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43)
선과 악에 대하여
그러자 성의 연장자가 말했다. 우리에게 선과 악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는 그대 안의 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으나, 악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악이란 다만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고통받는 선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 선이 굶주리면 어두운 동굴에서도 음식을 찾으며, 목이 마르면 썩은 물도 마신다.
그대가 그대 자신과 하나일 때 그대는 선하다.
하지만 그대가 그대 자신과 하나가 아닐 때라도 그대는 악하지 않다.
어느 집안이 분열되어 있다고 해서 그 집이 꼭 도둑의 소굴은 아닌 것처럼. 그것은 다만 분열된 집일 뿐.
방향키가 없는 배는 위험한 섬들 사이를 목적 없이 헤맬지라도 바닥으로 아주 가라앉지는 않는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주려고 애쓸 때 그대는 선하다.
하지만 그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라도 그대는 악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가 이익을 얻으려 노력할 때, 그대는 단지 대지에 달라붙어 대지의 가슴을 빨아먹는 뿌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열매는 뿌리에게 ‘나와 같으라. 익고 가득 넘쳐, 언제나 그대의 풍요로움을 주라.’고 말할 수 없다.
열매는 늘 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뿌리는 받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활짝 깨어있는 정신으로 말할 때 그대는 선하다.
하지만 잠이 든 상태에서 그대의 혀가 목적 없이 비틀거릴 때라도 그대는 악하지 않다.
또 비틀거리는 말조차도 약한 혀를 강하게 할 수 있다.
그대가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대담한 걸음걸이로 걸어갈 때 그대는 선하다.
하지만 발을 절룩거리며 가도 그대는 악하지 않다.
발을 절룩거린다고 해서 뒤로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하고 빠른 자여, 그대는 절름발이 앞에서는 절룩거리지 않는다. 그것을 친절이라 여겨.
그대는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선하다. 그리고 선하지 않을 때라도 그대는 악하지 않다.
그대는 다만 빈둥거리며 게으른 것일 뿐.
안타깝다. 수사슴이 거북이에게 빨리 달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자신의 큰 자아를 향한 갈망, 그 안에 그대의 선이 있다. 그 갈망은 그대들 모두의 가슴속에 있다.
그대들 중 어떤 이에게는 그 갈망이 거센 급류처럼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언덕의 비밀과 숲의 노래를 싣고.
또 어떤 이에게는 그것은 해안에 가닿기 전에 오래 머뭇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평지의 강물이다. 모퉁이와 굽이마다에서 스스로를 잃고 헤매는.
그러나 더 많이 갈망하는 자여, 덜 갈망하는 자에게 ‘왜 너는 그토록 느리고 머뭇거리는가?’라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진정으로 선한 자는 벌거벗은 이에게 ‘그대의 옷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집 없는 이에게 ‘그대의 집은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 칼릴 지브란(1883-1931), 『예언자』, 류시화 옮김, 무소의뿔, 2018
**
“그대는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선하다. 그리고 선하지 않을 때라도 그대는 악하지 않다.” 악이라고 불릴 것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도 선과 악을 알게 된 사람이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는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공동번역성서』 창세기 3:22)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가 악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대부분 악이라고 하기에는 비루한 것들이어서 굳이 하자면 시인의 말처럼 비선非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황과 맥락은 이때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입니다. 관점은 상황과 맥락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관점에 따라 선과 악이 갈리기도 합니다. 2010년대 이후로 가장 주목받는 일본 영화계 거장으로 꼽히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이 악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내러티브에 의존하는 영화가 아니라서 감독은 영화에서 직설적으로 악의 존재 여부를 묻지는 않습니다. 감독은 영상 속에서 상황과 맥락을, 자연의 훼손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살아가는 주민들과 보조금을 타기 위해 무리하게 글램핑 건설을 위한 개발을 강행하려는 개발사 간의 엇갈리는 관점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자연이 있습니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감독이 로우 앵글로 보여주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없는 자연, 아침과 밤의 숲은 관점이 없습니다. 다만 우연이라는 사건은 있습니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재 상영 중입니다(중앙아트홀 ‘인디플러스 포항’ 상영시간표 참조). 선하지 않다고 악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선이 아니면 악이라고 단정하고 우리 편이 아니면 배제하거나 삭제하는 확증편향과 음모론은 숱한 오류를 일으킵니다. ‘예언자’는 선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안타까워하라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안타깝다. 수사슴이 거북이에게 빨리 달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이.” (20240424)
첫댓글 악이란 다만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고통받는 선이 아니고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