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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사당 황산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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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난곡동에 있는 강릉 최씨 시조 충무공 최필달의 사당인 황산사. 지방문화재
제5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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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四世三賢 배출 명가
"대종회에서 발간한 '강릉 최씨의 뿌리를 찾아서'란 책자에 보면 고려 때도 삼군(三君)을 배출한 집안이라고 소개돼
있군요."
이번에는 의자 깊숙이 앉아 듣고만 있던 최정규 대종회장이 참견했다.
"시조이신 경흥부원군이 그렇고, 4세손인 숭자언자 최숭언(崔崇彦) 어른이 명주부원군, 13세손인 한자주자 최한주(崔漢柱) 어른이 명주군에 봉해졌으니 가히 삼군의 집안 아닌가요. 조선시대에는 그보다 더 많지요."
잠자코 사무만 보고 있던 최돈호 장년부장이 흥미롭다는
듯 귀를 세우고 의자에 다가앉았다. 최정규 대종회장은 책자
하나를 뽑아 필자 앞에 내놓았다.
"조선시대 때 우리 최씨 가문에서 문과급제하신 분만 39명, 무과에 오른 분은 무려 110명이나 되고요. 생원진사가
157명, 호당(湖堂;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독서당)에 뽑힌 분이 2 명, 책훈(策勳;훈장을 받음)되신 분이
15 명, 원(院)이나 사(祠)에는 12 명이 모셔졌고, 열행(烈行)하신 할머니는 33명, 효행하신 분은 34명이라고 밝혀져 있지요."
필자는 숫자가 많아서 대충 예예, 대답을 남기며 사무실을
휘 둘러보았다.
경호조은(鏡湖釣隱) 최치운(崔致雲)은 시조의 17세손이다. 태종 17년(1417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형조, 이조참판을 두루 거치고 집현전 직제학과 세자우빈객을 지냈다. 다섯 번이나 명 나라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세종 임금의 총애를 받는 중신으로 국정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나 판결하기 힘든 형옥이 있을 때마다 임금이
친히 불러 자문을 얻을 정도였다.
"지나치게 술을 즐기니까 글쎄, 세종 임금이 친필로 절주(節酒)라고 금주령을 내렸는데, 그 글씨를 벽에 붙여놓고 조신했다는 일화가 유명하지요."
최돈호 장년부장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이런 일화도 전한다고 웃었다.
"생후 8개월밖에 안된 김시습(金時習)을 보고 장차 큰일을
할 신동이라며 저 아이의 이름을 자기가 지어주겠다고 나선
분이 바로 치운 어른이시지요. 그때 지어준 이름이 때 시자에 익힐 습자, 시습(時習)이라고 합니다. 매월당 자신 또한
성장한 후에 최치운 어른께서 스스로 글을 깨우치라고 나를
시습이라고 이름지어주었다고 술회했다고 합니다."
세종22년(1440년) 12월 향년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정경부인 강릉 함씨였고 89세까지 만수를 누렸다.
최치운의 둘째 아들이자 시조의 18세손인 수헌공(睡軒公)
최응현(崔應賢)은 효를 위해 벼슬까지 사양했던 유명한 효자였다. 단종1년(11453년) 을과에 1등으로 급제하여 승무원
부정자(종9품), 박사(정7품)에 이르렀고 성균관 사성(司成;종3품)에 임명되었으나 강릉 땅 고향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사양하고 강릉향교의 훈도(종9품)를 자청해
낙향했다. 성종11년(1480년)에 모친상을 당하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며 한번도 집에 내려온 적이 없었다고 전한다. 모친의 3년 상을 마친 후 사헌부 집의(執義;종3품)에 천거되고 성종19년(1488년)에 이조참의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었다. 임지에 내려가 효제(孝悌)를 두터이 하고 예의를 장려하여 빈번한 송사를 그치게 하라고 내린 임금의 교유문(敎諭文)은 문중의 가보로 전해지고 있다.
연산군 3년(1497년)에 두 번째로 대사헌(大司憲;지금의
검찰총장. 정2품)을 맡았다.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무오사화 직전, 왕의 폭정에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려 관직을 버리고 잠시 낙향하는 바람에 사화를 정면으로 피할 수 있었다. 연산군 6년에 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는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사법부 총수의 자리를 맡는 등 명신이었으며 명석한 판단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말년에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78세에 형조참판
겸 도총수(정2품)에 임명되었으나 노령을 핑계로 귀향하였다. 중종2년(1507년) 정월 80세를 일기로 강직한 충과 효의
일생을 마감했다. 부인은 정부인 영남 남씨이다.
최응현의 손자이며 시조의 20세손인 문정공(文正公) 최수성(崔壽성)은 성종 18년(1487년)에 강릉 북평에서 태어났다.
13세 어린 나이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지만 거상범절(居喪凡節)이 어른과 같았고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3년 시묘살이까지 너끈히 해냈다. 일찍이 거유 (巨儒) 김굉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고 조광조, 김정 등 당대의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어 사림들 간에 명망이 높았다.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고도 하고 김시습 버금가는 고뇌하는 지성이라고도 그러지요. 우리 수자성자 최수성 어른,
중종 14년(1519년)이던가요,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
김정 등 신진세력들이 남곤 같은 훈구세력들에게 몰려 유배당하고 사약을 받을 때 수성 어른도 조광조 알파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했죠."
향년 35세인 중종 16년(1521년) 10월21일 처형된 것으로
전한다. 인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선조 때 불천위(不遷位;임금의 명으로 정해진 신위)를 받고 강릉 향사에 제향되었다.
"수자성자, 최수성 어른만 강릉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된
게 아네요. 앞서 말씀드린 최치운, 최응현 두 어른을 합쳐서
강릉 최씨 문중에서는 모두 세 분이 향현사에 배향되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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