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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무주구천동의 기억
신풍령-육십령
신풍령-갈미봉-지봉(못봉)-횡경재-백암봉-동업령-돌탑봉(1433봉)-무룡산-삿갓골대피소
-월성치-남덕유-서봉-할미봉-육십령
32키로
2011년 5월 5-6일
백오동, 요물
산행지도
6년차 백두대간을 하고 있는 나는 일년을 훌쩍 넘어서야 가방을 메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날 것 같은 그림물감이라도 덧칠하고픈 향수 깊은 마음이 덕유산으로 향했다.
삼공리로 들어가는 무주구천동계곡의 인정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듯 아주 오랜 시절의
빛바랜 사진첩을 회상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말이다.
민박집 앞마당엔 언제 피었는지 지기 시작하는 벚꽃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집은 세채로 주인집은
안쪽으로 있었고 아직 피서철이 아니어서 인지 우리 둘은 한가운데 독채속에 방 한개를 얻었지만 거실
과 화장실, 가스등 우리 둘이서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간, 우리는 밥과 꽁치찌게를 끓여 가져온 반찬을 근
사한 밥상에 한 상 차렸더니 이보다 더 좋은 세상 있으랴..
600여키로를 걸으면서 먹었던 밥상중 제일 오늘 푸짐한 상차림에 거기다 막걸리 한 병 사고, 지리산에
드는 산친구들 전화소리 오가고, 오랫만에 나온 대간 길 긴 이야기 나누다 하룻밤 지나는 줄 모르고, 긴
편지지에 쓰는 것도 아닌데 바깥 마당에 은은한 벚꽃향 피울 열정이 남아 있는 듯 시간은 자꾸만 흐르
고 있었다.
빼재까지 택시로 가면 일만오천원이면 되는데 구지 데려다 주겠다는 국립공원 아저씨의 배려로 편히 높
은 고갯길 경상남도와 전라북도를 가르는 경계선 신풍령에 닿았다. 둘이만 다녀 지나고 나면 찍어놓
은 사진이 없기에 기념사진 한 장 찍어 증표로 남기고 산속으로 들었다.
"이쁘다이, 저 아래 거창땅에 모여사는 뒷동산에 파릇한 나무들이 깨어나는 모습,
발아래 노랑제비꽃과 개별꽃이 길섶을 만들고, 연분홍빛 진달래가 새봄의 기운이
채 퍼지기도 전에 꽃망울 터 트린다"
다홍치마입고 나풀대는 숲속길 따라 가는 내가 아니라 연보라색 티우며 겹겹 꽃수술
달고 나오는 고개숙인 처녀치마 수줍음같이 해맑던 소녀시절이 생각난다.
갈미봉
갈미봉, 지봉의 작은 봉우리도 자연의 모습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계절의 신비를 연출하고
산길을 걷는 감칠맛 나는 변화의 뉘앙스를 만끽하게 한다. 난 산을 사랑했다.
진정 사랑한 것은 내가 가고 싶은 산,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행복
봄볕이 아스라이 내리쬐는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녹은 길
보드라운 흙길을 걷는 난 산향내가 온통 내마음에 가득하다.
지봉안부
못봉
저 높은 산등성이 나뭇가지를 보면 겨울이었고 길 안내를 하고 있는 바로 앞 진달래꽃을 보면
지금은 봄이 왔고 수정같이 맑은 물이 옥수처럼 흘러 내릴 것같은 무주구천동 계류의 물소리가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구천동에서
1982년쯤 이었던 같다. 고향친구 넷이서 구천동에 덕유산에 가자며 무작정 구천동 계곡을 올랐던 사진첩을 난
잊혀지지 않는 여행이었다. 지금 사진을 보면 등산복이라곤 없었고 그냥 편한 바지와 티를 입었다. 산에 간다
는게 얼마나 좋았던지 난 명동 롯데백화점에 가서 코바늘로 뜬 모자를 사고 베낭을 메고 갔던 사진을 보니 우습다.
등산신발은 없었는지 운동화도 아니었고 까만 샌달을 신고 갔던거 더 우습다.
지금도 기념으로 가지고 있는 그 때 그 모자를 내 장롱에 간직하고 있다. 이번에 쓰고 덕유산에 왔드라면 그 추
억이 조금이라도 되살아 날수도 있으련만 덕유산에 와서야 옛날 기억을 뒤집어 보고 있었다.
네 명중 노오란 티샤쓰를 입은 친구는 몇 년전 날벼락같은 죽음으로 우리와 이별하였다. 그 친구를 떠나 보내
던 날 친구신랑이 내게 원통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시집와 놀러 한 번 못가고 그 때 덕유산 친구와 산에 갔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 참 바보였다. 지 한몸 건사하지 못하고 일만 했던 멍청이 ,,
그 친구가 떠나자 우리는 지금도 그 멍청이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 한다, 아주 가끔씩.... 잊어야지, 구천동계곡
에서 놀았던 그 때를, 그 친구 할머니가 들려주던 양계장집 손녀딸을 잊어야지.
그 때 구천동 찍은 사진
난 그 때 찍은 어데쯤인지 뒤에 보이는 덕유산의 어느봉우리인지 궁금하다.??
산에서 멋지게 보이려고 했던지 선그라스를 티셔츠에 걸고 어델 째려 보는지 우습다.
중봉
덕(德)이 많고 품이 크고 넉넉한(裕) 너그러운산이라하여 덕유산(德裕山)이라 이르는 1,000m가
넘는 장중한 능선위 가장 높은 북덕유가 향적봉을 내 주었으니 보다 큰 인품이 있으랴,
백암봉에 서서 중봉너머 향적봉에서 설산의 눈꽃을 보던 때도 있었다. 주목나무를 감싸며 피어
난 설화에 매료되어 겨울산의 주인공이 되고 있었다. 너른 덕유평전의 원추리꽃도 여름을 재촉하
게 된다. 여러가지 계절의 흐름따라 갖가지 사연을 달고 사는 백암봉은 제일덕유산, 북덕유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간의 갈림길에서 멀어져 갔다.
옛날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을 긋던 산이고 지금은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선이고 더 작게는
무주와 거창의 고갯길을 잇는 마루금의 덕유평전에 서서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는 주능선의 파노라마
가 펼쳐지는 걸 뒤돌아 보는 친구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 걸까,
난,
가는 길 눈요기하라며 웃어주는 진달래가 지고 나면 철쭉의 향연이 펼쳐질 천상화원를 생각하며 걷는다.
용이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무룡산과 삼각봉이 솟아 오르는 남덕유를 바라다 보며 서봉이 있어 더 빛나는
동봉의 모습까지 완만하며 넓고 엄마품처럼 포근하다고 했던가,
보이는 것은 모두 겨울빛 회색위 분홍빛 물감이 덧칠한 것처럼 긴 덕유의 평전을 느릿느릿 만끽하며
걸을 수 있었다.
돌탑이 세워져 있는 1433봉엔 호랑버들이 고산이라고 알려 주는 것 같았다. 둥근해가 삿갓봉 머리위에
나직하고 굽어드는 자연이 빚어낸 산자락의 유혹앞에 발길을 재촉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무룡산을
내려 오는 나무계단을 터벅터벅, 50대의 여유로 산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느려지는 발걸음을 어쩔수
가 없나 보다.
삿갓골재대피소
1,280m의 고지대에 위치한 삿갓골대피소의 기상 변화가 매우 심한 지형여건을 고려, 대피소 지붕의
태양광발전과 풍력발전의 모터와 날개가 바람에 돌고 돌아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친환경 대피
소로 변모하였다. 화석연료를 사용하였던 난로가 아직도 대피소 한 모퉁이에 놓여 있었다.
직원 한 명이 발전기에 손가락을 다쳐 병원갔다고 혼자서 대피소를 지키는 모습이 바빠 보였다.
내일이 어린이 날이라서 대피소 난간까지 침낭을 깔고 자는 만원이었다. 잠자리를 배정받고 산꾼들
은 계단을 내려가면 졸졸 흐르는 샘물을 떠다 보글보글 끓는 찌게, 토닥토닥 거리는 소리, 삼겹살 구어
소주 한잔 걸치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또 하루 멀어져 간다.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어둠속으로,,,
삿갓봉
국립공원 직원의 배려로 불편없이 하룻밤을 지낸 대피소를 이른 아침 떠났다. 어둠은 거쳤으나 하늘에 먹구름이
뒤덮여 백암봉과 무룡산, 남덕유와 서봉, 저 멀리 아스라이 들어오는 지리산까지도 바다위에 떠 있는 산처럼
난, 이런 산들을 좋아했다.
보라빛 처녀치마가 땅위 으뜸이다, 연두빛보다 진한 겹겹의 이파리가 한무더기씩 나오고 있는 박새도 긴 산죽길을
헤쳐나온 것처럼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어제 횡경재나 동업령에서 한 숨 돌리며 친구가 되었던 둔덕도
오늘 가파른 남덕유를 오르기 위해 베낭을 내려 놓고 쉬어가는 월성치의 울창한 나무도 이제 서서히 바람결에 봄이
오고 있겠지.
지리산 노고단-천왕봉
지리산 천왕봉이 언제나 보일까, 가다 서서 보고 또 보일 듯 한데 구름에 가리고 하루종일 지리산만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걱정했다. 4일부터 지리산엔 내가 가입해 있는 회원들이 태극종주와 은비네가 대간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람결에 가끔씩 드러나는 하늘의 코발트빛, 먹구름이 낀 하늘의 회색,하얀 운무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천왕봉
만 부르고 있었다.
그노무 동부능선에 무슨 귀신이라도 쐬었는가, 지난 밤 외고개쯤에서 발목을 삐어 태극왕복종주에 들어간 산
친구가 중도 포기했고 독바위 근처에서 몇시간 동안 헤메다 "링반데롱"이란 재앙에 부딪쳐 종주의 꿈을 접고
내려 왔다는 소식이 마음 아프게 했다.
다행인 것은 왕복종주를 하고 있는 거제 회원들의 무사하다는 건 소식중 가장 기쁜 목소리였다.
180키로의 지리산을 왕복하며 걷는 태극길이 쉬울리 없지, 날씨가 태극종주의 가장 큰 힘이 된다는 사실도 그
길을 걷는 산꾼들만의 절실한 관건이 되겠지 싶다.
남덕유산 정상
남덕유산은 북덕유산보다 날카롭게 솟은 산이라고 했다.
두 개의 발원샘을 갖고 있어 남쪽 기슭의 참샘은 진주 남강으로 흐르는 첫 물길이며
북쪽 바른골과 삿갓골샘은 황강의 첫 물길이다라고 했다.
그 뿐이겠는가,
거창으로 내려가는 월봉산과 금원산 ,기백산을 내리면 시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이다.
이 높은 곳에 소원을 묻고 간다.
가파른 700여계단의 하늘 사다리를 가리운 운무가 춤사위를 펼친다.
제1봉 남덕유산의 기상이 솟구치는 산이 구름이 되어 산자락에 앉았다.
서봉
갈림길에 베낭을 두고 올라왔던 길 되돌아 내려가 서봉으로 향했다. 구름이 만드는 기암 절벽, 우리가 사는 삶도
제각각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전하려는지 억겁을 두고 월봉산을 휘돌아 감았다.
새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산이라 내 마음속 깊은 이곳을 돌아서면 언제올지 모르겠다.
어데까지 갈까, 육십령에서 점심을 먹고 중재까지 걸을 수 있겠다란 마음으로 할미봉으로 향했는데 사로잡는 풍경
도 그 때 뿐이었는가 보다. 가파른 바윗덩이를 오르고 바윗줄에 매달려 할미봉에 올라 자연의 시계에 맞춘다.
설마 나와 백오동이가 언제부터 할메라는 호칭이 붙었는지 모르지만 그건 아마 부실한 나를 깨우려는 산친구의 애원
이려니 하고 봐주고 싶었다. 할미봉에 서서 굽어 있는 날 피사체에 넣으며 백오동이 하는 말 "할미봉!"
그래, 어서빨리 살도 빼고 주름살도 펴고 부지런히 산등성이를 오르며 그전처럼은 못하더다도 조금이라도 할미라는
거를 탈피해보자. 비록 이몸이 부풀러 올라 있어도 마음만은 청춘이라오,
육십령으로 내려가는게 천만다행이지 거꾸로 올라 온다 생각하면 허겁지겁 몇 번을 쉬어야 서봉까지 갈 수 있겠다.
초등학교 3학년 어린꼬마가 아빠따라 서봉으로 가는 길, 맑고 찬 공기, 청아한 새소리, 산속의 경남 교육청, 삼각형
모양의 성남지, 산 내려가는 길에 내가 본 풍경이었다.
이렇게 덕유산을 육십령에서 내렸다. 아주 오랫만에 나온 대간 길위에 섰던 우린 자연이 주는 오르가슴속에 살다,
살다 이틀간의 여행을 끝내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mt주왕님과 선달님이 태극종주 지원차 있다가 우릴 데릴러 와
이 어찌 고마울 수가!!
산친구들이 지리산에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태극종주와 은비네 대간을 하고 있었다.
90키로를 걷는 님들도 180키로를 걷는 님들도 초등학교 6학년인 은비가 오늘은 백두대간의 먼 길을 내려 오길 바랬던
바람이 헛되지 않았다.
지리산의 모진 비바람을 타고 내렸던 숱한 고난과 힘든 여정을 마친 산친구들께 큰 박수를 보냈다. 철쭉꽃다발,
애기똥풀, 병꽃, 하얀싸리꽃으로 만든 꽃다발이 너무 작아 미안한 마음 그지 없소이다,
축하드립니다, 태극종주 길위을 완성하신 편도와 왕복길, 은비네 대간 졸업...5일동안 맘조리며 지켜본 우리도 님들이
있어 행복했다오.
첫댓글 무주구천동~~~나두 그시절에 친구랑 어느여름 휴가철에
향적봉을 향해 오르다가, 퍼붓던 비때문에 중도포기하고
민박집으로 왔던 추억이있는데...........
저친구들 모습보니 너무나 어리고 이뻐서 ~~젊음날이 마구 그리워.
산길걸을때의 행복~! 충전할날을 기다리며
정성담은 산행기 잘 보고가여~~`
대간길에 본 덕유산이 너의 추억을 더듬어서 간 그 길이 너무나 그리웠겠다...
그 무더운 여름휴가철에 왜 산으로 갔는지 ㅎㅎ
나도 그 때 사진있어 정상에서 찍은 산은 향적봉이라 짐작...
좋은 친구와 대간길 무사히 완주하길 빈다
산에서 오감을 느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