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쏟아지는 빗방울이 몇 갠지 셀 수 있어?”
치덕치덕 비 오던 날, 오래된 소나무 옹이가 박힌 마루에 팔베개하고 누워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암만, 셀 수 있지…”
“어떻게…?”
“눈을 감어 봐.”
“그리고...?”
“지금부터 셀 수 있을 만큼 하나둘 세어봐.”
“아니, 빗방울을 셀 수 있냐고요?”
“빗방울은 니가 셀 수 있는 마음속 개수만큼 내리는 겨.”
“에이 참, 할머니는”
“빗방울 개수하고 니 마음의 개수하고 같은 겨. 니 마음을 빗방울이라고 생각하면 되야.”
“사람의 마음을 세는 법도 같은 겨.”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알라믄 내가 그 사람이 돼 보면 되야.”
“니가 친구집에 놀러갔을 때 밥때가 되면 얼렁 집으로 와야 햐.”
“느그 친구네가 가난한 집이면 말여.”
“아줌마가 밥 먹고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해?”
“목소리를 잘 들어봐, 진짠지 그냥 해 본 소린지.”
“얼굴이나 몸짓을 자세히 봐, 진짠지 해 본 소린지 말여.”
“살림하는 여자는 제 식구들만 먹는 밥상 찬거리를 이웃한티 뵈주기 싫은 벱이거덩.”
“진짜 같으면 먹고 와도 되야.”
“그 대신, 맛나게 잘 먹었다고 고개 이쁘게 숙여서 인사 혀.”
‘앉을 자리와 설 자리 분간도 못하는 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인격을 얕잡아 보는 욕입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은 우리를 앉을 자리와 설 자리를 분간하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많은 암시와 훈육을 했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 분별력이 없으면 빙충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지,
내가 나서야 할 때인지,
내가 말을 끼어들어야 할 때인지,
여기서 해야 하는 말인지, 맥락과 낌새를 알아차리는 걸 눈치라고 합니다.
눈치가 없으면 빙충맞은 짓을 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당하기 쉽습니다.
어른들은 그런 인간이 안 되도록 자식에게 각별한 주의를 주었습니다.
‘앉을 자리 설 자리’를 분간하는 것이 사회화 과정의 첫발이기 때문입니다.
타자와의 거리는 윤리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그 타자에게 지나친 중력을 행사하거나 타자의 중력으로부터 너무 멀어져서 거리감이 생기지 않도록 계산하는 것을 삶의 중요한 기술로 여겼던 것입니다.
요즘 TV 뉴스를 보노라면 은근히 부아가 치밉니다.
행복 중에 제 일은 먹는 행복일 것입니다.
천정부지로 오른 식재료비와 외식비는 지갑을 가난하게 만듭니다.
사정이 이런데 고관대작들은 파티를 열고 오찬을 즐깁니다.
국민의 신음은 들은 척도 않고 눈치코치도 없고 앉을 자리 설 자리도 모르는 빙충이와 다름 없습니다.