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에 의한 전란이 계속된다.
약한 자는 지배당하고, 무장은 세력을 확대해 간다.
전투력의 우열이 승패를 좌우하여,
무력이 강한 자가, 마침내 국가를 통일해 간다.
이 무렵부터, 봉건제도는 더욱 엄격한 계급 제도를 만들어,
그 지배력을 공고하게 다져간다.
밑바닥의 대중은, 그 무력이나 권력의 희생물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참고 살아가야 했다.
무력은, 약한 자들의 자유를 빼앗고,
행동의 자유에도 제약을 가하여 갔다.
일본에 있어서의 농민 봉기 같은 것은,
약한 자들의 단결에 의한 투쟁이었다.
그만큼 권력자에 항거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길이 없을 정도로 악정(惡政)이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상인들은, 무기나 식량이나 의류 따위를,
무장(武將)들에게 팔아, 장사로서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다.
어떤 때는 스파이가 되어,
정보까지 팔아, 적과 자기편의 구별도 없이,
장사수완을 부려 재(財)를 축적해 갔던 것이었다.
투쟁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무장(武將)들은,
상인들의 좋은 봉이 되어, 결국은 경제력에 의하여,
거꾸로 상인들에게 지배를 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여기에 드디어 자본주의의 싹이 움터 나오게 된다.
그래서 경제력은 대중을 지배해 가는데,
대중은 그 속에서, 자유에 눈뜨게 되고,
물을 얻은 물고기처럼, 단결이라는 조직을 형성해 간다.
무력(武力)은, 대중을 지배하여 왔는데,
대중의 행동을 제한할 수는 있어도,
그 마음은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부조화하고 교만한 마음때문에
자기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들도 사람의 마음을, 붙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다.
그릇된 종교를 이용하여,
악덕(惡德)한 그 지도자와 결탁하여,
대중을 기만하고, 마음의 속박을 꾀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옳지 못한, 날조된 종교, 타력본원 종교(他力本願宗敎),
인간이 만들어 낸 우상으로는,
결과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칼 마르크스처럼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것을
대중은 조금씩 깨닫게 된다.
올바른 신리에 근거한 것이라면,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구제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지혜에 의하여 조작된 종교로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그러한 종교에 속는 것은,
우리의 의식까지 썩게 하고 마는 일이다.
권력자나 귀족이, 악덕 종교가들과 짜고.
대중을 희생시키는 따위의 종교는,
아편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태양의 열, 빛은, 모든 것에 평등하며, 신의 자애의 표현이다.
그리고 종교는, 일부의 특권 계급의 독점물이 아닌 것이다.
대중은 자유에 눈을 뜸과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싹터,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도, 물질경제가 기본이어서,
그들도 무장(武將)들처럼 무력(武力)으로서 지배하도록 되었다.
스스로 단결이라고 하면서, 계급투쟁 속에서,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도 한다.
사상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서는,
가혹한 탄압을 확대하게 되어
나중에는 그들 자신의 내부에도 불만이 생겨나게 된다.
그들은 남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을 잃고 언제 권좌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은 인민의 반역자로 낙인찍히어 실각하고 만다.
인민이란 이름을 거짓으로 빌려,
행한 독재자의 주의주장은,
마침내스스로의 부조화한 행위에 비례한,
반작용이 되돌아가는 것이다.
스스로의 올바른 생활 행위 속에서,
인민의 평화로운 생활을 생각하고,
자기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대중을 구하려고 하는,
양심이 살아 있는 지도자야말로,
본래의 신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기면 관군, 지면 적군이라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싸움 그 자체가, 만물의 영장이 할 짓이 아니다.
싸움은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하는 과정의 동물의 행위임을, 자각해야 한다.
인민 대중에게 단결을 호소하면서,
권력자와 자본가들과 함께 투쟁을 선동하고 있는 지도자는,
그것만으로도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권력욕이나 자기 보존의 마음이 싹터있다면,
그것은 이미 대중을 기만하고 있는 자들이다.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라면,
투쟁의 헛됨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지도자는, 인민 대중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
싸움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알고 있다면,
싸움은, 스스로의 마음에 불안으로 되고,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은, 모두 따라올 것이다.
투쟁과 파괴에 의해 희생되는 자는,
인민 대중이 아니겠는가.
계급투쟁에 의해서,
문명이 발달해 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사상가들은,
공해라고 하는 부조화한 독물(毒物)을,
만들어 내고있는 공범자나 다름없다.
일할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감사는, 스스로의 환경에서,
열심히 일하고, 보은이라고 하는 행위에 의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자를 자인(自認)하는 지도자들도,
대중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은, 그들에 대하여, 일할 장소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한 보은을,
실적을 올리는 땀으로서 보답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경영자는 일하는 종업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환경 개선, 직업병 추방 등, 행위에 의해 나타내어야 할 터이다.
지도자는 그래서, 스스로,
일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직접 가져야 한다.
지도자다운 인간성이 중요하지 않은가 라고 하는 것이다.
어찌됐든 서로 견제해서는,
마음과 마음의 조화는 기대할 수 없다.
자본가에게는, 품성(品性)도 교양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친절한 마음 씀씀이가 필요하다 하겠다.
올바른 중도의 지도(指導)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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