사를 고했다. 대노한 호나라 황제는 임 장군을 죽일 마음을 먹고, 명국을 칠 것이니 조선왕은 청병을 보내되 임
장군을 보내라는 국서를 우리나라에 보내왔다. 인조대왕은 임 장군을 보내기 애석히 여겼으나, 전일부터 임 장군을 두려워 모역을 못하고 있던 영의정
김자점이 인조를 권하여 보내게 한다.
임 장군이 출전하여 명군과 싸울 새, 명장 황자기는 전날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사귄 옛 친구인지라, 서신을 보내어 후일을 기약하고 황자기로 하여금 거짓 항서를 올리게 하고는 환국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호왕은 이번에는 임 장군의 전공을 포상하겠으니 보내라고 하였다. 인조대왕은 호왕이 필시 임 장군을 죽일 계획임을 간파하고 주저했으나, 이번에도 김자점의 권고로 할 수 없이 보내기로 한다.
임 장군은 압록강에 이르러서, “대장부 세상에 나서 어찌 타인에게 죽으리오” 하고는, 삼변을 틈타 자기를 데리고 가는 호병을 베고 산중으로 도피한다. 그는 삭발위승하고 있다가 명국으로 들어가서 대사를 도모하리라는 마음을 먹고, 강으로 내려와서 수백 명의 역군을 모아가지고 수십 척의 배에다 싣고
떠나가다가 풍랑을 만나 판도란 섬에 표착한다. 거기에는 명장 황자기가 수비하고 있었다. 황자기는 임 장군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명 천자는 임 장군으로
호위대장겸부원수를 삼아 호국을 치게 한다.
이때 호국에서 데리고 간 승 탁보가 공명심에서 호군과 내통하고 임 장군을 호지로 들어가게 한다. 임 장군을 생포한 호군은 호왕에게 보냈다. 호왕은 온갖 수단을 써서 임 장군의 항복을 받으려 하다가 실패하고 죽이려 했으나, 호왕도 임 장군의 일명을 관통하는 충성에 감동하고, 우선 회유책을 써서 임 장군과
세자 일행의 인질을 모두 송환한다.
임 장군이 죽지 않고 무사히 세자를 모시고 돌아온다는 소문을 들은 간신 김자점이 대경하여 국왕에게 임 장군은 역적이오니 치죄하라고 참소한다. 그러나 국왕이 듣지 않으매, 칙서를 위조하여 임 장군을 체포해서 투옥하고 죽이려 한다. 임 장군은 탈옥하여 국왕께 가서 자초지종을 고한다. 국왕은 대노하여
김자점을 투옥하게 했으나, 김자점이 반항하여 듣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조정에서 나오는 임 장군을 철추로 때려 죽이니, 만고충신 임장군은 천추의
유한을 품고 간신의 손에 일생을 마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목판본으로 경판본 ‘임경업전’, 활자본 ‘임경업전’이 있으며, 필사본으로 한문본인 ‘임충신전’이 국문본과 내용이 동일하다. 창작 년대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타난 기록을 보아 조선 중기에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4.옥소전
신라 때 강릉 사곡봉 밑에 이춘백이라고 하는 신동이 있었다. 자를 선군이라 했다. 선군은 사곡봉에 올라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궁으로부터 ‘강릉추월’이라
새긴 옥소를 받아 가지고 내려온다.
하루는 선군이 강상에 배를 띄우고 옥소를 불며 놀다가, 풍랑을 만나 한 섬에 표착하여 대문에 옥문동이라 쓴 집을 찾아가니 낭자들이 슬피 울고 있다.
선군이 물어보니 중국 여남인으로 풍랑을 만나 이곳에 왔으며, 소주에 사는 조 상서의 딸과 그녀의 시비라는 것이다.
선군이 옥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주옥과 황금으로 만든 집이 화려한데, 벽에다 “조선국 이춘백은 중국 여남인 조 낭자와 시비 춘랑을 만나 찾아오리라”고
써 붙여 놓았고, 한 노고가 반가이 맞이한다. 그 노고가 조 낭자를 데리고 들어와, 옥황의 하명을 받고 내려왔다면서 주혼이 되어 이 선군과 주 낭자를
결혼시키고, 또 시비 춘랑과도 결혼을 시킨다.
그 집에서 3일을 지내고 나니, 노고는 이곳은 인간과 다르니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배를 마련해 준다. 이에 선군은 조 낭자와 춘랑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아뢰니, 부모도 조 낭자와 춘랑을 반기며 며느리로 맞이한다.
이때 조정에서 설과할 새, 이 선군이 장원급제하고 한림수선이 된다. 내외직을 차례로 지내고 황해도감사가 된다. 조 부인과 춘랑을 데리고 부임하여 선정을 펴다가 임기가 차서 상경할 새, 배를 타고 오다가 해적을 만나 재물을 빼앗기고 모두 수중고혼이 되었더니, 이 감사는 파편을 붙들고 살아나 표류하다가
중국에 표착하여, 한 노승의 교시를 받아 가보니, 장인이 되는 조 상서의 집이었다. 이 선군은 신원을 밝히지 않고 있다가 자개산에 있는 자영도사를 찾아가 병서를 배운다.
한편, 해적들은 조 부인과 춘랑을 납치해 가서 괴수 장수백과 어천수에게 바친다. 비병 끝에 토혈한 조 부인을 춘랑이 간호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적선을
얻어 타고 탈출하여 육지로 올라가 만불암 부처님의 지시를 받고 백학산으로 백운암을 찾아가 삭발위승한다.
조 부인은 그때 태중이었다. 10삭이 차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운학이라 한다. 사승들이 사중에서 양육할 수 없다고 하며 산하에 사는 설영국의 양자로 주라고 한다. 조 부인은 눈물을 머금고 설영국을 불러 운학을 양자로 삼고 잘 기르라고 하였더니, 운학이 길에 나가 놀다가 행방불명이 된다.
이때, 운남 적장 장수백이 길을 가다 운학이 뛰어남을 보고 데리고 가서 양자를 삼아 이름을 해룡이라 한다. 해룡은 장수백을 친부로 알고 검술을 배우니
천신과 같았다. 적장 어천수가 검술을 시합하자고 하여, 해룡이 지면 어 장군의 사위가 되고, 어 장군이 지면 옥소를 주겠다고 한다.
이에 어 장군이 져서 해룡은 그의 딸 파주와 결혼하고, 또 옥소를 받아보니 ‘강릉추월’이라 새겨져 있다. 조정에서 설과할 새 해룡이 응시 차 상경하려고
하는데, 어 부인이 해룡의 신원을 밝혀주고 부친의 신검을 내어 주며, 금강산에 있는 백령도사를 찾아가 검술을 배우고 나서 응시하라 하고, 자기는 적굴을
벗어나 산사에서 피신하며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해룡이 적굴을 떠나 금강산으로 백령도사를 찾아가 검술을 습득하고, 강릉 사곡봉 밑에 사는 조부 되는 이옹의 집을 찾아가니, 이옹과 홍 부인이 옥저의
소리를 듣고 의심하고 아자를 본 듯이 반기며 후대한다. 해룡은 이옹의 집을 나와 서울로 가서 장원급제하고 한림편수가 된다.
이때, 황해도에 수적이 대성할 새, 조정에서 장 한림으로 황해도어사를 삼아 수적을 격파하도록 하니, 장 어사가 적굴이 있는 운남도를 습격하매, 적장 장수백과 어천수가 나와 항복한다. 그날 밤 술법을 써서 백학사 밑에 사는 설영국을 찾아가니, 자기를 양육하게 된 이유를 이야기 해 주기로, 바로 백운굴으로
모친을 찾아가 모친과 눈물의 상봉을 한다. 해룡이 적굴을 소탕하고 사부상서가 되어 상경할 새, 모친을 모시고 강릉으로 가서 조부를 비로소 만나보고
상경하여 부마가 된다.
한편, 중국으로 들어가 자개산에서 병서를 공부하고 있던 이준백이 도사의 지시를 받고 나와 촉왕의 승상이 되어 천하를 도모하고자 장안을 점령하니,
송조에서 신라에 구원병을 청한다. 신라에서는 부마로 있는 이운학을 구원장군으로 보낸다. 이운학이 중국으로 들어가 태원수가 되어 촉국을 격파할 새,
옥저를 내어 부니 촉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있는데, 이 승상이 그 옥저를 듣고 보니 분명한 자기의 옥저요, 이 원수가 자기의 아들임을 알게 되어 이 원수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이 원수가 촉진으로 와서 비로소 부자 상봉한다.
이에 이 승상은 아들을 데리고 소주로 조 상서를 찾아가서 사위로의 예로 뵈옵고, 이 원수가 모친의 편지를 올리니, 조 상서가 받아 보고는 천하의 희사라
하면서 못내 기뻐한다. 이 원수가 부친을 모시고 회군할 새, 송 천자는 이 원수로 부마를 삼는다. 이 원수가 대송 공주를 데리고 금의환국 한다는 것이다.
* 이 작품은 1915년 11월 9일에 발행한 덕흥서림 판(pp.79)의 활자본이 있다.
5.금강취유기
고려 공민왕 시절 설학촌에 사는 정달홍이라는 명사가 있었다. 일찍부터 용문에 올라 강원감사가 되어 갔다가, 사궁하고 금강산 밑에 들어가서 한 별읍을
이루고 살았다. 정공은 부인 이씨와 동주 30년에 슬하에 형제를 두었으니, 장자를 덕현이라 했고, 차자는 필현이라 했다. 덕현은 장안사에 가서 수학하다가
도인을 만나 선적을 얻는다.
하루는 정공이 덕현을 불러 모친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외조부를 위로하고 오라 하였다. 덕현은 모친을 모시고 강화도로 가서 외조부를 위로하고, 해상에서 선유하다가 광풍을 만나 한 섬에 표착하니 그 곳은 해중선도였다. 덕현은 중국의 소주자사 소공의 딸이 강상에서 선유하다가 광풍을 만나 그 섬에 표착하여서 대녀들과 외로이 살고 있는 미인 소 소저를 만나 가연을 맺는다.
덕현은 수일 후 소 소저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부모에게 고하고 택일성례 하였다. 소 부인은 후원 연당에다가 고기 한 마리를 밥을 주어 기르다.
하루는 소 부인이 연당의 고기가 미인으로 화하여 와서 자기는 원래 용녀로서 이제 남해용자에게로 출가하여 가게 되었으므로 작별하게 되었거니와, 후일
상봉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며 작별하는 꿈을 꾼다.
선시에 대원 건무황제 때 소세라는 일위명환이 있었다. 소주자사가 되어 있으면서 딸 계월을 잊을 수 없어 슬픔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때, 덕현은
과거에 급제하고 남해현감이 되어 있는데, 조정에서는 덕현의 선정을 듣고 내직으로 불러들인다. 덕현은 배를 타고 수로로 상경하다가 수적을 만나 파선되어 덕현과 소 부인은 수중으로 들어갔으나, 덕현은 다행히 괴물이 수중에서 자기 몸을 바닷가로 밀어내어 주는 바람에 살아나서 표착한 곳이 아라사 땅이었다. 덕현은 주모라는 집을 찾아가서 주인의 아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의탁하게 된다.
한편, 소 부인도 괴물에게 구출되었으나, 덕현이 죽은 줄 알고 투신자살 했더니, 또 괴물이 구출하므로 인하여 죽지 못하고 한 선녀가 와서 “15년 후에는
부군을 만나보게 될 것이니, 이 근방에 있는 망운사로 들어가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라”고 일러주는 그 선녀의 교시를 좇아 망운사로 찾아가서 의탁하게 된다. 그리고 대녀 운향도 괴물에게 구출되어 소 부인과 같이 망운사에 가서 삭발위승한다.
소 부인이 망운사에서 유복자를 낳으니, 여승들을 불결하다고 하면서 산하에 살고 있는 장대복이라는 부자가 무자하니 갖다 주라고 한다. 소 부인은 할 수
없어 아들을 장가에 갖다 주고, 보고 싶을 때마다 내려가 본다. 이에 장가는 생모와의 인연을 끊고 완전히 자기의 양자를 만들기 위하여 사랑도란 섬으로
들어가서 산다. 소 부인이 장가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도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대경실색하였으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소 부인의 아들 소청은 장가의 집에서 장성하여 과거에 응시하려고 상경할 새, 평소에 좋아하는 통소를 가지고 떠난다. 소청은 강원도에 이르러 금강산을
구경하려고 들어가니 한 누각이 있는데, ‘금강산취유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소청은 주인 정 학사를 찾아 일야를 쉬는데, 정 학사가 소청이 부는
피리소리를 들으니, 자기 아들이 불던 피리소리과 똑같은 지라, 피리를 구경시켜 달라 해서 보니, ‘금강취월’이라고 쓴 필적이 아들의 필적이 분명하므로,
소청이 덕현의 유복자가 아닌가 의심이 들었으나,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이튿날 떠나보낸다.
소청은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하고 장원급제하여 팔도군찰사가 되었다. 그는 떠나려는 전야에 한 노옹이 와서 동서로 유리되어 있는 부모와 주야로 통곡하는 왕부모를 찾고, 부모의 원리를 갚으라고 교시해 주는 꿈을 꾼다. 소청은 금강산으로 가서 정 학사를 만나 아자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영남으로 내려가서 민정을 살피다가 산촌에 이르러 수십 명의 장사들이 모여앉아 남해현령의 행차를 습격하였다가 재물은 없고 옥적 하나만을 탈취하였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남해현령에게 명하여 그 해적들을 체포하게 한다.
이때, 소 부인은 남편과 아자를 생각하면서 15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어사가 내려와서 백성의 원한을 풀어준다 하기에 아자를 찾아달라는 소상을
올린다. 소청은 그 소상을 보고 자기를 길러준 장가가 부모가 아니고, 소상을 올린 여승이 친모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소청은 이튿날 청학루에다 연회를
베풀고 부친을 습격한 해적들을 잡아다가 고문하여 자백을 받고, 장대복은 모자의 정을 끊게한 죄가 중하나 15년간 양육한 은혜를 생각하여 용서하고, 모친을 오게 해서 감격 속에 상봉한다. 소청은 즉시 정 학사에게 자기가 손자라는 것과 모친을 상봉했다는 서간을 보낸다. 수일 후 소청은 모친을 모시고 금강산으로 가서 조부 정 학사를 뵈옵고 상경하니, 국왕은 소청으로 사조참의에 대사성을 제수하고 가족을 상경하게 한다.
선시에 정덕현이 아라사 땅에서 지내다가 과거를 보러 중원으로 들어간다. 한곳에 이르러 누각이 찬란하기로 물어보니, 형주자사 소공의 집이라 하므로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소공의 집에서 과거일을 기다리다가 응시하여 장원급제하고 한림학사가 된다.
이때 고려 국왕은 소청으로 중국 사신을 삼아 보낸다. 소 부인은 아자에게 편지를 써 주면서 금릉에 가서 외조부를 찾아보라고 한다. 소청이 중원으로
들어가서 중국 황제를 뵈오니, 황제는 고려국 사신의 비범한 인물을 보고 정 학사를 불러 문장을 시험해 보라 한다. 정 학사와 소청이 인사를 하고 나서,
부자지간임을 알고 감격 속에 부친과 상봉한다. 정 학사가 중국 황제에게 고국으로 보내달라고 상소했으나 황제는 허가해 주지 않는다. 정 학사는 장인되는 소공에게 편지하니, 소공이 즉지 상경하여 서랑과 외손자를 만나보고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도 대희한다.
이에 중국 황제는 소공으로 고려 사신을 삼아 고려국에 보내서 국왕께 고하고 정문 일족을 중원으로 데려오게 하니, 고려 국왕은 황명을 거역할 수 없어
정문 일족을 중원으로 보낸다. 중국 황제는 정문 일족을 맞이해서 대희하고, 정 학사로 좌객노를 삼는다. 소청은 고국에 있을 때 좌의정 김공의 딸과 결혼해 두었 좌객노 성례일을 앞두고 사신을 고국으로 보내어 금공으로 하여금 딸을 중원으로 데리고 들어오게 해서 성례한다.
이때, 조왕이 중원을 침공한다. 이에 소청이 자원하고 대원수가 되어 출전해서 적군을 습격하고 조왕을 생포하여 항복을 받아 회군하니, 황제가 대희하고
소청으로 초국공을 봉한다. 이후로 정문 일족은 중원에서 영주하며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 이 작품은 1915년 4월 12일에 발행한 동미서시 판(pp.72)의 활자본이 유일본이다.
6.석태용전
대명 성화 년간 설학동에 석공이란 승상이 살고 있었다. 부인이 정씨가 늦도록 자녀를낳지 못하다가 태용산에 올라 불사에 발원하고 돌아와 아들 태룡과
딸 려룡을 낳는다. 그러나 정 부인은 남매를 낳아놓고 득병하여 죽는다.
석 승상은 려씨를 후처로 맞으니, 려씨가 태룡 남매를 친자같이 사랑하였는데, 친자를 낳고부터는 태룡 남매를 박대하기 시작한다. 이때, 각 지방에서 군적이 일어나 민심이 불안할 새, 황제는 석 승상을 불러올려 군적을 평정하도록 한다. 석 승상이 상경하여 조정의 간신을 물리치고 지방의 오사들을 숙청하니,
자연히 군도가 흩어지고 천하가 태평하여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큰 공을 세우고도 석 승상은 간신의 참소를 받아 고도로 정배를 당한다.
남편이 유배를 가자, 려씨는 마음 놓고 태룡 남매를 학대하며 죽이려고 음식에 독약을 넣는다. 그러나 죽은 정 부인이 태룡 남매의 꿈에 나타나 독약을 넣은 음식을 먹지 말라고 일러준다. 이어 려씨는 강제로 그 음식을 먹게 하니, 태룡 남매가 그 음식을 먹고 실신하였는데, 유모가 해독약을 몰래 먹여 살려낸다.
살아난 태룡 남매는 집을 나와 부친을 찾으러 남해 고도로 가다가, 수적을 만나 남매가 각각 헤어지게 된다. 겨우 7세 밖에 안 된 태룡은 망모의 현몽에
의하여 한 도인을 따라가 무예를 배우고, 석 소저도 망모의 몽중교시를 받고 정 승상의 부인 류씨를 만나 모녀지의를 맺고 지내며 무술을 익힌다.
이때, 교지국 등 변족이 중원을 침공할 새, 황제가 친정하였다가 위경에 빠진다. 황제의 위기를 들은 태룡과 려룡이 각각 출전을 자원하니, 황제는 려용으로 태원수, 태룡으로 부원수를 삼는다.
양 원수가 출전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황제를 모시고 환도하는데, 석 대원수의 탄 배가 풍파를 만나 표착한 곳이 부친의 배소인 남해고도였다. 석 원수는
부친과 눈물로 상봉하고, 모시고 회군하다가 양모인 유 부인을 찾아 사례하고, 또 고향에 들려 계모인 려씨의 죄를 용서하여 데리고 상경한다.
황제는 회군한 석 대원수로 위국공을 봉하고 차 원수로 병부상서를 삼으니, 석 대원수가 기군한 죄를 사한다. 황제는 고금에 없는 기사라 하며, 부원수인
태룡으로 부마를 삼고, 대원수인 려룡으로 태자비를 삼는다는 것이다.
* 이 작품은 고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으로, 총 71면, 매면 13행, 매행 30자 평균으로 쓰여 있는 필사본이다.
7.월영낭자전
송 태조 창업 시절 소주 땅에 사는 최현이란 상서는 아들 희성을 두고, 호원이란 상서는 딸 월영을 두어 일찍이 약혼을 해 둔다. 이 때, 권신 정환이 황제께
참소하여 호 상서를 죽이매, 부인도 남편의 뒤를 따라 죽는다. 고아가 된 월영은 부모의 삼년 상을 마치고 부친의 유서를 뜯어보니, 최희성과 약혼을
성취하라는 내용이다. 이로부터 월영은 희성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때 소주자사 위정이 포악하여 부인 정씨를 축출하고 재취를 구하다가, 월영의 재색을 듣고 청혼했다가 거절을 당하고, 노복을 시켜 납치하려고 한다.
월영은 자살한 양하여 빈소를 차려 놓고 시비로 하여금 조석으로 곡을 하게 한 뒤에 남복으로 개착하고 피신한다.
월영은 절강 땅에 이르러 경 어사의 양녀가 된다. 이 때 최 상서는 희성이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한림학사가 되매, 택일성례하기 위하여 호 상서 댁으로
사람을 보냈다가, 월영이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부득이 민 상서 댁과 혼사를 맺는다. 그러나 희성은 죽었다고 하는 월영을 잊지 못해 금실이 좋지 못하고,
월영을 생각하는 꿈으로 고민한다.
황성에 있는 희성은 소주 땅에 사는 숙부로부터 숙모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소주로 내려간다. 희성은 숙모의 병이 좀 나아지매, 춘삼월을 당하여 절강의 승경을 찾아 노는데, 달 밝은 밤 어느 집 후원에서 놀고 있는 한 미인을 엿보니, 몽중 천하에서 만나 연연한 정을 나누던 선녀와 똑같다. 희성은 이튿날 이웃 사람에게 그 미인이 누구냐고 물어 보니 그 집은 경 어사 댁이요, 그 미인은 호 상서의 딸이 부모를 잃고 양녀로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월영의 시비가 이웃 사람과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고 기뻐서 달려가 인사를 하고 월영의 생존을 알린다. 희성은 후일에 상봉할 것을 기약하는 편지를 써주고, 바로
상경하여 부친에게 월영과의 상봉을 고하고, 노복을 보내어 월영을 맞아 택일성례 한다.
이 때 국구 정한은 희성의 거절에도 굽히지 않고 황제를 움직여 희성으로 사위를 삼는다. 이에 희성은 본의가 아닌 민씨·호씨·정씨 등 3부인을 거느리고
사는데, 3부인이 다 같이 생남한다. 정 부인이 생남한 후로 자기보다 뛰어나고, 남편의 사랑을 받는 호 부인을 시기하고 질투하니, 희성이 정 부인을 멀리 한다. 하루는 3부인이 후원에서 놀다가 사소한 일로 정 부인이 호 부인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정 부인은 남편과 호 부인 사이를 멀리하기 위하여 미기 화선을 데려와 남편을 유혹하게 하나 실패하고, 미기 화선은 쫓겨나고 만다.
이 때, 황제는 발해 지방이 불안하다는 소식을 듣고 최희성으로 순무어사를 삼아 순무하도록 한다. 정 부인은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호 부인의 간부가 호
부인에게 보내는 위서를 만들어 시아버지인 최 상서에게 보여 호 부인을 하옥하게 한다. 정 부인은 태어난 아들이 죽으매 친정으로 가면서 시아버지에
고하여, 민 부인이 옥중에 있는 호 부인과 내통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일러바친다. 이에 크게 노한 최 상서는 민 부인을 불러 질책하면서 음녀인 호 부인을
동정하지 말라고 위명한다.
정 부인은 친정으로 갔으나 모친의 심한 힐책을 듣고 이튿날 시가로 다시 돌아와, 자객을 사서 민 부인과 호 부인이 낳은 아들을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그 음모를 호 부인에게 돌린다. 최 상서가 대노하고 호 부인을 끌어내어 참형하려다 임신 8개월이므로, 다시 하옥하고 해산 후로 미룬다. 호 부인은 무수한
태형을 맞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민 부인이 밤중만 되면 옥으로 가서 간호하며 위로한다. 호 부인이 옥중에서 쌍동을 낳으매 민 부인은 호 부인이 참형
당하는 것이 보기 싫어서 친정으로 간다.
한편, 발해지방을 순무하고 있는 최 어사는 호 부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울고 있는 꿈을 꾸고, 가화가 일어났음을 짐작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최 상서는
호 부인이 해산하매 황제께 호 부인의 불정을 상소하니, 황제가 호 부인을 잡아들여 친국하고 국구 정한의 말을 들어 서문 밖에 달아매어 죽이려고 한다.
바야흐로 처형하려는 찰라 광풍이 홀기하고 천명이 혼암해지므로 그 집행을 중지하니, 한 선관이 황제 앞에 나타나 무죄한 호 부인을 죽이지 말고 간악한
정 부인을 죽이라 하고는 사라진다. 이에 황제는 정 부인을 잡아들이라 하니 정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자살하매, 그 공모한 시비를 잡아들여 자백을 받으니 호 부인의 무죄가 밝혀진다.
황제는 최 상서에게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죄로 태형 50장에 관직을 박탈하고, 호 부인의 빛나는 절행을 포상한다. 가화의 처리가 끝난 후 돌아온 최 어사는 고문으로 죽어 가는 호 부인을 지성으로 간호하여 살려 낸다. 최 어사는 예부상서가 되어 있다가, 대원수가 되어 흉노의 침략을 격퇴하고, 회군한 후로는
가정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 한성서관(1917.3.8.)에서 발행한 활자본(pp.81)과 ‘호씨효행록’이란 필사본이 있다.
8.유승상전
대명 홍치 년간 양왕의 이름은 유흥완으로, 개국공신 기의 후예요, 안국공 참의 아들이다. 그는 원배 화씨, 차배 공주, 3배 주씨, 4배 윤씨 등 4부인을 거느리고 화락하게 살아 가는데, 4부인한테서 12아들과 5딸을 두었으니 다 기남미녀들이다.
그 12아들 중에서도 제11아들 창복은 화배의 소생으로, 부왕을 닮아 충효와 재덕을 겸비하고, 옥안선풍에 위로는 하늘과 통하고 아래로는 지리에 달하여,
20세에 장원급제하고 누진하여 사부상서가 된다.
그는 진 승상의 딸을 취하였으나, 진 부인의 방자혜질로도 가군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신혼초야부터 금실이 좋지 못하다. 하루는 양왕이 아들을 불러
훈계하고, 오늘 밤에는 꼭 아내 방에 가서 자도록 타일렀더니, 술을 마시고 취해 들어가서 진 부인의 머리채를 잡고 후원 연못으로 끌고 가서 빠져 죽게 한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 양왕이 창복을 불러 태장을 하고, 진 부인의 시신을 찾으니 연못이 양자강으로 통해 있어 찾지 못하고 만다.
때에 황제가 사부상서 유창복으로 순무어사를 삼아 민정을 살피게 하니, 소주지방에 이르러 자사 김정의 탐학을 듣고 출도하려고 한다. 이러할 때
철희문이란 산림처사가 양자강에서 선유하다가 한 시신을 건져 살려 내니, 곧 유 어사의 부인 진씨였다.
철 처사가 집으로 데리고 와서 양녀를 삼고 친녀와 같이 사랑하는데, 진 부인의 색덕을 들은 소주자사 김정이 진 부인을 납치하여 작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유 어사가 출도하여, 납치되어 가는 진 부인을 구출해 주고 보니 자기의 아내이다.
유 어사는 철 처사에게 선약을 주며 교자 안에서 자살한 진 부인을 소생시키라 하고는 떠나오니, 진 부인이 깨어나 남편의 구출을 받은 사연을 듣고는
참괴함을 이기지 못해 한다. 또한 이웃에 호영이란 거인이 진 부인의 색덕을 듣고 밤중에 납치하려고 한다는 기미를 안 진 부인은 2비를 데리고 담을 넘어
도주한다.
소주에서 아내를 구출하고 말없이 떠나 온 유 어사는 상경하는 길에 형주에 있는 월출산을 구경하고 소상강에 이르러 선유하다가, 세 시신을 건져내고 보니 또한 아내 진씨와 시비 벽란과 중행이다. 진 부인과 2비는 철 처사의 집을 도망해 나와 가다가 산적을 만나 강물에 투신자살을 했던 것인데, 두 번이나 남편의 구출을 받은 진 부인은 너무나 참괴함을 참을 수 없어 남편의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편이 시키는 대로 교자를 타고
본부로 돌아간다. 유 어사가 상경하니 군관 이현기가 올라와서, 진 부인을 모시고 상경하다가 군적을 만나 교자를 빼앗겼다고 아뢴다.
이 때, 윤배의 소생인 필자 창필은 화상서의 딸과 일찍부터 약혼해 두고, 양가의 왕래가 잦으나 창필이 화 소저를 냉대해 왔는데, 성례한 후에도 금실이
화락하지 못하고 필자마저 양왕의 속을 썩이는데, 창필은 장원급제하고 한림학사가 된다.
다시 이부상서가 된 창복은 여전히 독숙하며 재취를 원하지 않고 있다가, 윤 복사와 정 참정의 청혼을 거절할 수 없어 윤·정 양 부인을 취했으나, 양 부인과도 이성지친을 맺지 않고 홀로 지낸다. 이러할 때 유 상서는 진 부인의 꿈을 꾸고는 진 부인이 도적에게 죽어 원혼이 되었는가 하며, 뉘우침과 괴로움을 이길 수 없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진 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마침내는 득병까지 한다.
이 때 제왕이 모반 기병합에, 황제는 양왕의 제8자 동창후 유창광으로 대원수, 군부상서 화년경으로 부원수, 이부상서 유창복으로 좌선봉, 한림학사 유창필로 우선봉을 삼아 출정하게 한다.
한편 상경하는 길에서 산적에게 잡혀 갔던 진 부인은 한 여인의 도움으로 적굴을 탈출하여 산중에 방황하다가 호부상서를 역임한 임공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서 지내는데, 임공은 남복한 진 부인을 남자로 알고 자기 딸과 결혼하게 한다.
한 거한이 임 소저의 아름다움을 듣고 납치하려는 순간, 진 부인이 임 소저를 데리고 도망하여 나와서 자기 여자로 남복한 까닭을 고백하고 소상강에 이르러 선녀의 내영을 만나 충산으로 가서 위 부인에게 사사하며 피신해 와 있는 벽 소저와 다정히 지낸다. 하루는 위 부인이 진 부인을 보고 가군이 위태하니
급히 가서 구출하라고 하면서 주는 선약을 받아가지고, 위 부인의 제자 천선을 따라 구름을 타고 소주로 간다.
한편, 출정한 유 선봉은 반군을 평정하고 회군하려고 하는데, 황제가 다시 유 선봉으로 각 주를 순무하고 상경하라 하기로, 각 주를 순무하다가 과음 끝에
득병하여 위경에 빠진다. 진 부인은 소주에 있는 월봉에 올라 초당을 지어 놓고, 여선의 복색을 하고 찾아가 선약으로 병을 고쳐 주고 돌아온다.
병에서 일어나 유 선봉은 자기의 병을 고쳐 준 여선을 찾아 월봉산으로 올라가서 그 여선을 만나 보니 뜻밖에도 자기의 아내 진씨가 아닌가. 유 선봉은
아내를 달래어 데리고 상경하는 길에 철 처사의 집에 들러 사례하고, 상경한 후로부터 유 선봉과 진 부인의 금실이 좋아지고, 진 부인은 자기와 권도로 결혼한 임 소저와 충산에서 사귄 벽 소저를 데려오도록 하고, 유 선봉은 우승상에 오른다.
유 승상의 동생 창필은 회군한 후에도 여전히 화 부인과의 불화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광필에게 하가한 공주의 딸을 재취하고 화 부인에 대한 마음이 우심해진다. 그런데, 이 부인의 유모 최씨가 화 부인의 색덕을 시기하여 모해하려고, 조카 순경을 시켜 칼을 들고 이 부인의 방 앞에 섰다가 창필이 보는 데서
도망치게 하여 화 부인의 투기심을 보이도록 한다.
창필은 화 부인을 질욕하던 끝에 칼로 찔러 죽이고, 부친의 벌이 무서워 집을 나와 정처 없이 가다가, 부상을 당하여 치장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백금을 희사하고 영릉지방에 이르러 괴질의 유행을 막아 민심을 수습하고, 청량 산중의 산적을 평정하고 절도사 주신을 도와 서번의 내침을 격퇴하고, 강산을 건너다 풍파를 만나 빠져 죽게 된다.
한편, 남편의 칼에 죽었던 화 부인의 시신을 태운산 봉월암에 사는 태청도사의 분부를 받은 도인들이 나타나 초인으로 바꾸어 가지고 붕월암으로 업고 가서 소생시킨다. 봉월암에서 태청도사의 교시를 받은 화 부인은 여선의 복색을 하고 가서 강수에 빠진 남편 창필을 구출해 준다.
창필은 금릉의 정 태수를 찾아가 묵으며 강수에 빠진 자기를 구출해 준 여선을 잊지 못해 하며, 혹 화씨가 살아 여선이 되었는가 하고 새삼 자기가 죽인
화씨를 생각하며 눈물을 짓는다. 화 부인은 모친의 재종이 되는 금릉의 정 태수를 찾아가서 정 태수의 부인 홍씨의 소개로 창필과 인사를 나누니, 창필은
화씨인가 의심하다가 화씨가 아니라는 말에 홍 부인에게 중매해 달라고 한다.
홍 부인은 조실부모하고 자기 집에 와 있는 주 소저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이웃에 사는 하 처사의 아들이 화 부인을 탈취하고자 하기로 화 부인이 주 소저를 데리고 도망하다가, 연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는 오라비인 화 상서의 일행을 만나 본부로 돌아온다.
한편 길일을 고대하던 창필이 하생의 작란을 만나, 홍 부인한테서 비로소 화씨의 생존을 듣고 못내 기뻐하며 본부로 돌아오니, 양왕이 대노하여 형구를
갖추어 치죄하니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화 부인이 달려와 양왕 앞에 무릎을 꿇어 사죄하고 남편을 극진히 간호하니, 창필과 화 부인의 금실이 비로소 좋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 이 작품은 상·중·하 3권3책의 필사본으로, 상권 113면, 중권 96면, 하권 78면, 총 287면, 매권 13행, 매행 30자 평균으로 쓰여 있다., 필사 년대는 없으나 상당히 오래 된 사본이다.
9.심청전
황해도 황주 도화동에 사는 심학규란 사람은 잠영의 후손으로 우연히 눈이 멀어 장님이 되었다, 그가 장님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아내 곽씨는 어질고
착한 심청이라는 딸을 낳아 놓고는 죽었다. 심 봉사는 집이 가난하였으므로 유모를 두지 못하고 심청을 업고 이집 저집으로 돌아다니며 동냥젖을 얻어
먹이면서 15세까지 길렀다.
심청이 장성한 후로는 부친을 대신하여 걸식하며 부친을 지성껏 봉양한다. 심청은 틈나는 대로 공부와 침선에 힘썼다. 심청이 재녀라는 소문이 인근에
알려지매, 무릉동에 사는 장 승상이 양녀를 삼겠다고 하나, 심청은 부친의 외로움을 생각하고 거절한다.
심학규는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으므로 마중을 나갔다가 실족하여 물에 빠진다. 마침 지나가던 몽운사의 화주승이 건져 주고, 공양미 3백 석만 부처님께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고 한다. 심 봉사는 눈을 뜰 수 있다는 기쁜 마음에 선뜻 권선장에다 '3백 석 심봉사' 라고 기입한다. 그러나 하도 기쁜 마음에 덮어놓고 기입은 하여 놓았으나, 걸식으로 살아가는 심 봉사에게는 3백 석은커녕 단 한 말도 없는 처지이므로, 그는 날마다 근심만 할 뿐 별도리가 없는 신세다.
부친의 이와 같은 사정을 알게 된 심청은 부친의 눈을 뜨게 해 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궁리하다가, 마침 상인들이 남경으로 가는 도중에 인당수라고 하는 위험한 수로가 있어서, 15세 되는 소녀를 생지로 집어넣고 수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소녀를 사러 다니는 상인들이 왔다는 말을 듣는다. 심청은 그
상인들을 만나서 자기의 몸을 팔기로 하고, 3백 석의 대가를 받아서 몽운사로 보낸다.
심청은 상인들과 같이 떠나는 날을 당하여 부친에게 비로소 고백한다. 심청이 몸부림치는 부친과 이별하고 상인들을 따라 배를 타고 떠난다. 심청은
인당수에 이르러 제수로 물에 몸을 던졌다. 이때 상제가 심청의 지효에 감동하고 용왕에게 명하여 심청을 용궁에 데리고 가서 보호하였다가, 옥연화에 싸서 물 위에 띄우게 한다.
상인들은 중국으로 가서 큰 이익을 보고 돌아오다가 인당수 위에 떠 있는 연화 한 송이를 발견한다. 그들은 연화를 건져가지고 돌아와서 국왕에게 바친다.
왕국이 연화를 완상하면서 오무라드는 그 연화를 헤치니, 그 연화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오는데, 그 미인이 바로 심청이었다. 왕은 아름다운 심청을
왕비로 삼는다.
왕비가 된 심청은 부친을 만나보고자 장님 잔치를 열어 놓고 전국의 장님을 초대한다. 서울에서 장님 잔치가 열린다는 소문을 들은 심 봉사도 장님 잔치에
참석하려고 노비를 애써 마련해 놓았다. 그러나 그 노비를 후처인 뺑덕어미가 훔쳐가지고 도망한다. 심 봉사는 하는 수없이 걸식을 하면서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간다.
심청은 장님 잔치를 베풀어 놓고 혹시 부친이 왔는가 해서 찾아 살피다가, 자석에 앉아 있는 부친을 발견한다. 심 봉사는 심청이 “아버지” 하고 부르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는 순간 눈을 뜬다. 이에 부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 이 작품의 목판본은 경판본과 완판본의 양종이 있고, 활자본으로는 1915년에 발행한 박문서관판(pp.84)을 비롯한 5·6종이 있다.
10.배비장전
서울에 사는 배 선달은 김경이 제주목사가 되어 부임하게 되매, 비장이 되어 따라가게 되었다. 그의 아내가 배 비장을 보고 제주도는 색향이니 부디 여색에 조심하라고 신신부탁하는지라.
“내 여하한 미인이라고 엿보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있으라.”
하며, 아내에게 맹세하고 떠난다.
제주도에서는 김 목사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정비장과 기녀 애낭과의 이별의 장면이 전개 된다. 김 목사 일행이 부임하여 날마다 궁기를 하나씩 데리고
즐겁게 놀았으나, 배 비장만은 아내와의 약속도 있고, 또 장부의 언약을 저버릴 수 없어 고독 하나 꾹 참고 지낸다. 사또가 같이 놀자고 불러도 몸이 아프다고 하며 나가지 않는다.
이에 사또는 배 비장을 훼절시킬 자가 없는가 하고 묻는다. 사또의 말에 응하여 나선 궁기는 한라산의 정기를 타고 났다는 미인 애랑이다. 사또와 애랑이
짜고는 이튿날 한라산으로 꽃놀이를 간다.
그 날 꽃놀이에서도 배 비장은 고독하게 앉아서 사또 일행의 취사·광태를 멀리 앉아서 비웃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산록에 있는 수풀을 내려보다가, 수풀
속 맑은 물에서 옷을 벗고 목욕하는 선녀 같은 여인을 발견한다. 그는 한없이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날이 저물어 하산하게 되니, 그는 그 여인을 그대로 두고 갈 수가 없어 잔꾀를 부려 배가 아프다고 딩굴기 시작한다. 배비장의 기미를 눈치 챈 사또는 미리 정해 놓은 방자에게 “배 비장의 복통이 진정되거든 모시고 오너라.” 하고는 하산한다.
배 비장은 사또 일행이 하산하자 일어났다. 그는 그 날부터 그 여인에 대한 생각이 깊어져 얼굴이 파리해진다. 그는 방자를 불러 체면을 무릅쓰고 하소연
한다. 이에 그는 방자의 주선으로 밤중에 그 여인의 집을 찾아간다. 그는 그 여인과 수작하다가 불을 끄고 자려고 한다. 그런데, 별안간 바깥에서 문을 열라고 외친다. 그는 여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남편이라 하므로 대경실색하고 여인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한다.
그 여인은 구석에 놓아 둔 큰 자루에다 벌거벗은 배비장을 들어가게 해서 구석에 세워놓고 문을 연다. 그 남자는 “내가 잠깐만 나가도 문 앞에 남자의 신이 놓이니, 오늘은 이 연놈을 결단내야겠다”고 하며, “저 방구석에 세워 놓은 자루 속에는 무엇이 들었는가” 하고 묻는다. 그 여인은 거문고가 들어 있다고 한다. “거문고면 한 번 타 보자” 하고 연죽을 가지고 코 있는 곳을 향하여 탁 친다. 배 비장은 그 여인이 거문고라고 하였으므로 코 소리로 거문고 소리를 내었다. 다음에는 배 있는 곳을 친다. 퍽 하는 소리를 들은 그 남자가 “거문고 줄이 터졌구나. 오늘 밤은 거문고나 치며 술 한 잔 먹고 놀자. 내 변소에 갔다 올 것이니
준비해 놓아라.” 하고는 바깥으로 나간다.
이 때, 자루 속에 들어 있던 배비장은 다른 곳에 숨겨 달라고 애걸한다. 그 여인은 골방에 있는 궤 속에 들어가게 하고 뚜껑을 닫는다. 한참 있더니 그 남자가 들어오면서, “어제 밤에 꿈을 꾸었는데 우리 집에 있는 궤를 버려야 잘 산다고 하니, 그 궤를 바다에다가 버려야 하겠다” 하고는, 배 비장이 들어있는 궤를
지고 나가서 물을 가둬 놓은 대청 마당에다 놓는다.
궤 속에 든 배 비장은 물소리가 나므로 바닷가에 온 줄 알고, 인제 사랑하는 처자도 만나보지 못하고 수중고혼이 되는구나 하며 울기 시작한다. 배 비장이
울다가 가만히 들어 보니, 뱃사공들의 뱃노래가 들려온다. 그는 뱃노래가 가까이 들려오자,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친다. 뱃사공들이 와서 “궤문을 열어 줄
텐데, 바닷물이 짜니 눈을 꼭 감고 기어서 배로 올라 오라”고 하며 궤문을 열어 준다. 이에 배 비장이 눈을 꼭 감고 알몸덩이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 배를 찾아 헤매다가 기둥에 머리를 탁 받는다.
깜짝 놀라는 순간에 배인 줄 알고 눈을 떠 보니 거기는 넓은 궁청 마당이며, 사또 이하 여러 사람들이 모여 웃음을 참느라고 배꼽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한다.
* 이 작품은 활자본으로 1920년에 발행한 신구서림본(pp.112)과, 김삼불이 발행한 국제문화관본이 있다.
11.빈녀 음덕
승모리의 한 부자가 2남 1녀를 두어 모두 결혼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시집간 딸이 마음은 착하나 가난하게 사는데, 오빠들이 마음이 좁아 조금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친은 그것을 항상 마음 아파했다. 세월이 흘러 모친은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부처님께 기도할 것과 형제 우애를 당부하고 죽는다.
이에 형제들은 장례를 극진히 마치고 모친을 위해 절에 가서 3·7일간 재를 올렸다. 절에서 떠나는 날 딸의 꿈에 모친 혼령이 나타나서, “너의 오빠들의 재식은 정성이 부족해 잘 먹지 못 했고 너의 정성스러운 음식을 잘 먹었다. 절에서 내려가다가 골짜기에 보면 헌 방아공이가 하나 버려져 있는데, 이것은 몇 천 년
전에 달나라 선녀 항아가 약방아를 찧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값진 보물이니 가지고 가서 팔아 재산에 보태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딸이 절에서 내려오다가 보니 과연 낡은 방아공이가 버려져 있기에, 가지고 와서 집에 두었다. 얼마 후 오빠들이 중국으로 배를 타고 장사하러 간다기에,
이 방아공이를 주면서 팔아 오라고 했다. 오빠들은 누가 불이나 땔 썩은 나무를 사겠느냐고 하면서도 가지고 갔다. 중국에서 물건을 다 산 다음, 여동생의
부탁이 생각이 나 방아공이를 시장으로 가지고 갔다.
한 사람이 보더니 사겠다고 하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10개의 보물 상자와 바꾸었다. 그러고 상자와 함께 열쇠 10개도 주었다. 이것을 싣고 오다가
형이 바다 가운데에서 열어 보자고 했다. 그래서 열쇠를 꺼내니 갑자기 배가 흔들리면서 열쇠 뭉치가 바닷물 속에 빠졌다.
집에서는 여동생이 오빠들을 기다리며 바닷가에 나가니, 갑자기 큰 잉어가 해변으로 뛰어올랐다. 여동생은 그 잉어를 회를 해 먹으려고 배를 가르니까,
뱃속에서 어떤 열쇠 뭉치가 나왔다. 이상하게 생각한 여동생은 열쇠를 보관했는데, 오빠들이 와서 방아공이 판 얘기와 열쇠 빠뜨린 얘기를 했다. 그래서
여동생이 가지고 있던, 잉어 뱃속에서 나온 열쇠로 여니 모두 열렸으며, 상자마다 값진 보석이 가득가득 들어 있었다. 이래서 여동생은 큰 부자가 되었고,
이후로 모친 얘기를 하며 형제 자래가 우애 있게 잘 살았다. (조선 후기)
12.풍파가 일기를 바란 사람
그전에 서울에서 서당에 댕기는 사람이, 글을 사회 교육 좀 받아야 하겠으니, 그래 세상에 나가서 사회 교육 좀 받을라고 세상 나와서 제주 저 부렀네. 제주 구경 상그(아직까지) 못해, 제주 도사가 좀 된가 하고 설라무네, 나라가 제주 도사가 떡 해 가지구선, 제주 갈라구선 전라도 나선를 타구선 제주도 인제
돌아갈 참인데, 선장이 나와서 빌고,
“풍랑이 심하지 않구선 해 달라. 아무리 사또 같드래도 장새꾼이 여럿이 있으니 같이 가야 하겠습니다.”
“아, 그래라.”
“내 혼자 가서 되겠냐. 그 장사꾼도 같이 가자.”
그래 여러 장사꾼하고 도사 그 양반도 타고 저 한복판에 가더니만, 풍랑이 일어나면서 물이 일렁거리미 아이 깐뜩하면 큰일 났다. 배가 배 안에 있던 사람이 모두 소동하니 그 선장 말이,
“가만히 깐뜩 말고 있으라. 웅렁거리지 말구선 있으문 내가 잘도 갈 테이까 염려 말구선 껀뜩 말고 있으라.”
그래더니 한 늠이,
“에이, 그 늠의 배가 얼른 둘러 고만 엎었으면 좋겠다. 이젠 바람이 많이 불어서 둘러 엎어라, 이까짓 늠의, 제미 죽으면 죽었지 니미.”
이래니. 그 뱃꾼 여러 놈들이,
“아, 저놈 죽이라. 죽고 싶으면 네 혼자 죽지, 왜 아 그러느냐. 니나 물에 빠져 죽던지 왜 배를 엎으라고 그래느냐.”
온통 소동 나니,
“그 젊은 그놈을 물에 쳐 넣십시다.”
“그놈, 그 소인은 물에 잡어 쳐넣겠다만, 그 차머 그랠 수는 읍고(없고) 그놈의 주리를 틀어 막어라, 그 놈이 먼 소리를 하는지.”
도사가 그랬더니, 이왕 바람이 멈추고 해서 무사히 갔단 말이야. 가서는 무엇보담도 그놈을 불렀지. 불러서 잡아다 놓구선,
“이놈, 니가 죽고 쉬으문(싶으면) 니 혼자 빠져 죽지, 이놈 니가 여러 사람이 주세궁창에 빠져 넣을 수 있냐. 이놈 거게 그대로 다리가 편하겠느냐?”
“아이, 그렇지 않습니다. 지가 뭐니 살림이 괜찮습니다. 괜찮안 것이 장사를 하니, 하니 바람 불라 그러니 비 오구. 비 오라 그러니 바람 불고, 똑 제 말하고는 반대요. 반대니 이번에도 지가 배가 엎어져라 그러니 안 엎어져 졌습니다. 지가 여적찌 비 오래문 제 말과는 꼭 반댑니다. 그래 그랬습니다.”
“아 이늠아, 니가 재수가 없어서 그렇지.”
그래 고만 그늠을 거서 나가면 당대 아주 많이 죽도록 때릴라고 하더니만,
“에이, 그만 내버려 됐다.”
[현남면 설화 94]
13.감이 전래 된 유래
옛날 노인이 서울서 벼슬을 해가지구서 제주도를 갔어. 제주도 가서 3년을 벼슬을 다 살고 인제 오는 길인디. 그 선인들이랑 배를 타구 건너 오는디, 선인들이 가만히 생각해 봉게 풍파를 만나가지구서 배가 다 파산 되서, 배 쪼각을 만나가지구서 어느 섬이다, 떠내려가다 어느 섬이가 걸렸어.
인제 그 베슬허던 노인만 살았지. 그 섬으로 들어가서 먹을께 있나 산이라서 도토리, 밤 그렁 거 주서서 먹구 몇 달 몇 해를, 배가 있(없)으니께 멧 해를 살고 있는디, 입성(옷)두 다 한 삼 년 된 게 섞어서 떨어져서 빨개 벗게 되구. 상수리, 도토리, 밤이나 주서 먹으니까 몸이 털이 나서 무슨 짐승같이 생겼드랴.
그래 인자 잘 띠두 없으니께, 어디 구덩이를 손이루 파서 잔대 풀을 뜯어서 놓구서 겨울을 지내구. 그 열매 감 같은 열매를 따 먹구 지내는디. 그 때는
감이라구 해두, 그 열매를 감 같은 열매를 몰르구. 무슨 열매가 있는디 참 좋드라 이거여. 그래 잔뜩 따다 굴간이다 하나 놓구 그 눔으루 먹구 살어.
근디 인자 어느 핸가는 배가 참 쪼그마한 배가 멀리 뵈는데, 그 배를 불러야 겠는데 부를 수가 없응게, 나뭇잎사구를 달어 가지구 남구(나무)에 가서
산꼭대기서 내둘러 쌌거든. ‘배가 오라는 거라는 거구나.’ 싶어서 배를 몰아서 그 섬이를 당도하니까, 그 사람두 같지 않은 원숭이 같은 짐승이,
“나 좀 살려 달라. 나 육지에 내다 주믄 그 값어치를 할 팅게 좀 내다 달라.”
“그러라, 뭘로 값어치 할 꺼냐?.”
“여기 굴간이 뭐가 있는디, 그거 같이 좀 나르자.”
날르는디 봉게는 그게 월화라는 감이디. 그때는 감인지 뭔지도 모르구. 그때는 열매라구만 알구 한 배 쳐 실었겄다. 싣구서 제주도 어느 섬이서 육지루
나오는 거지. 나오구 보닝가, 나오다 가만히 뱃사람들이 생각해 봉게,
“저 사람을 없애구. 사람 같지 않은 짐승인디, 저 사람을 혓바닥을 끊어 가지구 저 눔을 재주를 가르쳐 가지구 육지 가서 재주를 부려서 돈을 벌겄다. 또 감,
월화라는 저 눔을 팔어 먹구 양거이 소득이것다.”
그런 마음을 먹구서 뱃놈들이 속닥속닥 해가지구 몽땅 한꺼번이 올라와 가지구, 묶어 매달구서는 집게루다 혓바닥을 끊어버렸어. 그리구서는 말두 못하지, 코를 꿰서는 영락없이 짐승이더랴. 배에다 내다 놓구서 날마다 호차리루 때려 가믄서 재주를 가르치는 거여. 긍게 나이두 많겄지. 그렇게 있다 봉게 벼슬두
할만치 하구 나이두 많이 잡숫구 그런 분인데, 그렇게 생식을 하다 보니께 짐승이 된 거지.
그만 갈쳐 가지구 육지를 당도해 가지구서는, 목포 같은 섬이 딱 당도해 가지구서는 월화라는 감을 선인들이 죄다 팔았어. 이 사람을 끌구 꽹과리를 치구
큰 도시를 한 바퀴를 삥 도는데, 그 사람 끌고 도는 짐승을 보니께 두발루 걷지 말구 니발루 걷네. 보니께 이거 곰두 같구, 원숭이두 같구, 참 털이 난 사람두
비슷하구 이상하거든. 그래 곡마단을 자리 벌려 놓구서 꽹과리를 치구 야단났거든. 구경꾼이 참 굉장히 유인했어.
그래서 돈을 던져 가지구 돈을 꽤 많이 벌었단 말여. 그래 그 지방이서 다 허구서는 지방을 또 옮겼지. 어디루 오냐면 차차루 목포 같으믄 광주루, 광주
같으믄 송정리루, 송정리 같으믄 이리 같은 디루. 도시를 자꾸 넘어서 돈을 벌면서 서울까지 올라가다 봉게 몇 해가 또 걸렸드랴.
그래서 서울 같은 디 가서, 이곳 저곳이서 곡마단을 돌린다 허니께 구경꾼이 굉장 햐. 그래 어느 대감댁이서는 하루를 놀려 달라구 요청이 들어와서는 하루를 놀리는디. 거 어떤 부인이 보니께 엣날이 자기 영감 생각이 나.
“그 어서 왔냐?”
“섬이서 왔다.”
가만히 생각해 봉게, 풍파 만나서 자기 영감이 실종됐다는 얘기는 들었는디, 이거 어떻게 보니께 영감 비슷해. 그 영감은 재주를 한 바퀴 돌구, 한 바퀴 뺑
돌아 자기 부인 곁이를 가며 말을 못해서 그렇지 자기 마음은 심중이 생각이 있어. 자기 부인인디 말은 통하지 못하구 그러니께. 이 영감은 애석한 생각이
나 지나가면서 눈물 한 번 찔끔 흘리구 돌아가구, 눈물을 찔끔 흘리구 돌아가구 해전 눈물을 찔끔 흘리구 돌아가.
그 부인이 곰곰 생각해 봉게 자기 영감 같기두 헌디, 자기 영감이 설마 저러랴 싶어서 말두 못하구 이상히 생각허며, ‘참 이상하다. 영감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병신이 될 리는 없구. 무슨 좀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싶어서는 저녁 때 해전 다 놀리구서. 그 부인이 그렁게,
“내일랑은 우리 집이다 좀 놀려 달라?”
“아 그러시라.”
그래 인자 저녁 때,
“우리 집으루 가자구. 우리 집 광 있응게 광이다가 뒀다가 내일 와서 놀려 다라.”
그래 인자 광이다가 딱 놓구서 쇠를 채워 달라구 해고서는 떠났겄다. 저녁이 저녁을 짐승이 됬던 사람이 됬던 대접을 해얄텐디, 광을 문을 따구서 저녁을
채려갖구 가서 밥을 줄라니께, 밥은 고사하구 손을 잡어. 자기 부인 손을 잡더니만 막 눈물을 흘리구서,
“지필을 가져오라.”
지필을 가져 오라구 그렁게 지필묵을 가지고 갔겠다. 갖다 중게 옛날이 배던 솜씨는 있어서 지식이 능란하구 그렁게, 지식은 일필휘장 해서는 굉장히
만리장성을 썼어. 그래 그 눔을 다 쓴 뒤에 아들을 오라구 해서,
“야, 이런 이유가 있응게, 이걸 좀 보라.”
아들이 죽 읽어 보니께, 자기 아버지가,
“그때 베슬을 살다 오다 풍파를 만나 어느 섬이다 가지구 이렇게 고생을 하구 있다. 월화라는 그 감두 따서 한 배 싣구, 어느 날 그 몇 해를 기다리구 있다
보닝가, 배가 한 지나갈 때 그 배를 불러 가지구 육지루 내다 달라구 허구 그 월화를 주기루 약속을 했는디, 이눔이 오다가 이러쿵저러쿵 해가지구 샛바닥을 끊구 재주를 갈켜 가지구 코를 꿰서 이런 정도루다가 해가지구서는 목포서부텀 여까장 한 이삼 년 걸려서 여기 오는 길인디, 여기 오나 보니께 우리 집
마누라가 누구요, 우리 아들 이름이 누구요. 아무 사람이구 외가가 누구고.”
아들이 전부 얘기 하는 것 보니께 틀림이 없이 자기 부모여. 그래 내다 놓구서는 막 울구짜구 북새기 막 났지.
“시상이 이럴 수가 있느냐?”
죄다 이렇게 해서 싹 걸어서 목욕을 시키구. 얼굴은 멘도칼루다 죄다 멘도(면도)를 시키구 갓 망건을 입성이 있응게, 예날 그 입던 것을 입히구 관자니 뭐니 싹 허니께 호락한 선비가 됐다 이거야. 그래 아들들이 자기 어머니 보구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해쌓더니, 종덜을 전부 다 불렀어. 불러 가지구서는 전부 약속을 딱 해 놓구서 아침이 오기만 기달리구 있지. 그 선인들 아침이 딱 와 보니께 기달리는 판인디, 문 열구서 싹 들어오니께 전부 달아 놓구서,
“족 잡아 묶어라.”
그렁게 종들이 죄다 결박해서 묶어 놨네. 묶어 놓구서 사실을 얘기를 허라구 고백을 받는디, 뭐 얘기 안 헐 수 있나. 본인이 만리장성을 내놓구서 사실이
이렇다는 얘기를 들어 꿰니께, 어느 양이라구 졸졸 얘기 했지.
“그래 돈 얼매 받구. 월화 내다, 감 판 값인디 얼매 받었냐?”
“얼매 받았다.”
“재주, 여기서 몇 해 돌려 열매 받었냐?”
“얼마만치 벌었다.”
“그 돈 다 어쨌냐? 가져 오너라.”
다 바치게 해 놓고 나라에다 고를 했어. 사실은 이러쿵저러쿵 했는디, 임금이 그 얘기를 듣고서 그 선인들에게,
“천하 죽일 놈들이구나. 이럴 수가 있나. 시상이 벼슬 살구 가는 이를 육지다 고이 내다 모시지 않구, 그눔덜 사형시키라.”
그 사람덜 사형시키게 되구. 그 영감님은 나라에서 불러서 더 고관대작 큰 벼슬을 주구, 아주 희귀한 일이 있었더라는 것이 있는디, 그 열매가 뭐냐 허냐면,
우리 땅이는 감이 없었는디, 그때 처음으루 그 감이 지금 와서는 월화라는 감여. 월화. 월타도에서 왔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 종류가 감이랴. 월화라는 감이
아주 좋다는 감여. 월화라는 감이 월타도 섬이서 오는 열매가 몇 해 종류를 육지 땅이 와서 하구 보닝께, 그때 더 좋은 종류가 되었다는 거지.
부여군 내산면 저동리 미암부락, 방인선(65, 남) 1983. 2. 3.
14.무식한 자와 선장의 흑심
중년 얘기 해야지. 옛날이라고 헐 것도 읎고 중년여. 여기로 일르면 항구라고 치면 갱경(강경)여. 갱경에 항구가 돼 있는데, 배 하나 가진 사람이 있어. 선주가 이 배를 띄웠어. 이 배는 뭘 허는 배나 바다 다니며 고이기(고기) 잡어다가 팔아서, 전부 선장도 주고 뱃동무들을 다 주는 겨.
그런데 배 임자네 집 졑이(곁에) 불과 두 집, 시 집 건너서 사는 사람이 어려워. 그런게 이 사람이 선주에 집은 부자이고 만날 거기 가서 비지락 걸이나 마당 씨설이(청소)나 해 주고 밥 한술씩 으더 먹고 댕겨. 그래 자기 안식구도 참 있는디 기가 막히거든.
시상에 말이여 다른 사람 말이여, 우리 바깥 양반 댕기면서 주객처럼 마당 쓸어주고 씨설이도 다 해주는디, 다른 사람은 뱃동무로 얹어가지고서 한 번 고이기 잡어 오면 쌀 몇 가마씩 팔어. 이것 환장 허것어. 시상은 우리 냄편을 워찌 못 허느냐. 그런게 하루는 참 남녀 간이 유별이지만, 그 선장한테 그 안식구가 갔어. 집(계집)이 일색여. 이쁜 여자가.
“선장님!”
“왜 그러시오.”
“예. 우리 바깥 남자가 워년이 자질이 못 나서 선주네 집이 와서 마당도 쓸어주고 마두 이러지 않아요. 허닌게 우리 냄편 좀 그 배여다 얹어 주어 고기
잡어가지고 오면, 다른 사람들 쌀 한두 가마씩 차리는디, 나도 한 가마만 차려오면 우리 식구 먹고 살잖아요.”
사정을 해. 가만히 생각헌 게 실지 그렇거든. 즤집이 와서 고궁살이를 허는디 그 사람 고상시킬까시러.
“아! 알었다.”
그래서 그 배동무들을 전부 불러놨어. 불러 놓고서 상의들을 했어. 배동무들을 보고서 하는 소리여.
“야. 니의가 이번이 가서 고기를 잡던 안 잡던 내가 한 밑천 준다. 그러닌께 아무개를 동무로 실어라. 어려운 사람 그 씨설이 허는 사람 얹어라. 얹어서 좌튼
어디 가서 그냥 무인도 같은 디 어따 갖다가 집어 냅쓸고 오너라. 그러면 고기 안 잡어도 몇 곱을 주마.”
이 남자가 그 여자 욕심을 내서 그러는 겨. 그래 참 배를 탄다고 헌게 그 안식구가 좋아, ‘이이구 인자 우리 냄편도 내일 모래 며칠 지나면 쌀가마나 팔기라’고 말이여. 좋아 혀. 그런게 그 이튿날 참 배 고사를 지내고들 북을 쳐 ‘둥둥’ 울려가면서 돛대를 달고 말이여, 참 만경창파에 배를 띄고서 떠나는 겨. 그런께
안식구는 좋아. ‘아이구, 그저 이번 우리 냄편이 갔은게 쌀 한 가마나 두 가마나 벌어가지고 올 것(웃음)이다.’ 말이여. 그래 이 사람들은 선주허고 짠 일이
있은게 무조건 간기여. 가서 그 사람 읎는 섬여. 무인도를 가서 물지게를 내주면서,
“야. 요기 옹달샘이 있다. 물이 읎어. 지금 요짝이 옹달샘이 가서 물 좀 한 지게 짊어가지고 오너라.”
그래 허란대로 허얀게, 물지게 지고 가서 물을 짊어지고 온 게 배를 똑 띄어버렸네. 조판을 대고.
“아이, 나는 어떻게 허라고 그러냐?”
“에, 우리 저기 잠깐 갔다 올던게, 여기 있어라.”
그래서 배는 그답 띄어 가지고 그냥 갱경으로 오는 겨. 이거 환장허기지. 이것 요때 저 때도 밤새도 안 오네. 그 이튿날도 안 오네. 그 그 이튿날 안 오네.
며칠이 돼도 안 나와.
“이제 내가 죽을 고비 들었구나. 나도 문생인디 사람이 먹으면 안 죽어.”
흙이라도 먹으면 안 죽어. 그러닌게 무인도에서 산중이 돌아댕이면서 쥐처럼 말이여, 도토리 상수리 뭐 이런 것을 전부 갖다 저장을 혀. 인자 즤을기(겨울)
먹고 살라고. 그러자 고렇게 즤을기 먹을 식량을 준비허는 겨.
그래 이짝이 자기 마루라는 ‘아이구 이번이 오면 우리 낭군, 우리 냄편이 쌀 가마나 벌어올텐니’ 허구선, 하루는 딱 나서서 보니께 저기 배가 온다 이거여.
‘아이구 저게 우리 선주의 배라’고 말이여. 참 좋거든. 지금이니께 그렇지 그전이는 남녀유별이라 남자 여자 술 않는 시절이었어. 그런게 그 울타리 넘어로
보닌게, 그 배가 쏜살같이 들어오는디 갱경이 쇠턱이다 딱 댄다.
대닌게 이 사람 저 사람 다 니리는디 자기 냄편은 안 니려. 이것도 환장할 일이지. ‘이게 웬 일인가’ 허고 말이여. 다 봐도 자기 냄편만 안 니리고 배동무는
다 니렸어. 그래 ‘이것도 복이라고 말이여 어떻게 됐나’ 허고서 생각허는 겨. 그 선주한티 간 겨. 선주보고 또 말을 허는 겨.
“선주님! 다른 양반들은 다 니리는디, 우리 집 양반을 아니 니리오.”
“아이고 참 안 됐요. 안 됐는데 워넝이 그 사람이 배에 서름애읏(서투르다). 그 배를 타고난 게 풍파가 사난디, 배가 뭐 떠메이는디 말이요. 아이 그 사람이 왔다갔다 허다가 강물로 똑 떨어졌네요. 그래서 이렇게 됐요.”
배동무들이 이렇게 소리를 혀. 그 얼마나 기가 막힌 건가. 거기서 대성통곡을 허고 우네. 그래 선주허고 그 동무들은 다 짰은게. 그런게 그전이는 고기
잡어오면 한 가마 줬지만, 그 사람 그렇게 놓고 온 뒤로 두 가마씩 주는 겨. 얼매나 좋겄나.
이 사람이 즐기(겨울) 먹을 것, 도토리 상수리 뭐 나무 뿌랭이 뭐여서 전부 칡넝쿨 뭐 이러서 즤을기 무려 해야지. 부존을 허야 살지. 그런게 죽을 때 죽더라도. 그렇게 저렇게 근 십 년을 지내는 겨. 그런디 하루는 선주가 그 마누라를 불렀어.
“여보! 당신 남편이 명이 짧었던, 배를 탈 중 몰라서 그랬던 내 배를 타고 이런 사고가 났으니, 내가 당신을 그냥 둘 수가 읎소. 당신 먹고 쓰는 것 일체를 내가 다 대것소. 허지만 기왕이 댈 봐야 나 허고 삽시다. 내가 대는 데야 뭐 살으면 어떻소.”
그런게 그 여자가 가만히 생각헌 게 그도 그렇거든.
“그럽시다.”
그래 둘이 사는데, 아 이놈은 무인도 섬이서 혼자 앉어 만경창파지. 어디 갈 디가 있나, 올 디가 있나 말이여. 하늘만 쳐다보고 살어. 하루는 늦다없이 풍파
일는디, 바대물이 말이여 참 하늘 닫나시피 앉은디, 어떤 배 하나가 쏜살같이 무인도로 막 달려드는디 마음이 참 반가워. 저 배가 나 있는 디로 오면은 참
좋겠다. 그런디 그 배가 떡 닿어. 다닌게 그 사람 떡 나타났어. 한 십 년 간을 밥도 안 먹고 뭐 허닌게 털부지네, 사람도 아니여. 아 그런게 배를 딱 댄게 그저
비는 겨.
“나 좀 그 배다 실어다 육지다 놔 달라.”
아 선장이랑 배동무들 다 세상에 못 보던 짐승여. 거기 실었다가는 배동무 다 잡어 먹으면 어떻게 혀.(웃음)
“어이 안 된다고. 저것 실었다는 우리 다 잡어 먹으면 어떻게 허냐. 안 된다.”
그래도 나이를 먹은 사람이 어디던지 낫다는 겨. 나이 제일 많이 먹은 선장이,
“야. 우리 넷이 저거한티 죽겄니. 저게 애걸복통 허니 우리가 실어 보자. 저게 사람은 아니여. 헌디 말을 허는 것 보면 사람은 사람이다. 그런게 실자.”
그래 배에서는 선장 그만이거든. 선장 말은 듣고서 조판을 놨어. 올라오닌게 그래도 미서서 배장이 이렇게 칸이 있잖여. 무서워서 거기다 가두어 버렸어.
가두고서 쥐(자기들)까지 상의하는 겨.
“이것 저걸 잘 허면 우리 돈 벌 수 있다. 그런게 동물도 말이여 이사(예사) 동물이 아니다. 사람도 되고 뭐도 된다 듯이 동물이 이상허다. 저걸 어떻게 돈 벌
궁리부터 허자.”
그래 뱃장 그 가둔 디를 이렇게 열으면서,
“섯(혀)바닥 내 놔라.”
허라는 대로 해야지 어떻게 혀. 혀바닥을 요렇게 내밀은게 칼로 똑 쳐버렸어. 그런게 말이되?
“랄랄 .....야” (청중웃음)
말허는 게. ‘랄랄...’ 그래 섯바닥을 똑 쳐거든. 섯바닥 때문에 말해. 섯바닥을 똑 쳤네. 그러니 ‘랄랄......’ 혀. 그러니께 즤까지 선장허고 동무들 허고서,
“야 이놈을 싣고서 군산을 가자. 우리가 광목 두 통만 뜨면 포장을 장만헌다. 그러면 두 통 장만해서 요것 동물으로 끄미면 안 들어올 놈 없다.”
참말로 광목을 떠서 포장을 맹길어서, 포장 뺑 돌려 치고서 이걸 갖다놓고 본게 이상한 동물이라고.
“아니어, 밖이 나가서 안 들어왔어.”
“안에 들어가 봐. 참 이상한 동물여.”
안 들어간 사람 읎어. 그럴 꺼 아니여. 아 그런게 물 묻은 바가지 깨 늘어 붙듯이 허네. 그래서 그적이 군산서 며칠을 놀았던지 놀아서 돈을 잔뜩 벌었어.
“자! 이리로 가자.”
그래 이리 와서, 또 포장을 치고 헌게 거기도 여전 혀.
“야! 참 동물도 이상한 동물여. 그런게 들어가 봐.”
뭐 친구찌리 안 들어가거나, 전부 그래 연줄연줄 해가지고 거기서도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어. 그래 이 사람이 다 알어. ‘이건 군산이다. 이건 이리이다.’
이걸 알어. 허지만 말이 돼야지. ‘랄라리...’ 강갱이 오는디, ‘이것 내 고향이다.’ 말이여. 저 떠난 디여.
그래 이런 지금 호랭이, 이렇게 철망 씌우고서 철장으로 ‘으흥’ 허는디 있지. 이게 놀리는 겨. 굿패, 그런데 이걸 철장을 폭 찌르면 (역)부러 ‘으’, 부러 짐승
노릇을 허는 겨. 그런게 갱경이 와서도 돈이, 그런디 꽤밭 꽤 들어불득기 허는 겨. 그런게 이놈이 철장 안에서 가만히 생각해 본게, ‘내 고향인디, 이것 여기
이게 지필고도 죽기 생전 철장 안에서 죽는다.’ 그런데 그날 저녁이 이놈들이 군산서 돈 벌었지, 이리서 돈 벌었지, 갱경이 와서도 돈 어마어마 허게 벌었어.
“야. 오늘랑 우리 초저녁부터 술이나 먹고 전부 재미있게 놀자.”
그런게 그날 저녁이 말이여 동무들허고 그 뫼여 가지고 술이나 고기니 잔뜩 먹고서 새벽녘에 전부 골아 떨어졌네. 저기가 자빠져 자고, 저기가 자빠져 자고. ‘요때 내어 고비를 못 타면 죽는다.’ 그런게 있는 심 읎는 심 해가지고 그 철망을 때려 부섰어.
자신이 발길로 찻던 어떻던 해가지고 철망을 부서 놯는디, 나서서 땅허니 나서서 자기네 집을 가는 겨. 그 암만 10년 됐어도 자기네 집 몰르것나. 자기네 집을 가닌가 지가 떠날 적이, 자기가 떠날 적이 장꽝(장독)이다 천도복숭아 하나를 심고 간 일이 있어. 그것이 10년 컸으니께 많이 컸다 이거여. 그런게 호랭이 가죽, 저 사람은 아니지. 이렇게 입고서 인자 천도복숭아 가서 올라갔어. 올라가서 가만히 있은게, 새벽이 자기 마누라 참 청수를 떡 떠가지고 오더니 그 천도복숭아 앞에다 놓더리 두 무릎 꿇고,
“그저 죽은 혼신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
이렇게 빌어. 그런게 저 천도복숭아 앉은 사람이,
“아! 이렇게 살아난 것도 우리 마누라 덕이구나. 우리 마누라가 저렇게 공을 드렸으니 내가 이렇게 나왔구나.”
그래 보니께 천도복숭아 세 개가 열었드라네. 꼭 시 개 열어드래. 그래 하나 따 먹어, 두 개 따 먹어. 두 개 따 먹은게 대가리가 근질근질. 시 개를 마저 따 먹어. 아 그런게 바빡 긁고 싶어. 박박 긁은게 허물을 벗는디 홀랑 벗었어. 인자 혀만 읎지 사람여. 혀손바다닥도 질었지. 그 짐승 가죽도 홀랑 벗었지. 그러니 그
호랭이 가죽인가 그 가죽을 똘똘 말아다 곁이다 들고서 갔어. 자기가 생각허는 겨.
“이게, 자기 마누라가 저러는데, 내가 느닷없이 찾으면 우리 마누라가 감소(기절)혀. 에 암만 뭐해도 죽은 사람이 찾아 봐 감소여. 죽은 귀신이라도 만나냐!”
이렇게 벗었지만 가만히 인자 연구 해. 이걸 어떻게 허면 우리 안식구를 놀래지 않고 말이여 서로 만나서. 그런디 그날 저녁이가 해필 지사더라네. 그 배타고 나간 날 이드랴. 그런게 물동이 청수 떠놓고서 빌고서는 들어가더니, 주밥 차렸단 말이여. 고걸 차려놓고서 인자 절 허고서 비는 겨.
“지 냄편 죽은 혼신이래도 만나 달라.”
이게 투전여(투정여). 그러니 싸줌문(싸립문)께 가서 찾으면 우리 마누라가 놀래서 저 기암 핼터고. 이게 천만해도 무슨 꾀가 않나. 그래도 헐 수 읎어 이것 찾으야지. 뭐 안 찾고서 도저히 안 되겠어. 그런게 사룸문께 가서 불렀어.
“여보! 여보!”
이렇게 푹 엎드려서 정성드리다가 가만히 들어 본게, 아 자기 문 앞에서 ‘여보. 여보’ 소리가 나거든. 그래 깜짝 놀래가지고 일어나 가지고 나갔어. ‘내가 죽은 귀신 만나자고 내 소원허는디, 우리 냄편 목소리다.’ 말이여. ‘여보! 여보!’ 그런게 10년을 자기 냄편 목소리를 모르겠어. 나갔더니 자기 냄편이 우뚝거니 서,
“나 산 사람이요. 나 죽은 귀신도 아니여. 그래 이것이 오늘날까지 공을 보니께 당신 덕으로 내가 살어 여기까지 왔소. 그런게 놀래지.”
신신 부탁허네. 그러니께 인자 여자도 안심을 헌 겨. 그러고 난 뒤에 둘이 들어가서 참 안서(안심)을 허는 겨. 여자가,
“내가 죽을 죄 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니여. 죽을 죄 지은 것을 말하자면 그 선주에게 몸 주었다는 겨. 그렇게 돼서 그 사람이 멕여서 살려서 오늘까지 살었고 그렇지 않으면 벌써 죽었어요.”
사람도 가만히 생각허닌께 그것도 은인여. 죽일 때는 죽일라고 했지만, 그 자기 식구를 믹여 살렸은게 그것도 은인여. 그래 그 이튿날 날이 샜네. 그런데 복패 이놈들이 밤새도락 술 쳐 먹고 자고서 이튿날 일어나는 게 그게 읎네. 노다지가 읎어. 그게 노다지지. 그런게 뭐 불컥 했어. 그런게 거기 사장이 원님에게로
상소를 했어.
“나 이런 짐승을 잊어 버렸으니께, 이 짐승을 좀 찾어 주시요.”
이런 상소를 전했네. 그런게 이 사람은 그 가죽을 곁이 물속이다 감추었던가 어쩌던가 원님한테 갔어. 원님한테 가서 사실 얘기를 족 헌 겨.
“내가 이만저만해서, 이렇게 저렇게 참 무인도 가서 이렇게 고생허고, 이렇게 해서 혓바닥 짜르고 이렇게 해서, 저 사람들이 돈을 수억대 벌었습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힘이 더 나가지고, 내가 여차이 많지만 허고서 천도복숭아를 시 개를 따먹었더니 내가 허물을 벗고 혓바닥이 질었다.”
이랬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다 해 버렸어. 그래 그 이튿날 상소를 받고 그놈들을 불른 겨. 그런게 좀 잘 딜겨. 죽 왔지. 말 들어볼라고.
“그래, 그 짐승은 어떻게 해서 잊어버렸니?” (웃음)
“암디, 그 철망 속이다 넣었는데 아이 부수고 나갔다.”
“허허, 그럼 그것 찿아야지. 그런데 그 짐승을 디리꼬 댕니며 얼매나 돈을 많이 벌었니, 못 벌었니?”
“예! 쪼금 벌었어요.”
“얼매나 벌었니?”
“그저 지금 돈으로 아마 돈 억이나 벌었어요.”
“그려.”
돈 억이나 벌었다 이런다 이거여. 그런게 그 놈들을 불러다 놓고서는,
“그 짐승 찾으면 어떻게 헐레.”
“아. 또 돈 벌어야죠. 뭐 그 짐승만 있으면 우리 돈 잘 벌어요. 그런게 짐승만 찾아주세요.”
“그래 그러면 니가 돈을 그만치 벌고, 네 몇 동무 간이 다 밥 먹고 살것다. 그런디 그 짐승은 어디 갔나. 나 니들 한 번 면회를 시켜 주마.” (웃음)
와 보니께, 사람인디 뭐 면회 해 보았자 얻을게 있어.
“나 모르는 사람이라.”
구찮아서도 나는 모르는, 사람이 그것 몰르지.
“그러면 그 짐승 허물을 볼래.”
“짐승 허물 보면 짐작해요.”
굿패 그 동무들이 그래.
“가 가져 오라.”
원님이 허니께, 가서 짐승 껍질을 훌랑 가져 왔네.
“이것 봐도 너의 기억에 안 나니?”
보닌게 그 짐승 허물여.(웃음) 그것 환장할 일이지. 그래서 그놈들을 전부 잡어 놓고,
“내일 10시까지 니의 하나피(하나당) 3천만 원씩 전부 갖어 와야지, 3천만 원씩 안 갖어 오면 니는 평생을 징역 받는다.”
하이 이것 똥 잠뱅이를 팔고 말이여, 속것 팔고 하여 가지고 다 3천만 원씩 가져 오면은, 사람이 한 10여 명 송(충분)혀. 그러면 3천만 원씩이면 열만 해도
3억여. 그래 3억을 딱 받아 놓고 그 짐승 된 사람보고,
“야, 이놈 갖으면 죽기 생전에 잘 산다. 이놈 가지고 니 내오간 가서 잘 살으라.”
그래서 그놈들 쫄딱 망허드라에. 그런게 일이 있어.
부여군 부여읍 왕포리 경로당, 김용길 (71, 남) 1983. 2 .4.
15.옹기그릇 값을 해결하여 준 원님의 지혜
어떤 사람이 옹기짐을 짊어지고 딱 갔단 말여. 가서 딱 바쳐 놨는디 바람이 일어나가서 냅데 옹기짐이 자빠져 버렸어. 자빠졌으니 속수무책이지. 그 고을
원님한테 소청을 했어.
“사실 이렇게 해서 옹기짐을 다 부셨습니다. 이걸 좀 어떻게 받게 좀 해주시죠?”
그래 바람이란 놈을 어디를 찾을 수가 있어야지. 그놈이 딱하기는 딱혀. 딱하다고 어쩐다. 그 앞이 강에서 뱃놈들 다 잡아들였어. 뱃놈들을 떡 잡아놓고선,
“너! 어디로 가는 배냐?”
“내려가는 배일수다.”
“너! 내려가는 배는 어떡하면 쉽게 가느냐?”
“바람이 있으면 쉽게 갑니다.”
“너 바람을 좋아하는구나?”
“바람이 좋습니다.”
올라가는 뱃놈을 붙들고서,
“너 아무데로 가는 너! 어떻게?”
“올라가는 바람이, 웃바람이 시면 그게 좋습니다.”
“니들은 다 바람을 좋아하는구나!”
“바람을 좋아합니다.”
뱃놈들은 바람 불어야 바람 타고 가니께,
“너 이놈들! 당장에 옹기값 물으라.”
그놈들한테 옹기값을 받아주더랴.(웃음)
부여군 세도면 청포리 노인회관, 임충선(76, 남) 1983. 2. 3.
16.하늘이 도운 효자 장상재
저가 사는 임원선이라고 있어. 임원선이 우리 일가집이 임원선이 할아버지라는 양반이, 임 상잰디 장(늘) 상재여. 부르기를 여기서 장산재로 불러.
어째서 그러면 자기가 어려서, (부모가) 죽었을 적이 부모상을 못 입었어. 어려서 조실부모했기 때문에 자기 죽기 전에 상옷을 꼭 입어. 상옷을 떨어지면 또 해 입고 그게 장 상재여. 임 상재가 그래 장 상재여. 그래 상이 장 상재지. 장 상이지.
그 어른 내외하고 아들 요섭이라고 있어. 원선이 아버지인 요섭이란 분하고 니(네)식구 사는디, 칠월 달이 양식이 떨어졌어. 양식이 떨어져 갖고선 양식을
구경을 못 혀. 아무리 댕겨 봐도 삯 거리라도 읃을라도 영- 구경을 못 혀.
그래 이틀을 굶었어. 그런디 아랫방 가서 아버지 어머니 딱 드러누웠지, 웃방에선 자기 부인이 딱 드러누웠지. 그래 양식을 어떡할 수가 있냔 말여. 그래 이런 정성이 있느냐 말여. 그런 판인디 고 건너서 이 서방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개! 아무개!”
“여기 자네! 오늘 일 안컬랑 일 좀 오소.”
그런디 부술비는 실실 내려.
“아, 이렇게 비 오는디 무슨 일을 혀.”
“아이 비 많이 오면 못 허지. 그 일 안 하걸랑 오소.”
우선 이틀을 굶으닌께 가서 자기라도 살어야 겠어. 밥이라도 읃어 먹고 살어야 할 꺼 아닌가 벼. 그래서 아침이 아침을 먹으러 가본 게 한 여러 명이 밥을
먹는디, 이전에는 둘이 이렇게 해가지고 먹어, 이전에 겸상.
돈 있는 사람이면 칠월 달이면 찰밥을 해 먹거든. 찰밥 애껴서 칠월 달에 먹은게, 찰밥을 수북수북 덮어 푸는디, 그 밥을 들구 나왔으면 닛(넷)이 먹었을러도 우선 죽기는 면하것어. 그러나 차마 들구 나올 수가 있느냐 말여. 여자 같으면 들구 나오는데, 남잔 절대로 못 들구 나와. 이틀 저녁 굶었응게 어쩌다 봉게
밥사발이 다 없어져 버렸어. 그저 쳐다만 봐도 없어져 버렸어.
그때 한 나절을 하는디 비는 안 오네. 오덜 안 해서 품은 안 맺어. 한나절 일 하고서 점심을 떡 들고 나올 예산여. 나올 예산하고 떡- 가서, 찰밥이 수북수북한 점심도 들고 나온다 생각만 했지 못 들고 나왔단 말여. 그 밥은 없어져 버렸어. 그 왜 해는 다지고 일은 다 끝났어.
저녁을 주는디 저녁을 들고 나와야 옳어. 두 끼 먹었응게 아무리 부끄럽다 해도 들구 나와야 되는디, 그렇게 한다고 하면 거기서 다른 사람은 더 떠다 이렇게 좀 더 줄 것 아녀. 헌디 점심 저녁이두 비위가 없어서 못 들구 나오구선 그냥 없어지고 말았어.
그러고 나서 뭐란게 안방에 아버지 딱 드러눴지, 웃방에 자기 부인 퍼질러 드러눴지. 그래 기맥힐 노릇이지. 자기는 하루 그놈 먹었응게 살았응게, 뭐 잠이
오느냔 말이여. 그래 비는 떡 오드란게 비가 사뭇 오더니 들쿠 퍼붓어.
떡 나서. 새벽이 어머니 아버지 돌아간 것 볼 것도 없고 자기 아내 죽은 걸 보고 죽어버려야 것어. 자살해 죽을라고 그 앞에 작은 갱구댕이라고 있어. 따라가 봉게 붉던 물에 사무 뛰어가지고선, 냅대 꺼꾸러져 버렸어. 꺼꾸러져 봉게 저짝에다 뚝 떨어져 버렸어.
이게 어짠 일인지 내가 죽은 줄 알았는디 저짝에가 뚝 떨어졌어. 냅데 떨어진게 이짝에가 뚝 떨어졌어.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본게 무엇을 밟고서 그걸루
뭐시가, 저짝에가 안 죽지 이짝에가 안 죽지. 이상하게 되어 그땐 저 혼자 살살 갔더란 말여. 가서 그 근방을 본게 가마니 하나가 있어. 가만히 물속을
들여다 본게 볏가마니여. 또 들어가 본게 열시 가마니여. 집에를 와서 자기 아내를,
“일어나라고. 먹을 것 있다.”
그런게 아랫방에서 어머니 아버이가 불끈 일어나.
“어디 먹을 것 있니?”
벌떡벌떡 일어나. 자기 부인이 이틀 저녁 굶고서도 ‘먹을 것 있다’고 한 게 기운이 나. 가서 가마니 좀 져다 놓고 져다 놓고 열시 가마니를 져다 마당에다
싸놨어. 떡 져다 놓고선 그놈을 우선 먹어야 하겠은 게, 솥에다 놓고서는 불을 때가지고 이글이글 해가지고, 그러구선 물기 마른디 도롱이에다 웃 껍데기는
벗어졌어. 껍데기는 벗어진 다음에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해서 갖다 퍼다 주닌게, 한 그릇씩 땀을 주룩주룩 흘리고서 잘들 자시더라는 거여.
“야 아무개는 자기 갱굴랭이서 벼 열시 가마니를 줏었다네. 우리도 줏으러 가세.”
몽창 나가서 그 갱굴 안을 쭉 훌터서 나가. 나가는디 어디 한 가마니도 있간디. 없고선 열시 가마니 주은 사람은 가서 훌터 보니게, 또 두 가마니 또 나왔어.
열다섯 가마 주었단 말여.
“야! 너 햇곡식 나올 때까지 이 벼를 다 못 먹어. 긍게 너 먹을만치 냄기고서 우리 생거를 다고. 새거허고 바꿔 먹자.”
그 놈을 주는디 한 톨 띨 놈도 없고서, 짜랑짜랑 들구 퍼 줘. 그래가지고서 그 아들 형제가 있는디, 원선이라고 시방 중학교에 서무계 가 있어. 대학까지
다녔어. 부자로 잘 살던 그 아버지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 아버지가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 손자가 시방 살아 있어. 그 전설이 장 상재, 하늘서 그 상재 효자 살리라고 칠산서 벼 실고 가는 배가 파손해 가지고선 그거 떠밀렸다는 거여.
부여군 세도면 청포리 노인회관, 임충선(76, 남) 1983. 2. 3.
17.태고사 불기를 빌려준 원효 대사
여기 제원나루 얘기. 전설 전해지고 있다. 제원나루 얘기, 제원면 나룻배가 있었죠. 여기서 십 리 밖이지. 제원 거시기 그 전이는 나룻배루 장을 댕겼지. 현재 그렇죠. 그 차가 다니던 지가 얼마 안 되니께. 여기서 영동 갈라면 배를 타고 댕겼어요. 나룻배로 배를 타고서 차가 댕겼어요.
원효대사가 그런 게 아니고 인간 사람이, 평민이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그냥 풍파를 만나서 떠나갔다는 게여. 떠나가서 섬에 가 닿는디, 말하자믄
원효대사지, 그게 중이지. 중이 그 사람을 구해줘서, 저녁을 먹을 때가 됐으니께 저녁을 먹어야 해, 때가 되서 밥을 먹어야 하니께 원효대사가,
“여기는 뱁(밥)이 없는 곳인디. 조금 더 있어 보라.”
조금 더 있응께, 우리 평민이 인제 배를 타고 가서 표류를 당한 거지. 풍파를 만나고 해서 섬에 가 닿았지. 그려 조금 있자고 하면서 쪼금 있으니께,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을 갖다 주드래요. 그래 밥을 먹은 뒤에는,
“이는 진산 태고사에서 불공드리는 불기니께, 진산 태고사 가걸랑은 불기를 갖다 주라.”
그 원효대사가 신이에요. 그 원효대사가 그런 전설이 있지요. 진산 태고사에 불기를 갖다 줬다는 거예요. 그랑께 그 진산 태고사 스님이,
“이 불기를 어서 갔고 왔냐?”
“사실 내가 배를 타고 와서 표류를 만나서로 어느 섬 중에 가서 닿드니만, 어느 대사님이 일어나서, 그 대사님이 때가 되서 밥을 먹어야 것다니께, 그 대사님이 좀 가만 있어보라고 해서 쪼금 있응께. 그 밥을 갖고 와서루 내가 거기서 밥을 먹은 일이 있고, 또 그 원효대사가 이 불기는 진산 태고사 불기니께 진산 태고사 가걸랑은 이 불기를 전해 주라고 해서 이 불기를 갖고 왔다.”
그래 진산 태고사 스님이,
“그러믄 그렇지. 원효대사 스님이나 이런 조화를 부릴 거지.”
그런 말이 있어요. 여기 진산에 있죠. 태고사는 대둔산에 있는디, 대둔산 마천대가 있죠. 산날맹이 마천대지.
금산군 금산읍 계진리, 고월봉(81, 남) 1996. 11. 9.
18.백세 청풍비 유래
내가 또 이야기 할게. 옛날에 우리나라가 속국 아니여. 그러면 중국에 천자가 있고, 우리나라는 제후국이여. 그래서 인제 제후국이니께 중국의 천자한티
조공을 바쳐야 햐. 그런데 조공을 받치고 한 사신으로 길 야은 선생님이 갔는데, 그 압록강을 건너야 할 거 아녀. 배로 건너는디, 인제 압록강을 갔는지 직접
배를 타고서 상해를 갔는지 그건 확실히 몰라.
사신이 왔는데, 길 야은 선생님이 인품도 좋고 지식도 좋고 해서, 그 나라에 충신이 도리만한 사람이 돼서 천자께서, ‘너한티 내가 글귀를 주니 가서’ 천자에 자필로 청풍명월이라 이런 글자를 써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이렇게 써 가지구서 글귀를 줬어.
사신은 갔다가 인제 상해에선가 워디선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는디, 저기 가운데쯤 오니깐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 배가 뒤집히는 거여. 그래 그 사신으로 갈 적에 수행원두 있구 여럿이 가잖어. 그래서 길 야은 선생이 수행원 보구,
“이게 깨딱하믄 위험하니 이게 무슨 까닭인지 한 번 판결해 보라.”
거기서 인제 나온 말이,
“백세청풍이라고 했으니께 바람 풍(風)자가 여그 들어서 그런 게비라고. 이 바람 풍자를 오려내라.”
그래 오려냈어. 도려내니깐 바람이 잔잔하니 그래가지고선 그 양반들이 살아 가지구 와서, 그래서 길 야은 그 양반이 거기서 안착을 해가지고, 다 그것을
돌아가신 뒤에 사당에다가 백세청풍이라고. 버스만 타고 가도 저 건너 참 잘 썼어. 아마 그 비가 원니 몇 자 되나 몰라. 한두 질도 넘어. 열두 자. 이게 보통
우리가 얘기하도록 12자는 되야.
금산군 추부면 마수리 자택, 최병칠(71, 남) 1998. 11. 14.
해일
1.허 미수가 세운 삼척 퇴조비
아까 얘기했지만 그 송시열이랑 허 미수 선생이랑 둘이 노상(매일) 여기 여당 야당 싸우듯이 싸워 나온 양반들이여. 허 미수 선생은 제원면에 불이 많이
나니까 어풍대라 써붙여 놨다 아까 여기 선생이 말했잖아. 그렁께 인제 송시열이 와서 보니까, 여기 역마를 말이나 씻는 못덕이 무슨 놈의 분벌이냐고.
그러고서 세마지라고 썼다는 것과 매일반으로 그 놈의 역사가 많아.
그러면 인제 강원도 삼척이라는 하는디 가서나 그 허 미수 선생이 원님을 했어. 그래 삼척에는 태풍이 불어 들어오면, 원님 저기 사무 보는 동원까지 막 물이 들어와서나, 조수가 물이 들어오고 그러더랴. 그런게 허 미수 선생은 그 과학이 발달된 것맹이 퇴조비라 물러갈 퇴(退)자 허고, 조수 조(潮)자 조수라는,
“퇴적(조)비를 맨들어서나 세우라.”
그래서 삼척이다가 퇴조비를 맨들어 놨다는 거여. 이 퇴조비를 거기까장만 물이 들어와. 이 동원까지는 안 들어오고 퇴적비까장만 들어오게 만들어 놨어,
허 미수 선생이. 그런게 암만 태풍이 불어도, 큰 장마가 쪄도 비석 세운 디까지 밲에 안 가. 그런게 안 와서나 이짝 맨들어 놨는디. 송시열 자손들이 나중에
원을 봐가지고서나 보닌께, 퇴적비라고 맨글어 놨거든. 그래서,
“누가 맨길었냐?”
“허 미수 선생이래.”
“이거 쓸데없는 것을 뭐더러 맨들어 놨나고. 때려 쳐라.”
해가지고서나 때려 부셨어. 그런데 그날 저녁에 그냥 막 물이 들어 와서나 동원이 물이 들어온단 말이여. 그러니 옛날 그 무시허고서나 거기 뭐야, 송시열의 자손들이 가가지고 원한 게나, 그 할아버지랑 이조 때 노상 지내던 처지에 그런 비석을 때려 치웠다고 하나요. 그러니 물이 들어와. 그러니 귀감 해. 그런게
그 거기 오랫동안 거기 일을 하던 그 관장 하나가 있어.
“허 미수 선생 말씀, 미리 알고서나 ‘이 동원 바닥 밑을 파 보면 퇴조비가 또 한 개 있다.’ 그놈 갖다 모시자.”
해가지고서나 묻어서 오늘날까장 삼척에 가보면 퇴조비가 있댜. 한 번 가 봐. 시방도 거기 퇴조비가 있어서 거기까장 밲이 안 들어온데. 그런 말이 있어.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 노인회관, 제보자3( 남) 1992. 7. 21.
2.삼척의 퇴조비
이것은 금산에서 한 얘기가 아닌데, 강원도 강릉이(강릉에;삼척의 잘못) 가믄 퇴조비라는 것이 있어요. 내가 동학사에 갔을 때 어떤 사람한티 퇴조비를
탁본해 온 것이 있어. 그것을 입수를 했는데, 이 퇴조비가 얼마만큼 위력이 있느냐묜 거기도 마찬가지여. 해마다 추수해 놓고 요 때가 되믄 바닷물이 기양
휩쓸어.
그래서 일 년 내 농사 진 것이 다 헛일이여. 이래서 허 미수가 인제 해안, 여기 같으면 저만큼 퇴조비를 딱 세워 놨어. 퇴조비 하나 세워 놓구서는 거기에
그런 일이, 그런 제방이 읎어. 근디 이상한 것은 지구가 둥근데 강릉의 퇴조비를 세워서 이 물이 여기만치, 이렇게 못 들어오는 만큼 이 반대, 반대가 어디냐
하믄 저 그리슨가 어디랴. 거기에는 여기(일동 웃음) 못 들어온 만큼 여기에 더 들어온대.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이게 믿을 수두 읎구, 안 믿을
수두 읎는데.
그 퇴조비 비문을 보면은 이 천지간에 살고 있는 온갖 동물의 이름들이 다 나와 있구, 뭐 이렇게 해서 그릏기 참 신비한데, 얘기를 들어보믄 또 재미있지.
왜정시대에 전라도 어느 마을에 불이 났어. 그런데 불이 나서 전체 마을을 쓰는데 동네 한 가운데에 있는 집 하나는 불이 근접을 못 해. 그래서 마을 다 쓸고, 한 가운데에 있는 이집만 보존이 돼 있어. 하두 이상해서 그 집을 가서 보니까 퇴조비 탁본한 것을, 탁본한 것이 벽에 걸려 있다 이거여. 이 퇴조비 탁본하는 것 그 위력 때문에 불이 접근을 못 했다. 그릏기 해서 그래 그만큼 위력이 있어.
그 현대 과학적으루는 우리가 뭐라고 참 증명할 수는 읎지. 그러나 사실로 전라도에서두 그런 것이 있었구. 강원도두 비를 세워놓으면 조수가 못 들어왔다. 어풍대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거 딱 써서 새겨놓고 후로는 제원이 불이 안 나.
금산군 금산읍 상리 대한노인회관 앞, 박찬요(63, 남) 1992. 7. 21
3.토정보다 나은 영감(소금장수)
가만이 있어 봐. 그때가 선조 때로구나. 선조 대왕 때 연평도 시립이 평야여. 논도 있고 집도 있고 한덴데. 그곳을 토정 선생님이 들어 가셨어. 토정 선생님이 들어가셔서 본게, 온통 마을 사람들이나 읍 사람들이 죽게 생겼어. 한날 다 죽겠어.
“어허! 어찌 이러는고 다 죽겠다.”
한 집이를 가본께, 넘의 집 사는 한 60이나 된 노인 하나가 살게 생겼어. 그래서 그이나 살게 생겼단 말이야. 그래서 ‘저 사람이 어떻게 사는고’ 허고 구경하고, 저녁을 인자 밥을 먹고 잘라다가 나중에 그 주인 양반더러 말하기를,
“나는 내일 우리 집에 쪼까 댕겨 올라유?”
이 영감이 그랬다 말이여.
“아이구! 어째 뜻밖에 갈려고 하는가?”
“한 3년 되으니껜 집에 가 구경 좀 허고 올라요.”
“아! 그러면 그러소.”
“아, 그런데 내가 손자 놈을, 저 놈을 데리고 갈라우. 하두 그 놈이 따라 쌌고 헌게, 내가 갔다 올라고 헌게, 서운헌게 데리고 갔다 올라우.”
“그럼, 그러소.”
“내일 새벽에 밥을 쪼까 해 주시오.”
“그러소.”
토정 선생님도 본게, 그 꼬마둥이를 내려왔는데 게는 살았단 말이여.
“나도 같이 갈려는데 밥을 조께 같이 해 달라고. 일꾼이랑 같이 떠나게.”
“그러라.”
그래 그날 잤고. 인자 밥을 먹고 오는디, 애를 등거리다 업는디 창창 얽어. 그 영감이 창창 얽어서 그러는디. 나중 밖에 나가서 따라 가지. 어디로 갈라고
하는가 하고 영감만 볼려고.
따라 간게 축지법으로 나가. 축지법이란 한 발에 십 리 밖에 안 된다 말이여. 그 발만 보러 가면 가는 거지. 똑 같애, 나중에 축지법으로 가더니 대축지법으로 간다 말이여. 그러면 한 삼십 리씩 가는 거여. 그래서 연평바다 되는 데까지 왔어.
와서 인지 쉬려고 쉬었는데, 낭중에 토정 선생님은 요짝에서 쉬고, 그 영감들은 이짝 쉬었는디, 토정은 이짝에 와 쉬고 있은게 영감이 토정더러 말하길,
“아! 기왕 살려고 왔으면 요령이 거지 하야지 않느냐?”
그런단 말이여. 꼭 토정 선생님이 앉은디 요리가 탁 넘어져 버려. 그래서 영편(연평) 일곱 고을이 바다가 되었어.
4.미륵바위 전설
서울시 성동구 행당 1동 자택, 정화원(84, 남) 1993. 12. 10.
또한 영감은 거시고 미륵바위가 있는디,
“저기 미륵바위에서 코피가 나면 피난이 난다. 다 피난이 난다.”
그런게 대처 그랬다고. 나중에 하루는 미륵바위 밑에서 개를 잡고, 개피를 미륵코에다 칠해 주었단 말이여. 많이 칠해 놓고는 영감님더러,
“영감님! 아이 미륵바위에서 코피가 나오라우.”
“그러면 피난이 난다. 가자.”
그 미쳤다고 가겠어. 저것들이 다 개를 잡는다고 코피를 칠해 놨는디.
“저 미친놈 영감 좀 보라고. 우리가 개를 잡으면서 코피를 칠해 놓았는디, 코피 나온다고 저 피난을 가자 허니 미친 영감이라.”
그런데 밤새도록 물이 쿡쿡 들어와. 들어오설라미 저희 집에 와서 ‘피난 가자’고 허는디 하나나 듣간디. ‘에이!’ 애나 그저 쬐깐 놈 데리고 나서 피난 했지.
서울시 성동구 행당 1동 자택, 정화원(84, 남) 1993. 12. 10.
5.자염 굽는 법을 가르쳐준 검단선사
자염법도 나오는 것이 검단굴이 있었거든요. 원래 검단굴에서 검단선사가 굴에서 처신을 했어요. 그리고 수리봉으로 찾아와서 선운사 절터를 내려다보고
그랬는데, 영감이 굴속에서 생활할 때 보니까, 굴속에 한 이십 명 정도 기거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기니까, 기거하는 자리 더 안쪽으로 가보니까 물이 고여
있어요. 들어가서 맛을 보니까 물이 짜거든요. 이상하단 말이에요.
‘이곳이 바다하고도 거리가 있고 한데 물이 왜 이렇게 짤까’ 하고 보니까, 이 분이 깨닫게 되지요. 중생대에서 신생대에서 넘어갈 때 바다가 솟구쳐서 봉우리 되고 그런 조화 속에서, 그 굴이 원래는 바다였는데 솟구쳐서 굴이 되어버렸는데, 굴에 오랫동안 고여 있는데 그 물이 짜거든요. 그래서 검단선사가 굴속에
있는 물이 왜 이렇게 짜지? 하고 그 원리를 연구해 보니까 원래 바다였었구나. 바다였던 자리가 솟구쳐서 이렇게 됬구나 라는 이치를 깨닫게 돼서 소금을
구었죠. 실습을 한 것이죠.
실습을 해보고 원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산적들을 데려다 놓고 혼자할 때 실험실 뿐이지 않습니까? 혼자 굴속에 물기를 빼서 말려보니까 소금으로
변하니까, 이것이 조화구나 하는 것을 알고 조화를 깨달아 두었다가 그때 산적들을 거기로 데려가서 공장법을 전수한 것이지요.
“뻘을 올려서, 갈아서 뻘을 구워라. 그러면 증발하고 나면 소금이 나온다.”
그렇게 뜰에서 하니까 그것이 자염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육염이거든요. 천염이 아니라 육염입니다. 천염은 천일염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은
증발시켜서 구워서 불을 때서 하니 육염이죠. 육염을 한 마디로 자염이지요. 끓을 자자. 그 원리는 그 이치를 산적들한테 옮겨줘서 기록적으로는 제일 오래
됐다는 것만은 사실이지요.
검단굴이 있던 곳은 지금 허물어져서 없어요. 아니 근처는 알고 있어요. 읍지 기록에 나오니까. 검단굴의 위치는 대게 나오는데, 그 굴 자체가 오랜 세월이
흘러서 허물어져서 지금은 없지. 기록에 나와 있으니까.
[조사자 : 처음에는 못이 따로 있었답니다.] 못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 검단굴이에요. [조사자 : 그런데 그 분들 말에 의하면 굴이 바다 속에 있던데요?] 지금은 바다 속이지만 그때에는 갯가시, 바다 속이 아니지. 지금은 바다 속이지.
[조사자 : 지대야 많이 변했지요.] 그전에 백제 땅에는 고창군 쪽이 물이 깊었어요. 변산반도 쪽이 뻘만 있었어요. 그런데 이놈이 약 몇 세기 거쳐 오는 동안에 고려 중기 짝이 어디서 빨려 와서 뻘이 여기로 오고, 물은 저기 가 버리고. 이런 변화가 우리 대에 생긴 것이요. 지구사에 나와요. 제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리학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고창지역 바다가 깊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 물이 저쪽으로 가버리고 뻘이 이쪽으로 이동한 거죠. 그것이 지각변동
이것이 고려 중기에 이루어집니다.
[조사자 : 그럼 검단굴하고 염정은 같은 건가요?] 그렇죠. 저는 개념적으로는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네들대로 얘기를 하니까. 그
검단선사가 검단굴에 기거를 할 때에도 바로 갯가였어요. 그 당시만 해도. 그런데 지금은 자꾸 메몰 되고 해서 사등이 형성되어 버리니까 지금 사등 자리가
원래 검단굴 자리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지금 사는 사람들이 염정은 바다 안에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갯가 안에 있었던 것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네들 중심으로 해석을 하니까, 저 바다 속에 있는 것으로 얘기하지만 바다 속이 아니지. 염전이 그 당시에는 갯가에 있었어.
그러니까 지금 사등 자리는 검단굴이 그 근방에 있었고. 사등 마을은 물에 안 잠겼지요. 지금 사등만 갯가에 있었지. 검단굴은 월산 하고 사등하고 중간에
검단굴 자리가 있었고. 그렇게 봐야죠. 그런데 자기네들 생각으로 해서 바다 안에 있는 것이지,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은 백제 때 개념으로 봐서는 검단선사의 것이 맞아요.
고창군 고창읍 제보자 자택, 2009. 8. 17. 이기화(75, 남)
6.해일로 능력을 드러낸 검단선사
하여튼 그 양반(검단선사)은 그 죽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뚜렷한 뭐시기 어디로 떠났다는 기록이 안 나오니까. 또 어떤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진짜, 사람이 아니고 가상의 인물이다.”
이런 이야기도 하거든요. 혹시 하도 신령하고 하니까 그런 위대한 분이 아니었나 추정하는 분도 있더만요. [조사자 : 원장님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반반이죠. 보통사람으로서 생각할 수 없는 생활사가 자꾸 노출되니까. 이거는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것은 저도 짐작해요. 그렇지만 확실히 근거를 모르니까. 그런 설명하는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죠.
그리고 그 검당포가 해일에 일어가지고, 1890년대 빨딱 엎어서 이렇게 해일로 갖다 그 검당포가 묻혀버렸거든. 바로 묻혀 있어요, 지금. 근데 검당 선생님이 사등마을 위에서 검당포의 생명력을 일부러 조화를, 해일의 조화를 뿌려가지구 엎어버린 것으로 이렇게 알고 있거든요. 그렇게 들려요. 검단선사가 아니면
그런 조화를, 그런 해일을 넘칠 수도 없고 여기도 만치 쏙 들어와 있는 덴데, 그 해일이 높은 해일이 있을 수가 없는디, 발톡 폭으로 엎어버릴 정도니까 큰
조화력이 발휘된 거 아니냐 이렇게 추측을 하지요.
고창군 고창읍 제보자 자택, 2009. 8. 17. 이기화(75, 남)
화재
1.화재를 예견한 오씨 영감
그 할아버지는 하마(벌써) 나이 100이 훨씬 넘어 우리가 모른단 말야. 그 집이 여기 상도문(上道門)(양양군 도문면(道門面)의 도문리 위쪽이므로 상도문인데, 행정구역 폐합으로 옹기점말을 병합 상도문리라 하여 속초시 도천면에 편입함) 그이 할아버지가 옛날에 상도문 아래 그 논이 있잖아. 한데 아들을 데리고
글을 가르쳤단 말이야.
글을 가르쳤는데 선생님이 하루는 괭이를 가져 나가서, 상도문 뒤로 올라 자꾸 댕기면서 논으로 도랑으로 들어가고, 아주 그 논이 몇 천 평 되는데 아주 거다(거기다) 물을 가뜩 틀어 놨어요. 그러다 가끔 한 번씩 나가 토주박하고. 그래 옆에 사람이,
“저 염감이 뭣 때문에 저러냐?”
이상하게 생각했단 말야. 그러고 이래 있다 보니까 한 달 포만에 이래 되니까, 아랫마을 상도문서 불이 났단 말이야. 기와집에 불이 나서 옛날 초가집과 한
가지로, 어디 물이 있어요? 그 때 바람이 되워(몹시) 불지. 그 거기 있는 물을 가지고 화재를 껐단 말야. 집이 몇 평인지 많이 타고. 그 다음에는 동네에서는,
“아, 영감님이 어떻게 된가 보다.”
그 화재 지낸 담에(그 다음에) 다시 물을 안 틀어 놨드래. 그래니 그이는 천기를 내다 보고 있는 거야. 상도문에 오가는 양반 집안이여.
[속초시 설화 38]
2.명주사 화재와 만석꾼 인공당
고려 목종이라고 했어요. 목종 기유년에 비로소 이 터전을 잡아 가지구 명주사라구 한 것은, 혜명대사하구 대주대사 두 스님의 이름에서 밝을 명(明)자 하고 구슬 주(珠)자 하고 두 자를 따서 명주사라고 지었어요. 이름을 짓기를 그래 가지구, 지금으로 말할 즉에는 약 900여 년 전 되지 않을까 봅니다.
그 사이에 변천이 많았지요. 많았는데, 요거는 역사에 있는 거요. 이조 정조 신축년에 관음 불상을 여기다 봉헌을 해 놨고, 철종 경신년에 불에 타서 절을
잃었다가, 철종 기유년에 또 불에 화재를 입었고, 그래구 또 절들이 여러 개 있었어요. 그 향노암이니 운문암이니 청련암이니 여러 암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절두 이거 원통암의 암자지요.
그런데 지금은 명주사를 이걸 쓰지마는 여기가 원래는 원통암입니다. 명주사는 저 아래 있고 그랬는데 이건 전설 얘깁니다. 전설에 의할 적에 저 아래
명주삽니다. 명주사는 하루는 있드라니 웬, 구인말(인마를 갖추어 가지고)을 해 가지고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 십여 명 몰려온다 말이야. 이조 때지요.
그래 모두 가마두 타고 말두 타구 여기 왔지요. 그런데 족보 책을 가져와서 펼쳐 놓고 말하기를, 이 근방에 우리 몇 대조 할아버지 산소가 있을 거 같은데
스님더러 아시는가 말이야. 그 스님들은 생각을 해보니, 보긴 봤는데 만약에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전부 들고 갈 판이거든. 그래 못 봤다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어디 샅샅이 알 수가 있나요? 알 수가 없으니 그 찾아보지도 못 하고 그러니까, 뭐 부근을 조금 돌아 댕겨 봤다 한들 잘 알지 못해 못
찾아 봤다 이거야.
그날 밤을 자구선 그 다음날도 못 찾아 보구선 그냥 갔어요. 갔더니 그날 밤에 그 사람들 간 날 밤에 스님들이, 절에 노장 스님이겠지. 그래서 노장 스님이
꿈에 금관 제복을 한 노인이 떡 나오시면서 하는 말이,
“아, 이놈들, 너 내 자손들이 날 찾아온 거를 그래 괄세를 해 보냈으니 그럴 수가 있느냐. 느가 부지할까 봐라.”
그런데 그 소리를 하자마자. “불이야!” 소리가 나는데 환해진다 말이야. 그래 문을 열고 내다보니까 온 그 산에 경내가 마침 불천지라. 그래 가지구 화재가
났대. 화재가 나고 그러니 돈들도 많고 그러니 절을 다시 증축을 해서 관사를 져 갔지요. 절을 짓고 또 사는데 거 살만한데, 또 꿈을 꾸니 그 노인이 나와
그런단 말이야. 또 불이 확 나고. 그러니 어떻게 절을 짓고 살만 하믄 불이 나고 불이 나고. 그러니 전에는 이 절이 어됫는고 하니 이 절이 상당히 부자였어.
스님 한 분이 만여 석을 했어. 우리들이 ‘만석군(萬石君) 만석군’ 합니다. 만은 후화상 한 분이 만석을 해요. 후나상이라고 저 밑에 비도 있습니다마는 보통
부르는 이름으로 후나상, 후나상 해요. 한자는 모르지요. 그런데 원래 그 비문을 볼 적(적)에는 인곡당이예요. 인곡당 기린 린(麟)자, 굽을 곡(曲)자.(曲은 谷이 맞다.) 그래 속성은 문씨고 훌륭한 분이 댔어요. 그 인곡당 소개는 따루 드리겠어요.
그래 절을 지어 놓으니 불타고, 불타고 그러고 하니까 그 앞에 가짜 절들이 많았어요. 그래 절에 재산이 많고 하니까는 여기 원통암이라는 암자를 지어 놓고, 이 절은 원통암 대신 스님들이 공부만 하게 돼 있어요. 법당두 들어가 보셨지마는 인곡당이라구 해 가지고 겨울철에도 불을 때고 부처님도 같이 모시고
있어요. 그리구 공부를 하면서 중노릇도 하고 염불도 하고 그러지요. 불공도 드리고 그러니까 불타니까 어떻게 할 수가 있나요. 간판을 명주사 간판을 미어
가지고, 해방되고 하니까는 결국 여기 올라와 가지고, 여기가 원통암이 본절이 명주사가 되었지요. 명주사가 명백을 유지하는 곳이지요. 그렇게 되었어요.
[현북면 설화 37] 명주사
3.경주 최가의 개무덤
우리 조상 이야기를 한 번 해 볼게. 이것은 실지로 우리 경주 최가들 저거여. 조상얘기여. 지금도 저거여 우리 경주 최가가 무슨 벼슬을 많이 해서 양반이
아니고, 엄청 부모한테 효도를 했어요. 그런데 저기 경주 개무덤이란 데가 능이 지금도 있어요.
지금도 있는데, 그런데 저기 자꾸 무슨 재판에 걸리가지고서는 재판을 하기가 됐는데, 그 최씨하고 김씬가 누구하고 재판을 하기가 됐는데, 꼼짝없이
이짝에서 최가가 지게가 되어 있거든요. 그래 저기 재판장이 하는 소리가,
“너 그럴 것 같으면 어데 가서 너 아부지를 살릴라면 어데 가서 대가리 너이 있는 개를 구해 오라”
했어요. 그래가지고 그 때에 차가 있어 머가 있어. 걸어서 인제 중국을 갔대요. 그 아들들 내외가 최준이란 사람이. 그래 중국을 가 가지고선 중국에서도 다
돌아다녀도 몸뚱아리가 하나고 대가리가 네 개인 것이 어데 있게소.
그래 할 수 없어서 섯달 기한은 다 되가고 저의 아버지는 죽게 생겼고. 이래 노니께 인제 올라오는데, 집으로 올라고 이래 마루에서 인제 신을 신단께로,
옛날에 짚신을 이래 먼 길 걷자면 이러찮아요. 신단께로 마루 밑을 이래 들여다 보니께 진짜로 몸뚱아리는 하나고 머리 네 개인 개가 있거든.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이 하도 효자라서 그렇게 주인한테,
“저 개를 팔라.”
그 중국집 주인이,
“그냥 가져가라.”
그래 그 놈을 델고서 그 재판 날짜가지 왔어요. 재판 날짜꺼정 와가지고서는, 지금도 경주 개무덤에 가면은 그 무덤이 능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그리 그거를 같이 걸어와 가지고서는 재판을 하는데, 이제 백성들이 많이 모여 있지 않아요. 인제 누가 이겼는지 재판을 하는데, 고만에 인제 시작하닌께로 그 개가 와서 거기에 있는 사람을 다 물어 죽였어. 그게 사람이 아니고 여우가 전부 둔갑을 해가지고, 그 사람 저걸 볼라고 그랬어. 여우가 전부 둔갑을 했는데 전부 물어서 다 죽였어.
그 사람을 그렇게 이겼잖아요, 최준이라 하는 사람이. 그래가지고 그 능을 지금 경주 개무덤이라고 카면 앞에 강도 있고, 우리도 가 봤는데 우리 조상이래.
개무덤을 그건 어데 가서 애기해도 알아. 개무덤을 이 집채 능 같이 해놓고 이랬어. 그래가지고 우리 경주 최가 개무덤, 최가가 그래서 양반을 해. 그것은 옛날부터 전설에 있는 거여.
서울시 성동구 금호2가동 노인정, 최병륜(79, 여) 1998. 11. 6.
4.어풍대 유래
예전에 제원면 소재지가 지금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거야. 옛날에는 살면서 교통의 요지가 되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대전시 정도는 되니까. 그래서 사람이 많이 살았는데, 갑자기 서풍이 불면서 화재가 나면은 마을을 다 쓸어버리는 거야.
그때는 사면(삼현)육각을 울리고, 지금으로 말하면 동문, 서문, 남문 이렇게 지어놓고 그랬다는 거야. 옛날 역사지만 그 정도로 마을이 컸었고. 그 때 당시
집들을 모두 초가집이었으니까 바람이 한 번 불면은 마을을 전부 휩쓸어 버리니까. 허 미수라는 사람이, ‘이것은 도저히 안 되겠다.’ 하는 생각에, 왜 그런가
하고 분석을 해보니까, 전국 각지에서 온 말들이 더러 죽잖아. 그라믄 말들을 가까운 데다 묻어.
“그래 말 귀신들이 그랬다. 말 귀신들이 이 마을을 불이 나게 만든다.”
그리고 가을 같은 때는 그 말은 돈을 얼마씩 주고서 농가에서 잘 길으라고 만들었었어. 그래서 그 말로 경주를, 저 산 밑에 가면은 봉황천이라는 큰 내가
흐르거든. 그래서 가을이 되면은 거기에 가서 경주를 하거든. 경주를 하면 1등, 2등, 3등 이렇게 순위를 정해서 상으로 쌀도 주고 그랬었는데. 말들이 많은
거지. 말들이 많으니까 죽은 말도 많을 거고.
“그+ 죽은 말들의 넋이 그런다. 방법이 무엇이냐?”
그러니, 허 미수라는 사람이 그 바위에다가 임금하면 뭐 다 떨잖아. 나무도 떨고 사람도 떨구. 옛날에는 임금 어(御)자를 써서, 임금이 바람을 다스리도록
말여, 어풍대(御風臺) 하고 탁 새겨놓고 불이 안 나는 거여, 마을이.
금산군 부리면 구억말 길가, 최완종(65, 남) 2004. 5. 31.
5.어풍대 유래2
인제 어풍대가 거기 있는데, 그 옛날에 말을 그렇게 역에서 멕이면서 그 못이 세마지, 여기 와서 말을 씩기고 어짜고 하는디. 어떻게 해서 거기다 뭐 말을 역 거시기를 뭐라고 했냐? 현감이 아니고 역 거시기가 현감인가 있어. 이 분이 말을 거시기다 놓고 많이 죽였다 이거여.
어풍대나 세마지나 한티 있어. 그 인제 말 죽은 넋이가 거식해가지고 제원역이 한 3년마다 불이 나가지고 동네를 싹 쓸고 하더라 이거여. 그라는디 그 불난 원인을 몰르고 거식했는디, 그 허 미수 허목 선생 알어? 일화가 많은디 허 미수 선생. 그 분이 제원 찰방이다, 역에 있는 거시기를 찰방, 찰방으로 모셔가지고 그 얘기를 듣고.
말을 관리 우두머리가 제원역 찰방. 그라면 그게 옛날 거시기로 정육품인가 그려. 인제 군수는 삼품도 되고 오품도 되고 사품도 되고. 인제 찰방은 오품
아니면 육품. 그래 허 미수 선생이 왔다가 그 화재 난다는 소릴 듣고, ‘어풍대’라고 바우에다 새겨서 그 뒤로 화재가 안 났다는 그런 얘기가. 이 어자라는 건
나라의 왕 밖에는 안 쓰잖냐. 왕이 바람을 막는 데다 이거여.
금산군 제원면 용화 1리 자택, 김현칠(66, 남) 1996. 11. 9.
6.허목의 어풍대
이래서 허 미수 선생이 호가 미수이여. 이름은 허목. 역사를 한 번 떠들어 봐. 그 양반이 젊어서 제원역 찰방을 했어. 역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 그저
나라에서 출장하는 관리나 암행어사가 들리면 거기서 역마 몇 필을 공급해 주구 하는 디여. 제원 여기에서 한 6km 되는 현재 제원면 소재지 그 근방에
있는디, 거기에 가므는 이 암벽이 있는데 ‘세마지’라는 글씨가 있고 ‘어풍대’라는 글씨가 있어.
그 어풍대라고 하는 글씨가 허목 선생이 쓴 글씬데, 제원역 찰방으로 와서 보니까 해마다 이 불이 나. 불이 나면은 이 서풍이 이렇게 불어가지구서 이 제원
바닥을 싹 쓸어. 근데 허 미수 선생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제원역에서 기르던 말, 제원역에서 이렇게 오래 길르구 뭐하던 그것들이 장난을 친다 그거여.
불이 나믄 이냥 바람이 불게하고, 여서 저 바람을 어거하는, 바람을 막는 뭔가 장치를 좀 해야겄다. 이래서 절벽에다가 어풍대라고 써놨어. 그것이 내게 있는가 모르겠다. 그렇게 한 후로는 불이 안 나.
불이 한 번 나먼 살림이 다 없어지는 거 아녀. 그 제원역 그 근방에 살던 사람덜이 아주 편안하게 살게 됐다. 그려서 허 미수 선생은 남인 계통의 서원을,
부리면 창평리에다 세워서 서포대서원이라고 그랴. 허 미수를 거기다가 모셔놓고 남인덜이 거기서 공부를 했지.
그래 금산이 성곡서원이니, 산천재서원이니 허는 디는 모두 노론 계통의 서원이고, 유독 서포대서원만 남인 계통의 서원이여. 그려서 서원끼리 파덜(파들)이 달르니까,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뭐 할 땐데, 금산이 학문적으로 그러한 쟁점을 많아 여기에서 인제 부각시키고. 지금도 남인 집안은 제사 지내는 법도나
제물을 차리는 제상 차리는 법도가 노론 계통과 달라요.
그 동안에 원수 간이라 서로 혼인도 안 했어. 남인과 노론, 이 사람덜은 혼인을 안 했는데, 요새는 그런 거 다 파괴돼서 뭐 이렇게 지내고 있지만. 허 미수는
그런 뭔가 천지의 기운을 움직이는 그러한 아주 위대한 그 힘을 가지구 있었어.
금산군 금산읍 상리 대한노인회관 앞, 박찬요(63, 남) 1992. 7. 21.
7.마을에 불이 나는 다리미 혈의 묘자리
저기 묘 임자가 전주 사는 김씨라는 데, 그 분들이 여기다가 묘를 썼단 이 말이야. 옛날에 어떻게 된 산인지는 몰라도. 그 위로 저쪽이 이 동네가 있었는데
불이 다 났단 말이여. 그래 이 동네 사람들이,
“묘를 판다.”
“좌우간 내가 여기에다가 이 집을 전부 지어 주마, 이쪽에다.”
그래 전부 이 동네가, 저기서 살던 사람들이 이리 잉겨서 마을이 된 거지. 그런게 그게 몇 백 년이 됐는가, 100년이 넘었는가 몰라. 사실이여.
그런게 아니라 다리미 혈이다가 묘를 쓰면, [조사자:다리미가 뭡니까?] 이복(의복) 다리는 다리미. 옛날에는 요만한 쇠에다 이렇게 자루를 맞춰갖고 이북을 다렸단 말이여. 시방 전기도 있고 다 있지만. 그래서 그게 혈이라 이 말이여. 그런 디다 묘를 쓰면 불이 난다는 거여. 그런 얘기를 내 들었고.
금산군 금성면 대암리 노인정, 박대서(71, 남) 1996.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