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舟論 성지.. 한자 그대로 읽으면 원래는 주론이 맞다. 배론이란 지명은 이곳 지혈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되었고, 성지를 감사고 있는 산의 이름이 주론산이라고 한다. 이 곳은 한국 천주교회 초기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 곳에 숨어 들어와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았던 곳으로 이곳의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관련하여 세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고 한다. 보통의 성지들은 박해를 당한 피의 성지임에 비해 이 곳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고스란히 함께 해온 성지라고 한다. |
배론 성지가 왜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성지인지 알아보자.
세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1.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이 이 곳에 있다.
2. 우리나라의 첫 천주교 신학교인 요셉 신학교가 이 곳에 있다.
3. 우리나라의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묘가 이 곳에 있다.
황사영백서가 쓰여진 토굴을 살펴보자. 일단 황사영 백서가 무엇인지는 알고 넘어가고...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
당시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보내고자 했던 청원서.
두 자 가량 되는 명주천에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하는데, 깨알같이 작은 1만 3311자나 되는 방대한 내용의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략 3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당시의 천주교 교세와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활동, 신유박해 사실과 이때 죽은 순교자들의 약전을 기록하고, 다음에는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사실, 끝으로 당시 조선 국내의 실정과 이후 포교하는 데 필요한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황사영 백서>는 민족 감정에서 나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한편 교회의 평등주의라는 원칙과 당시 조선사회에 미친 혁명적인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일부 사가(史家)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이 백서가 관변측에 압수됨으로써 1801년 대역죄인(大逆罪人)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원본은 당시 서울 주교로 있던 뮈텔(한자명 閔德孝)이 1925년 한국 순교복자 79위의 시복(諡福) 때 교황 피우스(11세)에게 바쳤는데,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황청에서는 이를 200부 영인(影印)하여 세계 주요 가톨릭국에 배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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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쭌, 나도 겨우겨우 포스팅하고있다네. 요즘 상담이 많은시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배론성지...
월요일 휴가 냈는데.. 반납했어요..ㅜ.ㅜ 신입생들을 미리 받고 있어 바쁘네요..그만큼 좋은 일이 있겠죠?^^
남다른 시선으로 담아 주신 배론성지... 잘 보고 갑니다~^^
별 말씀을요~^^
오... 이제부턴 쭌이를 똑딱이의 고수라고 불러줄께
ㅋㅋ 똑딱이 신동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