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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산업문명에서 좋은 삶(good life)은 가능한가?
- 경제사적 관점에서 들여다보기
박 병 진 명예교수(경영대학 경제금융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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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역사는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것과 달리 학계 내부에서의 정치한 논리 전개와 혼돈스러운 대중적 처방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존재하는 영역으로 이어져왔다. 그런 가운데 경제사상사나 경제사 과목은 경제학과의 커리큘럼에서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 있다. 그 이유는 엄밀한 과학이라는 경제학의 발전 과정에 크게 이바지하지 못하는(물론, 철학적 이상을 가질 수 있기는 하지만)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경제학에 되묻고 싶은 것은 그래서 ‘경제학은 우리 삶에 얼마나 이바지하였나요?’라고 하면 그 대답은 궁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의 경제 상황이다. 정말 경제활동을 통해 인간이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 것 인가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찾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경제사적 관점에서 앞선 선각자들이 그러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산업혁명 이래로 계속해서 발전해 온 자본주의에 대해 해당 시대에 존재했던 학자들의 경제사적 관점을 통해 21세기 산업경제 사회에서 우리 삶의 지향 목표가 무엇이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글은 형식을 갖춘 학술적 논문의 성격은 전혀 아니며 가벼운 경제사 산책 정도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1. 산업혁명은 무엇을 바꾸어 놓았는가?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19세기에는 유럽 전역과 북미 대륙으로 확산했고, 20세기에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지구 전체에 걸쳐 산업문명을 만들어 냈다. 여기서 산업문명이라고 부르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칭해지는 ‘산업사회’에 비해 다소 생소하게 여겨질 수 있다. ‘산업사회’라는 의미에는 대부분의 해석이 기술이나 산업 발전 같은 물질적 차원에 주어져 있다. 따라서 ‘산업사회’적 시각만으로는 우리의 삶이 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즉, 인간과 사회가 일종의 기계처럼 착착 맞물려 돌아가는 기능적인 시각만으로 인간의 미래를 묻는 물음에 대한 대답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물질만이 아닌 물질과 정신의 결합체로서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산업문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산업혁명이 인류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도 지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몇 가지만 문명사적 관점에서 짚어본다. 우리가 익숙한 혁명이라는 것은 대부분 정치, 사회적으로 큰 변동을 일컫는 것으로 혁명 당시에 사람들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경우들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동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의식조차 못 했던 현상들이다. 실제로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영국 등에서 대사건들이 나타나고 거의 100년 후에 붙여진 표현이다.
문명사적 관점에서 산업혁명은 놀라운 결과들을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인간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발전해 왔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다루는 생산력, 자본력 등의 잘 정의된 논의는 접어두고 혁명의 이면에서 문명사를 송두리째 바꾸게 된 핵심적인 내용들은 무엇일까?
그 첫째는 인간의 욕구에 찾아온 큰 변화로서 ‘소비에 대한 욕망’이 형성되기 시작한 점이다. 산업혁명을 촉발한 면직 기술의 발전을 통해 생산된 값싼 면직물들이 평민들에게 팔리기 시작하면서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소비문화의 원형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전 시기와는 완전히 다른 소비의 서사가 시작되면서 경제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세계 경제가 끔찍이도 추구하는 시장확장의 장구한 역사가 출발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산업혁명을 이끌어 온 기술혁신은 오직 더 많은 이윤만을 목표로 추구 되어온 것으로 이것 역시 그 이전의 전통사회에서는 없었던 의식으로서의 혁신이다. 물론 그 이전 시기에도 상업자본에 의한 이윤의 추구가 존재하긴 하였으나 대량생산에 기초한 이윤이 지배적 생산양식으로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로 볼 수 있다. 즉, 인간이 사회나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사용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이윤을 위한 생산이 경제활동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이윤이라는 경제활동이 인류를 지배하는 산업자본주의 패러다임이 형성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짚어볼 것은 노동의 속성에 관한 것으로 ‘추상 노동’ 의 등장이다. 산업혁명 초기의 노동에 대한 실태는 많은 문헌에서 다루어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의 실상은 잘 알려지고 있다. 그러면 노동의 속성이 그 이전 시기에 비해서 어떻게 변화한 것인가? 산업혁명 이전의 생산활동은 인간의 육체와 자연 요소가 직접 맞붙으면서 그야말로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이었다. 즉, 사람과 자연이 섞여지면서 생산 리듬을 만들어 내고 결과를 가져가는 생산방식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기술혁명이 진행되면서 노동은 기계속에 포함된 자본의 힘에 따라 굴러가는 생산활동으로서 개인 노동자의 감성은 포함될 수 없고 단순히 기계의 일부분이 되는 추상적 활동 양식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자본화된 기계가 생산의 주역이 되면서 인간과 자연은 조역에 머물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명사적 변화는 자기 확장 체계를 갖추면서 놀라울 정도의 성장을 이끌어왔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많은 문제점도 생성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21세기 현재의 고민은 결국 이러한 문명사적 변화의 출발에서 배태된 것이 아닐까? 따라서 오늘날 현대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전 지구적 고민의 해결책은 결국 그 문명의 출발점에서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
2. 21세기 ‘지구화’, ‘지구적 시스템’의 시대적 상황은?
영국에서 시작된 초기 산업혁명은 그 이후 4차 산업혁명(현재는 5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이라는 타이틀까지 달면서 우리 사회경제의 핵심 추동력으로 달려왔다. 지금 현재는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가? 21세기의 미래를 평가하는 많은 학자들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것은 ‘위기’라는 단어이다. 이처럼 낙관적인 전망은 찾기 어렵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5차산업혁명이 나타나고 그래서 평안한 안녕의 인류세가 이어지는 것은 모든 이들의 희망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단서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21세기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른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와 대량실업 사태, 환경 파괴의 가속화와 자정 능력의 상실, 이민자, 난민, 성소수자, 여성 등의 약자들에 대한 혐오 감정의 세계적인 확산, 테러의 일상화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인간은 물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공개한 ‘2023년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Global Risk Report 2023)’에 따르면, 앞으로 10년간 세계가 당면할 10대 리스크 중 6개가 환경 부문이다. 1위 ‘기후변화 완화(Mitigate) 실패’, 2위 ‘기후변화 적응 실패’, 3위 ‘자연재해 및 이상기후 현상’ 그 외에도 21세기 위험 요소로는 사람의 유전자조작, 사라진 도시들, 소셜미디어의 진화, 물 부족, 식량 위기, 자원의 감소, 인구 감소, 다른 세계에 정착, 향상된 인공지능의 지배 등이다.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으로 점철된 오늘날의 거시경제 환경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충격으로 인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짧게 잡아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길게 잡으면 1990년대 이후의 세계화·디지털화·고령화라는 큰 흐름 속에서 누적되어 온 것이다. 그런 와중에 더해진 팬데믹 충격은 세계 경제의 구조 변화를 가속화하였고 그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금융자본주의의 불확실성 위기는 별도로 서술하지 않아도 우리가 매일 체감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단기적인 안정 여부와는 관계없이 장기적인 불안정성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4차 산업혁명의 최종 도달점이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는 모르겠으나, 그 긴 과도기 동안 다수의 사람은 혁신의 성과보다는 단절의 고통을 맛볼 가능성이 크다. 한 국가 내에서도 그렇고,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국경 없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국민국가의 정부가 담당해야 할 역할이 지대한 이유다. 물론 대다수 정부는 실패하고 있지만 말이다.
오늘날 위기의 종류는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종합해서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엔 너무나 지난한 과제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이러한 불확실성이 예전에 경험한 사실이 없다는 점과 여러 분야에서 동시적으로 불안정성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특정 영역에서 인과관계의 분석을 통해 종전에 가지고 있던 매뉴얼 방식의 해법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책을 또다시 새로운 기술혁신을 통한 ‘성장지상주의’에 의존할 것인가? 최근에 와서 이러한 방식에 문제점을 지적하고 ‘탈성장’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 ‘탈성장’론에 따르면 지금 사회는 성장을 전제로 설계돼 있으며 모든 투자는 수익을 요구한다. 따라서 경제활동은 수익을 내기 위해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성장을 추구하지만 성장하지 못하는 결과로서 직면하게 되는 현상이 리세션(경기후퇴)이다. 그러나 ‘탈성장’은 성장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2014년에 작고한 경제학자 피터 포가니는 세계 전체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지구적 시스템’이라는 단일의 틀로 이해하자고 제안하였다. ‘지구화’, ‘지구적 시스템’이라는 용어는 아직 까지 학문적으로 확립된 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체적으로 느끼고 있는 느낌은 교과서보다 빠르게 우리의 의식을 끌어가고 있다. 지구화라는 것은 단순히 무역과 교류가 늘어나는 것만 아니라 지구 위의 여러 다른 나라가 경제와 산업에 있어서 상호의존이 깊어진다는 것이 우선적인 의미이다. 완성된 재화와 서비스만 완제품의 형태로 오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의 중간을 형성하는 산업의 가치사슬 자체가 국경선을 넘어서 형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이런저런 나라의 국경선을 넘어서는, 글자 그대로 ‘지구적 경제’가 형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 결과로 가장 둔하면서 또 위기 시에는 가장 민감한 에너지, 식량, 원자재 시장의 불안정이 나타났다. 이러한 근본 질서의 교란은 다시 러시아 푸틴의 도발에 의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나타났으며 그 파장으로 애초의 원인이었던 가치 사슬망의 교란과 국제 정치 질서의 혼란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지구 전체의 인간과 그들의 경제활동과 그 배경이 되는 자연환경은 이미 19세기부터 분명한 하나의 시스템이 되었다는 관점이다. 포가니는 현재의 지구적 시스템은 무한한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을 조직 원리로 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자원 고갈, 오염, 인구 등등의 문제를 낳고 있으며 2030년 정도의 시점에서 다시 혼돈의 이행기로 들어갈 것이라고 본다.
이 외에도 위기에 대한 대응 해법은 상당히 많은 저술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다양하긴 하지만 공통적 분모는 지금처럼 무한한 성장 체제로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것이다. 성장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앞에서 살펴본 산업문명의 진화과정(성장과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임)에서 살펴본 바대로 이제는 경제사적 관점에서 이 질문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위기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보기 위해서 먼저 짚어봐야 할 질문이 있다. 너무나 뻔한 것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너무나 많이 다루어진 것이기도 한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라는 것이다. 이 질문을 그대로 두면 역시 아무런 답변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질문의 범위를 좀 좁혀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good life)인가?’로 되물어 보기로 하자.
3.경제사적 관점에서 ‘좋은 삶’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물음과 이에 대한 고민은 많은 학문 영역에서 다루어졌지만 그래도 가장 치열한 논쟁과 나름으로 답을 찾고자 했던 분야가 서양철학 쪽이라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경제적인 문제를 짚어보고 실천하고자 했던 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홍기빈의 ‘어나더 경제사’(2023)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좋은 삶’의 내용은 음미할 만한 내용이다. 경제라는 말에는 ‘살림살이’라는 말과 ‘돈벌이’라는 두 가지의 전혀 무관한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경제(economy)라는 말은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왔는데, 이는 본래 ‘집안 살림’을 뜻하는 말(살림살이 경제)이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경제란 사실상 ‘합리적 선택을 통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위’(돈벌이 경제)를 뜻한다. 즉 전자는 ‘나와 우리의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조달하는 행위’이지만, 후자는 그냥 ‘화폐로 계산되는 바의 수익의 극대화와 축적’이다. 이 두 가지 종류의 경제가 전혀 다른 것이고 명쾌히 구별돼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것이었다. 따라서 ‘좋은 삶’은 무한한 욕망을 충족하는 삶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조달하는 행위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의 자본주의 및 산업혁명은 이 두 조건이 구분되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해 온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돈을 벌어야’ 했으며, 20세기까지의 두 차례의 산업혁명은 주로 좁은 의미에서 ‘물질적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에 초점이 있었다. 이렇게 되면서 화폐로 계산되는 바의 투입/산출의 개선이 바로 더 좋은 것 들을 더 많이 조달하게 되고 이는 ‘좋은 삶’을 이루는 가장 좋은 경로인 것으로 여겨졌다. 자본주의에서나 사회주의에서나 이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21세기의 환경은 이러한 혼돈을 극복하고 다시 두 가지 의미의 경제를 구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고 난 다음에는 인간의 ‘좋은 삶’에 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이 도무지 시장에서 돈 주고 사 올 수 있는 게 아닌 경우가 너무나 많아진 것이다. 미세먼지 없는 공기는 어떤가? 여성들이 안심하고 밤늦게 다닐 수 있는 도시는 어떤가?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이상적인 교육 내용과 시스템은 어떤가? 이런 것들을 제대로 조달하기 위해서는 ‘돈벌이’ 경제학이 아닌 ‘살림살이’ 경제학의 관점이 절실하다.
살림살이 경제학과 돈벌이 경제학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애덤 스미스이다. 애덤 스미스는 살림살이와 돈벌이 경제학 모두를 보다 포괄적으로 논의하면서 현대 경제학의 틀을 세웠으며, 애덤 스미스를 비판하며 등장한 리카도가 모든 것에 ‘가치’, ‘가격’의 개념을 적용하면서 현대의 화폐 경제학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그 결과 별개의 경제학으로 존재했던 살림살이 경제학은 화폐 중심의 경제학에 부속되는 일부분처럼 다뤄지게 되었다. 또한, 이렇게 수립된 돈벌이 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마르크스의 경제학마저 기존의 돈벌이 경제학의 체계와 논리를 오히려 강화하고 공고하게 해 주는 작용을 하고 말았으니, 이러한 경제사를 돌이켜보면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의 저자 칼 폴라니는 경제를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했다. 아껴서 돈을 많이 남기는 것, 그리고 나와 우리의 좋은 삶에 필요한 것을 조달하는 것"이라며 "첫 번째 정의를 형식적 정의, 두 번째 정의를 실질 정의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경제를 자꾸 첫 번째 정의로만 착각한다”라고 비판했다. 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논지가 ‘경제는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다’라는 표현이다. 영어로 embeded란 표현을 쓰는데, 경제는 정치·사회·문화·종교에 작동하고, 긴밀하게 하나가 돼서 떨어질 수 없다는 걸 가장 강조했다.
마샬 또한 경제학은 수학이 아니라 실제 인간사회에 살아 숨 쉬며 도움이 될 수 있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시경제학적 수리 분석을 다 만들어 놓고도, 자신의 저서에서는 수리적 내용을 되도록 배제하고 작성하였다. 우스게 소리이긴 하지만 이후 경제학자 중에서는 "마샬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일부러 우리에게 멀리 돌아가는 길로 고생하게 했다"라는 불평을 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케인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전제로 깔아 놓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물적 수단을 조달하는 연구가 경제학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사회 모든 인간들이 ‘좋은 삶’을 즐길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 목적에 필요한 물적 수단을 조달하는 기술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케인즈가 금융시장과 돈을 추구하는 투자자의 심리를 거의 정신병적 수준으로 보았던 것은 인간이 원래 추구해야 할 ‘좋은 삶’과 가장 거리가 먼 가장 비합리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이 금융자본주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금 21세기를 돌이켜 봤을 때 지난 30년간 지구적인 규모에서 벌어진 일은 케인즈가 그토록 싫어하고 무서워했던 19세기 식의 금융자본 공룡이 밟고 지나간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케인즈의 평가 이상으로 금융자본주의의 힘은 세고 파괴적이다. 따라서 케인즈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케인즈를 넘어서 새로운 삶의 모델을 찾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지구적 산업문명은 결코 지속 가능한 틀이 아니며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그 근간이 되는 경제생활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인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설계된 논리 인간에서 벗어나야 한다. 실제로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을 파악하여 그것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철학과 새로운 경제생활의 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좋은 삶, 인간 존재의 전면적 발전을 추구하는 삶이 우리의 경제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앞선 선각자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욕망의 포트폴리오를 재설계하고 화폐적 자산축적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4. 맺는말- 사회적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기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 성장하고, 계속 소비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경제성장은 우리 마음과 의식 속에 하나의 세속 종교와 같이 절대적인 목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20세기 후반 이후의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은 현상이며,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경제학의 주된 관심사는 성장이 아닌 ‘균형(equilibrium)’이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한의 소비 팽창이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이제는 으뜸가는 미덕이 되었고, 이를 가능케 하는 무한의 경제성장은 절대적인 ‘공공선(common good)’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경제생활의 틀은 세 층위의 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첫째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생태 위기를 낳고 있으며, 둘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낳고 있고, 셋째는 개인의 삶과 마음의 차원에서 불안을 낳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위기에 휩싸인 지구적 산업문명의 상태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게 만들고, 만족스럽지 못한 경제생활에 대해서도 그저 체념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에서 몸으로 움직이는 활기찬 인간으로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경제학이 필요하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라는 명제는 인간 욕망의 모든 복잡한 차원을 단일 차원으로 뭉뚱그려 버림으로써 인생의 의미가 담긴 ‘좋은 삶’이라는 것을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소비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인간의 존재를 물질과 정보라는 두 가지의 흐름으로 해체되도록 만든 것이다.
21세기 인류의 생존을 위한 새로운 발전모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기초한 탈물질주의적 가치관, 집중화된 권력의 분권화, 비시장적 경제의 활성화, 연대와 협력의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 생태 사회적 발전모델이다. 덜 소유하고 덜 소비하지만, 더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태적 혁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이라는 '생태적 한계'의 경고등은 이미 밝혀진 지 오래고 그러한 경고를 통해 인간은 자연스레 ‘인류 문명의 종말’이라는 미래를 전망하게 됐다. 더욱이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더 이상 기존의 낡은 문명 시스템이 유효하지 않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폴라니의 주장처럼 실체적 의미(인간의 살림살이로서)의 경제야말로 인류사에서 보편적인 것이며, 형식적 의미의 경제는 시장경제의 특수한 한 형태일 뿐이라는 점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다시 말해, 당연히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긴 하지만, 더 좋은 삶, 더 높은 삶을 추구하는 고귀한 존재이며, 공리주의적인 무한한 욕망이 아니라 다면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의 욕구(경제적 욕구는 이 같은 다면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의 욕구 가운데 한 부분에 불과하다)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질적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좋은 경제, 즉 실체적 경제이자, 인간의 살림살이 경제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시켜야 할 경제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