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애인
어린 시절 나는 만화방 단골이었다.
동네 ‘비둘기 만화방’ 긴 나무 의자에 앉아서 만화책을 읽다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곤 했기 때문에 온 동네에 소문이 나 있었다. 퇴근하는 언니나 오빠가 웃음소리를 듣고 만화방 미닫이 문 틈으로 말썽꾸러기 남자 아이들 사이에 불량소녀처럼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는 무척 창피했지만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따금 떼어놓고 온 여동생이 만화방 문 앞에서 "변소 간다고 하더니 여기가 변소냐?" 고 심술궂게 소리치곤 했다.
나를 따라다니다 덩달아 재미를 붙인 여동생도 나중에는 만화방에서 엄마에게 소맷자락을 잡혀 끌려오게 되었다. 동네 만화방을 섭렵하고 난 후 멀리 있는 만화방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방학이면 새로 개척한 만화방에 들어앉아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순정만화를 읽었다. 말괄량이 소녀가 수천 년 전의 이집트로 돌아가 젊은 파라오와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는 어찌나 흥미진진했던지! 만화에 흠뻑 빠져 있다 문을 나서면, 그새 사위는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 있었다.
만화책은 현실보다 재미있었지만 그 밤 내 마음은 도둑맞은 듯 공허했다. 어린 내가 불우한 현실을 피해 환상의 세계에 빠져 있다 추위와 어둠에 떨며 홀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길고 딱딱한 나무 의자, 간식으로 프라이팬에 구워 팔던 고소한 어묵, 만화방 주인아줌마가 삶아대던 이상한 나물 냄새가 내 유년 시절의 한 귀퉁이에 남아있다.
어느 시기가 되자 다른 책들로 시선을 옮기면서 나의 '읽기'는 이어졌다. 친구 집에서 놀다 말고 다락 위에 쌓인 지난 신문들을 읽었다.그 무렵 동네에 처음 생긴 학생 도서관은 하루 종일 20원만 내면 모든 책을 내키는 대로 볼 수 있었는데, 학교 선생님보다 목에 힘을 넣고 책을 비뚤게 꽂으면 핀잔을 주는 쌀쌀맞은 사서가 있었다. 줄넘기의 손잡이와 같은 모양의 줄을 당기면 물이 쏴아 흘러나오면서 변기를 씻어 내리던 수세식 화장실도 또래들 사이에 화제였다.
동생은 한 번 본 <신데렐라>를 읽고 또 읽었다. 좋아하는 책을 되풀이 읽는 것이 동생의 습관이다. 나는 유치한 그림의 신데렐라가 아니라 제법 두꺼운 <재투성이 아가씨>를 읽었다. '춤을 추면서 신데렐라에게 왕자님이 속삭였습니다.' 속삭이다니, 난생 처음 본 멋진 단어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 끼어 있던 '미녀와 야수'도 잊을 수 없다.
아직도 생각나는 그림책이 있다. 바람이 매서운 겨울 밤, 초라한 옷을 걸친 소녀가 빵을 들고 집으로 가는 들판 위에 있다. 소녀는 옷이 없어 추위에 떠는 노인을 만나 옷을 벗어주고, 굶주린 할머니를 만나 기꺼이 제 몫의 빵을 건네고, 신발이 없는 아이와 마주치자 신발을 벗어 준다. 겨울 밤 들판에서 알몸이 된 소녀는 하지만 온몸이 훈훈한 온기에 감싸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별들이 눈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달려가 보니 떨어져 내린 별이 금화가 되었던가. 발가벗은 소녀의 몸이 훈훈해지고, 별들이 금화가 되어주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는 연민도 책으로 배운 것인지 모른다.
이따금 일상의 빛이 바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안정된 일상이 더 이상 감사하지 않고 이제껏 걸어온 길이 엉뚱한 길은 아닌가 하는 회의에 휩싸이는 것이다. 내가 흘러와 있는 이곳은 어디이며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새삼스럽게 자신을 다시 바라본다. 생활은 너무나 남루해서 깊은 바다 밑바닥을 조금씩 기고 있는 거북이가 된 것만 같다. 지지부진한 일상, 그 곳에 눌어붙어 있는 자잘하고 끈질긴 위험들. 언제 바다 위로 떠오를 수 있을까? 위를 올려다보면 무겁게 뒤덮고 있는 겹겹의 물살뿐이다.
그런 때 나는 책의 애인이 된다.
작은 서재에서 글을 읽는다. 현실은 마음의 그림자일 뿐. 현실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책은 지혜로운 멘토와 같이 내게 일러준다. 현자와의 1:1 과외다. 창 밖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젖어 있다. 봄비가 오는가보다. 찻잔은 비어 있다. 12시를 넘기진 않기로 하고는 새벽이 되도록 서재에 머무른다.
필요한 책을 발견하는 것은 응답이고 만남이다. 책이 다른 책을 소개해주어,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음 책이, 같은 맥락을 지녔지만 더 넓고 깊은 이야기를 품고 기다린다. 책으로 이어진 징검다리를 건넌다. 가슴속에서 조그만 싹이 고개를 든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책의 손을 잡고 생활로 걸어 나온다. '읽기', 그것으로 내 일상은 일상 이상의 것, 보다 풍요로운 삶이 된다.
첫댓글 만화로 시작된 독서가 오늘의 김 사무국장님이 되게 하셨군요.
그땐 이른 바 불량만화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만화도 있었구요. 어른들이 못 보게 해서 목숨 걸고 봐야 했습니다. 본 지 오래되었네요.
만화가 독서의 재미를 알게 해 주었네요.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책은 재미있는 것이구나 생각했던 것 같네요. 우째 저만 만화책을 본 것 같네요. ^^; 감사합니다.
현실을 마주하기 겁 날 때 난 영화를 봅니다. 나와 다른 압축된 생들이 즐비해 있거든요.
적어도 두시간은 마음껏 일탈을 할 수 있어 좋답니다.^^
저도 좋은 영화 한 편 골라봐야겠어요. 동네에 영화관이 있는데도 코로나 때문에 팝콘 사서 영화 봤던 기억이 까마득합니다. ^^
어릴 때는 만화책 애독자였는데, 어떤 일 이후로는 절대 보지 않네요;;
책의 애인이 펼쳐주는 징검다리에 앉아 잠시 지난 일을 생각해봅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어떤 일이 뭣일까 궁금합니다.^^ 요즘 만화방엔 라면도 팔고 하는 것 같은데 못 가보았네요. 그 시절로 만화방 졸업했습니다. 아름다운 순정만화는, 펼치면 운명과 사랑이 소용돌이치는, 어떤 명작 못지않아서 읽고 나서 독후감도 썼어요. 가지가지 했습니다. ^^; 감사합니다.
'현자와의 1:1 과외'
'필요한 책을 발견하는 것은 응답이고 만남이다.'
지안씨 참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우리 때는 만화방은 없었고, 헌 책방에서 책을 대본해서 읽고는 했었지요.
중학교 때 다니던 원동서점이 지금도 그 부근에 있는데,
얼마나 대본을 많이 했던지 30년 후에 만났는데도 나를 알아보시더군요.
더 어려서는 아버지가 대본해 보시던 소설책을 몰래몰래 보는 바람에 입학 전에 한글을 깨우쳤지요.
만화는 초등학교 무렵 처음 '밀림의 왕자'라는 장편만화를 접했는데 주인공 철민이가 어찌나 근사했던지...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대본'이면 책을 빌려 읽으셨던 건가요? 그런 때가 있었군요. 예전에 책과 비디오 테잎을 대여해주는 곳이 있었는데 정림동 보람책방이 단골이었어요.^^
멋진 봄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