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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서
1장
우리 신앙의 요소 중에 마지막 주제가 되는 요한사도의 서신을 접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면 성도의 교통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잘 쓰지 않는 말로 성도와 교제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요한1서의 주제이다.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의 교제는 어렵다. 그들의 세계에는 답답하여 통하지 않는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은 그냥 교제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영적으로 통해야 한다. 성도의 교제가 되지 않으면 교회를 다닐 수가 없다.
빛의 자녀와 어둠과는 같이 할 수 없다.
요한은 제자 중에 나이가 어렸고 제자 중에서 순교하지 않고 오래토록 살았던 유일한 제자이다. 예수님보다 5~8살 정도 차이가 나는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그날,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면서 “보라! 네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목회자는 성경 한 구절을 가지고 얼마나 말을 많이 하든지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지만 예수님은 딱 한마디 하신다. “보라! 네 어머니다” 마리아에게는 “보소서! 아들입니다.”
통하는 사람들은 한마디만 해도 그냥 알아듣고 무슨 의미 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성경을 가지고 너무 해석을 많이 하고 말이 많으면 어째 거짓말 같고 진정성이 결여 된다. 진리는 단순하고 간단명료하다.
예수님의 짧은 말씀에 능력이 있다. 공산주의는 말이 많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속이려고 하니까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이 많으면 공산주의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예수님 형제들이 있는데 요한(요한은 남인데)에게 맡겼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친 형제들이 거의 모두 일찍 순교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순교하지 않고 오래 살았을 뿐만 아니라 요한1서를 보면 이단을 언급하는데 이 이단들이 예배소교회(바울이 개척한)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에베소는 바울이 3년 사역하고 마케도니아를 건너서 고린도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드로아에서 집회를 하고 밀레토스에 와서 에베소지역의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놓고 고별 설교를 할 때
바울자신이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게 할 것과 또 너희 중에서도 누군가 자기자신을 쫒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는데(행:20)
바로 그 에베소서에서 이단인 영지주의 모태가 되는 케림투스가 나타난다. 이 사람은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바울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크고 나름대로 똑똑했던 사람일 것이다.
요한이라는 제자가 일찍 죽지 않고 오래토록 살아 있어야 되는 이유는 마리아를 모시고 있는 사명도 있지만 케림투스와 같은 이단들을 대적하여 진리의 교회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섬새하고 깨끗하고 성도를 품을 수 있는 사랑의 사도가 절대 필요했다는 것을 요한 1서를 읽어보면 느끼게 된다.
에베소는 그리스 본토에서 볼 때 동방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그리스 중심의 세계관으로 봤을 때 에게해 건너편에 있는 에베소를 앗스리아(아스=동쪽+이야=땅)로 오늘날 아시아로 불러지게 된 것이다. 그 당시 헬라문화권에서는 헬라가 중심이 되고 그리스 아테네에서 봤을 때 동방의 땅이라고 아시아라고 했다.
아시아의 중심도시가 유럽에서 아시아로 들어 갈 때의 관문인 에베소이다.
에베소는 꽤 큰 도시로서 기독교 이전에는 세계종교의 중심이 되는 곳인데 아시아의 모든 신들이 거기서 나왔다. 아시의 대표신이 아데미(아르테미스), 버가모에는 세라피스, 제우스, 아스킬레피우스(치료의 신)
그리스에서 볼 때는 모든 신들이 동방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겨졌다.
바울은 에베소의 아데미신전 밑에서 복음을 전하여 에베소를 점령 했다는 것은 세계교회의 중심지를 점령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처럼 중요한 곳이 에베소인데 그 후 바울에 의한 초대 기독교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바울이 3년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또 신약성경의 10권의 서신이 에베소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로마에서 기록하여 에베소교회에 보냄), 고린도전·후서(기록된 장소가 에베소), 디모데전·후서(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요한1서·2서·3서,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모든 요한의 기록은 에베소에서 기록한 것이다.
히브리서도 로마에서 기록을 시작하였지만 에베소에서 마무리 했다고 추측된다.
사도들의 활동영역으로 살펴 볼 때 에베소는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다.
처음에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갔다가 다시 에베소 중심으로 옮겨 왔다가 로마로 건너갔다고 할 수 있겠는데 에베소는 선교의 중심역할을 하는 중요 지역이었다.
이방종교의 중심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이단인 영지주의가 태동한 지역이고 오늘날의 천주교(카톨릭)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AD431년에 에베소에 가면 마리아의 기념교회의 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인가 예수그리스도의 어머니인가 하는 논쟁(데오토코서)에서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결정된 곳이다.
지금 에베소는 흐지부지 작은 마을로 남아 있지만 항상 에베소는 문제를 일으키는 곳이였고 오늘날은 교회도 없어져버렸고 마을도 이슬람이 장악해 버렸다.
사도 바울이 거기서 사역하면서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던 훌륭한 폴리캅을 배출하였고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감독 안디옥 교회의 감독인 익나티우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에베소에서 교육하여 파송한 사람들이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번역이 맥빠진 것이지만 헬라 원어는 우리는 들었다. 우리가 보았다. 우리가 주목했고 우리가 만져보았는데 그것이 곧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다.
이렇게 강한 표현을 한 것은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이 케림투스인 이단이다.
그들은 보지 않았고 경험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직접 들었고 보았고 주목하고....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1장 1절의 제목은 “목격자의 증언”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된 자니라
우리는 복음을 가진 사람이고 저희는 이단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대상은 저희이다 저희는 이단이고 우리는 목격자이고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성도의 사귐이란 끼리끼리 좋아하는 교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교제 사도들과 교제 천천만 성도와의 교제 과거현제미래를 품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함해서 산자와 죽은 자가 진리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는 큰 사귐을 말하는 교제이다.
반면에 세상 중심이고 마귀와 마귀가 보낸 것과 권력과 명예와 돈의 사귐이 있는데 세상의 교제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교회의 구조와 세상의 구조가 분명하고 명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요한의 글은 쉬운 말로 표현하면서도 분명하고 명쾌하다.
성경의 다른 사람의 글은 사도요한처럼 명쾌하지 않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어려운 부분도 있고 말도 안 되는 곳도 있고 번역이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사도요한은 그렇지 않다.
복음주의 자들은 바울사도를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복음의 최고의 경지는 사도요한이다.
바울사도의 종말에 관한 글은 부분적이고 체계화 되지 않고 말을 하다가 은혜로운 단어가 나오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한참 주제에 벗어나다가 돌아와서는 서둘러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요한은 길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하게 진리를 표현한다.
이런 요한이 흉악한 이단과 대적하여 교회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으로 천수를 누리면서 오래토록 사명을 감당하게 한다.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대상인 케림투스를 말하는 것이다. 말의 대상은 이단인 케림투스이다.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장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의 계명=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지주의 이단들은 자기들이 굉장한 신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우기는 사람이다.
그리스철학과 기독교를 섞어서 자기들이 엘리트그룹으로 생각하면서 옳은 지리도 아니면서 떠들어대는 골치아픈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영지주의(지식주의)자들은 뭘 안다고 주장하며 신령한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것이고 자기들처럼 특별한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데 자기들에게 와서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떠드는 사람들이다(헬라 철학적 지식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한은 복잡하게 이야기 하지 않고 2가지를 제시하는데
안다고 떠들지만 그의 계명(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인데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이고 사탄의 일꾼인 이단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우리와 교제가 잘 되지 않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한 이단이라고 말씀하는데
그 당시의 영지주의 이단을 대상으로 글을 썼다는 것을 모르면 요한1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요한 1서가 쓰여진 배경과 대상을 알게 되면 그냥 읽어가면 이해가 될 것이다.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번역이 어렵게 하여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창작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번역은 쓴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기가 어렵다. 학문의 최고 경지에 있어야만 바른 번역이 된다.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언약이라는 소리는 유치하다.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은 같은 것이다 옛 계명을 받았던 사람들이 그 계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잘못 이해하면 오해를 하게 되고 더 나아가면 이단이 된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은 신약이나 구약이나 같은데 히브리인들은 이것을 해석하기를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는 것으로 해석했다.
성경에는 원수를 갚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고 했는데(레19:18)
사람의 원수는 마귀뿐이고 사람은 원수가 될 수 없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을 뛰어 넘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니이까? 이런 질문 할 때
예수님께서 계명을 알지 않는가? 계명에 무엇이라 기록 되어 있는가? 하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였나이다. 대답을 하니까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다 하시고는 그렇게 행하라고 했을 때
그 율법학자가 그러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고 묻는다.
이때 예수님께서 네 이웃이 누구인지 이야기 하지 않고 강도 만난 자의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강도 만난 자는 우리 옆집의 사람도 아니고 나에게 유익이 될 사람도 아니고 좋은 친구도 아니다. 단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이처럼 율법이나 새 계명이나 같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인데 예수님의 해석과 율법학자의 해석이 다르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로마 병정을 알겠는가! 그러나 로마 병정도 이웃으로 본다. 자신을 못 박은 원수이고 충분히 미워할 악한 사람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기도 할 대상으로 보
는 것이 새 계명이고 또한 옛 계명이다. 원수도 사랑할 대상이라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해석 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끼리끼리 좋아하고 너무 뭉치게 되면 암 덩어리와 같이 또 누군가를 미워하고 해치게 된다.
예수님의 이웃의 해석은 우리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면 그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이웃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강도만난 자를 보고 제사장은 자신의 이웃이 아니라고 그냥 지나치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도와 줄 사람이라 생각하고 도와주고 끝까지 도와주는 모습을 이야기 하면서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고 질문하니까.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기 싫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사마리아지역을 지나치지도 않을 부정한 사람들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자라고 대답을 했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을 맺는다.
네 이웃 사랑을 네 몸 같이 하라는 해석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
이처럼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이나 차이가 없는데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라고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이 옛 계명에서 이미 들은 것인데 다시 새 계명을 언급하는 것은 계명을 잘못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개인의 악한 행위가 밉고 가슴 아플 수가 있다.
미군이 장갑차로 효순이와 미선이를 깔아 죽였는데 미군의 판결에서 전혀 아무 과실도 없는 무죄로 선고 하는 것은 너무 심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미군에게 가해자를 무죄로 판결해서야 되겠는가!
강아지를 깔아 죽였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데 아무런 혐의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고의성이 없는 운전부주의라 할지라도 그것은 업무상 과실로 살인죄는 적용이 되어 복역을 하다가 고의성이 없는 과실치사는 대개 몇 개월 후에 풀려 날수도 있다.
이렇게 살인죄를 적용하여 판결하는 것은 피해자의 감정적인 보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일정한 기간 동안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도피성으로 이미 성경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을 미군에서 무죄로 처리함으로 국민들이 촛불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악한 세력들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온 미국을 상대로 해서 반미 하면서 미워한다면 큰 손해를 입게 되므로 국민들과 언론이나 방송에서 지혜롭게 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감정에 치우쳐 행동한다면 낭패를 당하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해석한 율법학자들의 오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구절이 없는데 해석을 잘못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비극은 해석을 잘못한 오해로부터 비롯된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오해로 인한 비극이 시작 됨
원수를 미워 할 때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법 정신을 잘못 적용하여 원수 갚는 일을 계속 하게 되므로 성경이 주어진 본래의 뜻에서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새 하늘과 새 땅 갈 때 까지 인간 역사의 모든 비극은 오해로 야기된 것이다.
제 멋대로 곡해하고 오해하여 비극이 온다.
모든 비극은 오해로 부터이다. 의사전달이 잘못되어 오해가 된 것이다.
의사소통에서 보면 자기 생각을 더하여 생각함으로 오해 하게 된다.
“비극은 오해로 부터!”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모든 오해를 완전히 밝혀줄 참 빛이 있었다.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사람을 미워한다면 아직 빛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요한이 지금 쓰고 있는 내용이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지를 다섯 번이나 강조하고 있는데 기독교 진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 사람을 얻은 것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비=지도층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 당시 교회 지도층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데 영지주의에 가서 뭘 더 배울 것이라 생각하는가! 오늘날에도 신천지나 구원파들은 자기들에게 와야만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얼빠진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가 더 듣고 배울 것이 없다 이미 대초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다. 예수님도 하나님도 십자가도 부활도 모르는 불신자들은 배워야 되지만 이미 믿은 자는 악한 자를 이겼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귀를 이긴 증거가 뭐냐! 우리는 마귀와 씨름도 해보지 않았고 복싱도 레슬링도 해보지 않았지만 우리가 이겼다는 증거가 뭐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못 믿게 하지만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가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이미 이긴 것이니까 영지주의에게 가서 배울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다면 이미 마귀에게 이긴 줄 아셔야 한다.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이들아=초신자
이중으로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 우리가 신령한 어느 누구에게 가서 더 배울 것이 있는 줄 생각하고 기웃거리는 것은 위험하다. 어디 가서 안수 받겠다고 함부로 머리를 내밀면 안 된다. 엉터리가 많아서 안수하는 것도 위험하고 안수 받는 것도 위험하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야고보는 이런 것을 마귀적이라고 하면서 마귀를 좇아 온 것이라고 했다. 마귀는 세상의 있는 모든 것으로 유혹한다.
다단계 판매 7년 동안 하고 패가망신한 사람 다른 사람들이 암웨이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읽었는데
다단계가 곧 마귀의 단계이다. 다 단계로 가면 판매자도 죽을 지경이고 소비자는 보나마나 모든 단계마다 이익을 붙여주고 구매함으로 훨씬 비싸게 구입하게 되는 것은 뻔하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거래를 하도록 해야지 중간 단계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계급단계조직에 의해 이익을 붙여먹는 것은 생산자나 소비자가 모두 할 짓이 아닌 것은 뻔한 것인데 그런 것은 알바 아니고 자신의 일가친척 동기동창 이웃과 교회까지 줄만 닿는 모든 사람을 끌어들여서 고객으로 만들어 버리게 됨으로 지금은 그들과의 관계가 엉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속여가면서 자신의 조직으로 끌어들여서 활동하다가 인간관계를 망쳐버린 인생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게 됨
다단계 하는 사람은 자기와 관계되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이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암웨이의 수장인 리치디보스라는 사람은 유대인이고 프리메이슨이다.
천하에 악당들의 조직에 들어가서 우쭐거리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도시의 유수한 교회는 장로들이 앞장서서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
도시교회는 그런 조직이 어떤 경로로 거쳐서 손 뻗히지 않은 교회가 없다.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마귀에 속한 자는 교회에 함께 있을 수가 없다.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기독교의 진리는 단순함으로 새로운데(영지주의) 가서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아무것도 가르칠 필요 없고 아무것도 배울 필요 없으니까 주일학교 이런 교회 교육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엉터리는 이 책이 기록된 배경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기성교회 성도들이 신천지나 이만희 성서연구회에 빠지는 것은 옛날 오리게네스의 해석처럼 성경 내용을 영적으로 해석(영해)한다고 성경을 신비하고 오묘하게 비유로 해석함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동안 교회에서 참된 성경교육이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오는 것이다.
신령하고 신비한 지식을 전한다는 이단들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이지만 이미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훤히 밝혀졌고 새로운 계시나 말씀이 있다면 모두 잘못된 것이므로 속지 말아야 한다.
3장
요한 1서는 신학적이나 학문적으로 교리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영적 가치로 따진다면 로마서보다 교리적으로 비중이 있고 아주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신학이 기독교신학의 정점이라 생각하지만 요한의 신학이 기독교신학의 정점이라 생각한다.
요한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두 가지 세상이 있는데 하나는 마귀에 속한 세상이고 하나는 하나님께 속해있는 교회이다. 특별히 3장에는 세상과 교회가 대치되는 내용이 많다.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의 고귀한 삶을 알아주지 않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종교라는 것이 약해빠진 신경쇠약증 환자들이나 믿는 것이고
종교를 가지고 있는 않는 자신들은 합리적이고 담대하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줄 알고 기독교인들을 우습게 본다. 특히 한국은 더 무시당하는 것 같다.
외국의 경우 기독교 나라들이 대부분 잘살고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기 때문이고 과학문명이 발달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무시 하지 않는데 그러나 이슬람 사람들이 기독교를 나쁘게 생각하는 이유는 2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십자군전쟁 때 칼로서 자신들을 정복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기독교국가의 여성들의 차림(머리와 배꼽을 드러낸)에서 기독교에 대한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가 오늘날 세상 만민 앞에서 품위를 잃어가고 있다.
반면에 마귀가 오늘날 얼마나 품위 있는 기독교를 개발하든지 따라갈 수 없다. 예를들면 몰몬교(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굉장히 품위가 있다. 주위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몰몬교의 선교사들을 보면 베이지색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있고 단정한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경건의 표준처럼 보인다.
몰몬교의 세계본부는 미국의 유타주에 있는데 몰몬교회의 건물이 미국의 어느 교회보다 잘지은 건물로 굉장하다.
몰몬교가 자랑하는 것 하나가 성가대(Mormon Tabernacle Choir)인데 파이프오르간이 엄청크고 대원이 남녀 360명 정도 인데 세계에서 최고의 수준으로 너무 잘한다. 일반 성가대의 노래실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마귀의 전략 중에 귀를 정복하라! 눈을 정복하라! 마음을 정복하라! 마귀의 3대 강령이다.
귀를 정복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몰몬교 성가대의 찬양을 들 수 있겠다. 얼마나 아름다운 천상의 찬양처럼 들려서 도대체(십여년 듣다가) 어느 찬양대인지 알고 싶어 찾아봤는데 놀랍게도 Mormon Tabernacle Choir 였다. 전 미국 사람들이 그 음악에 매료되어 몰몬교가 이단이라고 말을 못할 정도이다. 사실 몰몬교는 사탄의 집단으로 프리메이슨이 만들었다.
오늘날 원불교의 경우도 얼마나 품위가 있는지... 까만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고 쪽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포교하러 다니는 모습이 기독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기독교는 세속화 되어 거룩한 모습이 전혀 볼 수 없다.
이처럼 사탄은 무당의 굿으로부터 시작해서 Mormon Tabernacle Choir 까지 다양하게 혼란스럽게 한다. 젊은이들의 귀를 장악하기 위해서 로큰롤이나 째즈 음악 전파하여 혼란스럽게 한다. 마귀는 음악의 천재이다. 미국의 마이클잭슨은 귀신이 충만한 사람이다. 선글라스를 벗으면 우리와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할 것이다. 제정신이 아니므로 그런 음악이 나와서 젊은이들을 껌벅 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 영을 받아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노래가 대개 비슷하다. 이 세상이라는 구조속에서 사탄은 기독교인을 세속화시켜 세상음악이나 째즈 음악에 기독교 가사를 붙혀서 우리의 영혼을 황폐화 하는데 오늘날 CCM 음악이 상당히 문제가 있다. 아프리카의 섹스 음악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째즈가 되고 그런 음악에 기독교적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Mormon Tabernacle Choir 보다 더 아름다운 찬양을 부를 수 있는 성가대를 만들어서 세계에 내놓을만한 찬양으로 듣는 사람이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품위 있는 찬양을 해야 한다.
악령의 방법이 얼마나 다양하냐 하면 교회는 세속화시켜서 품위를 잃게 만들고 세상의 이단 사이비를 아주 품위 있게 만들기 때문에 미국교회는 많이 흔들리고 사람들의 믿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우리가 부활 했을 때의 모습을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처럼 될 것으로 추측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상대하실 것이라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될 것이라 한다.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인 우리가 천국 갔을 때 우리의 모습이 추한 돼지 같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더 괴로울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변화시켜서 예수님처럼 될 것 같다.
지금도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러시아 지역에 가면 백러시아인들 중에는 정말 시험에 빠질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소녀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정말 아름답게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타락하게 되면서 아름다움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시험에 빠질 정도로 아름답다.
사람의 얼굴 구조라는 것이 별게 아닌데(하나씩 따져보면 별게 아님, 이마는 가죽이고 눈은 구멍이고 눈썹은 그냥 털이고 코도 입도 별게 아님) 어떻게 얼굴이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가! 입술이나 눈동자의 색감과 얼굴의 광채와 풍기는 인격이 조화를 이루면서 그런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인간이 타락하고 환경이 파괴되면서 아름다움이 많이 일그러진 모습이 이 정도라면 부활할 때는 아름다움의 본 모습대로 부활할 것이라 믿어지는데 그 때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 될 것으로 믿는다.
장차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처럼 될 같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모습이 갈수록 일그러지고 쇠하여지므로 낙심이 되지만 부활의 모습을 생각하면 소망이 있다.(얼굴이 못생겨도 장애가 있어도 키가 작아도 염려 말 것은 완전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명확하게 2부류 밖에 없고 중간은 없다.
하나님께 속했느냐 마귀에게 속했느냐 뿐이다 죄의 종이요, 독사의 자식들이요, 어둠의 자녀요 불법의 자식으로 결국은 지옥에 갈 사람과 천국에 갈 사람! 2부류 외에는 없다. 요한의 이야기는 흑이면 흑이고 백이면 백이지 그 중간 회색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 회괴망측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원불교 지도자와 수녀와 불교의 승려가 함께 부처님 앞에 가서 아홉 번 절하고 나무아미타불 아멘 하는 신문기사를 접하고 스크랩을 해 놓았다. 카톨릭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니까 그 모양이다.
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사람이 나쁜 일을 했을 때 세상에서 그 사람이 죄를 지은 것 자체만 가지고 고발하고 범죄 가볍고 무거운 정도를 따지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그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마귀에게 속하여 죄를 지었다는 죄의 행위보다 마귀에게 속한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범죄를 했다고 할지라도 마귀에게 속했다가 손을 씻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속하게 되면 마귀에게 속해서 지은 죄는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해 있으면서 크게 범죄 하지 않든지 오히려 착한 일을 하면 더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마귀에게 속해 있으면서 선하고 착한 일을 하면 하나님 없이 이만큼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이 드러나면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는 것이므로 더 나쁜 짓이다.
마귀에게 속해 있으면서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나게 되면 수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다.
성경에서는 행실보다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반대로 하나님께 속한다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헬라어에서는 확실히 나타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 단순하게 1회성이거나 고의성이 없는 실족하는 범죄는 예수 믿고도 지을 수 있지만
계획적이거나 계속적이고 고의적인 의도적인 죄는 헬라어에서는 구분이 되는데 이런 죄는 마귀에게 속하여 짓는 죄로써 심각하다.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고 착한 짓을 하면 더 미워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해도 세상은 우리를 미워한다. 성령과 악령이 서로 좋아 할 수 없다.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예수님께서도 직접 하신 말씀이다(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자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우리 수준에는 맞지 않고 불가능이라 생각 할지 모르나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처럼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양심의 거리낌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해진다.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기도의 응답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양심의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어떨 때는 기도를 해놓고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면 믿지 않는 경우가 있다. 베드로가 옥에서 풀려나서 문밖에 왔다는 소식을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제자들에게 전했을 때 조금 전까지 기도하던 제자들이 아이의 말을 믿지 않고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말라고 책망하는 모습을 본다.
에스라 구건물 증축하면서 12월에 벽돌을 쌓고 있는데 5m 정도 쌓은 그날 밤 일기예보에 전국 날씨가 영하권에 들어가는 한파가 온다는 예보를 듣고 날씨에 대하여 여간 기도 하지 않지만(평소 맑은 날은 좋은 날 비오면 더 좋은 날이라고 했기에) 그런데 5m 높이의 벽돌이 얼어서 다시 쌓게 되면 완공일이 늦어져서 1월 집회일정에도 차질이 생기고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날 걱정이 되어 아침 일찍 에스라 공사현장을 가면서 라디오를 켰는데 밤사이 전국이 영하권에 들어가고 이상하게 산청만 영상을 유지했다는 일기예보를 듣고는 그냥 눈물이 주루룩....
또 한 번은 에스라 신축현장에 온 마당에 레미콘 6대 분량의 깔아 놓았는데 일기예보에 그날 밤 중형태풍이 올라와 우리나라를 지나면서 200mm 정도의 많은 비를 뿌리고 지나 갈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 방송국에서 녹화를 하면서도 조바심이 나고 예전에 기도의 응답을 받았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또 염려가 되어 마음은 온통 태풍에 빼앗겨 빗방울이 굵어지는지 노심초사하다가 다음날 일찍 에스라에 가서 보니까 거기는 가랑비가 지나갔을 정도로 전혀 피해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님께 미안한지....(예전에 기도 응답 경험했으면 그냥 믿고 잠이나 푹 잘 것이지 가보기는 뭘 가 봐)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4장
1절에 6절까지는 3장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령하거난 신비한 것에 쉽게 빠져들어가는 경향이 있어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 악령에 이용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귀에서 계속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속살거리는 것은 대게 마귀의 장난이다.
성령은 우리가 인격적으로 싫어하면 강제로 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속에서 악한 생각, 미워하는 생각, 의심하는 생각이 계속되면 사탄에게 마음이 빼앗긴 상태이다.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는 방법으로 그 당시 영지주의 속했는지 하나님께 속했는지를 판가름 하는데 국한된 방법이다.(하나님께 속했는지 마귀에게 속했는지를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단순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요즘은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영지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육체가 된다는 것은 도무지 수용할 수 없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예수라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다고 주장한다.(새 신자가 들을 대는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리스도는 나가버리고 인간 예수만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영지주의 자들인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방법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요한이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은 이단의 방법이 너무 악한 쪽으로 혼란스럽게 비슷하게 함으로 영들을 분별하기 참으로 어렵다.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5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진리가 통하지 않을 때는 영적인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지금 하고 이Ts는 설교를 성당이나 절에서 하게 되면 영이 괴로워서 듣지 못한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살리는 것이고 사탄은 죽이는 것이다. 세상에서 습관적으로 죽인다 하는 소리를 예사로 하는데 우리들은 이런 것도 따라하면 안 된다. 악은 모양도 흉내도 따라하지 말아야 한다. 말과 표현은 헛말이라도 조심해야 한다. 성령도 말씀으로 역사하시듯 마귀도 말로서 역사한다. 마귀의 방법이 우선 말로서 유혹하던지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여 그 틈을 타서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에 입이 열려 있어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과는 교제를 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말을 조심해야 한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출 애굽 후 바벨론 포로까지 860년이고 말라기 까지는 1000년을 사랑 했지만 말라기서에 보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했나이까?” 하듯 전혀 사랑을 못 느끼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시험에 합격하고 모든 일이 잘되고 잘되는 것만 하나님의 사랑인줄 알고 있지만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독생자의 십자가 사랑) 사랑하신 사랑!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교회에서 미움과 다툼과 시기 질투 암투가 그치지 않는 것은 첫째로 잘못 가르친 목회자의 책임이고 잘못 배운 성도들에게 있다.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는 일단 사랑을 받아야만 사랑을 하게 될 것인데 교회가 사랑이 없으면 성령이 역사 할 수 없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는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줄 알면 우리도 남을 사랑할 수 있는데 계명을 지키는 것도 없고 하나님 사랑도 없고 형제 사랑하는 것도 없으면 전도가 되지 않으니까 할 수 있는 것은 싸움 외에는 할 것이 없다.
손과 마음과 관심과 힘을 밖으로 펼치지 않으면 안에서 싸움이 계속 되고 세월이 가도 바뀌지 않고 악령들이 뿌리를 박고 있다.
귀신들은 공동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심심해서 뭐하려 있겠나!) 언제나 교회에 와서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들어가 방해하고 싸우게 만든다.
작은 교회일지라도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꽤 큰 교회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교회가 있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진짜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 한 분이신 것과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바리세인들(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던 사람들)은 하나님 한분이신 것을 철저히 믿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한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기들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너희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 한다! 이는 귀신들도 그 정도는 믿고 떠든다고 말씀하시며 책망 하신다. 이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의 믿음이 진짜 믿음이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사랑하면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게 되므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세상에서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 예배를 자주 빠지고 죄를 짓다가 목회자를 만나게 되면 마음에 거리낌이 있어서 자꾸만 피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렵고 떨려서 감히 설 수가 없다. 하나님의 초청장을 받고도 갈 수가 없다.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처녀들이 담대한 것은 늑대 같은 남자를 믿고 어떻게 늑대 집으로 시집을 가느냐? 총각들은 처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 오니까 망정이지 처녀 집으로 장가를 가라고 한다면 대부분 가지 못할 것이다. 두려움이 없고 담대해 지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자신의 일생을 맡길 수 있게 된다.
어떤 목사님이 평소 남자를 전혀 가까이 하지 않던 순전한 처녀가 겨우 혼인을 하게 된 신부에게 결혼식 축전을 보냈는데 우체국에 전화를 하면서 요한 1서 4장 18절을 읽어보라는 전보를 부탁했는데 우체국 직원이 요한 1서가 있는 것은 모르고 요한복음인 줄 알고 요한복음 4장 18절을 읽으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요4:18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실상인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결코 그 형상인 사람을 결코 미워할 수 없다. 형상은 보이고 실상은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형상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실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한다면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뒤에 하더라도 성도끼리 사랑하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서로 반목 시기 질투하는 관계가 되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있겠는가! 예배당 다닌다고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미워하고 이간질 하고 시기 질투 하는 사람은 단지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하면서 마귀의 심부름 하기 위해 교회 다닐 뿐이지 참 믿음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점검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종 점검은 요한1서이다.
요한1서야말로 창세기부터 여기까지 믿은 우리의 믿음을 최종 점검 할 수 있는 마지막 표준이 사랑하고 있느냐? 미워하고 있느냐? 하나님께 속해 있느냐? 마귀에게 속해 있느냐? 의를 행하고 있느냐 죄를 짓고 있느냐? 빛의 자녀인가? 어둠의 자식인가? 천국 갈 사람인가? 지옥 갈 사람인가? 확실히 드러나는 기준이 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요한에게는 흑이면 흑이고 백이면 백이지 중간지대가 없다. 회색지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사랑을 전파하는 모두가 되어야 한다.
5장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한께서 왜 이런 말씀을 자꾸 하는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을 알지 못하면 의아스럽게 생각 되지만 이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이 있다.
그 배경은 이 책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항상 생각하며 읽어야 하는데
그 당시에 이단 사이비였던 영지주의 자들의 주장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는 예수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예수라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가 그 속으로 들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는 예수에게 그리스도가 들어와 있다가 예수가 십자가 못 박힐 때 그리스도는 미리 빠져나가버리고 예수만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영적이 존재이고 예수는 그냥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단의 주장에 대하여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라고 강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갔다가 나갔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고 있다.
요한의 말씀은 영지주의와 큰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는 오늘날에는 그 당시와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너무 멀리 있기에 실감이 안 나지만 초대교회는 보통문제가 아니었고 영지주의 주장이 훨씬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쉬웠다.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당시에 영지주의가 더욱 설득력이 있었고 또 지식인들 사이에도 예수님이 참사람이고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설명 할 때 예수라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라는 영이 들어갔다 나갔다가 하는 주장이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영지주의 자들은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 육체는 본래 악한 것이기 때문에 개선되는 것은 위선이고 불가능함으로 육체의 소욕을 실컷 들어주면 더 이상 요구를 하지 않으므로 육체가 원하는 것을 실컷 하게 하면 된다고 하면서 절제를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유체가 밥을 먹고 싶어 하면 밥을 먹여 주면 되고 성적욕구가 일어나면 채워주면 욕구가 만족되므로 모든 육체의 욕구를 채워 주라고 하지만 성경은 육체의 욕망은 절제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정욕을 제어 하라는 이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영지주의와 같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나? 더운 날이라고 냉면 한 그릇 사드릴 수가 있는가? 춥다고 양복 한 벌을 사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청년들이 부르는 “주님 사랑해요~ ♬”를 찬양으로 반복하는데 말로만 사랑해요 하는 것이 무슨 사랑이냐?
다른 방법은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또 하나님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예배당 안에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게 아니고 예수님 말씀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아버지 사랑 안에 거하는 것처럼 너희도 네 계명을 지키면 내 안에 거하리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바리세인처럼 외식(겉으로 사랑하는 척)하는 자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에 나오는 말씀처럼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자이다
율법과 계명을 옳은 줄 알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것인 줄 알고 즐거워하며 지키는 것이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무거운 것인 줄 알고 바리세인들이나 서기관 율법주의자들은 그 율법과 계명을 굉장히 무겁게 하고 어렵게 한다.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이 613조항이나 되는데 그것을 지키기는 고사하고 외우기라도 하겠나!
그러나 예수님께서 쉽게 실천하는 방법을 말씀 하셨는데 아주 쉽고 간단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계명이 저절로 우리 삶에 따라 오게 되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남을 해칠 마음이 없으므로 그 많은 계명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이웃 사랑을 제몸 갔이 하는 사람은 율법 613조항을 모두 알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 안에 거하고 또 사랑 할 때 성령이 우리를 인도 하셔서 이제는 종이에 쓰거나 돌비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심겨진 성령의 법으로 인도를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싫어하고 귀찮게 여기고 부담스러워 한다면 매일 예배당 안에 있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사랑하거나 믿음이라 할 수 없다.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2~3가지를 근거로 믿게 되는데
첫째는 사실이기 때문에 믿게 되고 사실을 직접 목도하지 못할지라도
둘째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지리산에 반달곰이 있는지 없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반달곰의 배설물이나 나무를 긁은 자국과 같은 반달곰의 흔적이 증거가 되므로 보지는 못했지만 믿게 된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대체로 증거를 통해 믿는데 요한은 여기서 증거가 3가지 정도 된다는 것이다.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물은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여온 음성(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쁘하는 자)을 뜻하는 것이고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
또 이것을 증거하는 분이 성령이다
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성령과 물과 피가 예수님을 증거한다.
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진 음성이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이다.
세상 재판관이 죄인을 판결 할 때 직접 사건현장에서 목격하지 못했지만 증인들의 증거를 통해 판결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증거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증거는 우죽하겠는가!
하나님의 증거는 곧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인데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는다면 세상의 무슨 증거가 있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은 5장 39절에 성경전체는 곧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설교한다고 하지 않고 주의 말씀을 증거 한다거나 하나님 말씀으로 증거 한다고 표현 하였다.
설교가 뭐냐 하면 믿어지도록 증거를 자꾸 들려주는 것이다. 설교라는 표현 보다 “말씀 증거”라는 표현이 있었다.
증거는 곧 2가지인데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이다
일반계시는 우주만물 전체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증거이고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즉, 하나님의 피조물 자체가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고 또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증거이다.
우리가 훌륭한 사람을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남긴 작품(음악, 미술, 책)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작품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는데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이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을 몰라서 믿지 못했다고 절대로 핑계하지 못한다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거기다가 우리 같은 경우는 특별계시인 성경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증거를 세분화하여 7가지로 구분하였다
1. 역사가 하나님을 증거한다.
현실을 보면 항상 악한 자가 이기는 것 같지만 역사를 보면 악한 자는 망하고 정의로운 자가 세상을 차지하고 또 강한 자가 세상을 차지 할 것 같은데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고 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또 부분적으로는 잘 되지 않을 것 같지만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또다시 일어나고 의인의 자식들이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이처럼 역사를 보면 어떤 법칙이 있는데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데로 거둔다는 역사 속에 교훈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가 곧 하나님의 음성처럼 우리에게 비춰지게 된다.
2. 성경이 증거 한다.
성경은 역사를 증거하고 역사가 성경을 증거 하는 것으로 모두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1년 8개월 동안 극동방송에서 성경과 역사를 강의 했는데 듣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진짜 역사적인 사실이냐고 반문하였다. 성경은 그냥 신화적으로 생각하고 그냥 교훈이 담겨 있는 책으로 생각하고 역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책으로 생각 했다가 성경에 있는 모든 사건들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을 증거 하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을 역사에 나오는 동일 인물로 설명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것이다.
3.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을 증거 한다.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한 형태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구체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게 나타나신 분, 예수님이 곧 하나님 말씀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3가지로 나타낸다. ①기록된 말씀 ②예수그리도라는 말씀 ③기록된 말씀에서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선포되는 말씀
4. 예언자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증거 한다.
예언자들의 예언하고 성취되는 것이 성경과 역사를 통해 반복 된다.
우리사람은 한치 앞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없지만 예언자들은 수년에서 수천년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미리 내다보고 예언하고 이루어지는데
이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은 이 일이 이루어질 때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예언자들도 예수님께서도 말씀하고 있다.
5. 이적과 기사와 표적이 하나님을 증거 한다.
이적을 보고 믿는 것은 썩 좋은 신앙이 아니지만 대개 무식하거나 도통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기적을 행하기도 한다.
대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이적과 기적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이세벨시대의 극악무도한 그 시대에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이적이 많이 일어났고 세상이 끝장 날 뻔 했던 예수님의 사도들 시대에 이적이 많이 일어났다.
좋은 신앙은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고 말씀을 듣고 믿지 않고 이적을 보고도 도무지 믿지 않는 악한 시대에 이적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적을 보고 믿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니다.
하지만 그 따르는 표적으로 그의 말씀을 증거 하셨다고 하시니 표적도 하나의 증거이다
6. 우주의 질서와 법칙이 하나님을 증거한다.
7.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을 증거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이 즐겨 하던 말인데 일평생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증거이다.
신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냉철하게 생각하면서 통째로 속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안 계시는데 하는 의심도 해보고 따져보는 시간이 있는데 조직신학을 배우게 되면서 우리의 생각을 중구난방으로 무질서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질서 있게 효율적으로 논리적으로 하고자 생각을 체계화 하여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서 신의 인식론 신의 존재 증명을 통해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를 놓고 논의하는 학문에서 5가지 정도를 요약한다.
1) 우주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을 첫째 증거로 가장 많이 인용하는 증거로 우주가 어떻게 존재 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우주에 질서와 조화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것은 절대로 우연일 수 없다. 모든 우주의 제1 원인자로서 하나님이 계신다고 증거한다.
2) 존재론적 논증
어떤 존재(실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서 그 개념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철학자인 유명한 아놀드 토인비가 온 세계를 여행을 해 보니까 사람들이 국가도 정부도 없이 사는 사람들은 많이 있어도 신이 없이 사는 사람은 없더라는 것이다. 혼자서 살든지 몇 사람이 모여 살든지 부족을 이루고 살던지 큰 나라 대 제국을 이루고 살든지 사람 사는 곳에는 어떤 신이든지 신이 있더라는 것이다.
만약에 신이 참으로 없다면 신이 있다거나 없다는 말도 존재 하지 않을 것이고 무신론자라고 해도 무신론 의식 속에 이미 신이 있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신과 씨름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나간 사람 외에는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의 의식 속에는 신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3)역사적 논증
4)도덕론적 논증
5)목적론적 논증
어떤 사물은 존재의 목적이 있다. 예를 들면 곡식이 열매를 맺는 목적이 분명있가 그 곡식을 닭이 쪼아 먹고 닭의 존재 목적은 알을 낳는 것이고 알을 먹은 사람은 목적이 없는가!
곡식은 닭을 위해 닭은 사람을 위해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사람위에 목적이 없는가? 모든 만물은 목적이 있는데 자기 자신만 목적이 아니고 항상 자신의 존재 목적이 그 위에 또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볼 때 최종의 목적이 되는 분이 있지 않겠나! 우주만물의 보이는 모든 것의 궁극적 마지막 목적이 되는 그분이 신이 아니겠는가!
지금부터 2400여년전에 아리스토텔레스란 철학자가 있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4가지의 원인 찾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그 4가지의 원인은
1)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진료(물질재료)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2) 우주 만물을 디자인한 원인이 있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재료)들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디자인 된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디자인한 형상의 최고가 미(美)이다. 철학의 한부분이 형이상학과 미학이 있는데 미학은 형상의 원인이다. 누군가가 디자인을 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으로 장미꽃의 그 아름다움은 분명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진료(재료) 뿐 아니라 형사의 원인
3) 운동의 원인
어떤 물체를 가만히 놔 둔 것은 외부에서 힘을 가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를 볼 때 모든 천체가 움직이고 모든 우주 만물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가만히 있는 물체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처음에 그 운동을 할 수 있게 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의 군더더기를 벗기고 생각 참 알맹이만 가지고 진리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노력에 의해 이런 논리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무조건 믿습니다만 외칠 것이 아니라 증거를 통해 확실한 증거를 붙잡고 믿어야 흔들리지 않는다.
사실이 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고 무조건 믿는 것이 미신이다 놀랍게도 교회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성경도 읽어보지 않고 역사도 모르고 논리적인 생각도 해보지 않고 그냥 무조건 믿게 되면 미신처럼 된다.
사실이 있고 증거도 있는데 믿지 않는 것이 불신앙이다.
사실이고 증거가 있는 것을 붙잡고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없는 자는 목숨만 붙어있을 뿐이지 생명은 없다.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영지주의 이단에게 가서 배워야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바르게 믿는 우리에게 이미 영생이 있으므로 영지주의에게 끼웃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사망에 이르는 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회방하는 죄(민수기15:30 )
성령을 회방하는 죄(마태복음12:3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끝까지 부인하는 자(영지주의)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자신은 용서 받을 죄가 없다고 생각)
이처럼 어떤 죄는 용서 받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가 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요한2서
요한2서를 기록할 당시는 이단이 너무 창궐하여 모이는 곳마다 이단 사이비가 침투해서 교회를 어지럽힐까봐 노심초사 하면서 100살에 가까운 요한 사도를 마음에 그려 볼 수 있다.
여기에 또 다른 한 면을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부녀가 자신의 집을 개방해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 같다. 어느 교회인지 소개도 없고 아직은 큰 모임도 아닌 소규모 모임인데 초대교회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출발한다. 지금도 교회가 개척 될 때 열심 있는 가정에서 처음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은 도시에서 개척하면 교회당을 짓던지 홀을 빌려서 교회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 보면 네 집에 있는 교회라는 기록이 있다.
1장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가정에서 처음 교회를 시작하는 부인의 남편은 돌아가신 것 같고 자녀들도 믿음 안에서 잘 자라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거룩한 가정이다.
왜 이 가정에 이런 편지를 쓰게 된 이유를 자세히 밝히지 않지만 맨 끝에 보면(13절)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한다고 되어 있다.
이 편지의 수신자인 부녀의 여형제의 자녀도 순회전도를 하며 다니다가 요한에게 와서 자기 이모와 이종사촌들이 이단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온 것 같다.
요한의 경우는 다른 모든 사도는 순교하여 세상에는 자신 혼자 남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들을 훼방하며 덤비는 이단을 혼자서 지키기 위해 애쓰는 노 사도에게 부녀가 가정을 개방하여 성도들의 모임이 있는데 부녀와 그 자녀들이 아버지의 계명대로 실천하고 있는 소식은 큰 위로가 되고 기쁘고 감사해서 이런 편지를 쓰고 있다.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성도의 교재가 서로에게 통하는 진리 때문에 마음이 통하고 사랑하게 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될 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진리 안에 있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는다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 수 없다. 진리를 따라 행할 때 사랑을 행할 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임하게 된다.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너의 자녀가 부녀의 태에서 나온 자식인지 그 모임에서 길러진 자녀인지는 확실치 않다.
요한은 자신의 제자를 자녀라고 말하기도 함으로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요한의 표어처럼 서로 사랑하자. 영어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자라고 되어 있다.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해석을 많이 하여 계명에서 벗어나지 말고(영지주의) 처음부터 들었던 그 계명 가운데 거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지금도 신학자나 많은 교수들이 성경에서 벗어난 소리를 많이 한다. 하나님 교훈 안에 있지 않고 말씀보다 위에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말씀은 단순 한 것이고(진리는 단순한 것이다) 연구를 해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도 들으면 알 수 있고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성경이다.
반면에 교만한 사람은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도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린 아이도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진리인데 박사도 믿지 못하는 것이 성경 말씀이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하여 지나쳐 교훈을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사도들이 가르치고 일한 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사도 바울의 경우도 기록된 말씀밖에 넘어 서지 말라고 한다. 요즘도 넘어 서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미치지도 못하고 넘어 가버리면 그 알맹이는 놓치는 것이다. 참 진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건방져서 넘어 서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위험하다.
미치지도 못하고 넘어서지도 못하면 안 되고 항상 진리 안에 있어야 한다.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이단 사이비를 대하는 방법이다.
미국사람들은 자신들이 편협하다는 소리를 도무지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미국사람들인 자신들이 관대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온갖 사이비를 용납하게 되어 미국의 기독교가 이상하게 되었다.
영국국교인 기독교 영국성공회(Anglican Church)라는 교회가 있는데 캐나다에서 동성연애자에게 주교(신부 위에 직책이므로 목사 정도가 아니고 노회장 정도)에게 안수를 했다. 미국의 장로교에서는 동성연애자에게 안수 하는 것이 부결 되었다고 하는데 미국 법은 동성연애자들에게 어떤 차별도 되지 않는다는 법이 통과 되었다.
이단이 제일 많이 생겨난 나라가 미국과 한국이다. 이단 들이 창궐하는 것은 살아 있는 교회가 있기 때문에 이단이 나오는 것이다. 염려스러운 것은 앞으로 중국에서 이단이 가장 많이 나올 것 같다.
앞으로는 중국 범사에 일등을 할 것이다. 인구도 기독교인도 이단도 제일 많다.
이단이 창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통전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단을 대적하고 연구하려고 하지만 이단들이 신상품을 계속적으로 너무 많이 만들 내기 때문에 이단은 많고 인생은 짧아서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이단 연구하는 것보다 정통하나를 똑 바르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 함
이단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끼웃거리다 이단에 넘어갈 수도 있으므로 위험하다. 일반 성도들이 신학이나 이단연구를 하지 않았으므로 대적하면 백전백패이다. 이단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상대도 하지 말라고 한다.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이단들이 찾아오면 당신을 만나기 위해 오래토록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목회자에게 데리고 간다.
이단이 찾아 왔을 때 나름대로 터득한 것은 이단들이 묻는 말에 절대로 대답을 하지 말고 예, 그 점에 대하여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면서 모든 질문을 계속 되돌려 준다. 그런 뒤에 가려고 하면 이단들이 대답 못할 질문을 던진다.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연세가 많은 요한의 자세가 편지만 쓰는 것이 아니라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고 만나는 이유도 너희의 기쁨을 주기 위해서다. 남을 기쁘게 하는 삶!
13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우리가 꼭 주의 할 것은 이젠 이단에만 빠지지 않으면 된다. 지나쳐서 이 성경 말씀 외에 더 신령하고 확실한 것이 없는가 하여 교훈을 넘어서고 진리를 지나쳐서 이단에 빠지지 말고 끝까지 진리 안에 거하여 우리와 우리 선배들의 수고를 잃지 말고 주의 날에 온전한 상급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요한3서
요한3서는 요한2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편지이다. 수신자는 가이오이다.
그 때는 상주하는 교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어떤 성도에게 쓴 편지라고 볼 수 있다. 사도요한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참 감사하면서 당부하는 편지를 쓰고 있다.
그 당시 교회가 많았으므로 각 교회에 전달 된 이런 종류의 사도 요한의 편지가 많이 있었을 것인데 보존 된 것이 이것뿐이다.
1장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됨은 3절에 나오는 진리 안에서 행한 것
진리 안에서 행한 것은 순회 전도자를 잘 대접했다는 것으로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이 계명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진리 안에 행하는 것이 곧 영혼이 잘됨 같다.
요한의 말씀을 에매하고 흐릿한 것이 없고 명쾌하다.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6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저희=순회전도자
7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그 당시 교회는 많이 개척되는데 교역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교회가 대형화 할 건물을 지을 여력도 없고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드러나게 예배당을 지어서 집회를 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소규모의 가정단위로 교회가 수 없이 많이 늘어나게 되니까 교역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순회전도자 형식으로 사역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이 안정되지 못함
한국 교회도 초창기에는 목회자가 많은 교회를 돌아보는 시기가 있었다.
성도들은 열심히 개척하는데 교역자가 없다. 박해시대에 교역자가 되면 순교를 각오해야 하고 또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덕과 인격이 갖춰져야 되므로 교역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순회전도자는 교회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8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잘 살게 되면서 교회 강사를 모시려는 사람도 없고 남의 집에 가려는 강사도 점점 없어져 가는 것이 아쉽다.
마10:40~ 전도자를 파송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어느 시대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파송 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 옛날에는 이런 말씀을 똑바로 가르쳤기 때문에 이런 예절이 잘 지켜졌다.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람을 돕는 것은 그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일이므로 함께 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자신이 최고이어야 되는 사람이 있는데 남보다 열심히 해서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못 견디어 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고의적으로 지속적으로 계획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출교 시켜버린다 이것은 사회법정에서 사형에 해당 된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권징을 하지도 않고 권징이 힘을 잃게 되었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악한 것은 대부분 악령이 들어가서 행하는 것이므로 악령이 이사를 가지 않는 동안은 그 뿌리가 오래 가고 그 사람이 죽으면 또 다른 사람에게 들어감으로 악한 자를 본받는 자가 끊어지지 않는다.
12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데메드리오는 아마 이 편지를 가지고 교회를 돌아보기 위해 출발하는 사람 같다.
13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14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면대하여 말하리라
연세가 많은 사도 요한은 자동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걸어서 먼 거리를 가고자 하는 열정과 수고가 대단하다.
15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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