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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수마2세가 코르테스에게 선물한 깃털왕관. 이 왕관은 훗날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의 군주 카를로스 1세에게 바쳐졌으며, 합스부르크가의 보물로 수백년간 보관되었다가 '재발굴'되었습니다.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스텍 정복사에서 몬테수마 황제의 감금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수있다. 아나우악 땅 대부분을 지배했던 나우아틀어-우에이 틀라토아니(Huey Tlatoani, 위대한 연설자또는 황제)인 몬테수마2세(모테쿠소마 소코욧신, Motecuhzoma Xocoyotzin)은 어떠한 이유로 인해 자신이 환영하고 '사절단'으로 믿었던 사람들에게 감금당하고 포로신세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몬테수마 감금사건은 아메리카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수있다. 이 사건 이건 타 문명권의 ' 이방인 사절단으로 온 자' 가 갑작스럽게 한 제국의 황제를 인질로 삼고 잠깐 동안이었지만, 좌지우지 했다는 사실은 그 이전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코르테스가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몬테수마를 감금했던것처럼, 대한제국 말기에도 이토와 소수의 일본군대가 황제와 신하들에게 조약을 강요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비슷하게 보인다.
말그대로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이방인에게 어의없게 감금된 이 초유의 사건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필자는 여기에 몇가지 의견을 제시한다.
1. 애초에 몬테수마가 스스로 잘못을 재촉한것일까?
1519년 11월 8일,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는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에 들어서게 된다.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하기 이전. 코르테스는 비록 코르테스 본인이 몬테수마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먼나라(에스파냐)의 국왕(카를로스1세)의 명을 받고 온 사절단'이라고 분명히 이야기 하면지만, 황제는 코르테스가 사절단일 뿐만 아니라 아스텍인들의 속방이었던 셈포알란(Cempollan), 우왁소싱고(Huaxocingo), 촐룰라(Cholulla)와 그들과 가장 적대적인 틀락스칼라(Tlaxcala)인들까지 자기세력으로 규합한 군사적 행동이 충만한 세력으로 보았기에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을것이다.
코르테스의 소수의 에스파냐군대가 거대한 아스텍 제국을 한큐에 무너뜨렸다는 잘못된 정보가 아직까지도 떠돌아 다니는 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하기 전까지, 코르테스는 최대한 자신의 동맹군을 만들려고 애썼으며, 이게 안되면 무력으로마 굴복시켰다(틀락스칼라가 좋은 예이다). 더군다나 테노치티틀란에서 에스파냐인들과 아스테카인 두 문명세력이 최초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을때, 두려움을 느낀것은 오히려 에스파냐쪽이다. 오죽했으면 코르테스가 두려움에 떠는 에스파냐 병졸들에게 어깨를 피라면서 핀잔을 주었겠는가-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Francisco Lopez de Gomara)의 기록- 하여튼 코르테스와 몬테수마는 테노치티틀란을 연결하는 다리에서 만나 서로의 예물을 전달한뒤, 이후 코르테스 군이 머물 악사야카틀 궁전(Axayacatl Place)로 가게되었으며, 거기서도 일종의 환영식을 벌이게 된다. 메소아메리카 사회에선 지도자가 사절단으로 온 자에게 예물을 하사하고 자신의 재력을 성심껏 발휘하는게 일반사이었다. 아무튼 코르테스와 몬테수마 둘의 관계는 12월이 지날때까지 별다른 충돌없이 사이좋게 가는듯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코르테스가 과거에 아나우악땅에 들어설당시 건설한 전초기지 베라 크루즈(Vera_Cruz)를 방어하던 수비대장 후안 데 에스칼란테(Juan de Escalante)및 6~7명과 말 한필이 셈포알란에서 아스텍인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테노치티틀란에서 몬테수마의 호의를 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상황에서 이와같은 상황은 코르테스에게 마치 뒷통수를 후려치는듯한 감정을 받았을것이다.이 사건으로 코르테스와 그의 에스파냐군은 몬테수마와 아스텍인들을 상당히 불신하게 되었으며, 20~30만이 거주했던 테노치티틀란에 들어온이상 포위된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한발더 앞서 나가 코르테스는 군대를 대동해 몬테수마를 제압한뒤 감금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셈포알란의 사건으로 넘어가 보자, 후안 데 에스칼란테를 포함한 6~7명의 에스파냐인들이 아스텍인들에게 갑작스럽게 살해당했을 당시 '직접 명령한 자'는 나우틀라(Nauthla)의 영주 쿠알포포카(Cualpopoca)라는 자였다. 쿠알포포카는 코르테스에게 스스로 국왕(카를로스1세)의 신하가 되길 바라였고 자신의 영지 보호를 위해 4명의 에스파냐인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코르테스는 쿠알포포카의 요청을 들어주었고, 4명의 에스파냐인들은 쿠알포포카에게 파견된 순간 아스텍인들에게 살해당한것이었다. 나우틀라의 영주인 쿠알포포카는 몬테수마에게 임명된 자였기때문에, 몬테수마 명령없이는 그런짓을 스스로 자행하진 못했을것이다. 실제로 이때문에 쿠알포포카의 군사적 행동은 앞에선 호의를 베풀지만 뒤로는 칼을 가는 몬테수마 황제의 계획된 행동이 아닌가 하고 가장 의심한것도 코르테스와 에스파냐인들이었다.
실제로 테노치티틀란 입성이전 몬테수마가 코르테스를 상당히 의심하고 일부사건은 그를 제거하려고 했던 모습을 보인다. 몬테수마는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군해 오는 코르테스에게 계속된 사신을 보내었고, 실제로 로페스 데 고마라나 안드레스 데 타피아(Andras de Tapia)의 기록을 보면 신하에게 자신(몬테수마)처럼 위장시켜 코르테스 앞으로 보냈다고도 한다. 이 허술했던 분장은 금방 들통나버렸지만, 몬테수마가 코르테스를 얼마나 못미더워 했는지 알수있는 대목이다.
사실 코르테스의 의심이 절정으로 달한것은 비극적인 사건이라 할수있는 1519년 10월 19일 촐룰라(Chollulla)에서 벌어진 학살이다. 케살코아틀(Quechacoatl)의 성지이자 가장 번영했던 도시중 하나였던 촐룰라에 도착한 코르테스는 당시 엄청난 환영과 호의를 받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코르테스의 중요동맹인 틀락스칼라인중 한명이 도나 마리나(Dona Marina, 코르테스가 아스텍정복 당시 대동했던 통역관이자 정부였던 여성)에게 '촐룰라인들이 몬테수마의 명을 받고 사실 코르테스 일행을 전부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걸 틀락스칼라인들로부터 들었다고 고발했던것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안 코르테스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이른바 '먼저 선수치는 작전'을 써서 촐룰라 시민 3000명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대규모 학살극을 자행한다. 그리고 촐룰라에서 머무던 코르테스 일행을 지켜보러 온 몬테수마의 사신들에게 다시는 그런짓을 자행하지마라고 '강력한 경고'를 준다.(오로스코 라 베라,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의 기록)
촐룰라에서의 음모가 사실 고발한 틀락스칼라인의 악감정이었는지, 코르테스 개인이 조장할려고 했던 공포인지, 몬테수마의 의도된 계획이었는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이 사건을 이전에 경험한 코르테스가 '몬테수마의 신하인 쿠알포포카와 그의 무리가 에스파냐인들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 분노를 감추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이때문에 쿠알포포카는 직접 테노치티틀란에 끌려왔고, 코르테스는 그와 몬테수마가 관련이 있는지 조사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쿠알포포카는 자신이 황제의 명을 따랐을뿐이라 하는 반면, 몬테수마는 자신은 절대 그런 명령을 내린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쿠알포포카는 결국 1519년 12월 코르테스에게 화형이 선고되어 죽고 만다. 하지만 이 사건 바로 이후 몬테수마는 코르테스 군대에게 포위당했고 감금되다는 사실을 비추어볼때, 쿠알포포카 사건이 코르테스가 자행한 몬테수마 감금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수 있다. 이 사건외에도 코르테스에게 의심갈만한 행동을 했던 몬테수마의 모습을 볼때, 그는 스스로 잘못된 행동을 재촉해서 코르테스에게 감금당하게 된것일수도 있다.
2. 코르테스 개인적 사정
1519년 11월 8일 테노치티틀란으로 들어온 코르테스와 그의 군대는 기껏해야 얼마되지 않았었다. 그간 메소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전투로 인해 초기 500여명이었던 에스파냐인은 350~400이 채안되는 수준으로 전락해있었으며, 동맹군으로 기껏만든 원주민일부는 테노치티틀란으로의 입성이 금지 되었기 때문에 '매우 소수의 원주민 동맹군'만 대동해야되었었다.
테노치티틀란은 당시 유럽의 어느대도시와 비교해봐도 안꿀릴 거대한 도시로서 25~30만의 인구(여기선 의견이 있긴 하다)가 거주했던 대도시였다. 괜히 동행했던 졸병이자 역사가 베르날 디아스(Bernal Diaz)가 아마리스(중세 소설)의 환상도시를 떠올린것이 아니며, 괜히 부관 디에고 데 오르다스(Diego de Ordaz)가 '콘스탄티노플만큼 거대한 도시'라며 찬양했던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즉, 코르테스는 소수의 인원으로 아스테카인들의 본진영인 테노치티틀란 안에서 '포위된 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부관 후안 벨레스케스 데 레온(Juan Velazquez de Leon),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같은 급진적이고 충동적인 자들은 아스텍인들이 혹시모를 배신을 몹시 두려워하며, 선제공격할것을 주장했었다. 이제 막 몬테수마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띄어가던 코르테스에게 여간 고려해볼만한 문제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스테카인들이 선물로 보내준 '금이었다. 몬테수마는 코르테스 일행에게 악사야카틀 궁전(Axayacatl place)에서 머물게끔 허락했으며, 에스파냐인 마음대로 궁전을 써도 괜찮다고 하였다. 베르날 디아스의 기록에 의하면 인원 5000명이 들어가도 부족할게 없을 이 궁전은 몬테수마의 선대 황제였던 악사야카틀이 세운 궁전이었다. 코르테스 일행은 악사야카틀 궁전을 자기들에 맞게 보수및 개조했으며, 군사요새로 변모하게끔 하였다.
하지만 개조도중 코르테스는 놀랄만한 발견을 하게된다. 궁전의 벽을 부수는도중 궁전벽안에 다수의 황금 무더기가 발견된 것이었다. 이 보물은 코르테스와 그에 충성하는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같은 부관들이 거의 전부를 독차지했고, 나머지 졸병들은 터무니없는 몫을 받아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Bernal Diaz del Castillo의 기록)
어쨋든 이 악사야카틀의 궁전에서 발견된 보물은 코르테스 일행으로선 더욱 큰 욕심을 꿈꾸게 한 계기를 되게 함이 충분하다. 실제로 코르테스는 몬테수마를 감금시키고 다시 풀어준후, 가장 먼저 한일이 아스텍 제국의 전 영주들을 모아 '에스파냐의 카를로스1세에 충성한다는 대가의 공물'을 바치게끔 조약을 강요했던것을 보면 알수있다.
마치면서, 코르테스의 몬테수마 감금 사건은 현재에도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필자는 두가지 의견이 가장 적합하다고 여기며 이 두가지 의견 모두가 더해진 복잡한 상황에서 코르테스는 한 제국의 황제를 감금하는 초유의 일을 저질른것으로 추정된다.
즉 코르테스 부하들의 두려움+ 코르테스와 에스파냐인의 탐욕에 '몬테수마의
부주의하고 의심살만한 행동'이 이 사건이 나게된 원인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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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안 말했지만, 쿠알포포카는 코르테스에게 문초당할당시 '몬테수마와의 관계를 부인'했지만, 코르테스가 화형처한다는 명령을 내리자 '사실은 몬테수마가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이실직고 하였다.
참고자료
에르난 코르테스가 카를5세에게 보낸 서신.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iaz del Castillo)의 The Truthful History of the Conquest of New Spain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Francisco Ropez de Gomara)- Historia de las Indias.
그외 기록자들 안드레스 데 타피아(Andres de Tapia), 페르난도 알바 익스틀릴소치틀(Fernando Allva Ixtlilxochi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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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코르테스 정말 대단하네요 유럽 정치판에서 기회가 있었으면 활약했을 것 같은 느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