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휘는 1654년(효종 5)∼1706년(숙종 3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미재(美哉)이다.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문효공(文孝公) 어효첨(魚孝瞻)과 호조판서(戶曹判書) 아성군(牙城君) 양숙공(襄肅公) 어세공(魚世恭)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증 좌승지(贈左承旨) 어몽린(魚夢麟)이고, 조부는 수운판관(水運判官) 증 좌참찬(贈左參贊) 어한명(魚漢明)이다. 부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증 좌승지 어진석(魚震奭)과 모친 사랑(仕郞) 윤유익(尹惟益)의 딸 증 숙부인(贈淑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심(趙鐔)의 딸 정부인(貞夫人) 한양조씨(漢陽趙氏)이다.
1675년(숙종 1) 식년시 진사 3등 13위로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86년(숙종 12) 별시 병과 7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예괴원부정자(隷槐院副正字)‧율봉찰방(栗峰察訪)‧전적감찰(典籍監察)‧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동부승지(同副承旨)‧이천현감(利川縣監)‧연안현감(延安縣監)‧병조참판(兵曹參判)‧형조참판(刑曹參判) 등을 지냈다.
사간원사간 시절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승하하고 장희빈의 저주가 발각되자,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장희재를 옹호하는 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尙運) 등의 죄를 벌할 것을 강력히 청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 힘썼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절도사(節度使) 어유기(魚有琦)와 선전관(宣傳官) 어유규(魚有珪)이다.
묘는 경기도 용인(龍仁)에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찰방역은 공문서의 전달이나 관리들의 왕래와 숙박 등의 편의를 도모하고 관물과 공물의 수송을 돕기위해 설치된 역을 다스리는 중심지를 이른다.
신라 시대부터 처음 시작된 이 역(驛) 제도는 고려때 군사적인 목적으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역의 관할은 병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 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역전(驛田)이라는 토지를 나누어주었다. 한때 22개 방면에 역도를 두고 547개 역을 두었는데 역도에는 역승을 두었고, 각 역에는 역장을 그 아래는 역리와 역정을 두었다. 조선시대들어 역승을 찰방(察訪)이라 고치고 40개 구역에 찰방을 두어 주변 역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찰방이 주재하는 역을 찰방역이라 했던 것이다.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 있는 증약 찰방역은 전국 40개 중요역 중의 하나로 교통상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이 찰방역은 지금의 증약리, 자모리, 이백리 등의 전 농토를 역둔전으로 지급받아 역을 운영하고 역리가 355명이나 있었고 남여 종복도 500여명에 달할 만큼 큰 규모의 역이었으며 인근 역을 속역으로 다스렸다.
첫댓글 함안군 군북면이 아니고 옥천군 군북이네요. 저런 종류의 비석들은 옛닐엔 더러 본것 같습니다.
큰 역이였군요
곧은 관리였구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검토에 검토를 거쳐 기록하지않고 대충하였네요.
푸른바다님덕에 바로 잡아질 것 같습니다.
훌륭해요. 지기님. 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