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 길
6,25전쟁후 애들이 공부를 못하니까 문교부장관 안효상씨가 시험지를 전국에 돌리면 그것을 선생님이 프리터 해서 나누어 주셨다. 선생님이 계시든 안계시든 우리는 신주머니에 장작개비 하나씩 넣어가서 불 피우고 공부했다. 도시락을 위것 아래로 아랫것 바꾸다가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다. 하루는 눈이 펑펑 내려 좋아라고 노는데 동생임자가(한 살 작은 데 7세에 입학하여 어릴 때부터 나를 따랐다.) 언니가자해서 보니 모두 그 마을 애들이고 5리를 가야하는 애는 우리 둘이고 천지가 하야고 손도 잡을 수 없는 논두렁길 임자가 따라오다가 넘어져서 운다, 나도 같이 넘어지면서 웃었다, 임자도 웃었다, 임자야 여기서 울어도 우리대리로 올사람 아무도 없다. 언득밑에 떨어졌으면 우리는 가다오다 못하고 우리는 죽는다. 발재죽을 촘촘이 천천이 갔다. 마을을 지나니 개들이 짓어 대니 그래도 늑대는 안올 것 같아 덜 무서웠다, 소귀신이 나온다는 동산을 넘어 임자 집에 먼저 대리다 주고 우리 집에 갔다, 엄마는 재종조모집 대구산파하로 가시고 언니가 이불 밑에서 밥을 꺼내주면서 진외가나 친구집에 자고 오는 줄 알았다. 지금생각해도 임자엄마가 얼마나 애타셨을까. 그래도 임자는 초등학교 중학교도 같이 다니고 서울 살면서 동창생 모임은 꼭꼭 온다.
그다음은 선생님이 마을 마다 가서 공부 시키는데 여자는 윗방 남자는 아랫방에 자는데 윗방이 구둘이 낮아 남학생이 오좀을 사서 선생님이 옷을 적셔 갔다.
경상남도 전채에서 일등는 밀양에서 차지했고 단채상은 부산에서 일등을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