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포의 새벽 편지1076
의상조사법성게76
동봉
고향가는 길(6)
조건없는 선교방편 생각대로 가져다가
집에갈제 분수따라 먹을양식 삼을지라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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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無緣이라면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인연緣이 없다無는 뜻과
둘째는 없음無의 인연緣이란 뜻이 있다
물론 첫째의 뜻이 대세이고
둘째 뜻은 내가 그냥 풀어본 것이다
의상조사《법성게》에서는 말씀하신다
'조건없는 선교방편' 이라고
본디 원어는 무연無緣이기 때문에
'조건'이 아니라 '인연'으로 풀어야 했는데
인연없는 중생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에
'무연' 을 '조건없는' 으로 푼 것이다
따라서 내가 푼 '조건없는'보다는
'인연없는'이 원어에 가깝고 대승적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원어 풀이도
'인연없는 선교방편'으로 바꿀 생각이다
바꾸기 전에'조건없는'을 한 번 보자
삶에서 조건 없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부모가 자녀를 낳아 기를 때
거룩한 스승이 참된 제자를 가르칠 때
사랑하는 이에게 무엇인가를 줄 때
거기에는 어떤 조건이란 게 걸려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에게 대할 때는 조건이 없지만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을 대할 때는
대부분 조건이 따른다고 한다
그 말이 맞기는 맞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 예와 효를 지니고
조건없이 도우며 사는 이들은 많다
이 조건없음의 대표자가
곧 부처님이고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이고
보현보살 문수보살 미륵보살 등이다
그렇다면 그 밖의 아미타불이나
용수, 마명, 원효보살 등은 어찌 되는가
어찌 이들 뿐이겠는가
인류사회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 바친
수많은 보살들이 역사와 함께 했다
서산대사 사명대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용성스님 만해스님은 독립을 위해
마더 테러사 수녀는 어렵고 힘든 자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조건없이 바친 보살이셨다
아프리카에서 잠시 맺은 인연이지만
이태석 신부를 나는 이 시대 보살이라 보는데
아쉽게 몇년 전에 선종善終에 들었다
또한 다일공동체 대표이자 빈민 운동가인
최일도 목사는 살아있는 이시대 보살이다
그렇다면 조건條件terms이 뭘까
초기경전《금강경》에서는 '틀相'이라 한다
'나我'라는 틀相, '남人'이라는 틀
중생衆生이란 틀, 젠체壽者하는 틀이다
금강경 내용에서는 말씀하신다
'무아법無我法을 통달한 자가 보살이다'
어떤 분들은 말한다
'네 가지 중 무아無我의 틀相이 중요하다
만일 무아의 틀만 벗어난다면
뒤의 세 가지는저절로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넷은 자동차의 네 바퀴와 같다
네 개 바퀴 중 어느 하나도 다 소중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바퀴가 못쓰게 되면
나머지 세 개 바퀴는 덩달아 못쓰게 된다
반드시 무아의 틀에만 고집할 게 없다"
물론 우리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바퀴 하나가 망가지면
나머지 바퀴 셋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몰고 가기 위해 그 한 바퀴를 고친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금강경》에서는
네 가지 틀 중 무아의 틀만 내려놓게 되면
나머지 세 틀은 절로 사라진다는 논리고
비유로 든 자동차의 네 개 바퀴에서는
어느 바퀴든 하나가 고장 나면
나머지 세 개가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 하나를 빨리 때우거나 바꾼다는 논리다
자동차는 못쓰게 된 바퀴를
고치거나 바꿔 쓰임새를 온전하게 함에 있고
네 가지 틀은 비워진 틀 하나를 통해
세 가지 틀을 다 비우려는 데 뜻이 있다
금강경에는 '무아법을 통달한다면
곧 그를 보살이라 한다'라 말씀하시나
무인상법無人相法 무중생상법無衆生相法
무수자상법無壽者相法 등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제대로 깨닫고 통달한다면
그를 '보살'이라 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경전에 문자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더라도
경전의 숨겨진 행간에 깃들어 있다
그러기에 '조건없는 선교방편'이라 했는데
무연無緣은 '조건없는'이란 번역보다는
글자 그대로 '인연없음'이 더 맞는 게 맞다
의상조사《법성게》는 비록 짧은 글이나
이처럼 다양하게 해석할 여백이 있다
왜냐하면 대방광불화엄경 80권의 총체며
이를 도식화한《화엄일승법게도》의
해설서며 요약문summary인 까닭이다
의상조사《법성게》의 '무연無緣'은
없을 무無 인연 연緣에 대한 직역直譯으로
'인연없는'으로 풀었을 때 느낌과
내가 앞서 풀었던 '조건없음'의 느낌은
나름대로 많은 온도차가 있는 게 사실이다
무연無緣이다
인연緣이 없無다
어떤 끄나풀緣도 하나 없無다
학연學緣도 지연地緣도 혈연血緣도 없다
다산茶山(1762~1836)의 말씀처럼
그럴 때 온 세상이 청렴함 그대로가 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삼불능三不能 가운데
'불능도무연중생不能度無緣衆生'이 있다
'인연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연없는 중생이 있을까
나는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인연없는 중생은 없다고 보다
비록 직접연直接緣이 없다 하더라도
간접연間接緣으로 서로서로 이어져 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시공간을 예로 들어볼까 한다
우주의 역사를 138억 년이라 했을 때
최초 시작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시간만 138억 년이 흐른 게 아니다
공간도 138억 년 동안 함께 팽창하였다
이들 시공간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치 직사각형의 그물이 있을 때
왼쪽 위 모서리가 우주가 시작된 시점이고
오른쪽 아래 모서리가 오늘에 해당한다
그 138억년 중에 2/3쯤 지나
태양계와 함께 우리 지구도 탄생하였다
하여 지구 나이는 46억 년이다
어떤 학자들은 46.5억 년이라고도 한다
45억이나 46.5억은 5천 만년 차이로
실제로는 상상초월의 엄청난 숫자이지만
천문학에서 그 정도는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무튼 오늘날에 해당하는 아래 꼭짓점에서
그물을 흔들면 비록 미세할지라도
왼쪽 위 모서리 빅뱅bigbang지점까지
그대로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시공간時空間은 이처럼 하나로 이어져있다
부처님이 '인연없는 중생'이라 하셨다면
일반적으로는 직접연을 들먹였을 뿐
간접연을 예로 들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직접연이라면 부처님과 같은 시대에
같은 장소에서 부처님을 몸소 뵌 이들이다
부처님께서 직접연의 범위範圍를
당신과 같은 시대 같은 공간으로 잡으셨을까
그렇다면 직접연과 함께 간접연도 포함된다
부처님 당시라 하더라도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을 가까이서 뵙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인도대륙이 워낙 넓기 때문에
부처님이 계신 곳까지 찾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다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고
또한 당시에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부처님의 모습과 음성을 접할 수 없었다
매스미디어나 첨단 탈것을 이용한다면
이는 직접연이 아니고 간접연이다
직접연과 간접연을 함께 놓고 본다면
'인연없는 중생'은 찾을 수가 없다
부처님 열반하신 뒤는 무조건 간접연이다
직접연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부처님은 가셨으니까
일반 불자들과 평범한 납자들은 물론
역대조사 천하종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간접연에 의해 불교佛敎를 접하고
불교에 의해 부처님을 간접적으로 알아가고
화합하는 승가교단의 중요성을 배운다
곧 부처님 열반2562주기를 맞이하면서
여때껏 생각지 않았던 불교를 접하곤 한다
다만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인연없는無緣 중생이란 없다
아직 인연의 고리를 깨닫지 못했을 뿐이고
불교 만날 시절인연이 닿지 않았을 뿐이다
앞으로 백 년 뒤, 천 년 뒤, 만 년 뒤에
사람의 생각으로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교는 새로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불교의 옷 불교의 언어가 아니라
그 시대 그 나라 그 민족에게 어울리는
불교 옷과 불교 언어로서 말이다
'인연없는無緣' 다음이 뭐였더라?
아! 맞다! 선교善巧다
길게 말하면 선교방편이다
무연의 또 다른 해석과 함께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셔야 한다
12/24/2017
종로 대각사 '검찾는집'에서
스님
인연따라
여기까지왔습니다
고향가는길ㅡ
여정에
모두 모두
무탈 하시길
기원합니다 _()_
보경 합장
![](https://t1.daumcdn.net/cfile/cafe/99B0C5385A4201500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