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의 요새, 물류터전
묵호는 일찍이 철도와 항구가 발달해 있었다. 육지와 바다가 트였으니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북평항 쪽 송정동에는 비행장이 있어서 동해 상인들은 서울까지 가서 물건을 떼 올 수 있었다. 그야말로 육해공(陸海空)이 모두 있어서 교통의 중심지였다.
묵호가 교통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은 삼척일대의 무연탄 때문이었다. 장성, 도계, 마차, 사북 일대에서 나는 무연탄을 기차로 묵호까지 나르고, 이어서 배에 실어서 부산, 인천, 서울 등지로 날랐다. 그러니 무연탄의 물류 요새가 묵호였다. 얼마나 무연탄이 많았던지 묵호라는 이름이 무연탄 때문에 생겼다는 사람도 있다. 묵호에서는 흰 옷을 입을 수 없을 정도였고, 비가 오면 길바닥으로 무연탄이 흘러내려 까만 물이 휩쓸고 갔다. 바람이 불면 탄가루가 날려 진폐(塵肺) 환자도 생길 정도였다니 안 봐도 알만하다. 그런데 이 무연탄을 나르던 운반도구가 철도였다.
동호동 일대에 관사촌(官舍村)이 생긴 것도 철도역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물류기지가 생기고 철도가 놓이면서 관사가 지어졌다. 철도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었다. 당시 최고의 시설을 갖춘 집이었는데, 화장실이 집안에 있을 정도였다. 관사는 일본의 다다미방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것도 각각의 직위에 따라 관사가 달랐다. 이 관사는 철도종사자만 산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묵호항만에 근무하는 사람, 해군에 종사하는 사람, 그리고 각종 관청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관사마을에 들어왔다. 관사도 직위의 높낮이에 따라 지역과 집의 모양이 달랐다.
철도로 실어온 물건은 무연탄뿐이 아니었다. 철도는 묵호항에서 나는 고기를 싣고 대처로 나갔다. 고기는 워낙 많이 나서 철도로 나르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트럭에 실어서 전국으로 나갔다. 얼마나 고기주문이 많은지 미처 주문량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물류회사에서는 밤새 물건포장을 해야 했다.
그 때문에 묵호에는 정말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닐 정도였다. 누구든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무엇을 해도 호황을 누렸으니 말해 무엇 하랴.(이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