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나는 누구인가 ① ]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
| 베이징박물관의 찰스 다윈 관. 찰스 다윈이 저서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적자생존 이론은 과학 뿐 아니라 여러 학문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사진=신화사> | |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성’ 탐구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의 유전인자가 발견되기 전,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인간을 모호한 개념들로 정의해 왔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 유전인자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인문학자들은 인간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유전자연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최근 과학자들이 주도한 인간본성에 관한 연구는 인간을 종족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적자생존의 영웅으로만 해석한다.
인간은 정말 이기적인가? 인간은 자기 자신, 자신과 관계된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물인가? 과학은 인간이 이기적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답다고 우리를 현혹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92)도 이런 인간본성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과학의 발전으로 흔들리는 심정을 절친 아서 헨리 핼럼의 죽음을 기리며 시로 토로하였다.
이 시는 핼럼이 죽은 1833년부터 17년간 틈틈이 기록해 1850년 <인 메모리엄 A.H.H>라는 제목으로 발표한다.
그는 이미 자신이 맹목적으로 신봉해 온 신앙이 지질학, 생물학, 특히 진화론에 크게 흔들리자 ‘과연 이 세계는 신의 질서가 지배하는가 아니면 무자비한 자연의 투쟁인가?’ 라고 질문한다. 테니슨은 <인 메모리엄 A.H.H> 시구 56에서 외친다.
“Who trusted God was love indeed. And love Creation’s final law. Tho’ Nature, red in tooth and claw. With ravine, shriek’d against his creed.
“신은 진실로 사랑이었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리고 사랑이 창조의 마지막 법이었다고 누가 믿겠는가? 자연은 이빨과 발톱이 피로 물들고, 계곡에서는 인간의 신조를 아랑곳하지 않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
이 시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산 지식인의 종교와 과학의 상반된 세계관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기원>을 출간하면서 테니슨의 <인 메모리엄 A.H.H> 시구 56에서 “Nature, red in tooth and claw” 를 서문에 인용한다.
20세기 다윈의 추종자인 영국 옥스퍼드대학 교수 리차드 도킨스도 <이기적 유전자>에서 다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모든 생물의 행동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원칙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적자생존’이란 문구는 다윈의 ‘자연선택’을 대체하는 용어로 영국 생물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생물학의 원리>(1864)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스펜서는 ‘적자생존’ 이론을 자연과학을 넘어 사회과학, 특히 경제이론에 접목시킨다.
다윈과 허버트 모두 모든 생물은 치열한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적자만이 생존하는 잔인한 투쟁의 영원한 회로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다. 다윈과 허버트의 과학이론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적자생존 이론은 나치와 공산주의의 핵심사상으로 변질되고 19세기 말, 아니 오늘날까지 풍미하고 있는 ‘무자비한 자본주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적자생존-약육강식에 의거한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이며 혈연주의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 틀을 통해 대기업은 인간에게 별 필요 없는 물건을 생필품이라고 광고와 미디어를 통해 세뇌한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은 거대한 시장경제를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그 덮개 아래 우리는 하루를 연명한다.
자유방임주의 경제이론에 의하면 강력하고 거대한 기업이 작고 연약한 회사들을 갈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들의 행위는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하는 자연이론에 의해 정당화된다.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은 당시 영국에서 소수집단의 욕심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열렬히 수용되었다.
독일의 역사가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 이란 책에서 “경제학을 생물학에 적용함으로 자연선택이 영국에서 진리로 수용되었다” 고 기록한다. 그는 “자연선택은 자본주의 윤리와 맨체스터 경제학이라는 빅토리아 시대 ‘욕망의 철학’ 의 완벽한 표현이다” 라고 개탄한다.
| 스웨덴-영국의 작가 오스카 구스타브 레일랜더 (Oscar Gustave Rejlander, 1813~75)가 그린 알프레드 테니슨의 초상화. 테니슨은 <인 메모리엄>에서 흔들리는 신앙심에 대한 인간적 고뇌를 드러냈다. 이 작품은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시로 칭송 받는다. <사진=위키미디어> | |
적자생존 이론, 경제로 확대 적용
실증주의 창시자이자 ‘이타주의’ 개념을 만들어낸 오귀스트 콩트(A. Comte, 1798~1857)는 자신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찬양했던 과학의 시대와 이타심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는 공포로 가득 찬 유럽의 혁명시대를 살았지만, 깨달음을 얻은 사회적 질서의 도래를 자신했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 후손들, 동료들에게 의미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은 행복과 의무의 공통자원인 자비를 향한 본능의 직접적 요구” 라고 주장한다.
과학이 진리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믿는 오늘날 과학근본주의자들은 인간의 유전자가 불가피하게 이기적이며, 라이벌에 대항해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주장해왔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은 모두 ‘나-자신’을 최우선으로 놓도록 프로그램 돼있다. 그러므로 이타주의는 환영에 불과하며 인간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인 것이다.
많은 사회생물학자들은 이타심도 실제로는 이기적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이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타적이 된다는 것이다. 엄마가 위험에 빠진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즉각적인 행위도 결국은 유전적으로 이기적인 행위이다. 그런 행위의 표면적인 의도는 이타적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혈연을 종속시키기 위한 ‘혈연선택’에서 출발한다.
이타주의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예외로 자연선택의 실수이다. 인간에게 유용한 생존 메커니즘이었던 것이다. 협동하는 법을 배운 인종들은 자원에 대한 절박한 경쟁에서 유용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윌슨도 “이타주의자는 스스로 그리고 가장 가까운 동족에게 보답을 기대한다” 고 주장했다.
“그의 선한 행위는 종종 완전히 의식적이며 계산적이고, 그의 술책은 사회의 복잡한 승인과 요구에 따라 세밀히 조직된다.”
이렇게 ‘덜 노골적인 이타주의’는 거짓말, 가식, 자기기만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배우는 자기 행동이 실제라고 믿고 연기할 때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 당시 자신의 이기심을 줄이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하지만, 내심 상대방도 그와 같은 이타적인 행위를 자신에게 하기를 바란다.
이 연재는 ‘인간은 정말 이기적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시도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정말 도킨스나 윌슨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기적일 수밖에 없나?
우리 주변의 소방관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불타는 집으로 뛰어든다. 하루 종일 시청에서 쓰레기 수집 일을 하면서 주말에 양로원에 가서 노인들에게 봉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종종 읽는다. 이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7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를 시작으로 오늘날 현대인까지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이 이루어낸 위대한 문명을 찾고, 오늘날 우리 삶의 지표를 더듬어 가고 싶다.
- [배철현 칼럼] | Jan. 3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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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나는 누구인가 ② ] 크로마뇽인의 심장소리를 듣다 |
| 스페인 북해안에서 발견된 알타미라 동굴벽화 복제본. 벽화가 그려진 동굴은 크로마뇽인들에게 성스러운 장소였다. <사진=위키미디어> | |
크로마뇽인의 심장소리를 듣다 ... 그림 그리는 인간 ‘호모 핑겐스(Homo Pingens)’
어린 시절 꼭 배워야 할 기술 중 하나가 그림그리기였다. 동네마다 고대 로마의 위대한 장군 아그리파 흉상 포스터가 달린 화실들이 즐비했다. 우리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이가 적어도 꽃병 정도는 흉내내 유사하게 그릴 수 있는 ‘창의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화실에 아이들을 등록시켰다. 그림 그리는 행위가 인간 창의성의 표상일 수 있을까? 왜 인간만이 그림을 그릴까?
예술에 대한 연구는 18~19세기 철학자 칸트나 헤겔에겐 중요한 학문분야였다. 그러나 고대에는 달랐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 특히 회화를 무시했다. 이들은 회화가 진리를 묘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껏해야 이데아에 대한 그림자, 즉 현실의 모사품일 뿐이다.
플라톤에 등장하는 ‘동굴의 비유’ 속 용어를 빌리자면, 동굴 안에 다리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포로들은 그들 뒤에서 한 사람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인형의 그림자를 포로들이 마주한 벽에 비추게 한다. 포로들은 그 환영이 실제라고 믿지만, 그것은 인형 그림자일 뿐이다. 플라톤은 예술을 ‘진리’에 대한 흉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시대에 와서 예술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탈리아 화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는 마음을 전달하는 어떤 것” 이라고 정의한다.
다빈치는 인간 마음속에 숨겨진 진리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예술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은 회화, 시, 음악을 인간 내면에 숨겨진 지성에 대한 예술적 표현이라 정의한다.
인간은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인간이 그린 최초의 그림은 프랑스와 스페인 동굴에서 발견된다. 이런 그림의 존재가 알려진 시기는 1879년 11월이다. 스페인 북해안 알타미라의 영주인 사우투올라 자작은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다. 그는 다섯 살 난 딸 마리아를 데리고 근처 동굴에 들어가 석기 따위를 수집하곤 했다. 아빠의 유물 발굴에 싫증이 난 마리아가 동굴을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아버지, 소들이 천장에 있어요!” 라고 소리 지른다.
그 그림은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벅찬 가슴으로 그 짐승들의 그림을 구석기 시대 크로마뇽인들의 작품이라고 확신하고 스케치 한다. 그는 당시 프랑스 고고미술사학회에서 구석기 시대 사람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학회는 그 벽화가 너무나 뛰어났다는 이유로 위작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사우투올라는 아무에게도 그 그림을 인정받지 못한 채 실의에 빠져 죽었다.
저명한 프랑스 고고미술학자 에밀 까르따이약(1845~1921)은 사우투올라의 주장을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인류가 점차 진화하고 문명화된다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 신봉자였다. 그는 2만 년 전 구석기시대 거의 ‘동물’ 상태인 구석기인들이 그런 정교한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유럽 지식인들은 예술을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여유로운 문명사회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다. 크로마뇽인의 예술을 연구한 최초의 예술사학자인 신부 앙리 브루이(Abbe Henri Breuil, 1877~1961)는 그들이 영적인 예술창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폄하한다. 후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등장하는 미신적인 행위를 기초로 크로마뇽인들의 예술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분석한다. 원시인들이 자신이 잡고 싶은 동물들을 그림으로써 더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원시적인 풍요제사의식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동굴벽화에 남겨진 동물 중 뾰족한 칼이나 창으로 긁힌 흔적이 있어 그의 가설이 그럴 듯해 보였다. 이 이론은 간단명료 하여 매력적으로 보이나 원시인들이 가진 신비에 대한 경외심을 간과하고 설명하지 않았다.
독일 표현주의의 구루이며이란 책의 저자인 빌헬름 보링거는 플라톤의 예술 정의를 신봉한다. 그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공감’의 기술이며 원시인들은 공감이란 감정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거친 현실상황 때문에 예술작품을 남길 수 없고 기껏해야 알 수 없는 기호만 끼적일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에밀 까르따이약(1845~1921)은 라는 책에서 사우타올라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조사한 끝에 그 벽화들이 구석기 시대에 속하는 예술작품이라 선언하고 선사시대 미술연구라는 새로운 학문분야를 열었다.
|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 그는 예술을 ‘진리에 대한 흉내’라고 정의했다. <사진=위키미디어> | |
동굴벽화 속 대상은 ‘또 다른 자아’
왜 크로마뇽인들은 거주하는 장소가 아닌, 지상으로부터 50m 이상 지하로 내려가 이런 찬란한 벽화를 그렸을까? 횃불이 없다면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간의 본성과 위대함과 연결시키는 설명은 없을까?
상상해 보자. 지금부터 2만여 년 전,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들은 빙하기에 살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며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내야 했다. 이들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들이 누구인가, 왜 사는가 하는 철학적이며 근본적인 문제를 표현할 방법을 간구하였다. 이들은 눈 덮인 지상이 아니라 산이나 계곡에서 발견한 동굴로 들어간다. 깊고 좁은 지하통로를 통해 지상으로부터 한참 내려간다. 이곳에는 칠흑 같은 어둠과 귀를 멍하게 만드는 침묵만이 존재한다.
크로마뇽인들은 횃불을 들고 내려와 자신들과 지상에서 삶을 공유하고 있는 동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 동물들은 사냥 대상이 아니라 삶을 공유하는 자신의 이웃이나 ‘또 다른 자아’ 라는 사실을 벽화로 표현한다. 그들이 이 고유한 공간 안에서 듣는 것은 자신들의 심장소리뿐이다. 자신의 심장소리를 듣는 행위는 영적인 의례이며, 지상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여기서 삶의 의미와 공동체의 의미,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먹이사슬의 운명을 묵상하고 깨닫는 ‘제3의 귀’ 를 얻게 된다.
이 장소는 크로마뇽인들이 정기적으로 자신들의 살아있는 심장소리를 듣는 ‘시스틴 채플’ (Sistine Chapel showing Michelangelo's ceiling fresco)이었다. 이들은 이 성소에서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처럼 삶에 대한 신비와 저 너머 세계에 대한 동경을 표현했다.
구석기시대 인류의 조상들은 그들이 서로 하나이며 심지어 동물들과도 하나의 끈으로 이어졌다는 ‘유동성’ 을 확인했을 것이다. 깊은 묵상을 통해 얻어지는 선물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는 ‘그것’ 까지도 하나라는 인식이다. 그들은 또한 이미 죽은 조상들과 소통하여, 자신들도 다음 세계로 진입하는, 즉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투과성’ 을 경험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신들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획득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 성인들, 모세, 엘리야, 플라톤, 붓다, 예수, 공자, 노자, 무함마드가 그런 섭리를 깨달은 자들 아닌가?
- [배철현 칼럼] | March 2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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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나는 누구인가 ③ ] 문명창출 원동력, 문자와 도시 |
| 우룩(Uruk)은 인류 최초의 도시다. 이라크 남동부 유프라테스강 부근에서 발굴된 우룩 도시 유적 <사진=British Museum> | |
문명창출 원동력, 문자와 도시 ... ‘우룩(Uruk)’ 과 ‘도시인(Homo Civitas)’
문명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 ‘문자’ 다. 인류가 속한 인종이 다른 인종과 달리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70만 년 전 인류는 불을 발견해 다룰 수 있었고, 허리를 펴고 두 발로 걷게 됐다. 이들을 ‘호모 에렉투스’ 즉 ‘직립원인’ 이라 부른다.
그 후 기원전 1만 년경 중동지방에서 인류는 처음으로 보리와 밀을 재배하는 기술을 터득한다. 사냥 · 채집경제에서 농경 · 정착경제로 급변하게 됐다. 인류는 파종(播種)하면 싹이 나고 그 열매를 추수하는 자연의 순환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과 연결시킨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신석기혁명’ 이라 불렀다. 인류는 이제 겨울 동안 먹을 것을 찾아 다니지 않고 촌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공동체를 이뤄 살다 보니 자연히 갈등이 일어나고 누군가 대표로 나서 중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기원전 6000년경 촌락들이 등장한다. 촌락들이 성곽을 짓고 공동체를 방어하고 필요한 물품을 다른 촌락과 교역하며 점점 촌락들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 때 촌락과 촌락의 소통, 한 촌락의 행정을 위해 새로운 소통체계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문자’ 다.
인류는 문자를 통해 촌락을 더 큰 촌락으로, 급기야 도시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최초로 문명을 시작했지만 다른 문명들도 독립적으로 후대에 등장한다. 기원전 3100년 이집트, 기원전 2500년 인도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기원전 1900년 중국 황하 유역, 그리고 기원후 9세기경 아메리카 대륙에서 등장하였다.
왜 이렇게 다른 시기에 문명이 등장했을까? 학자들은 기후변화로 농업이 가능해진 시기가 지역별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우룩(Uruk)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 중 가장 먼저 문자를 기반으로 새로운 공동체, 즉 도시로 발전한 곳이다. 에 의하면 우룩은 엔메르카르가 기원전 4500년경 건설했다. 수메르(오늘날 와르카, 이라크) 남쪽 우룩은 셈족어인 히브리어로 에렉으로 음역되며, 아마도 ‘이라크’ 국명의 어원이다.
우룩이란 도시는 인류 최초 영웅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 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27세기 우룩 왕인 그는 불멸을 찾아 가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 인간은 ‘문자’ 라는 소통수단을 기반으로 ‘도시’ 를 이룩했다. 사진은 인류역사상 첫 도시 ‘우룩’ 제1왕조 5대 왕이었던 불멸의 영웅 길가메시. 사자를 굴복시킨 모습이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기원전 7세기 사르곤 2세 왕궁 부조다. <사진=위키미디어> | |
진흙 계약서에 인장으로 소유 표시
우룩은 문명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완성한 도시다. 문명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문자와 도시다. 이 두 요소가 동시에 존재해야 시너지를 발휘해 문명을 이룰 수 있다.
고고학에서 설정한 우룩 IV지층은 기원전 3300년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문자가 등장한다. 문자는 낙서와는 달리 모양이 그림문자라 해도 그 도시의 경제 · 행정체계 안에서 통용되어야 한다. 그 안에서 진흙이 아닌 돌로 지은 행정건물, 종교시설인 지구라트가 등장한다. 특히 수많은 원통 인장들이 발견됐다.
우룩인들은 소유를 표시하기 위해 건물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진흙으로 만든 계약문서 위에 진흙이 마르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원통인장을 굴려 표시하였다. 원통인장은 개인의 정체성과 명성을 표시하는 도구다. 또한 우룩은 오늘날 뉴욕이나 파리처럼 명성 있는,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도시였고 기원후 300년까지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했다. 우룩은 1853년 대영박물관의 윌리엄 로푸투스가 발굴하면서 과거의 영광이 복원됐다.
수메르인이 건설한 우룩은 기원전 4100~3000년 사이 융성했다. 우룩은 상업과 행정의 중심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우룩을 중심으로 도시와 문자가 등장한 사건을 ‘우룩 현상’이라고 부른다. 우룩 유물들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발견된다. 심지어 이집트와 터키, 이란과 중앙아시아에서도 발견된다. 문명탄생을 연구하기 위한 고고학적 발굴이 완전하지 않아 우룩 현상에 대한 구체적 정황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의 중이다. 문명이 시작된 우룩에선 처음으로 그릇이 대량생산됐다. 테두리가 일정하지 않은 우룩 그릇들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미뤄 전문적 도공들이 삯을 받고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테두리가 울퉁불퉁한 그릇’은 북쪽 도시 마리에서도 발견된다. 이 그릇이 인간이 처음으로 대량생산한 제품이다.
우룩은 두 지역으로 구분된다. ‘에안나’ 과 ‘아누’다. 에안나 지역은 우룩의 여신 이난나를 위한 공간이고 아누 지역은 이난나의 할아버지인 아누 신을 위한 공간이다. 우룩에서 발견된 대리석 여성얼굴 가면을 ‘와르카의 가면’ 혹은 ‘우룩의 여주인’이라 부른다. 아누신은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오래된 하늘신이며 신들의 모임을 관장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난나 여신이 최고신으로 등극하자 높은 담을 쌓아 그녀를 위한 특별한 공간을 표시했다. 이난나 여신은 샛별여신이자 전쟁여신이다. 수메르 신화에 의하면 이난나 여신은 아버지 신이자 지혜의 신인 엔키로부터 수메르 문명의 문화적 틀인 ‘메’를 훔쳤다고 한다. ‘메’는 우주 삼라만상의 운행원칙이자 인간사회의 규범, 인간 개개인이 살아있는 동안 해야 될 자신의 운명이다. 신화에서 엔키신이 ‘메’를 에리두라는 도시로 가져갔지만, 이난나 여신은 아버지를 속이고 다시 우룩으로 가져갔다. 이 신화는 우룩이 수메르 문명의 중심임을 시사한다. 에리두는 원시적 삶을, 우룩은 새로운 삶인 ‘도시’문화를 각각 상징한다.
수메르는 우룩 시대를 거쳐 초기 왕조시대로 진입한다. 우룩이 아직 수메르 권력의 중심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점차 줄고 있었다. 길가메쉬 왕이 우룩의 성벽을 쌓았다. 라가쉬라는 도시에서는 에안나툼 왕이 등장해 라가쉬 제1왕조를 기원전 2500년경 건립한다. 라가쉬의 왕 루갈-짜게시는 우룩을 흠모한 나머지 우륵을 수도로 정한다. 기원전 2334년 셈족 사람인 사르곤이 아가데라는 곳에서 왕국을 세운 후 우룩으로 들어와 이난나와 아누 신전을 재건하였다.
기원후 3세기 이후 버려진 이 을씨년스러운 우룩이 인류가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창조적 공간이었다. 우룩에서 인류는 자신의 의견을 말이 아닌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상징체계를 고안해냈다. 이 상징체계는 나만, 혹은 한 집단 안에서만 소통되는 도구가 아니라 다른 마을과 도시에도 통용됐다.
문자를 사용하는 공동체는 자신들이 약속한 문자라는 상징체계를 지키려는 마음과 의지가 있어야 가능했다. 처음으로 도시에 거주하게 된 ‘호모 시위타스(Homo Civitas)’는 서로를 배려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법’ 이란 체계도 만든다. 초기의 법은 기원전 2400년경부터 등장한 왕정제도에 의해 취지가 흐려졌지만, 공동의 이익을 위한 시도에서 등장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 [배철현 칼럼] | May 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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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나는 누구인가 ④ ] 세월호 참사와 종교의 ‘황금률’ |
| 지난 3월30일 이스라엘 아라바에서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땅의 날’ 행렬에 참여하고 있다. 1967년 이스라엘의 갈릴리지역 점거에 저항하기 위해 시작된 땅의 날 시위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을 상징한다. <사진=신화사/뉴시스> | |
세월호 참사와 종교의 ‘황금률’ (黃金律) ... 당신이 당하기 싫은 방식으로 상대방 대하지 말라
위대한 종교와 문명을 관통하는 강력하면서도 흠모할 만한 사상이 있다면 무엇일까? 저마다 자신들이 속한 종교나 문명이 우월하다고 착각하며 살지만, 위대한 문명들과 그들이 남긴 경전들을 묵상을 통해 살펴보면 이들에게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을 ‘황금률’ (黃金律, Golden Rule) 이라 부른다.
황금률의 내용은 “당신이 당하기 싫은 방식으로 상대방을 대하지 말라” 혹은 “당신이 대접받고자 하는 방식대로 상대방을 대접하라” 이다. 동서양의 주요 종교들은 이 사상을 자신의 역사적인 환경에 맞게 터득하고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 적용시켜왔다. 황금률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은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관에서 벗어나 ‘무아’ 상태로 진입하는 연습에서 시작된다.
인간들 간의 갈등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여러 세계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세계들을 열등하거나 틀렸다고 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이것들을 위장하기 위해 종종 종교를 이용한다. 이런 이들을 종교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특히 종교인들이 자신들만의 세계에 매몰된다면 왜곡될 수밖에 없고 다른 종교들이나 세계관을 틀렸다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극악무도한 테러를 자행하면서도 그 행위가 “신의 뜻이다!” 라고 외친다.
유대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경전 토라(Torah)에 이스라엘 하느님이 “북으로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남으로 이집트의 강까지 영토를 주신다” 라고 약속한 내용을 축자적으로 믿는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인 가자와 웨스트뱅크에서 지난 3000년 동안 거주했던 팔레스타인들을 몰아내려 하고 심지어는 중동평화를 위해 노력하던 이스라엘 수상 이츠하크 라빈마저 암살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꾸란(Qur’an)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국제적인 테러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오사마 빈 라덴은 자신이 조직한 알 카에다의 막강한 자금으로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와 미국 9·11 대폭발테러를 감행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왜곡한 세계관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폭력 · 살인 · 대량살상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근본적인 행위는 일부 극단적인 정신병자들만 하는 행위가 아니다.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들과 주교들은 자신들 관할 아래 있는 성직자들이 저지른 아동 성학대 스캔들을 못 본체 함으로써 수많은 여성들과 아이들의 고통을 무시해왔다. 몇몇 종교 지도자들은 마치 세속적 정치가들처럼 자신들의 종파를 찬양하고 상대종교에 대해 험담과 비하발언을 멈추지 않는다. 이 근본주의 종교집단의 공개적인 신앙고백에서 상대방, 특히 자신과 다른 종교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는 찾아 볼 수 없다.
| 1659년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 (Harmensz van Rijn Rembrandt)가 그린 ‘신으로부터 십계를 전달받은 모세’. 십계는 토라(Torah) 계율 중 일부에 해당하며 토라는 유대 근본주의자들의 종교적 기반이 됐다. <사진=위키미디어> | |
예수와 동시대인 힐렐의 교훈
오늘날처럼 종교와 문명의 핵심인 황금률이 이토록 간절히 요구되는 시대는 없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권력과 돈이 염려스러울 정도로 소수에게 편중되어있고, 그 결과 분노, 불안, 소외, 굴욕이 점점 커져 소외자들의 정신분열적인 무차별적 폭력과 미움이 분출되어 모두를 슬프게 한다. 북경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오늘 일어나는 일이 이제 내일 서울이나 뉴욕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환경 재앙의 무서운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과거에는 소수의 권력들이 국가단위에 부여된 절대권력을 가질 수 있는 전능한 존재였다. 우리 시대만큼 황금률(黃金律)이 필요한 적은 없었다. 우리의 종교와 도덕적 전통은 이 난제를 풀어야하는 어려운 시험에 직면해 있다.
기원 후 70년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국가적인 재난에 직면했다.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 2세가 예루살렘을 부수고, 그들을 포로로 삼았다.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가 시작된 것이다. 성전이 기원전 515년 재건되었다. 그 후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차례차례 받으면서 자신들의 생존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유대인들에게 창의적인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유대교 랍비들은 자신들이 간직해온 경전연구를 통해 지상에서는 어떤 세력도 파괴할 수 없는 ‘영적인 예루살렘’ 을 짓기 시작하였다. 기원 후 200년경 등장한 유대교 경전 미쉬나(Mishnah), 그리고 5~6세기 등장한 탈무드(Talmud, 유대교의 고대 율법및 전통 모음)가 그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경전들을 공부하는 행위가 천상의 예루살렘을 위한 벽돌을 하나씩 쌓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이 경전을 공부하여 경전에 대한 해석, 즉 ‘영적인 예루살렘’ 을 구축하면서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황금률’ 이다. 만일 토라의 내용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자비를 찾을 수 없다면 유대인들은 그 내용을 토라에서 과감하게 삭제하였다.
황금률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예수와 동시대에 힐렐이라는 위대한 랍비가 있었다. 1세기 위기에 빠진 유대교는 새롭고 참신한 방향을 모색 중이었다. 당시 유대교를 구축하려는 두 학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심마이라는 랍비가, 다른 하나는 힐렐이 주도하였다. 어느 이교도가 유대교로 개종하기 전에 심마이와 힐렐을 방문하여 마지막으로 토라에 대해 물었다. 그가 먼저 심마이를 찾아 “당신이 한 다리로 서 있는 동안 토라 전체를 암송할 수 있다면, 나는 유대교로 개종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토라 전체의 핵심을 간단히 말해달라는 질문이다. 그러자 위대한 랍비 심마이가 몽둥이를 들고 그를 내쫓으려 외친다. “네가 감히 그런 질문을 하느냐? 바다를 잉크삼아 그 내용을 붓으로 쓴다 해도 다 기록하기 못할 텐데, 그런 무식한 질문을 하다니. 너는 유대교를 믿을 자격이 없다!”
이렇게 쫓겨난 이교도는 다시 똑같은 질문을 들고 힐렐을 찾아 물었다. 그러자 힐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 스스로 생각하기에 혐오스러운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토라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그저 각주일 뿐입니다. 가서 이것을 공부하여 실천하시오.” 힐렐은 신의 유일성, 천지창조, 출애굽 혹은 613계명과 같은 교리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힐렐에게 그저 황금률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위대한 종교나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종교와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다른 세계, 문명, 종교에 대한 배려와 존경이다. 그리고 배려를 장려하지 않는 종교와 문명은 가짜이며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 [배철현 칼럼] | May 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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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나는 누구인가 ⑤ ] 인간, 왜 진리를 떠나 살 수 없는가 |
| 웨일스 남단 카디프 세인트존 침례교회에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된 예수 그리스도상. 그리스도 순교자들의 믿음은 유럽문명과 세계문명의 기반이 됐다. <사진=위키미디어> | |
인간, 왜 진리를 떠나 살 수 없는가 ... 종교적 동물 ··· 묵상 통해 찾아낸 절대믿음 위해 목숨 걸어
누가 당신에게 ‘객관적인’ 사실로 부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삶에 필수불가결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이 처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형성된 하나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 자신에게 친숙한 사물과 사람, 그리고 이념들을 의지하고 믿게 된다. 누가 필자에게 무엇을 신봉하느냐라고 묻는다면 필자도 역시 자신의 경험 안에서 믿음의 대상을 찾으려 시도할 것이다. 우리가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에 대해 믿음을 가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필자가 1988년 미국에서 종교공부를 시작했을 때, 다른 종교를 진지하고 깊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혼돈스러웠다. 기껏해야 대한민국에서의 경험은 유불선과 그리스도교 정도였다가 이슬람교, 유대교, 시크교, 힌두교, 그 외 수많은 세계종교들을 삶의 좌표로 삼는 종교인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흔히 믿음이라고 하면 자신이 속한 우물 안과 같은 환경에서 만난 하나의 이데올로기, 종교 혹은 세계관에 대한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의존을 의미한다. 우리가 속한 협소한 정신적인 세계 밖으로 눈을 돌린다면 수많은 종교들을 만나 혼돈에 빠질 것이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믿음’ 이라 하면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배타적인’ 믿음을 연상하게 된다. 특히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자신들만의 신앙체계가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다른 종교들에는 구원이 없다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특히 한국 종교지형도 안에서 믿음은 철저하게 이 배타성 위에 존재한다.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우리는 이런 광경을 쉽게 포착한다. 어깨에는 이동식 스피커를 매고, 손에 쥔 마이크에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라고 목청이 터지라 외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 파괴적인 이단집단들과 일부 무식한 개신교 대형교회에서는 종교인들이 자기 자식에게 종교시설을 넘겨준다. 이런 집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들의 종파만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종교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존재로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을 바로 ‘무식(無識)’ 이라 부른다.
공부는 ‘다름’의 신비함과 아름다움 알기 위한 것
우리는 이 무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다름’ 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 공부한다. 이 공부는 단순히 학교에서의 공부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자연의 오묘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배우는 혜안을 포함한다. 인간의 생존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능하다. 어린아이는 태어나면서 ‘어머니’ 라고 부른 존재를 절대 신뢰하게 된다. 그녀는 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 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그의 존재를 믿는다’ 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내가 어떤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로 고백해 천당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그런 저급한 차원이 아니다.
기원후 302년 가을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우스가 시리아의 안디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로마관원이었으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로마누스가 로마황제를 위한 제사를 방해한 적이 있었다. 로마누스는 그 자리에서 체포돼 화형선고를 받았으나 디오클레티우스는 그의 혀를 자르라고 명했다. 그는 약 10년간 로마제국의 동편에서 2만명의 그리스도교인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이 순교자들의 믿음은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존재 이유였다. 이 순교자들이 가진 믿음이 무엇이었길래, 유럽문명과 세계문명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나?
그리스도교에서 ‘믿음’ 에 해당하는 고전 그리스어 단어는 ‘피스티스’이다. ‘피스티스’는 사실 ‘어떤 교리나 사실을 믿는 행위’ 가 아니라 오히려 ‘신뢰 · 충성 · 최선 · 위임’ 이란 의미다.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한 적도 없다. 예수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보여준 행동들, 즉 ‘가난한 자 · 고아 · 과부,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을 자신의 몸처럼 보살피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에 옷을 주라고 주문한다. 또한 학연 · 지연에 얽매이지 말고 하늘의 새나 들의 백합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며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의 신비를 관찰하여 이 만물들을 존재하게 하는 아버지-어머니 같은 존재인 신(神, God)을 의지하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자신의 일상에서 신비를 발견하고 그 안에 내재한 신비를 통해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매겨 행동하는 것, 바로 그것이 ‘피스티스’ 다.
제롬(Jerome. 기원후 342~420년,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의 영어 이름)은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를 로마제국의 공인된 종교로서 그 위상을 마련하기 위해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는 ‘믿음’ 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명사 ‘피스티스’ 를 라틴어 ‘피데스’(Fides)와 ‘크레도’(Credo)로 번역했다. 라틴어 명사 ‘피데스’ 는 영어단어 ‘피델러티’ (Fidelity)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는 ‘약속에 대한 엄수 · 충실 · (배우자에 대한)정절’ 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 은 삶의 태도이지 어떤 사실을 믿는 정신적인 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 질서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라틴어 동사 ‘크레도’(Credo)를 보면 원래 의미가 다시 한 번 강조된다. ‘나는 믿는다’ 라는 의미를 지닌 ‘크레도’ (Credo)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심장’ 을 의미하는 ‘크르’(cr-)와 ‘우주의 질서에 맞게 삼라만상을 정렬하다’ 라는 의미인 ‘도’(do)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크레도’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란 뜻이다. 우리가 흔히 교리(Creed)라고 하는 것들은 ‘말로 하는 고백’ 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조망해 우주의 질서가 무엇인지,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탐구해 그 사람의 체취로 묻어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의 사성제 팔정도를 말로 고백하고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 은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깊은 묵상을 통해 알아내고, 그것들을 최선을 다해 심지어는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삶의 태도이다. 11세기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캔터베리의 주교 안셀무스는 ‘Credo ut intelligam’ 이란 라틴어 명구를 남겼다. 직역을 하자면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인데, 그 의미는 ‘나는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것을 묵상을 통해 찾아내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그 결과 삼라만상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 되지 않을까.
당신에게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원칙, 아니 ‘믿음’이 있습니까?
- [배철현 칼럼] | July 9, 2014
| Leonardo da Vinci - St. Jerome, c. 1480, Musei Vaticani, Rome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 in the Wildernes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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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나는 누구인가 ⑥ ] ‘아레테’가 지도자 최고 덕목 |
| 소아시아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도시 에페소, 켈수스 도서관의 아레테 조각상 | |
‘아레테’가 지도자 최고 덕목 ...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등 통해 위대한 영웅 찬양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위대한 국가나 기업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한 나라를 창건한 왕이라고 해서, 혹은 한 기업을 창업했다고 해서 자식에게 그 나라나 기업을 물려주는 몰염치한 상황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종교인들, 특히 대표적인 대형 교회의 목사들 중 자식에게 넘겨주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있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전근대적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왜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나? 왜 다른 동물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났는가? 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애쓰는 것인가? 서울대는 신입생들에게 입학 전 2박3일간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한다. 필자는 나름대로 ‘수재’소리를 들으면서 입학한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1%의 노력과 99%의 운으로 서울대에 입학했다” 고 강의한다. 그 나이 또래 대부분은 아프리카나 중동 등 이름 모를 지역에서 99% 태어난다. 대한민국 같은 나라 혹은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에 태어날 가능성은 1% 미만이다. 서울대에 들어온 학생들은 자신의 운을 감사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는 150개 이상의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 도시국가는 고대 오리엔트의 정치 틀인 왕정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었다. 당시 소아시아(터키) 해변에는 그리스에서 이주한 이오니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에 등장한 페르시아제국이 이 해변도시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참주(僭主)제도를 정착시키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제국에 근본적인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왕정이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인간이 이 세상에 다른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 신분은 공동체인 도시(Polis)에서 ‘아레테(Arete)’를 실현하기 위한 바탕이라고 생각했다. 지도자는 고대 그리스어로 ‘아레테’를 어김없이 발휘한 자들 중 투표를 통해 선출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과정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왕권을 자식에게 불려주는 행위를 ‘바바로스’ 즉 ‘야만적’이라고 정의하였다. 영어 단어 Barbarian이 여기서 파생하였다. 즉 ‘야만인’은 ‘아레테’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다.
|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가 죽은 헥토르의 시신을 말에 매달고 트로이 성문 앞을 의기양양하게 질주하고 있다. | |
고대 그리스, ‘아레테’ 갖춘 자 투표로 선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아레테’는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 을 의미한다. 굴뚝의 ‘아레테’도 있고, ‘황소’의 아레테도 있고, 사람의 ‘아레테’도 있다. 아레테는 그것이 무엇을 묘사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사물이나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고유한 아레테가 있기 때문이다. 아레테의 원래 의미는 ‘자신의 삶을 우주의 질서에 맞게 연결시킨 것’ 이다. 인간 자신이 시공간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묵상을 통해 깨달아 그런 삶을 추구하는 삶을 바로 아레테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크랫(Aristocrat)’ 이란 영어 단어는 흔히 ‘귀족’으로 번역되는데, 숨겨진 본래 의미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깨달아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며, 이들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하는 일이 천직이라고 깨닫고 묵묵히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분이 모두 아리스토크랫이다.
기원전 750년 호메로스는 450년 이상 구전으로 내려온 서사시를 문자로 옮긴다. 고대 그리스에는 다소 난해한 음절문자인 선형문자 A와 선형문자 B가 있었으나, 그들이 수백년간 노래한 서사시를 기록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이들은 페니키아인들로부터 배운 셈족 알파벳을 차용하여 이 노래를 적었다. 이 노래가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다. 이들은 각각 두 명의 위대한 영웅들의 아레테를 찬양하고 있다.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바로 아킬레우스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전쟁 영웅으로 아레테를 발휘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함락시키러 갔지만, 아킬레우스 도움 없이 그 전쟁을 이길 수 없다. <일리아스>에 처음으로 등장한 ‘아레테’라는 개념은 바로 아킬레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용맹성을 의미한다. 후에 등장하는 그리스 교육과 그리스 올림픽은 바로 이 육체적인 탁월함인 아레테을 연마하는 장소이다.
<오딧세이아>의 주인공 오딧세우스는 아킬레우스와는 다른 아레테를 지녔다. 그는 자신의 말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말솜씨를 지녔다. 그는 트로이전쟁서 아킬레우스처럼 죽지 않고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향인 아타카로 항해하는 동안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사이렌과 같은 여신의 유혹을 대화로 설득하여 자신의 뜻을 이룬다. 아레테는 육체적인 탁월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을 통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언변의 탁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아레테를 ‘인간 노력의 탁월함’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아레테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에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레테는 자신이 최선을 이루겠다는 결심과 노력이다.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지속적인 마음이다.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는 확신, 이를 지속적으로 완성해 나가려는 겸손에서 아레테는 시작한다. 그리스 교육체계는 암기가 아니라 참여다. 매일매일 체육관에서 운동을 통해 육체를 연마하며 그동안 알지 못하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는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무아(無我)상태를 연마하여 정신적인 최선을 지향한다. 거기에는 사지선다가 없다.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성적이 아니라 경쟁이다. 이들은 육체적으로 올림픽경기를 통해 경쟁하는 것처럼, 시 · 산문 · 연극 · 음악 · 그림 · 연설을 통해 아레테를 연마한다.
시 · 연극 · 운동 등 통해 연마
아레테를 가장 많이 연마한 자들인 아리스토크랫은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적 · 정신적 환경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을 끊임없이 한다. 타인의 다양한 마음을 진실로 이해하고 그들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이 바로 공부다. 이런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이에 따라 공동체는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여 자연스레 ‘존경’을 보낸다. 이 존경을 그리스어로 ‘티메’라고 부른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선을 지향하는 노력이 바로 아레테이다.
스스로 최선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레테는 떠나버린다. 오랜 연마를 통해 아레테에 이른 이에게 공동체는 존경심인 티메를 선사한다. 티메는 사람이 타인의 다양한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무아의 능력으로 그에게 서서히 쌓이는 신의 선물과 같은 것이다. 티메는 지도자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우리 주위에는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이 없는 ‘야만인 지도자’ 가 많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가는 여러 길 중에 하나는 아레테를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아레테를 깊이 연마해야 티메가 오며, 티메를 지닌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다.
- [배철현 칼럼] | September 2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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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의 말(馬) ‘부락’
무함마드는 570년 아라비아의 상업도시 메카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최고 가치는 ‘복수’ 였다. 이들은 자기 부족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힐리아’ 즉 이기심에 사로잡힌 무식(無識)이 생존방식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는 4살 때 어머니 아미나마저 세상을 떠난다. 그는 아바리아의 상인이었던 할아버지 무탈리브의 도움을 받아 25세까지 메카~시리아 대상여행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거의 고아상태인 그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언행일치(言行一致)였다. 상인인 그는 자신의 말을 반드시 실천하는 ‘믿을 수 있는 자’ 로 소문이 난다. 당시 메카의 부호였던 미망인 카디자가 무함마드에게 청혼하여 이들은 결혼한다. 무함마드는 25세, 카디자는 40세였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무함마드는 고아시절을 기억했다. 부익부빈익빈의 악순환을 지켜보면서 무함마드는 결혼한 610~620년 10년 동안 메카의 외각 히라동굴에서 자신을 위한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을 아랍어로 ‘타한누쓰(tahannuth)’라 부르는데, 상인 무함마드는 10년 간의 타한누쓰를 통해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되었다. 무함마드가 위대한 예언자가 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부인 카디자와 삼촌 아부-탈리브이다. 이들은 무함마드의 계시를 비웃지 않고 받아들여 첫 무슬림들이 되었다. 그러나 620년, 무함마드는 인생일대의 위기에 처한다. 아내 카디자와 삼촌 아부-탈리브가 죽은 것이다.
621년 어느 날 무함마드는 깊은 실의에 빠진다. 어느 날 밤 무함마드가 카바 옆에서 자고 있을 때, 자신에게 지난 10년 동안 꾸란을 계시했던 가브리엘 천사가 천상의 말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 말의 이름은 ‘부락’이다. 부락은 굴레가 채워진 키가 크고 잘생긴 백마(白馬)였다. 부락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말굽을 치켜 올려 내딛기만 하면 한 순간에 날아간다. 산에 오를 때는 뒷다리를 쭉 뻗고, 내려올 때는 앞 다리를 쭉 뻗는다. 부락은 또한 날개가 달려 하늘로도 훨훨 날아간다.
무함마드가 부락에 올라타려 하자 등을 구부려 껑충 뛰었다. 그러자 가브리엘 천사가 “오! 부락이여 창피하게 여기지 말라. 알라신께 무함마드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다” 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부락은 가만히 서 무함마드가 올라타게 했다. 부락은 단숨에 무함마드를 예루살렘에 있는 알-아크샤 모스크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무함마드는 과거의 모든 위대한 예언자들과 인사를 나눈다. 다른 예언자들은 그를 형제로 받아들였다.
그 후 무함마드는 부락 위에 올라타 알라의 왕좌가 있는 일곱 하늘로 승천한다.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아경지에 진입한 것이다. 무함마드는 일곱 하늘을 여행하는 동안 아담, 예수, 세례 요한, 요셉, 에녹, 모세, 아론, 아브라함을 만났다고 전한다. 무함마드는 부락을 통해 자신이 살았던 메카를 쳐다보고, 그 안에 존재했던 다양한 삶의 형태들, 여러 종교들을 내려다 본 것이다.
2014년 갑오년은 청말띠 해다. 나도 무함마드의 부락과 같은 말을 타고 싶다. 부락은 무함마드처럼 이기심이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직시하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깊이 묵상하는 자에게 주는 신의 선물이다. 올해는 나도 부락을 탄 무함마드의 환희를 맛보았으면 좋겠다
- [배철현 칼럼] | January 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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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낯설음’이다
인간에게 신은 어떤 존재인가? 신은 천둥소리와 함께 구름타고 나타나 번개로 죄인을 멸하고 자신을 믿는 신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존재인가? 만일 인간이 신을 정의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신이라고 불릴 수가 있는가? 루돌프 오토라는 독일 신학자이자 종교학자는 신을 정의할 단어를 찾지 못하고 대신 신의 속성인 ‘거룩’ 을 독일어로 ‘다스 간쯔 안데레’ Das ganz Andere, 번역하자면 “완전히 다른 존재 ; 절대 타자(他者)” 라고 정의하였다. 신은 내가 생각하는, 내 공동체가 생각하는, 혹은 인간이 생각으로 감히 측정할 없는 존재, 즉 ‘절대타자’ 라고 정의한다. 이 ‘절대타자’ 에는 다음 세가지 속성이 있다. 첫째는 ‘미스테리움’, 즉 ‘신비’ 이다. 신비는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신비하다. 셀 수 없는 밤하늘의 별, 지구를 포함한 수 천억개 행성들이 저나마 지니고 있는 중력, 인간이 태어나는 과정, 씨앗을 뿌려 싹이 나는 과정… .. 우리 주위는 바로 이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이 신비에 대한 반응을 경외심(敬畏心)이라고 한다. 아인쉬타인은 이 경외심을 최선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둘째는 ‘트레멘둠’ 즉 ‘전율’ 이다.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웅장하고 압도적인 것을 만날 때 우리는 전율한다. 최선의 음악, 미술, 문학, 사람, 자연, 수학.. 등을 오감으로 느낄 때 소름이 돋는다. 전율할 수 없는 사람은 거의 죽은 사람이다. 셋째는 ‘파시노숨’ 즉 ‘매력’ 이다. ‘매력’은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목숨까지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만일 나에게 매력이 없다면 상대방이 재미없는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이 낯섬에 관한 이야기가 그리스도교 복음서에 실려있다. 여기 실의에 찬 두 청년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12km정도 떨어진 엠마오로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3년 전 예루살렘에 나타난 한 청년을 만난 후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예수(Jesus Christ)였다. 예수는 ‘아낌없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 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고 심지어는 신적(神的)으로 만든다고 설교하였다. 예수와의 만남을 이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버리고 예수의 제자로 3년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이 청년은 신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드러낸다고 선포하고, 그 이웃은 심지어는 원수까지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예수는 깨달음을 주는 랍비일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독립을 가져다 줄 정치적인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예수가 십자가형이라는 로마형벌의 가장 극악무도한 형태로 죽자, 자신들이 바라던 꿈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힘없이 자신의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공해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가족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가슴이 답답했다.
복음서에 의하면 이들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지 사흘 후에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한 낯선 자와 동행하게 된다. 이 낯선 자는 수심이 가득한 두 제자에게 말을 건다. 두 제자가 절망에 늪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데, 이 낯선 자는 주제넘게 말을 건낸다. “당신이 얼굴빛이 안 좋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들은 처음 보는 사람과 말할 기분이 아니지만 이들이 추종한 예수라는 청년과 그의 십자가 처형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말한다. 이들은 특히 예수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린 메시아(Messiah)였다고 그 낯선 자에게 말한다.
사실 예수는 그 당시 기성종교인 유대교에서는 이단(異端)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의 제자였다는 시인(是認)은 그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이 낯선 자에게 자신들이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 낯선 자는 두 제자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 이들의 슬픔을 공감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토라(유대인의 경전)의 핵심과 메시아와의 상관관계를 두 제자들에게 설명한다. 그는 토라에 등장하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을 설명하고 메시아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고통을 당할 운명이라고 말한다.
이 낯선 자의 토라해석은 획기적이다. 유대인의 토라에는 메시아가 고통을 당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토라를 이 두 제자의 상황에 맞추어 오늘 여기의 삶이 의미가 있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런 해석을 ‘미드라쉬적 해석’이라 한다. 두 제자는 거리의 철학자같은 이 낯선 자의 해석을 무식의 소치라고 반박할 수 있었으나, 그의 지혜와 그의 해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두 제자의 위대한 점은 낯선 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과는 “다른” 해석과 견해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세계관을 바꿀 수 있는 마음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두 제자가 고향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 해는 뉘엇뉘엇 지고 있었다.
두 제자는 정처도 없이 어두운길을 갈 낯선 자에게 말을 건다: “날이 저물었으니, 오늘 밤은 우리 집에 가서 식사도하고 주무시고 내일 가시면 어떨지요?” 그 낯선 자는 자신은 급히 가야만 한다면서 한사코 거절하였지만 그들은 그 자를 만류하여 집으로 데려간다. 이들이 집에 도착하여 정성스럽게 낯선 자를 대접하였더니, 그제 서야 그들의 눈이 열렸다. 바로 이 낯선 자가 예수가 아닌가! 그러나 그 순간에 예수는 그들의 눈에서 사라진다. 이 공상과학과 같은 이야기는 무슨 의미인가? 두 제자는 3년 동안 따라 다녔던 예수를 인식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보려고 하는 메시아의 틀 안에서 그를 보려고만 했다. 그것은 한순간의 깨달음이었다. 낯선 자와 공감하고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호의를 베풀었을 때, 그 낯선 자가 바로 ‘예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 앞에서 예수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사라지지 않았다면, 두 제자는 자신들이 만난 예수만 유일한 메시아라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그들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기록함으로 예수는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 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고 증언한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거나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의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아(無我)’로 신을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여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신(神)이라 부른다. 신의 특징은 바로 ‘낯 설음’ 과 ‘다름’ 이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속한 소위 ‘아브라함종교 전통’에서 ‘거룩’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코데쉬’와 아랍어 ‘쿠드쉬’는 모두 “구별; 다름” 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파편적이고 편견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자신과는 완벽하게 다른 존재와의 만남이 종교이다.
우리는 우리와는 다른 이데올로기, 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로부터 경청하고, 그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 개혁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 낯설음과 다름을 수용하고 그 다름을 단순히 참아주는 똘레상스가 아니라, 다름을 소중히 여기고 대접할 때, 신은 우리에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 [배철현 칼럼] | October 2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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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배철현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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