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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못골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연못골
광산 김씨 사계 가문의 다섯 가지 자랑!
인품·학문·덕행 산물… 문묘배향 경사 대제학 7인· 4대 5불천위· 왕후배출 등
다섯 가지 자랑 !
광산김씨 김장생가문은 다섯 가지 자랑거리가 있다.
첫째는 김장생 김집 부자의 문묘배향을 들을 수 있다.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문묘는 태조 7년에 건립되어 오늘에 이른 성균관 대성전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장생 선생이 문묘 배향된 후 아들 김집이 문묘에 배향되는 경사가 생겼다.
이 같은 경사는 김장생 부자가 이룬 ‘인품, 학문, 덕행’의 산물로 평가 됐다.
둘째, 7인의 대제학을 배출이다.
조선의 대제학은 오늘날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의 지위에다 서울대학교 총장의 명예를 보태고 그 위에 국무총리의 관록을 얹어 놓을
정도의 영광스런 자리다.
이와 같은 광영의 자리에 오른 7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가문은 조선후기 문벌을 통틀어 김장생 가문이 으뜸이다.
셋째 4대 5불천위, 정려 7명, 종묘배향 2명, 공신 2명, 3대 문과장원(전체로는 사계 6인, 월사 5인)등의 기록이다.
이것은 대제학 4개 가문에서 사계 사계가문이 최고의 기록을 낸 항목들이다.
상신과 문과 급제 숫자에서는 순위가 하위이지만 불천위, 정려, 종묘배향 등 값지고 명예로운 분야서는 사계가문이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넷째는 왕후를 배출했음이다.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가 부원군으로 책봉되고 대제학에 병조판서를 거쳐 장신에 보사공신 1등 공신으로 훈봉 되신 후
불천위가 되었다.
왕후의 삼촌 김만중도 효행과 덕망이 높은 학자로서 대제학에 오르게 됐으며 종묘에 배향되는 영광에 이어 정려를 하사 받았다.
김만기의 장자 김진구는 형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에 오른 후 예조판서에 오른다.
게다가 왕후의 조카 김양택과 김춘택 둘 다 불천위의 은전을 받았으며, 왕후의 종손자 김양택은 영의정에 대제학을,
왕후의 백부 김익희는 대제학에 이조판서를, 왕후의 숙부 김익훈은 장신에 보사공신 2등공신이다.
다섯째 자랑은 김장생의 제자들이다.
맹자에게 기쁨이 있다면 천하의 영재를 가르치는 것이라 했다.
그 기쁨을 누린 이가 김장생 선생이다.
그의 제자들은 뛰어나고 화려하기로 조선조에 으뜸이다.
조선조 문중 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이다.
이 기록은 한양의 권문세가들이 누렸던 영광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한양문벌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경지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협의의 의미로 보면 광산김씨의 영광이요 자랑이라 할 것이나 이를 광의에 의미로 보면 조선의 유교사회가 낳은 왕도정치의
치적으로 높임 받고 있다.
7인의 대제학
조선조에서 대제학이란 직책은 모든 선바가 선망하는 대상이다.
대제학은 정 1품인 상신보다 낮은 정이품의 직책이다.
그러나 대제학은 학문과 도덕으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대제학이 배출되면 당대는 물론 그 후손들도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고 한다.
대제학은 조선시대 꽃이라 할 수 있으며 영의정이 부러워하는 벼슬로 “3대가 선을 베풀어야만 대제학 한명을 배출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자리로 여겼다.
대제학의 별칭은 문형이다.
문형은 즉 홍문관, 예문관의 최고 책임자로서 당대의 관 학계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자리다.
문형의 임기는 종신이다.
문형의 임기는 반듯이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하며, 이를 삼상신, 좌우찬성, 좌우참판, 육조판서 등이 모여 권점하여 결정한다.
권점이란 후보자의 이름아래 점을 찍는 것으로 지금의 비밀투표와 같다.
광산김씨 사계 가문서 배출한 7인의 대제학은 김익희, 김만기, 김만중, 김진규, 김양택, 김상현, 김영수이다.
1. 김익희는 반의 아들이며 익겸의 형이다.
김익희는 1633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 대사성, 부제학을 거쳐 대제학에 이어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냈다.
2. 김만중은 해평 윤씨 둘째 아들 즉 김익겸의 유복자로서 젖이 떨어지기 전에 글을 배웠고 영특하고 숙성하여 14세에 초시에 합격했을
뿐 아니라, 16세에 진사시에서 장원했다.
이후1665년 문과 정시에서도 장원하여 정언, 지평에 이어 1671년에 경기를 비롯하여 삼남어사, 동부승지, 예조참의, 공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친 후 대제학에 오르게 된다.
3. 김영수는 3대 대제학 (만기, 진규, 양택,)을 배출한 김만기의 맏아들 진구의 후손이다.
영수는 춘택의 후손으로 1829년에 태어나 1870년 문과에 급제, 대사성, 이조참의, 강화부유사, 이조참판 등을 거쳐 예조, 이조, 병조,
공조판서 등을 지내다 1892년 홍문관 대제학에 이어, 1896년에 의정부 찬성에 올랐다.
공은 청렴하고 신중하며 명망이 높았으며 시호는 문헌, 호는 미당, 하정이다.
하정이라는 호는 임금이 손수 써서 하사 했다 한다.
4. 김상현은 충헌공 익훈의 후손이며 재곤의 아들이다.
1811년에 태어났으며 김매순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이조참의, 승지, 대사성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양관제학, 도총관, 공조와 예조의 판서, 경기도와 평안도 관찰사, 우참찬 등을 지내고 대제학에 이르렀다.
그 뒤 판돈녕부사를 지내고 봉조하가 됐으며 시호는 문헌이다.
5. 김만기는 김장생의 증손자이며 김익겸의 아들이다.
호는 서석 혹은 정관재라 한다. 만기는 어머니 해평 윤씨의 품에 안기어 폐가로 돌아와 삼촌 익희에게 글을 배우다가 우암 송시열
문화에 돌아가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만기는 태도가 의젓했으며 사리에 밝고 심성이 너그러웠다,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의 충의정신을 배우고 스승을 통해 대대로 내려오는 학문을 이어받았다.
1653년 문과에 급제, 정언, 교리 등을 지냈으며,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 복상문제로 논쟁이 있을 때 기년 설을 주장,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 윤선도와 맞섰다.
김만기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의동 별궁에 들어갔고 그 뒤 왕세빈으로 책봉된다.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등극함으로서 김만기의 사위가 조선 19대 왕위에 오른다.
병조판서에 있던 김만기는 숙종이 왕위에 오르므로 광성부원군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와 총융사를 겸하여 병권을 거머쥠으로서
13세의 소년왕의 우익이 됐다.
이후 김수항의 천거로 대제학이 됐으며 1680년 경신환국 때 훈련대장으로 끝까지 남인과 맞섰다.
그러나 불행히도 따님이신 왕비 김씨가 같은 해에 천연두를 앓다가 8일 만에 19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남인의 거두 허견이 복선군을 임금으로 세우려한다는 ‘삼복옥사’가 터졌다.
김만기는 이 사건을 다스려 보사공신 1등에 책록 된다.
그러나 기사환국이 일어남으로서 노론의 핵심인물이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 됐으나 나중에 복직되고 현종에 묘향에
배향되었으며 시효는 문충이다.
6. 김진규는 만기의 아들이며 호조판서 진구의 동생이고 인경왕후의 오빠이다.
진규는 1658년에 태어나 1716년에 별세했다.
송시열 문화에서 수업하여 생원시 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서도 장원했다.
이조좌랑 재임 시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됐으나.
갑술옥사 이후 지평으로 기용된 이듬해 남구만의 탄핵을 받아 삭직됐다.
1699년 동부승지로 스승 송시열을 배반한 윤증을 공격하여 소론과 대립하게 된다.
1706년 병조참의에 이르렀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유배 됐다가 2년후 에 풀려나 대제학, 예조판서를 지내고 좌참찬에 이른다.
7. 김양택은 진규의 아들로서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서도 장원한 후 대사성, 이조참의를 거쳐 양관 대제학을 지낸 뒤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이른다. 시호는 문간이다.
사계의 4대 불천위
광산 김문의 김익겸의 자손에 불천위가 다섯이다.
김익겸, 김만기, 김만중 3부자가 불천위 즉 부조에 은전을 받았으며 김만기의 손자 다섯 중에서 춘택, 운택이 불천위이다.
3대 대제학 가문 중 대구서씨 약봉서성가문은 불천위가 서성 한사람이며, 전주이씨 백강 이 경여 가문은 이 이명, 이 건명, 2인이며,
연안이씨 월사 이 정귀 가문은 이 일상, 이 천보, 이 시수 3인이다.
이에 비해 광산김씨 김익겸의 집에서 4대에 걸쳐 5인의 불천위가 나온 것은 대단한 기록이며 광영인 것이다.
불천위는 불천지위 (不遷之位)의 준말이다.
불천지위는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를 왕이 명하여 자손이 있는 한 영구히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을 말한다.
이것을 부조묘라고도 한다.
본래 4대가 넘는 신위는 사당에서 꺼내어 묻어버리기 때문에 어명 불천위는 흔하지 않으므로 대단한 광영으로 여겼다.
춘택 · 운택의 불천지위
김춘택은 만기의 손자이며 진구의 아들이다. 춘택은 호가 북헌이다.
북헌 춘택은 훈신의 자제를 우대하는 전례에 따라 대호군에 임명됐으며 1689년 기사환국 때 유배됐다.
이후 갑술옥사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등용 됐으나 인현왕후의 복위를 은밀히 도운 사실이 들어나 소론의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된다.
1706년 세자(경종)를 모해 하려 한다는 혐의가 가중되어 제주에 안치됐다가 후에 협의가 없음이 증명되어 1886년 경연의 자리에서
충신으로 공덕을 기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광녕군에 봉해졌을 뿐 아니라 부조의 은전이 내려졌다.
시호는 충문 이다. 김운택은 춘택의 동생이다.
1704년 문과에 급제한 김운택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자상하며 문예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1717년 평안도 감진어사로 나갔다온 후 부제학을 거쳐 호조와 형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경종의 병이 있어 저사(儲嗣:왕세자)가
없었다.
이에 김운택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동생 민택과 함께 이정소에게 저사세우기를 청하도록 권면했다.
이정소가 상소하자 경종이 이를 받아 들였다.
또한 노론의 4 대신들이 경종과 대비에게 저사를 세울 것을 청하였으며, 이에 경종은 대전에 나와서 대비의 명을 전하며
왕세제(영조)를 세웠으며 이는 김운택 형제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 했다.
그러나 소론의 반대로 신임사화가 일어나고 목호룡이 무옥을 크게 일으키자, 1722년(경종 임인) 김운택을 영변 현에, 김민택을
선천부에, 김조택을 창성부에 귀양 보내게 된다.
이후 목호룡의 무고에 의한 반역 도모 죄로 김운택이 체포되어 혹형을 받다가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때 나이가 50세였다.
이후 영조가 원년에 하교하기를 “적신이 임금을 속여 나라의 권병(權柄:권력으로 사람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힘이나 지위)을
마음대로 휘둘러 선인(善人)과 양사(良士)들을 많이 죽였으니, 그 칼날의 참독함을 내가 매우 가엾게 여긴다,
그들을 모두 복관시키라”고 명령함으로서 비로소 김운택이 복관되어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 받았다.
정조 3년 서기 1779년 3월15일 도승지 홍국영이 아뢰기를 “김운택 등은 모두 깨끗한 지조와 훌륭한 명망을 지닌 자로서 자신의 포부를
시행하지 못한 채 신임사회 때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실로 착한 무리들이 다함께 애달파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점입니다.
그 말에 대하여 말하면 사대신에게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선조(先朝)가 이미 증직 하셨지만 미쳐 시호를 내려주지 못했으니 이두사람에게 응당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청원함으로. 이에 정조께서 하교하기를 ‘충청’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사계 가문의 특성
가문의 성향은 관조와 파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관조를 비롯한 파조의 성격과 인생 역정이 그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파조의 성격이 강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사계 김장생, 약봉 서성, 월사 이 정귀 이 세 사람은 똑같이 경서를 바탕으로 성리학으로 다듬은 당대에 거목들이다.
이들은 조선유교를 통해 자양분을 흡수, 조선사에 찬란한 문벌을 꽃피운 각 문벌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각자 개성이 특별하여 각기 특성이 다른 면을 갖고 있다,
사계는 명문 거벌에 군림하는 종조(宗祖)라 할 수 있으며, 약봉은 실학을 중시하는 재상이라 할 수 있고, 월사는 문학에 조예가 깊은
도학 문장가라 할 수 있다.
약봉은 자신이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아들하나는 우의정에, 또 다른 하나는 임금의 사위라는 화려한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월사는 자신이 우의정에 대제학, 아들과 손자가 내리 대제학의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사계는 참판이라는 아경급 벼슬에, 아들과 손자에 이르기까지 상신하나 내지 못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최고의 명문으로
기호학파의 종장(宗匠)이 되어 그 권위와 명예가 드높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인물의 비범함을 알 수 있다.
광산김씨의 노론 선봉에선 인물들은 맹렬했다.
이 가문은 문묘배향공신과 왕후를 낸 집으로서 자긍심이 높아 종통에 도전 하거나 저항하는 무리를 용납하지 않는 권위의식 또한
높았다.
김만기는 남인의 허적의 서자 견의 역모 사건을 다시려 보사공신 1등에 책록에 올랐으며, 김익훈, 김춘택, 김진구는 김석주와 함께
남인을 타도하며 훈척의 권세를 휘둘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만중이 동부승지로 예송에 적극 참여함으로서 삭탈관직 당하게 된다.
이들은 대개 노론의 중추세력으로서, 남인과 소론 등은 반대파에 의해 축출될 때 사계가문에서 김익훈, 김운택, 김민택 3인이
희생됐으며 이때 20여명의 문중 인재들이 유배를 당했다.
전주이씨 백강 이경여의 집은 노론 4대신 두 명 즉 이 이명, 이건명이 희생되어 참화 폭이 컸다.
그러나 이이명은 김만중의 사위로서 사계집안과 운명을 같이했다.
따라서 백강집안까지 합하면 사계집안의 친인척 피화는 엄청난 규모였다.
사계가문은 조손 부자 형제 숙질들이 대동단결하는 응집력이 매우 강했으며. 부녀자들까지 남편과 운명을 같이 하여 생명을 초개처럼
받쳤다.
사계가문의 열부가 4대 가문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다.
월사 가문은 이 일상 아내와 이시수의 아내 2인 정도인 반면 백강가문은 이사명의 아내, 이 휘지 아내, 이 봉상 아내 3인이 있다.
그러나 사계 가문은 무려 7인에 정려가 있다.
사계가문은 예학을 통해 유교 사회의 질서를 세우고 유교의 명예와 권위를 수호하였다.
사계가문은 4대 가문 중에서 가장 높은 이상을 지닌 정치지향성 인물 집단으로서 서인과 노론 거대세력의 구심점으로 대인(大人)의
풍도가 있어 4대 가문 중 장자의 역할을 해 왔다.
사계집안은 학문의 연원이 깊고 종통의 권위가 무거워 한양 권문세가들의 기를 꺾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한양의 명문 거벌 들의 종주(宗主)역할을 해옴으로서 한양문벌의 태두가 되고 백가(百家)의 제왕으로 군림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