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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인들의 효행
이원걸(문학박사)
1. 현재도 유효한 효행의 덕목
2. 효도의 의미와 배경
3. 중국의 효행 인물
4. 우리나라의 효행 인물
5. 우리도 효도할 수 있어요
1. 현재도 유효한 효행의 덕목
예전부터 인간이 지닌 여러 가지 덕목 가운데 효는 가장 으뜸가는 덕목으로 인식되어 왔다. 공자는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고 했다(子曰 夫孝 百行之本也).이러한 효의 연원을 추적하여, 현실 생활에서 효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문제는 효라는 덕목을 지난 시대의 유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데에 있다. 이를 역사와 연계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기존 역사나 가치관이 화석처럼 굳어져 전시용에 불과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취급된다면,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반면에 지난 문화와 역사가 화석이 아닌, 과거 사실을 현재화하는 매개물로 활용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미래를 예측하게 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 적용할 수도 있는 훌륭한 유산이 된다. 그런 점에서 역사와 기존 가치관은 화석 같은 존재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미래를 전망하고 이를 추동할 수 있는 역동적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안목과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효라는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효라는 것 역시 과거에 잔존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한 정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아름다운 효행이 현재와 미래 사회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가치를 확보한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아름다운 효행은 어느 시대에서나 보석처럼 빛난다. 인간 생활에서 효행은 주요한 덕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인간으로서의 기본 생활 실천 도리는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옛 선인들의 효행을 정리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정리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효도의 의미와 구체적 실천 방안 및 배경 등을 정리하기로 한다. 이어 우리 문화가 중국 문화와 인접해 있었고, 중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여 중국 측의 효행에 대해 개략적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이어 우리나라 역대 효행의 기록을 검토하여, 학생의 입장에서 효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효도의 의미와 배경
효에 대한 의미와 기록은 효경과 예기 및 논어에서 찾을 수 있다. 효라는 의미의 한자는 늙은이(老)와 자식(子)의 합성어이다. 자식으로 노인을 공경하듯이, 어버이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 효라는 의미이다. 이에 대한 문헌적인 자료를 통해 살펴보면, 효경에서는 효에 대한 개념 정의를 하였으며, 예기에서는 이에 대한 행동 준칙과 강령을 제시했다. 그리고 논어에서는 효에 대한 구체적 사례를 제시했다. 이를 조목별로 정리하기로 한다. 먼저 효경에서 언급한 효의 개념 정리를 보기로 한다.
몸의 살갗과 털은 어버이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를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세상에 나아가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떨쳐서 어버이의 이름까지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다.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위에서 어버이께서 물려주신 몸을 손상하지 않고 잘 보존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했다. 여기서 어버이께서 물려주신 몸뿐만 아니라, 어버이의 소중한 정신적 가르침도 함께 지켜 나가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이면적으로 강조했다. 이렇게 자신을 소중하게 보존하면서, 어버이의 가르침을 따라 학문을 익혀 후세에까지 아름다운 행적을 드러냄으로써 자연히 어버이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라고 했다. 어버이가 주신 몸을 온전히 보전하면서,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 발전과 인류의 복지 증진에 힘을 써서, 최선의 삶을 살아갈 때, 어버이의 이름이 자연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효도의 종결이라고 했다. 이러한 예는 논어의 증자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증자가 병이 위중하여 제자들을 불러모으고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이불을 걷고 나의 발과 손을 보라. 시경에서는 두려워하고 경계하기를 깊은 못에 다다른 듯이 하고, 엷 은 얼음을 밟듯 하라하였으니, 이제야 그것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알았노라. 제자들아!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이는 증자가 병이 위중하여 제자를 불러 모아 유언한 내용이다. 증자는 제자들에게 이불을 걷고 팔과 다리를 만져보게 하고는 자신의 신체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을 보여 주면서, 어버이가 물려주신 몸을 온전하게 보존하여 효도를 다했다고 강조한 사례이다. 증자는 시경을 인용하여, 자신이 살얼음 밟듯이, 조심스럽게 일생을 살아갔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었다. 증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어버이가 물려주신 신체를 잘 보존하여, 이제는 이를 손상시킬까 염려하는 데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이처럼 자식 된 자는 자기 몸을 올바르고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동시에 건강한 사고를 지니고,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효임을 강조했다.
그러면, 옛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효를 실행했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 규정은 예기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식이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하루를 준비하는 모습을 다음처럼 상세하게 규정해 두었다.
아들이 부모를 섬길 때에는 첫닭이 울면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며, 머리를 빗고, 검은 비단으로 머리털을 싸 매어 비녀를 꽂는다. 그리고 비단으로 상투를 짜며, 다발 머리 위의 먼지를 털고 갓을 쓰고는 그 끈을 드리 운다. 그리고 검은 빛으로 만든 삼베옷을 입고, 무릎덮개를 착용한 뒤에 큰 띠를 띠고 홀(笏)을 꽂는다. 그 리고 왼쪽과 오른쪽에 여러 가지 작은 도구를 찬다. 왼편에는 물건을 닦는 수건과 손수건과 작은칼과 숫돌 과 작은 뿔 송곳과 나무 부싯돌을 찬다. 이어 행전(行纏)을 두르고 신을 신고 신 끈을 맨다.
자식으로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몸단장을 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세수 → 머리단장 → 복장 갖추기 → 장신구 착용 → 신발 착용에 이르기까지의 세미한 규정을 기록해 두었다. 실제 인용하지 않은 효경에는 부모가 출입할 때 행해야 할 예절, 세숫물을 올리는 예절, 음식을 올리는 예절 등 생활 전반에 걸친 예절을 아주 상세히 규정해 두었다. 일반 사람들이 감히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롭게 규정해 두었다. 그만큼 어버이는 지성으로 모시고 공경을 다해야 하는 대상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효의 실천 방안은 논어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다.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효에 대한 교육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례들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구체적 효행에 대해 다음처럼 정리하였다.
효자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평소 모시는데 공경함을 다하고, 받들어 섬기는 데에는 즐거움을 다해야 한다. 병 이 드셨을 때에는 근심을 다하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드릴 때에는 엄숙함을 다해야 한다.
(子曰 孝子之事親也 居則致其敬 養則致其樂 病則致其憂 喪則致其哀 祭則致其嚴)
그리고 공자는 맹의자에게 효에 대해 다음처럼 가르쳤다.
어버이 말씀에 어김이 없어야 한다.
(孟懿子問孝 子曰無違)
어버이의 말씀에 어긋남이 없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효도를 실천하는 방안임을 강조했다. 이는 곧 어버이 말씀에 거역함이 없이 공손하게 순종하고, 어버이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효도임을 역설했다. 그리고 공자는 자식으로서, 어버이에게 행해야 할 도리를 다음처럼 언급하였다. 두 가지 예를 인용하기로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버이가 계시면 멀리 가서 놀지 말며, 놀러 갈 때에는 반드시 간 곳을 알려야 한다.”
(子曰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
이는 어버이에게 자식으로서 자신이 오고 가는 장소를 분명히 알려, 어버이에게 근심을 드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평소 어버이의 부르심에 대해서도 다음처럼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부르시면 빨리 대답하되 느리게 대답하지는 말며, 입안에 음식이 들어 있으면 그것을 뱉고 대답 해야 한다.”
(子曰 父命召 唯而不諾 食在口則吐之)
어버이께서 자식을 부르시면, 지체하지 말고 공손히 응하여 작은 근심거리도 끼치지 말아야 함을 강조했다. 어버이에 대한 공경심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공자는 어버이께서는 잠시라도 자식들을 위한 염려에서 놓여 질 때가 없음을 다음처럼 언급했다. 맹무백의 효에 대한 질문에 공자가 대답한 내용이다.
맹부백이 효에 대해 질문하자, 공자께서는 어버이께서는 오직 자식이 병이 날까 걱정한다고 하셨다.
(孟武伯 問孝 父母 唯其疾之憂)
공자는 어버이는 항상 자식에게 작은 병이라도 발생할까 염려하며, 마음을 졸인다고 깨우쳐 주었다. 어버이는 자식에게 작은 어려움이라도 발생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와 조바심으로 마음을 쏟고 계심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어버이를 대하는 기본 정신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에 대한 단서는 다음의 두 가지 예에서 발견된다.
자유가 효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늘날의 효라는 것은 봉양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개와 말도 모두 제 새끼를 기르는 도리가 있는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별하겠느냐?”
(子游問孝 子曰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자유는 예절이 바르고 착한 공자의 제자이다. 공자는 그에게 자식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데 있어서 공경심이 없다면, 미물의 짐승이 새끼를 기르는 것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했다.그만큼 어버이 봉양에 있어서, 공경심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이 부모 봉양에는 소홀하면서, 애완동물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와 비교해 볼 때, 마음에 새겨 둘 교훈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자하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자하가 효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얼굴빛만으로 자식의 효도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일이 있을 때 동생과 자식들이 어버이께서 하실 수고로움을 대신해 드리고, 술과 밥이 있을 때, 아버지나 형에게 먼저 드시게 하는 것만을 효라고 할 수 있 겠는가?”
(子夏問孝 子曰色難 有事 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자하는 공자 제자 가운데 문학으로 뛰어난 자였다. 공자는 그에게 자식으로 어버이를 섬길 때, 어버이의 수고를 덜어 드리고,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효도를 다했다고 볼 수 없음을 깨우쳐 주었다. 수고를 덜고, 물질적 봉양을 했다고 해서 완전한 효도를 다했다고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진정한 효도는 그 얼굴빛에서부터 싫어내는 내색이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꾸밈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효도를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자식으로 어버이를 섬기는데 있어서 어버이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 주시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다음처럼 언급했다. 자식의 효심이 담긴 내용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버이의 연세는 알지 않을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
(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喜 一則懼)
어버이의 연세를 아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슬프다고 했다. 기쁜 이유는 어버이께서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이 기쁘다는 의미이고, 슬픈 이유는 어버이께서 이 세상에 사실 날이 자꾸만 줄어들기 때문에 슬프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버이가 살아 계시는 날을 아낀다는 의미에서 애일(愛日)이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이어 옛 사람들이 어버이를 존경하고, 어버이 은혜에 대해 표현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시경에서 노래했다.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셨으니, 슬프고 슬픕니다. 어버이께서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수고하셨 습니다. 그 은혜를 갚고 싶지만 하늘처럼 높아 끝이 없습니다.”
(詩曰 父兮生我 母兮鞠我 哀哀父母 生我劬勞 欲報深恩 昊天罔極)
어버이의 은혜를 그리워하며, 나를 낳고 길러주신 은혜는 하늘처럼 드높아 자식으로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고 했다. 어버이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고시에서 다음처럼 표현하였다.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위해 옷을 짓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려내었다.
자애로우신 어머님 손에 들린 실은
길 떠나는 아들의 옷을 짓기 위한 것일세
떠날 때 되어 더욱 촘촘하게 꿰매심은
아들이 늦게 돌아올 것을 생각해서 라네
한 치 풀 같은 아들의 마음으로
봄날 햇빛 같은 어머님 사랑 보답하기 어렵다네
(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
이 시는 당나라 때 맹교라는 시인이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이 자신을 위해 옷을 정성껏 만들어 주시는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에 감동이 되어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어머니는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이 타향에서 오래 지내는 동안 옷의 실이 터질 것을 염려하여 매우 정밀하게 바느질을 하신 것이다. 이와 함께 어머니는 자식이 먼 객지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한 올 한 올 정성을 다해 옷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마음을 자식이 알고, 한 치 밖에 안 되는 자신의 마음으로 몸 석 달 동안의 햇빛 같은 어머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어렵다고 표현하였다. 다음 예문은 어버이가 살아 계시는 동안 어버이에게 정성을 다해 효도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어버이와 자식과의 관계를 나무에 비유했다. 나무의 뿌리는 조상을 말한다. 나무 자체는 부모를 상징한다. 그리고 가지와 잎은 자식을 의미한다. 바람은 자식으로 인해 어버이가 겪는 여러 가지 세상적인 어려움을 말한다. 이는 우리 속담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의미와 통한다. 가지가 많은 나무에는 바람이 잠잠해 질 날이 없다는 의미로서, 자식이 많은 어버이에게 걱정이 떠날 때가 없다는 것이다. 어버이가 자식들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어지는 시구의 의미는 자식이 성장하여, 어버이 은혜를 깨닫고, 보답하고 싶지만, 어버이는 이미 세상을 떠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탄식만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자식을 교육하면서, 어버이에게 다음처럼 효도하라고 강조했다.
태공이 말했습니다.
내가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면 내 자식 또한 나에게 효도하겠지만, 내가 이미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았다면 자식이 어떻게 나에게 효도하겠습니까?
(太公曰 孝於親 子亦孝之 身旣不孝 子何孝焉)
강태공은 중국 주나라 때의 실존 인물이다. 80세가 될 때까지 평생 독서하고 바늘이 없는 낚시질을 하면서 등용될 때를 기다리다가, 서백창에게 등용되어 어려운 정치 현실을 타개하고, 실권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강태공은 나 자신이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으면서, 자식에게 효도 받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다음의 내용도 이와 동일한 성격의 교훈성을 갖고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한 사람은 다시 효도하고 순한 자식을 낳을 것이며, 부모에게 거역한 사람은 다시 거역 하는 자식을 낳습니다. 믿지 못하면 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을 보십시오.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孝順 還生孝順子 忤逆 還生忤逆子 不信 但看簷頭水 點點滴滴不差移)
자식에게 효도를 받기 이전에 내가 먼저 어버이에게 진심으로 효도를 하면, 자식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효도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한 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음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비유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미 앞서 떨어졌던 그곳에 그 다음 빗물이 떨어진다고 했다.
이상 검토한 내용을 정리하면, 효는 모든 행동 규범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라고 했다. 그리고 자식이 어버이를 봉양할 때에는 진심으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되,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어버이가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효도를 다해야 하며, 나 자신이 진정으로 어버이에게 효도하면, 자식도 자연스럽게 효성을 본받게 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의 실제 효행을 실천한 인물을 살펴보기로 한다.
3. 중국의 효행 인물
중국 역대 효행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70세 노인으로 색동옷을 입고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린 초나라 노래자 이야기를 보기로 한다.
노래자는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봉양할 때에 맛있고 부드러운 음 식을 준비하였다. 그가 70세의 노인이 되었어도 그의 부모님은 여전히 생존해 계셨다. 그래서 노래자는 부모 에게 나이가 든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이 입는 색동옷을 입고 어린이처럼 놀곤 하였다. 그는 부모님을 위해 음식을 차린 뒤에, 마루 위로 오르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게 되었는데, 엎어져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리고 새 새끼를 가지고 어린 아이처럼 놀았다. 이러한 일은 모두 부모에 대한 효성을 다하기 위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익히 들어온 노래자 이야기다. 노래자는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기 위해 자신은 늙지 않은 어린 아이인 것처럼 행동하였다. 노래자는 명절에 어린이들이 입는 색동옷을 입고, 늙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고, 어린 아이처럼 울면서 부모님께 칭얼대었다고 한다. 부모님 입장에서 어린 아이처럼 느끼게 함으로써, 매우 연세가 높으신 부모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린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나라 때 이한(李瀚)이란 사람이 중국 역대 인물 가운데 600여 명의 행적을 정리한 몽구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왕상(王祥)의 효행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왕상은 계모가 겨울철에 물고기를 먹고 싶어하자, 옷을 벗고 얼음 속에 들어가려 하니, 얼음이 저절로 깨어지 고 잉어 두 마리가 튀어 나왔다. 그래서 이것으로 반찬을 만들어 계모에게 올렸다. 그리고 또 한 번은 계모가 황작새의 부침을 먹고 싶어했는데, 황작새 수십 마리가 장막 속으로 날아들어 오게 되었는데, 이를 잡아 요리 를 해서 올렸다. 그리고 계모가 오얏을 지키라고 했는데, 바람이 불어 오얏이 떨어지자, 왕상은 나무를 안고 울었다.
왕상은 계모를 지성으로 섬겼다. 음식을 봉양하는데 있어서, 신이적인 도움이 있었다. 겨울철에 잉어를 잡아 올리는 과정과 황작새 요리 과정에서 신이한 해결 장치로 인해 어려움이 해결되었다. 왕상의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켜 이러한 일이 발생된 것이다. 그리고 왕상이 오얏을 지키다가, 오얏이 바람에 의해 떨어지자, 슬퍼했다. 이는 그가 비록 부모님의 말씀을 일부로 저버린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저버리게 된 점을 슬퍼했던 것이다. 다음은 후한 때 황향(黃香)의 효행 이야기이다.
황향은 아홉 살 때에 어머니를 여의자, 어머니를 그리워 한 나머지 몸이 야위고 거칠어져서 뼈가 드러날 지경 이었다. 그는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하여 봉양해 겨울에는 이불이나 바지를 팔더라도 아버지에게 맛 있는 음식을 드시게 했다. 더우면 아버지 베개에 부채질을 하여 아버지를 시원하게 해드렸고, 추우면 자신의 체온으로 아버지의 이불을 따뜻하게 해드렸다.
황향의 아버지 봉양에 대한 이야기이다. 황향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무척 슬퍼했으며, 홀로 남은 아버지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효성을 다하였다. 맛난 음식을 올리고, 아버지께서 계절에 맞게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이어 공자가 효자라고 칭찬한 민자건의 경우를 보기로 한다. 공자는 민자건의 효성에 대해 그의 부모나 형제들이 칭송했는데,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이 없었다고 술회했다(子曰 孝哉 閔子蹇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 부모와 형제 및 모든 주변 사람들이 인정한 민자건의 효행을 정리한다.
민자건은 일찍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께서 계모를 얻어 아들 두 명을 낳았다. 그런데 민자건은 지극한 정성으로 효도를 게을리 하지 않자, 계모가 그를 미워하여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는 솜옷을 입혀 주고, 민자건 에게는 갈꽃 솜옷을 입혔다. 어느 추운 겨울날에 아버지가 민자건에게 수레를 끌게 했는데, 민자건은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 수레채를 놓치고 말았다. 아버지가 이를 나무라자, 민자건은 제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자세히 살펴보고 그 까닭을 알아채고는 계모를 내보내고자 했다. 이에 민자건은 아버지께 간청을 했 다. 어머니가 계시면, 한 아이가 춥고, 어머니가 가시면, 세 아이가 모두 추위에 떨게 됩니다. 아버지는 그 의 말을 착하게 여겨, 계모를 내보려고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 계모 역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세 아들을 차별 없이 대우하여 마침내 착한 어머니가 되었다.
민자건의 착한 행실이 담긴 사례이다. 민자건은 계모의 학대를 탓하지 않았으며, 계모의 못된 행동에도 착한 마음을 베풀어서 마침내 계모로 하여금 도리어 감화를 받게 하여 온 가정을 화목하게 하는 덕행을 실천했다. 가정의 화목과 평화를 유지시키는 민자건의 효행은 퍽 아름답다. 민자건의 착한 효심이 계모의 마음을 변화시켜, 온 가정이 평안하게 되었고, 그는 결국 아버지에게 효성을 다하게 된 것이다. 이어 맹자에 나오는 순임금의 효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순(舜)의 부모는 순을 시켜서 창고를 수리하게 하고는 순이 지붕으로 올라가자, 사다리를 빼 버린 뒤에, 순의 아버지인 고수(瞽瞍)가 창고에 불을 질렀으며, 우물을 파게 하고는 순이 우물로 들어가자, 위에서 흙을 덮어 우물을 메워버렸다. 상(像)은 다음처럼 말했다. 순을 죽일 계획을 세워 그를 우물에 묻혀 죽게 한 것은 나의 공이다. 소와 양과 보물 창고는 부모에게 주고, 순이 사용하던 방패와 무기와 거문고는 내가 차지하며, 두 형 수는 나의 침실을 돌보게 하겠다.하고는 순의 집으로 가보니, 순은 평소처럼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상은 다음처럼 둘러대었다. 제가 형님을 보고픈 마음이 간절하여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순은 다음처럼 말하였다. 너는 나의 백관을 다스려다오!
순의 효성은 매우 탁월하다. 순임금은 어진 정치를 베풀어서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고 중국의 문화를 발전시켜서 이상적인 시대를 건설한 위대한 군주이며, 효자였다. 순의 아버지는 고수이다. 순의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계모 아래에서 자라났다. 그런데 계모에게는 상(象)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주 못된 성품을 소유했다. 그리고 계모 역시 성질이 모질었으며, 아버지 고수도 완고하고 악한 사람이었다. 순이 아무리 착한 마음을 가지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려고 해도 이들은 순과 배다른 동생인 상과 함께 순을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서로 짜고 순을 시켜 창고 지붕을 수리하게 하고는 사다리를 치워 버리고, 창고 아래서 불을 질러 버렸다. 그러나 순은 큰 우산을 펼쳐 들고 지붕에서 안전하게 내려와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우물 청소를 시킨 뒤에 순이 우물로 들어가자, 우물을 메워버리고 죽게 만들었다. 그러나 순은 우물 옆을 파고 땅굴을 파서 겨우 살아 나왔다. 그래도 순은 그들을 결코 미워하지 않고, 효성을 다했다. 자기를 죽이려는 그들에게 착한 마음을 베풀었던 것이다. 의의 이야기에서 상은 죽은 줄 알았던 순이 나타나자, 거짓말로 형을 보고 싶어 찾아 왔다고 하자, 순이 그를 용서하고, 그에게 도리어 작은 고을을 다스리도록 주선했다는 이야기이다. 못된 상을 벌주면, 결국 상의 어미에게 근심을 남기게 될 것이며, 이는 결국 아버지에게 불효하는 일이 되므로, 순은 모든 것을 알고도 상을 용서하여 아버지 고수에 대한 효를 실천했던 것이다.
순은 중국 역대 효자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후일, 부모와 상이 못된 마음을 뉘우쳤다고 전해진다. 순의 어질고 고결한 마음이 결국 그들을 개과천선하게 한 것이다. 요임금은 이처럼 착한 순에게 두 딸 아황과 여영을 시집보내고, 아홉 아들로 하여금 소와 양, 그리고 많은 일꾼과 재물을 갖추게 하여 들판 가운데서 순을 섬기게 했다. 그 결과, 순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 벌판은 5년도 채 되지 않아 한 도읍을 이루게 되었으며, 순은 후일 어진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 노래자, 왕상, 황향, 민자건, 순의 효성에 대해 정리했다. 노래자와 왕상 및 황향은 다소 주변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효행을 실천했다. 민자건과 순의 경우에는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인 상태에서 효를 실천했다. 이들은 박대와 죽음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더 큰사랑과 어진 행적을 실천함으로써, 가정의 평화를 유지했다. 순의 경우는 이보다 더 나아가 위해 행위를 가하려는 자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도록 유도했을 뿐만 아니라, 천하 백성들을 평안하게 다스리는 덕행을 발휘했다. 그 기본 마음의 바탕에는 효행이 자리 잡고 있었다.
4. 우리나라의 효행 인물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조선의 건국의 이념으로 수용된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충(忠)․효(孝)열(烈)이 강조됨에 따라 국가에 충성한 자나 부모에게 효도한 자,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킨 여성에 대한 포상 제도와 특혜가 부여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부응하여 자연히 충신, 효자, 효녀 및 열녀가 배출되었다. 이에 따라 역대 우리나라 수많은 문헌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충신, 효자, 효녀, 효부, 열녀가 입전(立傳)되었다. 조선 시대 이전의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의 기록에도 효자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분량면에서 조선 시대의 기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제한된 이 지면에서 이러한 효자, 효녀, 효부들의 모든 행적을 살펴보는 것은 무리이다. 문헌에 드러나면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효행 인물을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에 실린 효행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다루기로 한다. 먼저,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을 보기로 한다. 향득의 효행 이야기이다.
향득(向得)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흉년이 들어 그 어버이가 거의 굶어죽게 되자, 향득은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봉양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콧병을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조정에 알리어 경덕왕이 벼 5 백 석을 내려 주었다.
향득은 흉년이 들자, 부모님이 굶주려 죽게 될 지경에 이른 상태에서 최후의 비상 대책을 강구하여, 부모의 목숨을 살렸다. 그리고 어머니의 축농증을 입으로 빨아내어 치료했다. 향득이 부모를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했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다음은 성각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각은 신라 사람으로, 세상의 명예나 벼슬을 즐겨 하지 않고, 스스로 거사라 칭하며 일리현 법정사에 의지해 살았다. 후일,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 나물밥을 먹기 어려우므로, 자기 다리 의 살을 베어 먹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지성으로 부처님께 빌면서 재를 올렸다. 대신 각간 경신, 이찬 주 원 등이 국왕에게 아뢰니, 왕은 웅천주 향덕의 고사에 의하여 벼 3백 석을 내려 주었다.
성각도 향득과 비슷한 효행을 실천하였다. 성각은 자유로운 몸으로 불가에 의지해 살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서 어머니를 정성스럽게 모셨다. 어머니가 늙고 병들자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먹이는 행동을 하며, 어머니가 죽자, 지성으로 부처님께 빌면서, 재를 올렸다고 한다. 다음은 효녀 지은 이야기다.
효녀 지은은 신라 사람으로, 천성이 효도에 지극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그 어머니를 봉양하여 나이 32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어머니를 밤낮으로 모셔 좌우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봉양할 것이 떨어 지면, 품팔이도 하고, 혹 나가서 밥을 빌어다 드시게 했다.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하자, 피곤함을 견디지 못해, 마침내 부잣집을 찾아가 쌀 10여 석을 받고, 일하는 종으로 팔려가기로 하고, 하루 종일 그 집에서 일하다 가 저녁이면 밥을 지어 가지고 와서 봉양한 지 삼사 일이 지났다. 그 어머니가 딸에게 이전에는 밥을 먹으면, 맛이 있었는데, 요즘은 쌀밥을 먹으니 좋기는 하지만, 맛이 이전만 못하구나. 마치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하니, 딸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 어머니는 나 때문에 네가 종이 되었으 니, 이 어미가 빨리 죽는 게 낫겠구나!' 하고 이내 대성통곡하니, 딸도 따라 울었는데, 슬피 우는 소리가 길가 는 나그네를 감동케 하였다. 그 때 효종랑이 구경나왔다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돌아가 부모님께 청하여 좁쌀 백 석과 의복 등을 실어 보내주고, 또 지은을 종으로 사기로 한 사람에게 변상하여 좋은 낭군에게 시집을 가 게 하였다.
여성으로서, 효행을 실천한 인물 이야기이다. 지은은 가난한 살림에 홀어머니를 제대로 봉양할 수가 없어서 남의 집 종으로 몸값 대신 쌀을 받고, 어머니를 봉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를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고, 급기야 그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이 모녀의 통곡 소리를 들은 효종랑이 부모님에게 아뢰어 곡식을 보내주고, 지은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여 종의 굴레를 벗겨 주었다. 이 덕분에 효녀 지은은 좋은 신랑감을 만나 혼례까지 올리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다음은 설씨녀 이야기이다.
설씨녀는 신라 율리 민가의 여자이다. 그녀는 비록 외롭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안색이 단정하고 몸가 짐이 순결하여 그녀를 지켜 본 사람이면 누구나 부러워하면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진평왕 때에 그녀의 아 버지가 늙은이였지만 군대에 편입되어 정곡이란 곳에 수자리 살러 가게 되자, 그녀는 늙고 병든 아버지를 차 마 멀리 떠나보낼 수도 없고, 또 자신이 여자의 신분이기 때문에 모시고 따라 갈 수도 없어 마냥 답답하기만 했다. 사량부에 사는 소년 가실은 비록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지만 교양이 있고 단아한 청년이었다. 그는 일찍 부터 이 설씨녀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감히 표현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설씨녀가 아버지의 종군으로 인해 근 심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급기야 찾아가 설씨녀에게 청하였다. "내가 비록 용렬하지만 항상 의기가 있는 사람 이라고 자처해 왔습니다. 못난 제가 낭자 아버님 대신 수자리 살러 가게 해 주시오."라고 하기에 설씨녀는 매 우 기뻐하며 들어가 아버지께 아뢰었다. 아버지는 들어오라고 하여 보고 말하기를 "듣건대, 젊은이가 내가 해 야 할 일을 대신해 준다하니, 기쁘고 송구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보답할 방법을 생각했네. 만약 그대가 나의 어린 딸을 어리석고 고루하다고 해서 버리지 않는다면, 아내로 삼아주고 싶네"라고 하였다. 가실은 두 번 절하 며 "감히 기대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그것이 저의 소원입니다"하고 바로 물러가 혼례를 청하니, 설씨녀는 " 혼인은 사람의 큰 도리이니, 갑자기 거행할 수는 없습니다. 첩이 이미 마음으로 허락한 이상 죽어도 변함없을 것이니, 낭군께서 수자리에 나갔다가 교대하고 돌아오신 뒤에, 날을 잡아 혼인 예식을 올리더라도 늦지 않습니 다."하고 거울을 두 쪽으로 나누어 서로 한 쪽씩 나누어 가지면서 말했다. "이것이 믿음의 증표이니, 후일에 반드시 합쳐질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가실은 일찍이 말 한 마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즈음에 이르 러, 그는 설씨녀에게 당부했다. "이 말은 천하에 없는 둘도 없는 좋은 말이니, 훗날 반드시 쓰일 데가 있을 것 이오. 지금 내가 떠나고 나면, 말을 기를 사람이 없으니, 여기 두고 길러 뒤에 사용하게 해주시오"하고 떠났다. 마침 나라에 변고가 생겨, 가실과 교체를 시켜 주지 않자, 아버지는 딸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그와 3년을 기약 했는데 지금 이미 그 기한이 지났다. 그러므로 너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하니, 설 씨녀는 "그 당시, 아버지를 평안하게 하기 위해 굳이 가실과 더불어 혼례를 올리자고, 언약했는데, 가실이 믿 고 여러 해 종군하여 굶주림과 추위와 수고를 하며, 하물며 적의 경계에 가까이 있어 손에 무기를 놓지 못하 며,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처해 있는데, 어찌 신의를 저버리고 약속을 바꾸는 것이 사람의 도리겠습니 까?" 하고 " 끝내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으니 다시는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라고 하였다. 그런데 늙 은 아버지는 딸이 나이가 찼는 데도 시집을 못간 것이 안타까워 강제로 시집을 보낼 생각으로 몰래 마을 사람 과 약혼하고 날짜까지 정하여 사윗감을 데려오자, 설씨녀는 굳게 항거하여 몰래 도망을 가려고 하다가 결국 가지 못하고, 마구간에 들러 가실이 맡긴 말을 보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때 가실이 교대하고 돌아 왔 는데, 얼굴이 바짝 마르고, 의복이 초라하여 집안사람들이 몰라보고 딴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실이 바로 앞에 나와 반쪽 난 거울을 던져 주니, 설씨녀는 이것을 받아 들고 기뻐하며, 울었다. 아버지와 온 집안사람들이 매 우 기뻐하였으며, 급기야 둘은 혼례를 올리고, 해로하였다.
설씨녀 이야기에 설씨녀 아버지의 종군을 배경으로 하는 설씨녀와 가실의 사랑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기존 사실에 근거한 허구가 반영되어 문학성을 갖는 작품이다. 실제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이러한 작품들이 많다. 이들 작품은 우리나라 한문 소설 발달사에서 영향을 끼친 작품들이다. 설씨녀를 사랑한 가실은 설씨녀의 효심이 담긴 고충을 해결하려고 자청한다. 설씨녀 부친 대신 자신이 수 자리를 살러 가겠다고 한 것이다. 어쩌면 살아서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설씨녀를 사랑한 나머지 그 일을 자청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짐을 자신이 대신 져주겠다는 발상이다.
설씨녀의 순수성에 비해 설씨녀 아비는 계산적이다. 자신이 가야할 수 자리를 대신 가주겠다는 가실에게 보답으로, 딸과 혼인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가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딸을 다른 남자에게 시집 보내려고 한다. 물론 아버지로서 일정한 책임 등으로 인해 그러한 생각도 할 수는 있겠지만, 설씨녀의 순수한 행동에 비해 얄팍한 양심을 지닌 인간 유형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설씨녀는 가실과의 약속을 굳게 믿고, 이를 지켰다. 결국 그들은 극적으로 서로 만나 행복한 해로를 하게 되었다.
결국 이 작품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위기에 직면한 노인의 병역 의무를 제삼자인 가실이 대신해 줌으로써 이 가정에 평온을 유지시켰던 점에서 효도의 개념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제삼자도 곤경에 처한 남의 어버이를 위해 효심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가실의 희생적인 행적은 결국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이와 함께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종적인 효도를 제삼자인 가실이 대행하는 횡적인 효행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가실에 의해 횡적인 효행도 가능함을 보여 주었다. 그런 효행도 필요함을 보여 준 것이다. 다음은 손순의 효행을 그린 작품이다.
손순은 모량리 사람인데, 아버지는 학산이다. 손순은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어머니 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은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 시 구하기 어렵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님의 굶주림이 심하시니, 이 아이를 땅에 묻어 어머님의 배를 부르게 해 드려야겠소.'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 들판으로 가서 땅을 파다가 이상한 돌 종을 얻었다. 부부는 놀라고 괴상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걸어놓고 시험삼아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은은 해서 들을만하였다. 아내가 말했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분명 이 아이의 복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이를 땅에 묻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남편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돌 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좌우 신하들을 보고 말 했다. '서쪽 들판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는 것이 보통 종소리가 아니니 빨리 가서 조 사해 보라.' 왕의 신하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보고, 그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감탄했다. '옛날에 곽거가 아들을 땅에 묻으려고 하자, 하늘이 금 솥을 내리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그 아이를 묻으려고 하자, 땅 속에서 돌 종이 솟아 나왔으니, 앞 시대의 효도와 뒤 시대의 효도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보는 것이로다.' 이에 집 한 채를 주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순수한 효성을 치하했다.
손순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홀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문제는 가난한 살림에 먹거리가 넉넉하지 못한 터에 아들 녀석이 어머니의 밥을 축내는 것이다. 손순은 그 점을 매우 가슴아프게 생각하였다. 자식보다 어머니를 더 깊이 생각한 것이다. 이 역시 요즘 우리 세대들이 반성해 볼 일이다. 자식보다 어버이를 더 봉양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손순은 아내에게 심각한 제안을 하였다. 어머니 밥을 축내는 자식놈을 들판에 생매장시키고, 어머니를 제대로 봉양하자는 것이다. 이 제안에 그의 아내도 수용했다. 이 문제도 사실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제안에 순순히 응했다. 어미 입장에서 자식을 죽이면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는데 동의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남편과 함께 시어머니 봉양에 우선을 두고, 아들을 희생하기로 작정했다. 다소 허구적인 내용이지만, 그만큼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이 우선적인 것임을 깨우쳐 준다.
그러나 이들이 처한 위기는 신이적 장치를 통해 해결된다. 아들을 매장하기 위한 흙구덩이에서 돌 종이 발견되었다. 손순은 자식 생매장 대신 돌 종을 발견하여, 자식도 살리고 임금으로부터 집과 벼를 하사 받아 어머니를 잘 봉양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이한 도움을 통해 난관을 해결 받고, 가정의 평화를 되찾은 효행담이다. 특히, 부부가 자식보다 어머니를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씨 표현은 많은 교훈을 제공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조선시대의 경우, 효에 대한 기록이 무수히 많다. 국가적 주요 사업으로 이를 추진했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효행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모든 백성들에게 효를 계몽하고 권장하기 위해 효자들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기록으로 남겨 계몽 자료로 활용했다. 조선초기에 국가 주도하에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속삼강행실도․오륜행실도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개인 문집이나 지방지(地方誌)등에도 엄청난 분량의 효에 관한 인물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서는 국한하여 다루었다.
위에서 우리나라 효행에 대해 언급한 것을 정리하기로 한다. 향득과 성각의 경우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점을 제공하는 효행을 실천했다. 여느 사람들이 감히 흉내내지 못할 행적이다. 그만큼 부모에 대한 깊은 효심에서 이러한 행동까지 행했다고 해석하면 되겠다. 허구적인 면도 일정 부분 곁들여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 정신을 소중히 여기면 된다. 그리고 지은의 경우는 여성에 의해 효행이 실천된 면모를 보여준다. 남의 집 종이 되면서까지 어머니를 봉양하려는 마음씨는 매우 아름답다. 심청과 같은 마음씨이다. 지은의 뒤를 이어 조선 시대에는 많은 효녀와 시어머니를 지극히 섬기는 효부들이 출현한다. 그리고 설씨녀의 경우는 설씨녀가 대신 할 수 없는 아비의 병역 의무를 제삼자가 대신함으로써, 제삼자에 의한 효행 실천의 사례를 보여 준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식에게 부양되지 못하는 어려운 노인을 위해 자원 봉사하는 선례를 보여 준 것이다. 손순 부부는 자식보다 어버이를 더 사랑하는 사례를 보여 준다. 핵가족 시대의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제공해 준다.
5. 우리도 효도할 수 있어요
이제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21세기 이 시대에 우리가 공유해야 할 효행 방안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서두에서 효행은 분명 우리 시대에도 적용 가능하며, 반드시 적용해야 할 덕목임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까? 이 대한 준거는 유교의 윤리 강령인 가운데 하나인 오륜(五倫)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강 가운데 부자유친(父子有親)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이다.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서로 굳게 신뢰하고, 애정을 공유하는데서 이 관계는 유지될 수 있다. 사람은 언제나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서로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배려와 양보, 그리고 인내가 요구된다. 때로는 희생적인 헌신이 필요할 때도 있다.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도 그 방식은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도 서로 무관심하거나 소홀하면, 그 관계망은 자연히 틈을 보일 수밖에 없다.
어버이와 자식의 튼튼한 관계망을 형성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어버이와 자식 상호간에 튼실한 관계의 그물을 얽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어버이의 입장은 생략하고,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부자유친을 위해 자식이 해야 할 방안이 무엇일까? 앞에서 살펴 본 많은 효행 인물들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정신은 이해하되, 21세기에 맞는 우리의 생각을 찾아내야 한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된다. 다음 두 가지 방안을 제시해 본다.
첫째, 어버이를 그리워하자. 그리워한다는 의미는보고 싶다․ 기다린다․ 생각한다 등의 유사한 의미로 정리할 수 있다.모두 너무 바쁜데 어떻게 어버이를 그리워한단 말인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루 일상 가운데 잠시 동안 어버이의 고마움을 느낄 마음의 여유조차 없어서는 안 된다. 친구 사이에 문자 메시지도 보내지 못할 만큼 바쁘지는 않다. 어버이에 대한 관심을 끊지 말자는 것이다. 작은 것에 감동을 드리자는 말이다.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정겨운 말을 건넬 수 있다. 아름답지 못한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직장에서 늦게 오신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면, 아버지 양복 주머니에 작은 쪽지 편지를 넣어 두자.아빠, 우리들 때문에 힘드시죠? 힘내세요! 저도 열심히 공부할 께요!라고 써보자. 그 쪽지 편지를 보고, 감동하지 않을 아버지는 없다. 그리고 그 작은 편지는 아버지에게 엄청난 응원군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아무리 힘들어도허허하고 웃으실 것이다. 어머니에게 보내는 메세지 메뉴도 얼마든지 많다. 귀가할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어머니를 위해 유치원 아이 때 했던 것처럼 응석을 부려 부리자.엄마, 오늘 나 많이 보고 싶었지? 때로 기다려주시는 어머니를 꼬옥 안아드리자. 자식이 이렇게 할 때, 엄마는 가장 행복해 하는 법이다. 이제 안기지 말고, 어머니를 안아 드리자. 아버지도 안아 드리자. 어버이의 따뜻한 사랑이 전해지고, 자식의 작은 사랑도 전해 질 것이다.
기형도 시인의 [엄마 생각]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어렸을 때에 배추장수 어머니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엄마에 대한 기다림, 그리움, 외로움 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어린 아이처럼 어머니를 기다려 보자. 그리워하자.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둘째, 어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때로 다투거나 마음이 상한다. 따지고 보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된 원인이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 그런 경우, 자신을 차분히 저리한 뒤에,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한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나의 단점과 상대에 대한 나의 배려가 부족했던 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 방법을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성 유지를 위해 적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평소 생활하면서,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작은 의견 차이나 입장 차이 등에서 오는 오해 발생으로 인해 부자유친의 관계망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 문제성을 방치해 둔다면, 이내 더 큰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 그러므로, 조기에 이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 문제 발생의 원인을 곰곰이 따져 자신을 반성한다. 그리고 내 입장만 고집하지 말고, 어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어버이 입장에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현안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는 지혜를 지녀야 한다.
그렇게 하면, 내 작은 시각에 한계와 모순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버이는 내가 파악하지 못했던 사각지대까지 훤히 보고 계시는 분이시다. 세상을 살아오신 경륜이 나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사각지대를 모두 파악하고 계신 어버이와 함께 차를 운전하는 자식은 비록 자신의 자동차 운전 솜씨가 서툴러도 결코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어버이와 함께 따뜻한 가족애를 공유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효행은 우리 2세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선물이다. 효행은 우리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결코 아니다.
출처 : 이원걸/옛 선인들의 효행. [한국국학진흥원 특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