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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부처님 법을 말하며 그 법은 한자로 '法(법)'이라고 씁니다.
범어나 영문은 ' dharma(धर्मः다르마)'라고 쓰고
그걸 다시 한자로 음차할 때는
'달마(達摩, धर्मः)' 또는 '담마(曇摩,धम्म)'로 음역합니다.
'달마(達摩)' 는 매우 친근하죠.
이런 매우 중요한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확한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알긴아는데 뭔가 찜낌한거.
이 달마(다르마, 담마)에 대해서는 아래 언급되는 대로 여러 이론이 있습니다.
근데 너무 복잡하죠?
이런식으로 불교를 배워가는거 고쳐야 합니다.
저렇게 하면 고상한 것 같지만..
희안한 학문적 접근 방법입니다.
불교를 어렵게 만들어 대중과 괴리되게 만듭니다.
불교는 저렇게 접근하면 안되요.
학문적인 부분에서 저런짓은 비일비재한데요.
간단한 문구 하나를 가지고 논문을 쓰면서는
갑자기 두께가 확늘어납니다.
대표적인 분야가 '사회복지'.
아주 웃겨요.
누가 말 한 마디 해놓은걸 줄줄이 논문.
나중에는 논문 배우다 날샙니다.
시험도 무지하게 어렵게 되고요.
끝을 찾아가면 1줄.
그 한 줄만 이해하면 되는 일인데
이게 무슨 학문적 가치가 있습니까.
현장실천이 중요한거지.
더 웃기는건 그렇게 들이파서 두껍게 만들면 인텔리 대접.
뭐하자는 짓인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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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그렇게 어려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유는 이세상의 모든 것이 부처님 몸이기 때문이에요.
본래 이사바는 위대한 부처님..
청정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원력으로 탄생된 불국토 입니다.
그렇기에 가만히 쳐다보면 도처에 배울점이 수두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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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은 본래 범어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 이들이 인도로 넘어갔다 되돌아온 메아리에
매달려 끙끙 앓고 있는데요.
범어 속에 숨겨진 우리말의 의미를 알면
불교는 따로 크게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실 그래야 해요.
불교가 학문이 아니잖아요.
학문적으로 접근해서 우웅거리는 메아리를 진짜로 알고 덤비기보다는
본래 우리가 사용했던 말인만큼
원어가 남아 있다면 그걸 찾아내는 것이 쉬운 일입니다.
범어에 담긴 순수 우리말을 이해하면 불교는 매우 쉬워요.
물론 어떤 무식한 놈들이 원어를 약어로 생략해서 버려놓은 것은
원문의 의미를 알아내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만
최대한 말을 음미하며 우리나라 말로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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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법)'에 대해서 파고 들어가 보죠.
'다르마(Dharma, धर्मः, धम्म, 달마(達摩), 담마(曇摩))'
여러분 보이십니까?
나열된 것을 가만히 보시고 입으로 읽어보세요.
뭐가 보이고 뭐가 생각나나요?
우리말로 분해해 보겠습니다.
'ㄷ ㅏㄹ ㅁ ㅏ'
붙여보죠. '닮아'
이게 현재 '다르마'라고 분리해서 읽고 있는 우리말의 본 뜻입니다.
'다르마' 역시도 붙이면 '닮아'잖아요.
왜 우린 이걸 못보냐는 거죠.
'법'은 우리나라 말 '닮아'입니다.
뭘 닮으라는 걸까요??
뭘 닮고 배워서 자기거화하라는 건데요.
우리는 뭘 닮아야 할까요??
스님은 정답을 알고 있지만..
또 누가 지가 안거도 아닌걸 흉내낼까 싶어 정답은 안적겠습니다.
'~~~을 닮는 것이 법입니다'
어때요 명쾌하죠??
정답을 알면 더 명쾌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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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팔리어로는 '담마'인데요.
성중님께서 이것 역시 옳다고 하셨습니다.
둘 다 산스크리트어로 맞는 말.
여쭤보니 한 부류는 '닮아라' 이렇게 발음했고요.
한 부류는 '담마라' 이렇게 표현했답니다.
연유는 혀의 구조로 발음이 안되서 그랬다고 해요.
충격적이게도 '담마'가 옳은거라네요.
여러분도 해봅십시오.
이'담마'가 발음이 안되는 분들도 있데요.
마치 경상도 일부 인원들이(스님도 경상도출신입니다)
'쌀'을 '살'하고 발음하는 거와 같은거죠.
스님은 진짜로 봤습니다.
'쌀'하고 먼저 말하고선 따라하라했더니
'살' 그러더라고요.
여러번해도 동일.
즉 '닮아'의 원래 발음은 '담마'.
뜻은 동일.,
무엇을 '담마'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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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한자로 '법(法)'자는
01. 法자는 ‘법’이나 ‘도리’를 뜻하는 글자이다. 法자는 水(물 수)와 去(갈 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법이란 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자 모두가 공감해야 하는 이치이다. 물(水)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去)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法자는 바로 그러한 의미를 잘 표현한 글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금문에서는 치(廌)자가 들어간 灋(법 법)자가 ‘법’을 뜻했었다. 치(廌)자는 해치수(解廌獸)라고 하는 짐승을 그린 것이다.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그려진 해치수는 죄인을 물에 빠트려 죄를 심판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에 水자가 더해진 灋자가 ‘법’을 뜻했었지만 소전에서는 글자의 구성을 간략히 하기 위해 지금의 法자가 ‘법’을 뜻하게 되었다. 출처 : [한자로드(路)] 신동윤 | (삽화) 변아롱.박혜현 ------------------------ 02. 물(水)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去) 규칙이 있다는 뜻이 합(合)하여 「법(法)」, 「규정(規定)」을 뜻함. 水(수 ☞ 공평한 수준)와 사람의 정사(正邪)를 분간한다는 신수와 去(거 ☞ 악을 제거함)의 합자(合字). 즉 공평(公平)하고 바르게 죄를 조사해 옳지 못한 자를 제거한다는 뜻을 나타냄. |
이렇게 두 가지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근데 짐승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요.
성중님께서도 그건 잘못 오독한 것이라 알려주셨습니다.
그보단 ' 法자는 水(물 수)와 去(갈 거)자가 결합'
이게 옳다고 하시고요.
'물이 흐르듯 사는 것이 법' 이게 맞답니다.
'담마'의 정답이 나왔죠??
물이 흘러가는 것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성중님께서 확인해 주신 물이 흘러가는 것에서 배울 이치는 이렇습니다.
물은 막히면 돌아가고, 좁은데를 만나면 빨라지고 거칠어지고,
완전히 막으면 힘을 축적해 끝장내버린다, 물 길은 막는게 아니다,
모든걸 깨끗하게 해준다, 항상 수평을 잡는다,
살릴수도 있고 죽일수도 있다, 물은 현장에 잘 적응한다,
~~10개 정도의 숨겨진 이치~~~ 이게 법(닮아,담마)
그리고 잘못 본 이치는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고(틀림), 물 없으면 죽는다,
모이고 모이면 큰물이 된다~~~... 이건 그릇된 인식)
우리는 담마(닮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담마'는 '물이 가는' 그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가지가 있어요.
이걸 생각하는 것이 '명상'이고 그 주제를 생각속에 집어 드는 것을 '화두'라고합니다.
실마리죠. 시작점.
그렇게 행하는 것을 '선정바라밀'이라고 하는데 원어로는
(선정바라밀 속에 화두선이 들어있는데요
화두선은 단순히 문제 풀기가 아닙니다.
그게 아닌 화두선만의 비밀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이걸 모르면 개우친게 아닙니다. 가짜.
1600공안이라 부르는데 그속에 가짜가 수두룩하게 끼어 있습니다.)
'"선(禪)"은 산스크리트어 디야나(dhyana)를 음에 따라 번역한 것,
혹은 속어(俗語)의 자나(jhana)를 음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선나(禪那)라고도 하며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려(靜慮)라고도 불린다.'
라고 해석하는데요.
우리나라말로는 '짠~나(아)와'입니다.
'디야나(dhyana)'는 'ㄷ'발음이 아닌 'ㅈ'발음으로 나야 맞다고 해요.
그래서 속어에는 'ㅈ'으로 바뀌어 있는 겁니다.
'짠나'죠. '짠나와'.
실마리를 들고 생각을 하면 머릿속에서 '짠~하고 나온다는거'
그런 방법을 육바라밀 가운데서는 '잔나바라밀(선정바라밀)'.
이걸 '나'라는 발음을 빼놓으니 맨날 선바라밀, 선바라밀..
우리나라 말로 이해하기는 글러 버린 상황이 된거에요.
어느 멍청하고 무식한 놈이 '선나'를 '선'으로 줄여버려서
인문학 대참사가 생긴거죠.
같은 비유는 아니지만 요즘 또 우리 주변에서
우리나라 말을 초성만 따서 약어화 시키는 무식한 것들이 수두룩해졌습니다.
한 두 단어가 아니라 문장을 초성만 줄여 단순화 시킨다는 거죠.
그런 사례가 너무 많이 기억도 안납니다.
우리말이 다시 망가지고 있는거죠.
발음으로도 된소리를 안나게 하는 바람에
산스크리트인 우리나라 말이 계속 망가지고 있어요.
그건 잘하는 짓이거나 고급스러운게 아니라
'선나'를 '선'으로 줄여버린 멍청한 놈과 같은 짓을 하는겁니다.
재미로 하는 것은 그럴수 있겠지만
이게 '선나(짠나)'처럼 학문 분야로 가는 기초 단어인 경우
대참사가 벌어지는 거에요.
저 자식 덕에 현재 선바라밀에 담긴 진짜 뜻을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스님도 이것을 해결하며 애를 먹었어요.
관련 글은 저 아래 첨부해드릴께요.
이런 미친짓을 하는 개들이 있다는 것만 아시고
따라는 하지 마세요.
역사에 죄인 되는 일입니다.
저것들 말고 아나운서들이 저지른 것은 더 엄청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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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오는 법에 대한 정의와 해설입니다.
참고 삼아 읽어주십시오.
법(法) 요약:불교 삼보의 하나를 가리키는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를 가리키는 불교용어. 내용범어로는 다르마(dharma) · 달마(達摩) 또는 담마(曇摩)로 음역한다. 다르마란 인도말은 불교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 아니라 일찍이 인도 고대의 문헌인 『베다(veda)』 이래 브라만교의 여러 문헌들 속에서 사용되어 온 말이다. 그것은 다르(dhar)라는 동사어근(動詞語根)으로부터 파생한 말로서 ‘유지한다, 질서(秩序)지운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다르마는 ‘∼을 유지하는 자, 질서지우는 자’ 등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원시경전(原始經典)에서 “내가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도 법은 있었고 내가 죽은 후에도 법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라고 한 바 있고, 또 “이 세상이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는 것, 그것이 법이다.”라고 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법을 어떤 쓰여진 교설(敎說)만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법의 의미의 일부분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일체가 하나하나 다 법이라고 불려질 수 있다. 그럴 경우 법은 하나의 대상 · 사물 · 실제 또는 개념 등의 뜻으로 해석된다. 정신적인 것이건 물질적인 것이건 그 대상화되는 일체의 것이 법이다. 불교에서는 인간 행위의 의지처로서의 법을 세우기도 한다. 석가모니의 최후 설법 가운데에는 “자기에게 의지하라. 법에 의지하라. 자기를 등불로 삼아라. 법을 등불로 삼아라.”라는 말이 있다. 즉 인간이 자신의 이법(理法)을 실천하는 곳에 참다운 자기가 구현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자기를 확립한다는 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설하는 것 또는 어떤 권위자가 설하는 것에 맹종하지 않고, 일단 자기가 바르고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면 그대로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남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면서까지 그와 같이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데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하며, 남에게 확신을 갖도록 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는 것이 다르마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실체적이거나 기능적인 ‘나’를 상징하는 데는 반대하였지만 대신에 무수히 많은 법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의 법이란 우리들의 현실 존재로 하여금 ‘지금 이렇게 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규칙이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법은 그 자체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항상 규범이 되어 사물에 대한 이해를 발생시켜 준다[任持自性 軌生物解]고 한다. 또 법(法)은 한자어로 ‘물[水]이 간다[去]’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글자는 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되 거기에는 일정한 길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르마를 법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실제로 현실의 존재 속에는 많은 법이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현실의 존재를 해명하기 위하여 불교에서는 오온(五蘊) · 육입(六入) · 육경(六境) 등의 여러 가지 법 체계를 설하게 되었다. 이 법이란 말은 매우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특히 ‘인간 행위를 보존하는 것’이 그 본래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인도에서는 ① 관례 · 습관 · 풍습 · 행위규범, ② 해야 할 일, 책임, 의무, 도리, ③ 사회질서 · 사회제도, ④ 착한 것, 선행, 덕, ⑤ 진리, 진실, 이법(理法), 보편적 의의가 있는 이치, ⑥ 전세계의 기반, ⑦ 종교적 의무, ⑧ 진리 인식의 규범, ⑨ 본질 · 본성 · 속성 · 성질 · 특질 · 특성 · 구성 요소, ⑩ 논리학의 술어, 빈사(賓辭)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위와 같은 용법들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의미로 법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특히 소승불교의 교리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능히 파지(把持)할 수 있으므로 법이라 한다(能持自相 故名爲法).”고 해석되어 있다.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살펴보면 ① 진실한 이법(理法), 진리,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지켜야 할 규율, 법도(法度), 법칙, 진실, 규범의 힘, ② 바른 일, 착한 행위, ③ 이법으로서의 연기(緣起), ④ 부처님의 가르침, 불법(佛法), ⑤ 삼보(三寶)의 하나, ⑥ 구체적인 계율의 뜻이 있다. 그리고 ⑦ 십이부경(十二部經), ⑧ 본성, ⑨ 형(型), ⑩ 뜻[意]의 대상, 육경의 하나, 마음속의 모든 생각, 생각의 대상이 되는 것, 마음의 대상, ⑪ 사물, 존재, 사물의 원형(原形), ⑫ 글자로 표현될 수 있는 의미, ⑬ 마음의 작용, ⑭ 실체, ⑮ 법신(法身), ⑯ 주어에 대한 술어, ⑰ 의(義), ⑱ 밀교(密敎)에서 행하는 기도 및 수행법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법은 갖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 어느 것이든지 진리 또는 이법(理法)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의미로 깔려 있다. 인간의 개개 존재는 이처럼 수많은 다르마에 의하여 현상의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온갖 모습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그 흐름이 연속되고 있다. 그러한 모습의 연속성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 것이 다수의 인(因)과 연(緣)이다. 이들이 나타내는 전체 집합에 의하여 자아의식이 성립되고 개별 존재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또한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도 법에 대한 자각이다. 부파불교(部派佛敎) 철학으로 대표되는 법에 대한 객관적 해석과 이론적 분석태도를 지양하고 스스로의 체험과 실천을 통하여 주체적으로 감득하는 법에 대한 자각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법이란 대상적으로 보기보다는 선정(禪定)의 체험을 통하여 자각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원시경전도 “진지하게 명상하는 자에게 법이 나타났을 때 모든 의혹은 사라져 버린다.”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사라진다는 것은 지식이나 이론상의 의문이 아니라, 인생의 근본적인 의혹이 풀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인간과 만물의 진실된 법을 꿰뚫은 경지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법의 주체적 체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깨달음의 내용은 반야(般若)로서 강조되며, 이는 어디까지나 주객의 대립을 초월한 경지에서 감득할 수 있는 주체적 의식이기 때문에 이성과 지성의 세계에서 작용하는 지식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다. 법의 실질적인 내용은 불교의 필경의 교리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교법(敎法)이라 한다. 그 교법은 원시불교에서는 오온(五蘊) · 십이처(十二處) · 십팔계(十八界) · 삼법인(三法印) · 십이인연(十二因緣) · 사제(四諦) · 삼학(三學) ·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 · 사향사과(四向四果) 등으로 설해지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六波羅蜜) · 보살십지(菩薩十地) 등의 수행계위(修行階位)와 불성(佛性) · 여래장(如來藏) · 팔식(八識) · 삼성(三性) · 이무아(二無我) · 보리심(菩提心) · 육입(六入) · 삼밀(三密) 등으로 설해진다. 이러한 교리를 수용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종파별 · 사상별로 여러 가지의 새로운 교학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 교법은 반드시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지고, 관찰지(觀察智)에 의해 스스로 잘 살펴 보아야 하며, 어느 때에나 이에 의해 닦으면 증과(證果)가 있음은 물론, 직접 체험에 의해 실견실증(實見實證)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이 교법은 사람들을 이상의 경지인 열반(涅槃)으로 이끌 뿐 아니라 관찰과 실수(實修)로써 바르게 각지(覺知)할 수 있는 것이라는 6가지 정의(定義)가 뒤따른다. 또 법은 네 가지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는 교법(敎法)이고, 둘째는 인(因)이며, 셋째는 덕(德)이고, 넷째는 무아성(無我性)의 것이다. 첫번째의 교법이라는 것은 석가모니가 설한 가르침이고 팔만사천의 법문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중생의 번뇌에 팔만사천 가지나 되는 많은 번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퇴치하기 위해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설해졌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상대자에 따라 응병여약식(應病與藥式:병에 따라 약을 투여함)으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갖가지 설법을 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뜻에 있어서의 교법은 종교로서의 불교 본연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불교의 종교성이 교법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 이상(理想)은 깨침으로서의 성(聖)에 도달하는 것이다. 두번째의 인은 원인을 말한다. 인은 좁은 뜻으로는 불교의 이상으로서의 깨침에 도달하기 위한 원인[修道法]을 뜻하지만, 넓은 뜻으로는 모든 존재[現象]의 원인을 가리킨다. 그리고 원인은 결과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인이란 말에 의해 바른 인과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사회와 인생의 움직임으로서의 원인과 결과의 상태를 바르게 알고 인과의 도리에 따라 깨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이상실현의 방법을 바르게 알고, 그것에 따라 바르게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 ‘어떻게 있는가’를 바르게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바른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합리적인 진리를 갖는 인과관계를 뜻한다. 따라서 법의 두번째 정의로서의 인이란 바른 인과관계, 즉 합리적인 진리를 뜻한다. 다시 말하여 인의 본질은 보편타당적인 진리와 합리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법이 진여라든가 진리라고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번째의 정의인 덕(德)에도 성질이나 특성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주로 종교적 윤리적인 선으로서의 덕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선을 상대선(相對善)과 절대선(絶對善)으로 분류한다. 상대선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미혹의 세계에서의 선이며 업보에 지배를 받는 선이다.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인과법칙에 의해 선을 행하면 인간과 천상 등의 행복의 과보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절대선은 이와 같은 인과응보를 초월한 것이며 성스러운 선을 가리킨다. 세속적 세계에서는 상대선이 권장되지만, 불교에서는 궁극적 목적으로서 상대적인 선악을 초월한 절대선을 추구하며, 이를 구현하려고 한다. 즉 법의 세번째 정의로서의 덕은 종교적 · 윤리적인 이상으로서의 선이고 정의이다. 불교의 교법이 높은 윤리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인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음사사교적(婬祠邪敎的)인 것을 배척하는 윤리적 종교라고 불리는 것도 법의 내용에 이와 같은 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합리성과 윤리성을 가지고 어떠한 시대와 어떠한 지역, 그리고 어떠한 사람에게도 이상으로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을 갖는 세계적 종교라는 것은 불교의 법에 이와 같은 세 가지의 규범적 특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번째의 법으로서의 교법은 두번째 법으로서의 합리성(眞)과 세번째 법으로서의 윤리성(善)을 포함함으로써 가장 뛰어난 교법이 된다. 불교의 법은 반드시 이와 같은 세 가지가 일체가 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법에 대한 네번째 정의로서의 무아성은 이 세 가지와는 다르다. 이 경우의 법이란 일체법(一切法) 또는 제법(諸法)이라 일컬어지는 경우의 법이며, 이것은 물(物)을 뜻한다. 이 중에는 선법(善法) · 불선법(不善法) · 정법(淨法) · 염법(染法) · 출세간법(出世間法) · 세간법(世間法) · 실법(實法)과 가정(假定) 등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존재나 현상을 무아성의 물(物)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 존재가 실체적인 물이 아니라 언제나 생멸변화하는 물이기 때문에 이를 고정불변한 물로서 집착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실천면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근본 목적은 무아무집착(無我無執着)의 바른 신앙실천에 있기 때문에 앞의 세 가지에 무아성을 합침으로써 완전한 법이 성립된다. 이 무아성은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 특유의 것이며 불교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법에 대한 정의는 우리 나라에서도 그대로 수용되고 토착화되었다. 교조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불교적 교리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법의 중요성은 다른 종교보다 훨씬 강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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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민이 뜻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잼민이'는 인터넷에서 개념 없는 초등학생을 낮춰 부르는 인터넷 신조어입니다. 진짜 초등학생에게만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때로는 수준이 낮은 사람을 가리켜 비아냥 거리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잼민이 와 비슷한 뜻으로 옛날 신조어 인 '초딩’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잼민이 뜻 '잼민이'라는 이름은 잼(재미)과 재민을 합쳐서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재민’은 방송 후원 서비스 업체 투네이션의 남자 어린아이 목소리를 의미합니다. 유튜브나 아프리카 TV 등에서 BJ에게 후원을 할 때 특정한 목소리로 읽어주는데, '재민이’라는 남자아이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잼민이’로 쓰였던 것은 아니고 '재민이’가 '잼민이’로 변형된 것이라고 합니다. 잼민이 지금은 '잼민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초등학생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비방하거나, 어리숙하며, 감정조절이 안돼서, 무분별한 표현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잼민이'라는 말이 다소 부정적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잼민이'라는 말의 어감은 매우 귀여운 개구장이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개구장이 잼민이 잼민이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신조어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신조어는 어떤 분야에서 이제 막 시작하거나, 초보자인 사람들을 'O린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서 요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을 요린이, 주식을 처음 하는 사람을 주린이, 부동산 초보인 사람을 부린이와 같이 부릅니다. 잼민이 뜻 예전에는 긴 문장을 줄여서, 줄임말이 신조어로 많이 사용되었지만, 요즘에는 '잼민이'처럼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신조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신조어들에 대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조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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