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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교동 성당 성서 백주간 제 68 주 히브리서
I. 개 론
1. 히브리서는 어떤 성서입니까?
☞ 히브리서는 교회전승에서 신약성서 정전목록에서 빠지기도 했으며, 사도 바오로의 편지로 이해되기도 하여 논란이 되었던 성서입니다. 연구에 의하면 히브리서는 편지로 보기는 어렵고, 그리스도교인의 신앙 증진을 위한 하나의 설교로 이해됩니다. 히브리서는 신앙인들을 권면하고 지도하고 위로하기 위한 교훈적 또는 교육적인 설교의 성서입니다. 히브리서는 중재자요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진리와 실천해야 할 교훈을 알려주는 성서입니다.
2. 히브리서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 히브리서 자체가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어, 히브리서의 저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바오로 서간으로 인정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성서학이 발전되면서 사도 바오로가 저자임을 의문시하게 되어, 현재 히브리서는 사도 바오로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 배경을 가진 어느 유다계 그리스도교인이 기록한 성서라는 것에 대체로 일치합니다.
4. 히브리서가 쓰여진 배경은 무엇입니까?
☞ 히브리서는 아주 오래전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신자들에게 행한 연설문형식의 성서입니다(2,13; 5,11). 개종자들은 이미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고(10, 32-35), 초대교회 지도자들을 이미 잃어버린 뒤였습니다(13,7). 그래서 빈번하게 말이 나오듯이(2,3-4; 3,1; 4,14; 10,19-25 ),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항구하도록 격려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배반할 뻔한 유혹도 받았고(10,26-29; 6,4-8), 복음과는 다른 교리를 절충할 위험도 있었고 (13,9), 히브리 경신례의 준수에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도 있었습니다(13,9-15). 히브리서를 통해서 저자는 그에 대한 방책으로서 예수님에 관하여, 예수님의 사제직에 관하여, 새로운 그리스도교 경신례의 탁월함에 관하여 깊이 있는 가르침을 내리고 있습니다.
연대는 대략 60년부터 95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II. 구성과 내용.
히브리서는 크게 세 부분의 주제로 나뉜다.
A. 하느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1,1-4,13)
특별히 여기서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어떤 천사, 또는 사람(대예언자 모세) 보다도 높으신 분임을 강조하고,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이며 사람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천사들보다 훨씬 더 높으신 분이 죽음의 고통을 당함으로써 잠시동안 천사들보다 더 낮아졌다가 나중에 영예와 영광의 관을 쓰게 되셨다. (2,7)
그분은 고난을 통하여 복종하는 법을 배우셨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가장 높으신 분이시지만, 우리 인간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사람이 되셔서 낮아지졌다는 것이다.
* 구원받는 길 제시
‘오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 여기서 새로이 ‘안식’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전통인 ‘안식일’의 개념에서 나오는 것으로 하느님과의 참된 일치 또는 구원의 상태를 ‘안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매일 우리에게 전달된다(3,13) 그 말씀에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야 한다.
* 하느님 말씀의 힘.
하느님 말씀의 힘이 아주 강하게 묘사된다. (4,12-13)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 . .”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히 죽은 문자 또는 언어가 아니라, 성령과 함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B. 둘째 주제 “ 구약의 완성자로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 ” (4,14 -10,39)
1. 완전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제는 백성 가운데서 뽑힌 사람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며 지성소에 들어가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이 세상에 계시면서 어떤 대사제보다도 완벽하게 사제직을 수행하셨다. 백성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변호하여주시고, 죄의 사함을 받는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구약의 대사제들은 백성을 위하여 속죄의 제물을 바쳤으나, 완전한 속죄는 얻어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고난을 겪고 그분께 완전하게 복종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기 때문이다.(5,7-10; 7,26-28)
2, 멜키세덱의 사제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7,1-10,18)
히브리서 저자는 심오하고 풍부한 구약성서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멜키세덱의 사제직이 일반적인 레위인의 사제직보다 우위에 있음을 밝혀 보이면서, 바로 이 위대한 멜키세덱의 사제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완성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구약의 사제직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비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월등하게 우월하고 차원이 높은 것임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확고하게 한다.
1)구약의 사제들은 죽게 마련이지만, 예수님은 영구히 사시는 영원한 사제이다.(7,24-25)
2) 구약의 사제들은 매일 새 제물을 드려야 하지만, 예수님은 한번 자신을 봉헌함으로서 완전한 제물을 드리신 분이시다.(7,26-28)
3) 구약의 사제들은 땅의 성막에 봉사하지만, 예수님의 사제직은 하늘 성막에 봉사하신다.(8,1-5)
4) 예수님은 구약의 옛 계약보다 더 좋은 새 계약의 중재자가 되셨다. (8,8-13)
C. 믿음의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 (11-13장)
1.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믿음의 생활로 이끌어준다.이것은 단순한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의 삶의 긴 여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믿음이다. 이렇게 삶을 통하여 완성되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참다운 구원으로이끌어준다. (10,19-11장)
2. 때로는 하느님의 견책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또한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한 하느님 사랑의 한 표현이다.(12장)
3. 삶을 통한 제사의 봉헌 . . .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제직의 전통에 따라 일상의 삶을 통한 제사를 중시한다. (13장) 즉 성전에서 형식적인 제사를 잘 지낸다고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삶에서 거룩하고 참된 삶,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특별히 불평하지 않고(12,14-29), 음행에 빠지지 않으며(13,1-5), 교회 지도자를 통해 들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13,17)을 살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강력한 권고’에는 항상 하느님의 진노와 불의 심판에 대한 경고가 감추어져 있다.
II. 히브리서 주요 묵상
(개 요) 히브리서는 구약성서를 신학적으로 종합하면서, 초대 교회가 어느 정도 정착되면서 성숙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성서로 내용이 깊고, 영적으로 깊이 묵상하여야 할 부분이 많은 성서이다. 꼭 필요한 몇 가지 영적묵상을 다루어보기로 한다.
1.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1, 5; 시편 2, 7절에서 인용됨). . .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어떤 천사나 예언자보다도 훌륭하시고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두고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적용되도록 해주셨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곧 아들과 딸로 만들어주셨을 뿐만 아니라(루가 11,2; 마태 6,9-10), 당신보다 오히려 더 큰 일도 할 수 있도록 섭리해주셨기 때문이다. (요한 14,12; 요한17,9)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귀한 신분과 위치를 깨닫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님의 사랑에 대하여 확신을 가져야 하겠다.
2. 우리보다 앞서 먼저 유혹을 받으신 그리스도 예수님(2,18; 4,15; 5,2-3; 고린1서 10,13참조) . . . 그리스도는 분명 완전한 신성(神性)을 갖추신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나약한 인성(人性)을 취하시어 이 세상에 오셨고, 그러한 약점을 감수하며 이 세상의 삶을 살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죄(罪)와 악마(惡魔)에 굴하지 않으셨으며,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 완성하셨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인성(人性)을 지니시고서도 죄를 극복하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본받을 수 있다.
3. 하느님의 말씀의 효력은 바로 ‘오늘’이루어진다. 우리의 응답은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실천되어야 한다. (3, 7-4,11)
구원의 말씀은 바로 오늘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말씀은 먼 미래를 위한 이야기보다는 바로 오늘 나의 회심(悔心)과 성찰(省察) 그리고 결단(決斷)을 촉구하는 말씀인 것이다. 특히 회개의 실천, 악습의 끊음, 선행의 실천 등 구원에 직결된 행동의 실천은 기약없는 ‘내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오늘’ 실천함으로써 주님과의 일치, 성령의체험, 구원의 실현이 바로 오늘 나와 내 가정에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참조 루가 19,9. 자캐오의 구원 이야기. ‘오늘 이 집이 구원을 얻었다’)
반대로 오늘 반역함으로 설마하던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3,19 ; 민수 14, 29; 민수 16장 전체, 민수 20,12-13; 민수 21, 4-9 등 참조),
4. 하느님 말씀의 힘(4, 12-13) . . .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성서 말씀을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나 미래의 예언서로 읽으면 그것은 죽은 문자이거나 호기심을 채우는 심령서적 정도밖에 안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영적으로 읽을 때, 바로 오늘 나에게 구원을 주기도 하고, 심판을 주기도 하는 살아있는 ‘쌍날칼’과도 같은 말씀으로 들릴 수 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매일 매일 나에게 영적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 즉 ‘오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읽을 수 있어야 하겠다.
5, 배반에 대한 경고(5,11-12 ; 12,14-17. 25-29.) . . .공동체가 성숙해지면서,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긴박하게 느껴졌던 그리스도의 재림이 쉽게 오지 않고 미루어지면, 공동체는 내적으로 느슨해지고, 이단 사설이 침투하게 되고, 공동체 지도자의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며 공공연하게 분열을 꾀하는 무리가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공명심과 교만이 크게 작용하며, 이를 이용한 마귀의 책동도 큰 몫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보이지 않게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타락과 죄에 떨어지는 생활도 공동체의 영적 기운을 쇠하게 만들며 성령 안에 일치를 저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반역과 모반, 그리고 불충하는 무리에 들지 않도록, 개인적으로는 항상 겸손하게 신심생활(기도 및 묵상, 소공동체 모임 참여)에 힘쓰면서 공동체적으로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 섭리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촉각을 세우고, 공동체의 일치에 힘쓰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응하는 모습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항상 공동체 안에 평화로운 일치와 화합을 원하시기 때문이며, 더 큰 차원에서 일치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동이불화(同而不和)가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모습을 원하시고, 소인배의 걱정(小憂- 개인의 의식주에 연연한 걱정)이 아니라, 군자(大人)로서의 걱정(大憂- 복음적 진복팔단의 실현에 관한 걱정)의 차원에 머물기를 바라신다.
6. 믿음으로 구원을 완성함(10,19 -11장 전체)
11장은 ‘믿음장’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은 어떤 한 순간의 믿음 또는 영세한 후 1년 동안 믿다가 쉽게 냉담하고 져버리는 등의 ‘값싼 싸구려 믿음’이 아니다. 즉 일생을 통하여 증명된, 피와 땀과 노고와 희생으로 증명된 ‘온 일생의 믿음’이다. 더욱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여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 세상의 것을 넘어선, 이 세상의 물질과 감각과 차원을 넘어선 고차원적인 믿음이며 초월적(超越的) 믿음이다. (11, 13-16) 우리도 단기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는 값싼 믿음, 결코 인정받지도 못하고, 우리를 하늘나라 구원의 항구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고 인생의 항해에서 난파되고 헤매게될 그러한 믿음을 가져서는 안되겠고, 일생의 종착역에 마침내 성공적으로 도달하여 이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하늘 고향이며 구원의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러한 ‘항구한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
7. 하느님의 견책(譴責, 꾸지람(訓育훈육)(12,4-15).. .이 부분은 야고보서 1장 부분과 내용적으로 큰 일치를 이룬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이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시며, 이를 잘 견디고 인내함으로써 더 큰 평화, 흔들리지 않는 평화와 기쁨을 얻게 되고, 믿음 안에 더욱 성숙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위에서도 인용한 바와 같이(고린1서 10, 13) 하느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을 결코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고, 고통에 짓눌려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아도, 기도하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힘과 지혜를 구해나갈 때, 그 고통과 시련을 극복해가나게 됨을 체험할 수 있다. 시련은 곧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선물이며, 나의 죄의 보속으로 주시는 구원의 디딤돌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8. 그리스도 고통에 기꺼이 동참함(13, 13). . .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나아가서 우리의 최고의 사랑의 대상인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마침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살아있는 제사’(13,1-15)로서의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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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주 11월 10일.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 11월 24일 휴강. 12월 15일 종강 예정.
* 12월 12일(토) 토요일 오전 9시 –오후 3시. 성서 백주간 수료 기념 특별 묘지 참배 미사.
장소 : 마석 모란 공원 민주화 열사 묘지.(11시) 회비 1만. 1차 접수:11월 17일까지.
< 2020. 11. 3. 매교동 성당. 전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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