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흥초등학교
신흥동은 일제 강점기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대전역이 생기고 대전역 주변에 일본인들이 몰려들면서 원동 인동에 이어 새로 생긴 마을 이예요. 그래서 신흥동은 철도 주변에 집들이 하나 둘 들어서며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흥(新興)이라 이름 지었어요.
그리고 1924년 대전삼성초등학교에 이어 대전공립 제2보통학교로 대전에서 3번째로 개교한 아주 역사가 오래된 학교지요.
그런데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가 되면서 대덕군 유성 읍이 대전광역시 유성구가 되어요. 그런데 편입된 유성구에도 이곳 동구 신흥동처럼 유성구 신흥동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한 광역시 안에 신흥동이 두 개라니, 비록 구는 다르다지만...., 그래서 연원을 따져보니 유성구 신흥동이 이곳 동구 신흥동보다 먼저 생겨난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유성구의 신흥동에는 더 오래된 마을이인 뜻으로 원(元)자를 하나 더 붙였어요. 그래서 유성구 신흥동은 원신흥동이 되었고 이곳 신흥동은 그냥 신흥동이 되었어요.
신흥동은 원동 인동과 함께 생긴 지가 상당히 오래된 마을이라 낡고 오래된 집들이 많았어요. 더구나 둔산, 노은, 도안 등 새로운 신도시가 생기면서 시청 법원 등 많은 관공서가 새로운 신도시로 이전함에 따라 원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인해 더욱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더구나 경부선 철도가 도심을 가로막아 사람의 교류마저 차단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얼마 전 도심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신흥동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되어 많은 사람이 유입됨에 따라 지금은 또다시 예전처럼 활기를 되찾고 있는 신흥동이 되었어요.
세천초등학교
세천공원 주변은 지금은 보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가둬두지만 예전엔 식장산 북쪽 줄기를 따라 내려온 조그만 물줄기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흘러내려가 경치가 무척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이곳에 자연스레 유원지가 생기고 이곳을 세천 유원지라 불렀어요. 세천이라는 이름은 물이 여러 갈레로 가늘게 흘러가는 형상을 따라 세(細)천(川)이라 하였어요.
우리가 세발낙지라 부르는 낙지도 발이 셋이 아니라 발이 가늘다는 뜻으로 세발낙지라 하듯이 이곳 세천도 가는 시냇물이란 뜻에서 세천이라 했어요. 그곳에 1959년 학교가 생겨 세천초등학교라 하였어요. 지금은 전교생 38명의 아주 조그만 농촌학교로 남아있어요.
청계천
그런데 이런 시냇물을 우리는 다른 말로 개천이라고도 하지요. 정지용의 시 향수에 보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라는 싯구도 있지요. 그런데 이 개천이라는 말은 원래 ‘천거(川渠) 즉, 도랑을 수리해서 열었다.’ 라는 뜻의 개천(開川)에서 왔어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은 지리적으로 홍수에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비가 오면 인왕산, 북악산,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앞쪽 남산에 막혀 한강으로 바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한양 한복판에 모여 홍수 피해가 심각했어요. 그래서 태종은 한양을 관통하는 인공하천 개설을 지시했어요. 그래서 1406년 1월 처음 공사를 시작해 1412년 완공했는데 이것이 바로 청계천이에요. 이렇듯 청계천은 원래 있던 자연하천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만든 인공 하천이에요.
그런데 이청계천은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나오지 않아요. 다만 태종 태 ‘천거를 수리해서 열었다.’는 뜻에서 개천이라 불렸고, 후에 개천이라는 말은 하천과 통용되는 보통명사가 되었어요. 그러던 이 개천이 세월이 흘러 토사가 유입되어 하상이 높아지고 수로가 막혀 무용지물이 되었어요. 그러자 영조는 개천의 준설을 지시하게 되고, 드디어 1760년 2월 18일 개천의 준설이 시작되어 같은 해 4월 15일 준설을 마쳤어요. 그래서 ‘개천이 다시 맑아 졌다.’는 뜻으로 청개천(淸開川)이라 하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시내계(溪)자를 써서 청계천(淸溪川-맑은 시냇물?)이라 불리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