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명나라 유격장 심유경(沈惟敬)이 주도한 강화교섭은 결국은 파탄으로 막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강화교섭의 내용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에 온 명나라 사신의 즉각 귀국을 명하였고, 조선 사신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清正)는 득세하게 되었다.
분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재침략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선조 30년(1597) 1월 가토오 기요마사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는 군사 행동을 일으키기 전에 회담을 통해 일본의 요구를 관철시켜 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사명당(四溟堂)과의 면담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선조 30년(1597) 3월 18일 사명당(四溟堂)은 서생포왜성으로 들어가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清正)와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이 때 완전 무장한 일본 군사들이 사면을 겹겹이 들러싼 가운데 회담이 이루어졌는데, 사명당에게 겁을 주어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러나 사명당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당당히 회견에 임하였다.
대화 중에 가토오 기요마사가 “조선에 보물이 있는가?“라고 묻자 사명당이 ”우리나라에는 없고 보배는 일본에 있다.“라고 하니, 이어 ”어찌하여 보배가 일본에 있다는 말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사명당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당신의 머리를 베고자 하니 네 머리가 보배이다,“라고 한 바 있었다. 이 말에 가토오 기요마사는 놀래어 얼굴빛이 푸르러졌다고 한다.
가토오 기요마사는 본래의 매우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날의 경위를 설명하면서 조선이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아 재침략에 나섰음을 피력하였다. 이에 사명당은 조선은 그러한 약속을 애초에 한 바 없으며, 이는 모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심유경(沈惟敬)의 조작임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사명당은 가토오 기요마사를 가리켜 “재능과 지혜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면서 어찌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 의와불의 그리고 될 일과 안 될 일을 구별하지 못하는가.”라며 힐책하였다.
사명당과 가토오 기요마사의 계속된 회담에서 8년전 대마도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에 의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조선이 받아들인 것처럼 꾸며진 과거의 모든 허구가 밝혀졌다. 가토오 기요마사로서도 조선이 그러한 약속을 한 바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清正)의 목적은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영토할양에 대한 것은 빠졌으나, 조선의 왕자를 일본에 보내 사죄할 것이라든지 매년 공물을 일본에 바칠 것 등을 요구하며 협박하였다. 여기에 응할 리 없는 사명당(四溟堂)이 그러한 약속을 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회담은 끝났다.
<자료출처>
우인수(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 「서생포왜성의 역사적 성격」, 『조선시대 울산지역사 연구』(국학자료원) 2009. 122~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