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 효자 휘 기서(양간‧전리판서)
조선전기의 문신이며 효자. 자는 시견, 호는 돈목재.
아버지 군기부시정 명원, 어머니 숙인 의창 황씨.
성효가 출천하고 덕행이 뛰어났다.
상중(喪中)에는 죽을 먹고 시묘하였다.
복을 마친 뒤에도 여묘에 살았으니
그 마을을 시묘동이라 하고 그 집을 돈목재라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광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라가 어지러워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정암 조광조에게 학문을 배웠고 학포 양팽손과 더불어 경의를 강론했다.
1519(중종15) 기묘사화에 연루되었고 그 후 고향인
고창에 은거하여 후학을 육성하였다.
그 때 건립된 돈목재 강학당이 현존하여 지방문화재 100호로 지정되어있다.
효행으로 명종조에 정려를 명받았으며,
향인이 사당을 지어 향사한다.
참봉 기서 행장
공의 휘는 기서요, 자는 시견이다.
공은 나면서 효행이 출천하였고,
효행이 뛰어나서 12세 나이에 어머니가 병이 드니
분뇨를 맛보고, 주야로 하는데 빌어 효험을 얻었다.
아버지가 운명할 적에 손가락을 깨어 피를 먹여 3일간 연명하였다.
전후 상사에 죽을 마시고 시묘를 살았으며, 글은 반드시 효경과 성리서를 읽고,
과거를 일삼지 않으니 향중이 여러 번 천거하여 벼슬이 광릉 참봉이었다.
그의 집을 돈목재라 이름하고, 가정이 편안하고 즐거움을 일삼으니
향중에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