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사(山寺)를 일컫는 우리말이 ‘절’이라는 어휘로 주저앉은 연유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절’을 하기 때문이라는 싱거운 이야기가 믿을만한 기원이라면 기원으로 전해질 따름이다. 수행성 따위에 관심을 얹어 한 시절을 살아본 이들이라면, 피식 웃어넘길법한 이 어원에야말로 무서운 진실이 담겨 있음을 (억지로 믿는 게 아니라) 금세 알 수 있다. ‘나’를 죽이며 ‘나 아님’을 끝없이 반복하는 제자리걸음만이 신(神)에게 훌쩍 다가선 제(대로 된)자리를 향한 도약이기 때문이다.
* 바느질의 수행성은 그리하여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언제나 위험한 매혹이다. 단 한 번의 반복조차도 힘겨워하는 나는, 우리는, 깨달은 그분(覺者)의 살내음이 은은하게 배어있는 꽃살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조마조마한 걸음으로 당신의 방 문지방을 조심스레 넘어가 당신이라는 반복을 지긋이 엿본다.
* 문(門)은 또 다른 문(問)에 닿기 위해 그곳에 있다. 관(vessel)들은 누수(漏水)를 받아 내기 위해 또는 기어이 누수하기 위해 그곳에 있다. 아무것도 연결시키지 않은 채 얽혀버린 전선들은 너무도 크거나 너무도 작아서 그 모습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삶’이라는 악기의 풀어헤쳐진 현(絃)이 되어 그곳에 있다. 그 현들이 빚어내는 일상의 불협화음에 맞춰 홀로 춤추는 검은 의자가 그곳에 있다. 떠나온 곳인지, 돌아갈 곳인지, 잃은 곳인지, 되찾을 곳인지, 알 수 없는 ‘그곳’을 향한 너울거림만이 당신의 방 한 가운데서 이 모두를 휘감고 돈다.
* 중도 사람도 아닌 채 굳이 당신의 방을 염탐 하고야마는 절박함은, “집도 절도 없다”는 실존적 위태로움을 동력으로 삼는다. 당신의 방은, 사람이기에는 너무도 지독한 반복으로 그득하며 사람이 아니기에는 너무도 연약한 매체에 운명을 꿰어버렸음을 증명 중인 당신의 방은, 지옥도 극락도 아닌 연옥(煉獄)으로서의 일상이 지닌 무심한 너그러움으로 한 인간의 위태로움에게 그 곁을 흔연히 내어준다.
* 무채색으로 침묵하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머리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진다. 이제 나는 울어야 할까보다.
* 하지만 당신의 방 한구석이 여태 있다, 오방의 색(色)위로 펼쳐진 당신의 삶의 한 구석이 저만치에 숨겨져 있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끝내 미지의 장소로 남아 있을 그 모퉁이가 있다, 당신의 방을 구경하기보다 당신의 방과 더불어 있음을 선택한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개입을 환대한 따사로움의 순간이 있다, 아무런 여과장치(screen) 없이 영혼으로 곧장 스며들던 고독과 애상의 나르시시즘의 풍랑으로부터 가녀린 영혼을 황급히 건져 올리는 섬세한 구원의 어루만짐이 환히 피어나는 자리(screen)가 있다, 당신 속에 자리한 당신 아님이 당신 위로 당신을 투영시키며 당신이라는 벽의 경계를 현묘함의 입구인 현관(玄關)으로 녹여내는 ‘그곳’이 있다.
* 하나의 자의식이 다른 자의식을 사뿐히 내리누르며, 하나의 절망이 다른 절망을 살그머니 끌어올리는 이곳은, 당신의 방은, 그녀의 방은, 그리하여 이제 그의 방이다, 나의 방이다, 우리의 방이다. ‘장소’다.
* 무명(無明)이래도, 어리석음이래도, 환영(幻影)이래도 좋겠다. 내 눈동자 속 기억의 막(網膜) 위로 흐릿하게 맺히던 당신의 실루엣(茫漠)을, 일상의 그림자 속에서 붉고 푸르게 흘러가던 꿈결 같은 찰나를, 당신이라는 마야(Māyā)됨을, 그 백일몽을, 무어라 불러도 나는 좋겠다. 더불어 꿈꾸었기에, 더불어 살아냈기에, 아직 나는 울 수가 없어야 하겠다.
*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그래도 세계는/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단호하고 깊고/뜨겁게/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_ 함민복,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中
* 눈꺼풀에게 제 허리가 베여지는 눈물처럼, 당신이라는 문(門/問) 밖으로 나는 이제 나간다. 집도 절도 없는 이여, 사람도 사람 아님도 아닌 이여, 이 ‘장소’ 어디쯤을 내내 맴돌고 있을 그대여, 나는 언제나 당신을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