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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1:13-16(377)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2023. 10. 8
양승훈 교수의 ‘물에 빠져 죽은 오리’라는 수필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방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됩니다. 지방 근무지라고 해 보았자 서울에서 고양으로 옮긴 것이지만, 가족이 있는 서울을 떠나 생활해야 하는 것에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분도 달랠 겸 무엇을 할까 살펴보는 중, 회사 창고 옆에 있는 공터를 보고 오리를 키우면 좋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듯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사고, 오리가 놀 수 있는 큰 물통 또한 구입합니다. 그리고는 오리를 물을 받아 놓은 큰 물통에 넣어주고 퇴근을 합니다.
그런데 놀란 것은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보니 오리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짐승이 물었는가 싶어 이리저리 오리를 살펴보아도 짐승에게 물린 흔적이 없었습니다. 혹시 사람이 해코지 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CCTV를 살펴도, 밤에 공장을 출입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죽은 오리를 이리저리 살펴 본 결과, 불에 빠져 죽은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니 오리 죽음에 대한 문제는 더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합니다.‘물에서 노는 수영이 전문인 오리가 얕은 물통의 턱을 기어오르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청둥오리를 산 곳에 가서 ‘문제 있는 오리’라는 말로 주인에게 따집니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들은 주인은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오리는 양계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입니다. 그래서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게다가 그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 물에 잘 뜨지도 못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오리는 물에서 놀고 닭은 땅에서 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리라면 당연히 헤엄을 잘 치고 밀과 친숙한 동물이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물과 친숙해지지 못한 오리는 닭과 마찬가지로 물에 빠지면 죽는다는 사실이 새롭기 까지 합니다.
저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물통에 빠져 죽은 오리 이야기와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물에서 쉽고 빠르게 이동하도록 물갈퀴가 있는 오리라고 해서, 모든 오리가 수영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올바른 기독교인이라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에서 얼굴 도장만 찍는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신앙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순하게 교회를 출석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말과 언행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구별되는 영적인 모습이 있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전히 거룩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세상 물정을 모르고 어리숙하다고 해서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만으로 거룩한 생활을 한다고 단정해서도 곤란합니다. 이런 모습은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오리가 오리로서의 삶을 살지 못한 것과 동일합니다. 성경을 끼고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다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힘을 쓰고, 목소리 높이며 자기주장을 하지만, 정작 세상에 나가서는 아무 소리도 못하는 것은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리의 진가가 양계장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서 드러나야 하듯이, 거룩은 세상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특히 타락과 부패로 가득 차 있는 세상입니다. 뉴스를 보고 주변에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사기와 거짓말로 다른 사람의 돈을 차지하려는 사악한 행동이 많습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양보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모습은 보기 쉬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정직하게 일하고 돈을 벌어서 교회에 헌금을 해야 합니다. 남을 도우면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진정 성경에 따른 거룩한 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 함께 ‘주여 진실하게 하소서’찬양을 드리길 원합니다. “1)주여 진실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하루 순간을 주가 주신 힘으로 승리하기 원하네 주여 나를 진실하게 하소서. 2)주여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하루 순간을 주가 주신 힘으로 승리하기 원하네. 주여 나를 사랑하게 하소서. 3)주여 거룩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하루 순간을 주가 주신 힘으로 승리하기 원하네. 주여 나를 거룩게 하소서.”
우리 모두는 날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 순간은 진실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미워하지 아니하고 사랑하면서 살기 원합니다. 또한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 드리는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 15절에 보시면,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를 단도직입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 보세요.“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5절 말씀은 두 부분으로 구분해서 살펴보면 더 쉽고 빠르게 이해가 가능한 말씀입니다.
상반절)‘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직역하면 ‘너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죄악을 싫어하시고 죄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거룩’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상당히 추상적인 단어입니다. 그것은 거룩에 대한 구체적 기준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마다 자신이 정하고 생각하는 거룩함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정말로 거룩하고 고매한 인격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거룩의 흉내만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정한 기준의 거룩함은 본 받아야 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용어사전’에서는 거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 되는 요소요. 성도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이다. 성경 원문에는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는데 그 기본 의미는 ‘구별하다, 분리하다, 깨끗하다, 유일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약 모세오경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레위기에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가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반절) ‘이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이 요구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룩하게 행동하고 저것은 거룩하게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NIV성경에서는 이 본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so be holy in all you do 그러므로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거룩하라)” 내가 하는 모든 일입니다. 교회안에서도 거룩해야 하고, 세상에 나가 나의 직장에서도 거룩해야 하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말과 행동속에서도 거룩해랴 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중적이라고 비난을 받는 첫 번째 모습이 바로 이 기준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모여 있을 때에는 거룩하게 행동합니다. 말이 온순하고 인자한 행동을 보입니다. 교회안에서는 다들 천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이 합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주일날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에서 도무지 일치점을 찾을 수 없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거룩함을 잃어 버린 일부의 기독신자들을 향해 손가락질합니다. 그리고 이런 비난과 오해가 자꾸 쌓여서 한국교회 전체와 성도들이 욕을 얻어 먹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은 원어로 ‘하기오스’인데 ‘하나님에 의해 성별되어진, 거룩하게 구별된’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그분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함을 더럽히지 않도록 모든 부정한 것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며, 행실을 거룩함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삶의 행동에 연관된‘행실’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외모가 아니라 행실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행실이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베드로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1. 거룩하신 하나님이 부르셨기에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15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여기의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 성도들을 부르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신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거룩한 행동을 하고, 나의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성도 역시 모든 행실에 거룩해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죄악을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거짓될 말과 행동을 미워합니다. 위선의 모습보다는 정직한 모습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으로 대항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받아들이며 화답하는 순종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을 따르는 것에 기쁨을 누리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영국의 정치인이면서 오늘날까지 후대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는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위키피디아 인물검색란에 월버포스를 검색하면 ‘영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을 이끈 대표적 인물 중에 한 명’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약관 21살의 나이에 하원의원으로 당선될 정도로 똑똑하고 유망한 청년이었지만, 기독교 신앙 양심에 따라 ‘노예제도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탐욕의 결과’로 생각하고 노예제 반대 투쟁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 결과 노예제 폐지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걸고서 50년간 투쟁하게 됩니다.
이에 노예제도가 계속 지속되기를 바라는 노예상인들과 이권에 결탁한 수많은 사람들이 월버포스를 죽이겠다는 신체적인 위협을 끊임없이 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양심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월버포스는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50년간 노예제 철폐를 외치다가 73세로 죽기 얼마 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죽기 얼마 전에 적은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의 길은 공적인 길이며, 내가 일할 곳은 이 세상이다.”즉, 자신이 한평생 주장하였던 노예제도 폐지는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한 공적인 길이며, 내가 이 거룩한 사명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함축한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내가 거룩한 생각과 행동을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내 주변에 거룩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도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핑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 등불로 살아가는 것이 탐욕으로 물든 세상 속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함과 동일합니다. 거룩한 생각, 거룩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드러내는 거룩함입니다.
13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너희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서‘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행실을 보여 주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전히 드러내기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함을 추구하기 보다는 세상을 따라가고 물질과 타협하면서 쉽게 쉽게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되겠다는 독한 마음과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거룩함을 표현하는 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행실을 드러낼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죄악을 멀리하고 정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도가 거룩하게 행동해야 함을 직접적으로 강조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16절,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이 16절 말씀에는 달리 설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두 말하면 잔소리가 되는 너무나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임어당(林語堂 1895-1876)은 중국 출신으로 중국의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 근세기 중국 최고의 석학으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복건성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한사코 거부합니다. 미국에서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중국최고 명문대학인 북경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합니다.
동서양의 철학을 섭렵한 교수요 철학자로서 세상 학문과 철학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고자 애쓰며 세상에서 소망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내면은 어둡고 공허할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의 권유에 못 이겨 참석한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던 중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된 세상의 소망’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씀이었는데,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서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임어당이 한 말이 있습니다. “태양이 떴다. 이제 촛불을 꺼라.” 세상의 철학과 학문으로 덮혀 버린 무지의 눈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린 것입니다.
그 이후 임어당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면서 중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최고의 국제적 인물로 부상하게 됩니다. 임어당이 기독교 사상을 배경으로 저술과 강연을 이어나가자 중구 공산당은 활동을 가로 막았고, 결국 1966년 대만으로 이주한 후에 1976년 홍콩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 생각과 내 경험과 내가 주장하는 것이 최고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 것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한발 먼저 낮아지고, 내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이 거룩한 발걸음의 시작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10월의 모든 시간들이 내가 드러내는 거룩한 말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10월의 모든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